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재단] 117기지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

"괜찮으니까, 오늘은 제게 맡겨보지 않을래요?"

내 옆에 딱 붙어 팔 한쪽을 움직일 수 없게 옭아맨 스튜어트 박사가 말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전혀 괜찮지 않다고!

말은 하고 싶지만,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왜지? 목이 막힌 느낌이 아니라, 말이 나가려는 의지가 없는 듯 어떠한 압력도 목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박사님, 아쉽겠지만 루시드 박사님은 저와 선약이 있어요. 그렇죠?"

베아트리체 연구원이 내 오른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슬쩍 끌어당기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 자네와 약속을 잡은 적이 없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세피아 요원이 나타나 내 앞으로 오더니 내 볼을 손으로 감싸며 베아트리체 연구원을 보며 웃었다.

"어머, 그거 안 됐네요. 박사님이 오늘 저랑 같이 저녁 먹자고 하셨는데."

"하지만 저와의 약속이 먼저죠?"

스튜어트 박사가 표정을 약간 구겼다.

"허, 다들 박사님과 약속이 있다 이건가?"

"그럼요. 무려 일주일 전 약속이라구요?"

"저는 이주 전인데요?"

"중요한 건 박사님 마음 아니겠어? 루시드 박사님."

세 여성이 동시에 날 바라보았다.

"박사님은, 누구와 함께 가실 건가요?"


루시드 박사의 목에 걸린 충격 장치가 발동했다.

"윽..."

싫다, 이 감각. 언제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아. 어찌나 반동이 심했는지, 루시드 박사가 누워있던 침대가 한 차례 덜컹거릴 정도-사실 루시드 박사가 충격에 몸부림친 것이다-였다. 루시드 박사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연구실, 침대, 책상 한쪽에 모여있는 서류들. 꿈이구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난감해서 기절하고 말았을 거야...

루시드 케인 박사는 꿈, 그중에서도 변칙적인 간섭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꿈들을 연구하는 뇌과학 박사이다. 최근 그녀는 SCP-185D의 연구를 책임지게 되었고, SCP-185D가 있는 117기지로 오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남성공포증이 있는 SCP-185D는 넓은 반경의 남성을 알아차리고 공황에 빠져 변칙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특성이 있어 117기지는 이사관은 물론, 감독관, 잡역부들까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루시드 박사 역시 여성 연구원이기 때문에 117기지로 발령된 것이다.

그녀가 SCP-185D의 연구 책임자가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직도 진척은커녕 SCP-185D의 특성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한 상태이기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로 자각몽 훈련을 하러 잠든 루시드 박사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스튜어트 박사, 베아트리체 연구원, 세피아 요원. 세 사람이 자신을 유혹하는 꿈을.

"하필 꿈을 꿔도 그런 꿈을..."

루시드 박사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와 맑고 약간은 어두운 듯한 자수정색 눈동자, 163cm의 아담한-어디까지나 재단 인원 평균에 비하면- 체구와 청순한 인상은 누구나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게 이성이든 동성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 호감이 단순한 친구로서의 호감이 아닌 경우도 루시드 박사는 숱하게 겪어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데 117기지로 옮겨온 뒤로는 한동안 그런 부류의 호감은 느껴본 적 없었다. 당연히 그 세 사람에게도. 그런데 어째서?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일까. 꿈은 말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루시드 박사는 이럴 게 아니라 꿈 일기를 써야 하는 것을 간신히 기억 속에서 끌어올렸다. 목에 전기충격을 받았으나 몽롱한 정신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꾸 다시 감기려 하는 눈꺼풀을 겨우 참아내고, 루시드 박사는 자신의 노트를 꺼내 꿈을 기록했다.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다.


루시드 박사의 다음 할 일은 SCP-185D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대충 정돈하고, 연구자료와 펜을 챙긴 뒤 SCP-185D의 격리실을 찾았다. 루시드 박사의 연구실은 A동에 있었고, SCP-185D의 격리실은 C동 옆에 있는 02-T단위에 위치해 있다. 말로 들으면 꽤 멀리까지 가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엘리베이터 몇 번 타면 금방이다. 루시드 박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깨지 않은 몽롱한 정신에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꽤 피곤하신가 보네요?"

익숙한 목소리다. 루시드 박사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레이스 연구원이었다.

"아... 나야 뭐, 늘 그렇지. 알지 않나, 방금까지만 해도 자다왔네."

"그렇게 주무셨는데도 얼굴에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 것 같은데요."

"... 계속 자는 것도 못 해 먹을 짓이야."

루시드 박사는 꾸었던 꿈을 상기하며 말했다. 꿈 내용은 5분 내로 증발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더니, 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거람.

"알죠, 알죠. 수면패턴이 일정하지가 않잖아요. 다른 사람들 처럼 자는 시간에도 맘대로 자지도 못하고."

"혹시 이쪽 팀으로 이동할 생각 없나?"

"절대 사절입니다."

그레이스 연구원의 말에 루시드 박사는 큭큭 웃었다. 하긴, 자유시간도 남들 만큼 보장 못 해주는 이 팀에 누가 들어오려고 하겠어. 그래서인지 SCP-185D 연구팀은 늘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뭐, 다른 부서라고 인력 부족이 아닌건 아니지만 말이다. 연구에 진척이 없는 것에 이것도 한몫할 것이다. 그레이스 연구원과 루시드 박사는 엘리베이터에 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오늘 점심 메뉴 알고 있나?"

"오늘 점심은 벌써 지났습니다만."

그 말에 루시드 박사가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23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시간 감각이 없어, 요즘."

"그러실만 해요. 대신 저녁 메뉴는 알죠. 햄치즈샌드위치, 오랜지 주스..."

"적어도 오늘은 안 굶어도 되겠네."

"그쵸? 아, 도착했다. 저녁 때 볼 수 있으면 다시 봐요."

"그래, 잘 가게나."

이윽고 루시드 박사는 SCP-185D의 격리실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격리실은 또래 아이들의 방처럼 가구가 놓여있지만, 무채색에 단조로운 분위기였다.

SCP-185D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며,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타인의 꿈에 개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단에 확보되기 전까지 지속해서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에 남성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스튜어트 박사가 심리상담사로서 그녀에게 지원되었으며, 베아트리체 연구원이 약을 투여한다. 재단에 확보된 초기만 해도 대인공포증의 증상을 띄어 자신에게 강제로 약물을 투여하는데도 저항하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며, 여전히 남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에게는 그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안녕, SCP-185D."

SCP-185D가 자신의 골반까지 드리우고도 남을 만큼 기다란 하늘색 머리카락을 걷어내었다.

"...안녕하세요, 루시드 박사님."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떤가?"

"...괜찮아요."

항상 같은 대답.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걸 알고있다. 그녀는 떨고 있으니까. 내가 들어온 후 부터 쭉.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까."

약간의 날이 들어간 말을 꺼내니 SCP-185D의 어깨가 움찔했다.

"SCP-185D, 나한테 네 능력을 썼지?"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