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TIGO

허풍도×백동훈

백 형사.

백 형사!

목소리는 끈질기게 동훈을 불렀다. 목소리가 한층 높아 질때까지 동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앞에 검은 실루엣이 불쑥 튀어나왔다. 딱,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는데 그때까지 그는 희뿌연 상념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머리와 다르게 몸이 위험을 감지했다. 눈을 깜빡이자 안개같던 시야가 걷혔다. 자신의 코앞에서 오므린 손가락이 보여 소리의 정체를 짐작했다. 그리고 오지인이 못마땅한 얼굴이 보였다. 댕그란 눈에는 의아함이 있었다. 동훈은 태연하게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거 아냐. 무슨 일인데?”

“아니, 피의자가 심문이 오후로 미뤄졌다고. 유 탐정님이 새로운 증거를 찾았다고 반장님께서 사무실로 가셨어. “

“아아.”

주말에 잡힌 연쇄 살인범이었다. 유명한 탐정이 활약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동훈은 공항이었다.

“그나저나 제주도는 잘 다녀왔어? 새벽같이 한라산 등반한다더니 그사이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아?”

“하하. 농담은.”

동훈은 건조하게 웃었다.

“어디어 디 갔어? 당신 성격에 여기저기 쏘다니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냥 뭐, 매일 가던데 갔지.”

지인은 ‘제주도를 매일 안 가봐서 모르겠네.’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비켰다. 평소 동훈을 생각하면 묵었던 호텔이나 경찰 월급으로 갈 수 없는 곳을 보여주기 마련이었지만, 대답이 건성인 게 그가 피곤해 보여 배려 차원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동훈은 미치도록 피곤했다. 지난 2박 3일 제주도 여행은 충동적으로 떠났지만, 주제는 리프레시였다. 한 번씩 찾아오는 고민―어릴 적부터 고집한 경찰 생활에 대한 고충―을 여행에서 털어보는게 어떠냐고 주치의가 제안했다. 주말을 껴서 해외를 다녀오기엔 일정이 피곤했고 다른 곳은 아직 추웠다. 직장인이 그렇듯 귀찮음과 약간의 무기력증으로 이곳은 이래서 어떻고, 저곳은 저래서 어떻고 따지니 차트에 무언갈 적던 풍도가 눈을 떼지 않고 ‘그럼 제주도는 어떠세요?’하고 제안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일 남쪽 지방은 가까우며 산도, 바다도, 따뜻함도 있었다. 제주도는 한 달살이 한 후로 간 적이 없었다. 떠올리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훈이 신뢰하는 주치의와 대화하면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어떤 대화를 해도 지식이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았고,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무엇보다 풍도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생님 주말에 바쁘세요? 하고 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무얼 했냐는 물음에 대답하자면 동훈은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부끄럽고 지성인으로서 수치스러운데 다시 상기하게 됐다. 새로운 감정이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동훈이 좋아하는 횟집으로 갔다. 오후와 저녁 애매한 시간이라 이른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를 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그가 찾던 와인이 들어와 와인을 마셨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그는 체크아웃까지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지난 주말동안 자신은 인간을 벗어나 마치 금수와 다름 없었다. 짐승도 이렇게 오래 짝지기를 하진 않을텐데. 그런 의미에서 흘레붙었단 말이 맞았다.

그날을 떠올리면 얼굴이 절로 화끈거리고 아래에 피가 흘렀다. 처음 관계를 한 사람 같았다. 시작은 어땠더라. 먼저 풍도가 입술을 부딪쳐왔다. 평소 동훈이라면 바로 밀쳐냈겠지만,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엘리베이터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기억이 잘게 쪼개질 정도로 취했다. 그 사이사이로 풍도가 끈질기게 동훈을 탐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동훈은 낯선 등을 봤다. 얼굴만큼이나 창백한 살 위로 옅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세상 처음 느껴본 당혹감은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풍도에 대해, 그리고 남자와 타액을 섞고 관계를 한 자신에 대해서.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막 눈을 뜬 남자가 잠긴 목으로 자신을 불렀다. 올려다보는 처진 눈가가 어쩌면 애절한 것 같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 눈에 홀렸던 것 같다. 그 뒤, 풍도와 끊임없이 붙어먹었다. 룸서비스를 시키는 도중에도, 먹는 도중에도. 젠틀하고 고상하게 살아온 백동훈 인생에 가장 추접한 시간이었다. 자신도 몰랐던 면모에 적잖이 충격받았는데, 정신을 붙잡을 수 있던 이유는 허풍도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가 자신의 주치의란 이유 하나만으로. 풍도의 말이라면 무조건으로 따르게 되는 무한한 신뢰 덕분이었다. 허풍도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란 믿음.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긴 나머지 환자와 의사 간 암묵적인 약속도, 본분도 잊은 채였다.

