괴물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2021.11.09.
연대기, 괴물 (임철우 소설)
임철우 작가는 6.25 전쟁,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태평양 전쟁, 베트남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폭력의 참상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그의 소설은 죄의식과 부끄러움, 심리적 불안, 그로 인해 형성된 트라우마적인 면모가 조명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소설은 2015년에 발표된 단편이다. 근현대사의 암울한 사건들을 직접 체험해온 노인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의 망가진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얼룩졌을 지난 시간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육십 대 노숙자 지하철 투신자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숙자의 이름은 진태지만, 그는 남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적어도 기록 상으로는 그랬다. 진태의 생부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던 자였고, 어머니인 옥례는 그에게 겁탈 당해 진태를 임신했다. 진태는 이를 사춘기 무렵 알게 되었고, 외조부모가 보였던 묘한 태도가 출생에서 비롯되었음을 눈치챈다. 어렸을 적부터 괴담처럼 들어왔던 ‘갈고리’ 즉 생부에 대한 묘사와 괴물의 이미지가 닮아 있다는 점에서, 날 적부터 정도(正道)를 위반했다는 사실이 평생 그를 옭아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입대 이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의 지인은 광주 민주항쟁 시기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이 망가졌다. 시간이 흐르고 진태는 뉴스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다. 이처럼 그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큰 사건들과 맥을 같이 하며, 그 모든 순간에 그는 피해자였고 가해자였으며 방관자였다. 그는 때때로 괴물과 마주치며 공포에 휩싸이는 동시에 살의를 느낀다.
진태가 괴물의 얼굴을 확인하는 장면은 2015년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에는 “놀랍게도 놈은 완전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서술되었지만, 2017년에 여러 작품을 모아 펴낸 소설집에서는 이렇게 수정되어 있었다: “아아, 마침내 그는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의 아비였고, 또한 바로 그 자신이었다.” 괴물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말은 단지 인간의 생김새를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괴물이 인간 그 자체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했던 주체는 다름 아닌 또 다른 인간이었다. 진태가 괴물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즉 자신도 괴물임을 깨닫는 장면은 니체의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진부한 인용이지만 차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심연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그대 속을 들여다본다.” 그는 진실을 깨닫고 자기 살해를 저지름으로써 속죄 혹은 일종의 단죄를 행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 칼을 움켜쥐고 괴물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의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역사에 남아있는 상흔은 인간의 죄임에 틀림없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를 잊는다면 그 또한 죄일 것이다. 혹자는 무거운 과거를 회상하는 게 무가치하다고 말하지만,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이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수전 손택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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