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민은] 죽은 천사를 위한 샤콘느

(*이 붙어있는 괄호안의 대사는 영어로 된 대화입니다.)

발밑이 축축하게 젖었다.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이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품에 안은 종이봉투가 젖을까 품에 더욱 깊게 껴안았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거센 빗줄기가 마치 나의 마음을 대신 하는 것 같았다. 런던은 비가 자주 왔다.

철컥, 끼익-

우산을 털고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팔을 문지르며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은 나는 보일러를 확인했다. 아예 켜는 것을 깜빡했는지 보일러는 꺼져있었다. 온도를 올린 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밟았다. 방 쪽에서 옅게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거운 빗줄기는 아직도 내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가 방 문을 열었다.

'왔어?'

문을 여는 순간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뚜껑이 닫힌 피아노는 뽀얗게 먼지가 올라앉아 있었다. 문득 목이 메여왔다.

죽은 천사를 위한 샤콘느

w.카사블랑카

문간에 서있는 나는 내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너를 바라보았다.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걸어오는 것이 꽤나 걱정이 되어 조바심이 났지만 너는 구태여 나를 찾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럴 것이었다.

"민혁아-"

"응. 나 여기 있어."

더듬더듬 나의 손을 쥐어오는 너를 피아노 앞으로 인도했다. 너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옆을 지키는, 너의 안내자였다. 작은 손을 꽉 쥐어 조심스럽게 의자를 짚게 만들자, 익숙하게 자리에 착석한 네가 건반을 만지며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얼른 쳐줘."

"오늘은 뭘 연주해드릴까요, 나의 뮤즈님?"

너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뮤즈라니. 그저 너를 바라만 보고 있는 나에게 뮤즈라는 칭호는 과분했다. 그거 아니, 은광아. 내가 너의 뮤즈라면 너는 나의 음악이야. 나는 그 말을 내뱉는 대신 너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고개를 살짝 돌린 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 꼬리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너의 뺨을 감싸 쥐곤 가볍게 입술을 훔쳤다. 허공을 떠도는 너의 회색빛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곡으로 쳐줘."

"그럼 당연히-"

"샤콘느."

"그렇지!"

나의 대답에 살풋 웃은 네가 하얀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보이지 않는데도 정확한 건반을 찾아가는 네가 신기했다. 너는 무겁게 시작하는, 슬픈 분위기의 샤콘느를 사랑했다. 본래 바이올린과 합주를 해야 하는 곡이였지만 사람들은 네가 홀로 치는 피아노의 샤콘느를 사랑했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눌리는 건반에서 애처로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모든 감각으로 피아노와 이야기를 나누는 너의 모습은 나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과 같았다. 나의 천사는 피아노로써 너의 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격정적으로 변하는 음률에 맞춰 건반 위를 누비는 작은 너의 손이 호수위의 백조마냥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본래 바이올린과 함께 해야 애처로운 느낌이 더욱 묻어나왔지만 너의 피아노는 달랐다. 네가 건반을 누를 때마다 피아노가 눈물을 흘리는 듯 축축한 눈물 내음이 났다. 작게 휘청거리는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무심코 너의 어깨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몇 번이나 거둬냈다. 내리깔아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10분 남짓한 너의 연주는 나를 저 멀리로 던져다놓았다. 음악이 없는 세계, 내 품에 안겨 웃는 네가 없는 환상. 사랑하는 이를 잃어 느끼게 되는 슬픔이 날 감싸 안았다. 잔잔하게 가라앉는 듯싶다가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폭풍우가 다가와 모든 것을 쓸어갔다. 결국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몰래 훔쳐냈다. 나는 네가 샤콘느를 연주할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 울보 같지만, 너의 샤콘느를 라이브로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눈물을 흘렸다.

"하아…."