체크아웃 후 기가 빨려 피곤한 얼굴로 캐리어를 끈 채로 나오는 모습은 2박 3일 꽉 채워 관광한 영락없는 여행객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지금 동훈은 비밀을 들추고 있었다. 질문 안쪽엔 허 선생님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제주도를 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호텔방을 들어가기 전까지 동훈은 느낀 바가 없었다. 허풍도가 철저히 감췄던지.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로 풍도에게 연락은 없었다. 동훈은 허풍도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고민했다. 혹시나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까 내심 걱정됐다. 성인 남자 둘이 실수할 수 있지 않냐고. 그런 어쭙잖은 말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동훈이 느낀 의외성이었다. 생각 외로 남성이나 낯선 이와 관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앞 부분이 기억 나지 않는 게 흠이지만, 뒤로는 모두 맨정신이었고 자신의 의지였다.

풍도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옆으로 누워 얼굴을 파묻고 잔다던가, 잠에서 깨기까지 오래거린 다던가, 햇빛을 받으면 머리카락이 더 옅고 투명해보인다던가, 사람을 더 낮고 다정하게 부를 줄 안다던가. 키스를 할 때 꼭 깍지를 낀다던가. 마치 연인 같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동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름없이 상담을 몇 번 다녀도 풍도에게 특별한 낌새는 없었다. 아직 동훈의 귓가엔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풀이되고 있는데. 요즘 어떠세요. 동훈 씨? 속삭이는 물음에 한동안 귀만 만지작거렸다.

동훈에게 있어 전후관계가 틀렸지만, 풍도가 의향이 있다면 그 의사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상대가 고백만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꽂힌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즈음 풍도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전화가 아닌 메시지를 한참 뒤에 확인했다. 줄곧 기다린 동훈이 추진력을 발휘했다. “같이 저녁 식사 하시겠어요? 할 말도 있을 것 같고...”

“아...”

말꼬리가 길어진다. 난처함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눈을 굴리고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는 동훈은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죠. 제가 일찍 끝나니 백 형사님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동훈은 황급히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운치 있는 자리를 레스토랑 오너의 지인이란 이유로 꿰찰 수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근사한 라인의 수트를, 머리는 흐트러지지 않게, 향수까지 뿌린 후였다.

꽃다발은 사지 않았다. 풍도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어둠이 가라앉았다. 허풍도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아마 동훈이 직감할 수 있는 어떤 물체라 짐작했다.

식사는 여전히 훌륭했고 대화는 지극히 평범했다. 제주도에서 일은 제외된 상태였다. 동훈이 디저트를 음미하고 입가를 닦을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풍도는 가져온 쇼핑백에 안중에도 없었다.

“이제 갈까요?”

대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뒤 동훈 씨랑 있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하하, 간지러운 울림으로 웃기만 할 뿐.

“잠시만요. 선생님.”

“왜 그러시죠?”

그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물었다. 동훈은 헛기침으로 감정을 환기했다. 풍도가 하지 못하면 자신이 할 생각이었다. 동훈은 얼마 전까지 자신만 보면 타오르던 남자가 작은 쇼핑백을 펼치지 못한 건 ‘부끄러움’이라고 인식했다.

“흠. 기억하시겠지만, 제주도에서 온 뒤로 많은 생각해봤습니다. 시작이 매끄럽진 않았지만, 괜찮다면 허풍도 선생님과... 이상의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신중한 동훈에게 쉬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확신을 말했다. 아, 작은 꽃다발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풍도의 안색을 살폈다. 어떤 감동이나 부끄러움 등이 하나 서리지 않은 얼굴은 한참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시죠?”

풍도가 되물었을 때,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다.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선생님께서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저도 선생님을.”

말을 고르던 동훈이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빳빳했다.

“아...!”

풍도는 무언갈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의 존재로...”

“사귀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목을 둘러싼 넥타이가 답답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풍도가 미소를 지었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마주쳤을 때와 같이 눈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곱게 휘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따스히 부르는 대신 손을 마주하고 손끝끼리 마주쳤다. 정말 곤란해 보였다.

“제가 어떤 오해를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그가 내린 대답이었다.

“동훈 씨 성인이라서 잘 아시겠지만, 고작 섹스 한 번 했다고 사귀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훈 씨와 제 관계에 선이 있잖아요.”

의사와 환자라는. 풍도는 목소리를 낮춰 비밀처럼 속삭였다. 그 음이 가슴에 콱 박혀 호흡이 삐걱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라고 읽히는 말 때문인지, 한 번이란 횟수인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전부일 수도 있다.

“사과의 의미로 오늘 식사는 제가 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풍도는 아참, 하고 속삭였다. 자신이 가져온 쇼핑백의 존재를 지금 생각해 낸 듯 동훈에게 내밀었다. 하나 희망적인 일은 동훈이 예상한 일 중 손바닥만 한 쇼핑백은 자신에게 물건이 맞았다. 그 사실만으로 동훈은 어떤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참, 팬티가 섞여 있더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날, 급하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누구 것인지 몰라 늦게 전달해 드려 죄송합니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이, 수치로 변하며 폭발했다. 동훈은 할 수 있다면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동훈이 만들어내지도 않은 시작하지도 않은 감정이 실연으로, 상처가 수치로 돌아와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고 애써 웃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괜한 오해를 했나봅, 니다,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폐를 쥐어짜 겨우 숨을 쉬었다. 헐떡이지 않게.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동훈은 호흡이 멈출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풍도와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예의 다정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풍도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잔인하리만큼 명백한 비웃음을 읽어냈다. 밑바닥에서 토기가 올라와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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