너의 연주가 끝나자 나는 작게 박수를 쳤다. 나의 소리에 너의 입 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입술 틈사이로 작게 보이는 너의 덧니가 못내 사랑스러워, 나는 조심스럽게 너의 곁으로 다가가 볼을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 네가 눈을 떴고, 초점이 잡히지 않은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코를 찡긋거린 네가 작은 손을 들어 더듬거리며 내 볼을 감싸 쥐었다. 볼 위로 닿는 손이 땀으로 촉촉해져 있어 웃음이 났다.

"…왜 웃어-"

"긴장 했어? 손이 젖어있네."

"아, 미안…."

"괜찮아. 다시 만져도 돼."

나의 말에 네가 거둬갔던 손을 다시 내 볼에 안착시켰다. 작은 손이 천천히 내 얼굴 위를 헤엄쳤다. 눈을 감고 너의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마치 너의 손끝에서 새로이 빚어지는 조각품이 되는 것 같았다. 볼 위를 문질거리는 손가락에 웃음이 났다. 내 볼이 씰룩거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네가 내 입술 위로 엄지를 옮겨냈다. 부드럽게 입술을 문질거리는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자 네가 화들짝 놀라며 얼굴에서 손을 때어냈다.

"뭐야, 왜 물어!"

"귀여워서."

"귀엽기는…."

입술을 감쳐 문 네가 샐쭉한 표정을 짓자 웃음이 났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이 아름다운 천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뭐 쳐줄 꺼야?"

"으음…"

건반 위를 문질 거리던 네가 내가 있을 법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어긋나는 시선에 웃으며 너의 시선이 닿을만한 곳으로 몰래 몸을 옮겼다.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괴롭히던 네가 검지로 건반을 눌렀다. 낮게 울리는 음이, 샤콘느를 연주할 때 제일 처음 눌리는 건반임을 알려주었다.

"나랑 합주하자, 민혁아."

"…은광아."

"너랑 같이 연주하고 싶어."

"안 돼…."

애원하는 듯 한 너의 표정에도 나는 단호하게 그 말을 끊어냈다. 너의 연주를 망치기 싫다, 은광아.

-

나는 원래 바이올린 리스트였다. 못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썩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신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났다. 내가 보고 잘할 것 같다고 하는 아이나, 네가 이런 것을 보완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아이들은 대부분 콩쿠르에 나가서 대상을 타거나 마에스트로들의 눈길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러한 역량이 없어 콩쿠르에 나가 아주 가끔 3등을 하는 정도였다. 대상은 나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이며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과 같았다. 내가 손을 대고, 격려를 했던 아이들이 나에게 다가와 고맙다고 웃을 때면 나는 쓴 웃음을 삼켰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었다. 잘할 거야, 민혁아. 다음엔, 이 다음엔… 그러나, 내 손이 닿아 꽃이 피는 아이들은 있어도 결코 내 손 위에 꽃이 피는 적은 없었다. 25살. 대학시절 마지막 콩쿠르가 끝나고 홀로 대기실에서 바이올린을 쓰다듬고 있던 나를 발견한 선생님은, 그대로 무너져내려 나를 끌어안았다. 민혁아, 미안하구나... 미안해, 미안...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선생님의 사과에 결국 억누르고 있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날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선생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러한 척 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민혁아… 혹시,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네?"

삽시간에 굳어버리는 나의 표정에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바이올린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쓴 입맛을 다시는 나의 손을 꼭 잡은 선생님의 표정은 꼭 자신이 바이올린을 놓아야 하는 사람인마냥 아팠다.

"너의 음악적 재능이 모자란 건 아니야. 그저… 그걸 보여주는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구나. 민혁아, 너는…."

"알아요, 저도. 저도 알고 있어요…."

그 후, 나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니지먼트에 뛰어들어 인재를 발굴해나가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스카우트 쪽만 맡았었다. 얼핏 보면 선생님의 인맥으로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끄나풀이었지만 선생님의 조언처럼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났고, 회사는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기꺼이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민혁씨, 이제 개인 매니저를 시작해보는 것이 좋겠군요."

"네?"

"민혁씨에게 부탁하게 될 사람이 이 사람인데, 좀 특이케이스라…."

매니저를 해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권유 아래 처음으로 담당하기 된 사람이 바로 너였다. 보기 드문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라 웬만한 경력이 있던 사람들마저 매니저역할을 꺼려 결국 초보인 나에게까지 돌아온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앞을 보는 사람들조차도 부족한 것이 바로 피아노인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잘 칠까 싶었다.

'결국 떠맡기는 것뿐이잖아….'

괜스레 곤란한 일을 떠맡은 기분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일단 내가 만나보자 싶어 네가 늘 연습한다던 건물에 들러, 천천히 그 복도를 걸어갔다. 공허한 복도를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달큰한 피아노의 선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메아리치는 피아노 소리가 마치 나를 신에게 인도하는 것만 같았다. 이 건물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너 한 사람뿐이라고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에 가까워질수록 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조심스레 문을 여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의 앞에 앉아있는 작은 사람은 피아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버려 피아노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외치는 것만 같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네가 치고 있는 곡은 월광 소나타 3악장이었다. 눈이 보이는 사람도 어려워하는 까다로운 곡을 격정적으로 치고 있는 너의 눈은 굳게 감겨있었다. 너의 연주가 나를 감싸 안으며 폭풍 속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커다란 회오리바람이 나를 둘러싸고 흔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간간히 튀어나오는 음표들이 나를 할퀴고 지나가 생채기를 남겼다. 그러나 금세 쓰린 상처를 달래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다치는 줄도 모르고 너의 연주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넋을 놓은 채 온 몸으로 너의 연주를 받아들이던 나는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헉, 하며 크게 숨을 들이 쉴 수가 있었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너의 연주가 나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 알려주는 증표였다.

"거기, 누구 있어요?"

내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는지 네가 불안감으로 범벅이 된 목소리를 냈다. 바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던 나는 그제야 너를 다시 바라보았다.

초점이 없지만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옇게 흐려 보이면서도 맑게 빛나는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의 심장은 그대로 멈춰 바스러졌다.

바이올린 이후로 첫눈에 반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대로 너의 매니저가 되었다. 날마다 너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너는 늘 슬픈 곡만을 연주했다. 메마른 대지 위로 몰아치는 모래바람 같고, 거센 바람이 등을 떠밀어 바위에 몸을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 같은 선율은 듣는 이조차 괴롭고 슬픈 마음이 들게 하는 그것이었다.

"은광씨는 왜 이렇게, 힘들고 슬픈 곡만 쳐요?"

나의 말에 네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친 건지 이마가 땀으로 잘게 빛나고 있었다.

"글쎄요? 전 곡을 듣고 청음으로 곡을 외워서 치는 편인데, 항상 이런 곡만 끌리더라고요."

너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짧아야 5~6분, 길면 한 시간도 넘는 곡들을 청음으로 외운단 말인가? 아니, 청음으로 이렇게 까지 칠 수 있던가?

"4옥타브 솔이 어디 있나 칠 수 있어요?"

너는 대답 대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맑게 울리는 소리는 분명 4옥타브 솔이었다. 너의 검지가 올라와 있는 건반도 4옥타브 솔이었다.

"놀랐어요?"

"아, 네…."

나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놀람을 표했다. 살풋 웃은 네가 손끝을 세워 부드럽게 건반을 쓰다듬었다.

"점자 악보를 보긴 하는데, 저는 청음이 더 편하더라고요. 애매한 음들 때문에 악보를 찾을 때가 있긴 해요."

"건반 위치도 다 외우신건가요?"

"네. 보이지 않으니 몸으로 익혀야죠."

살풋 웃는 너의 미소가 왜 그리 서글퍼 보이는지, 내 가슴이 다 미어질 지경이었다. 내 침묵의 뜻이 무엇인지 읽은 듯 네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청음으로 외우는 경우가 꽤 있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틀리는 게 싫어서 더 연습한 것도 있구요."

"틀릴 수도 있죠."

"전 틀리면 안돼요."

앞이 안보이니까 그런 줄 알거든요. 그렇게 말한 너는 옅게 웃으며 건반을 쓰다듬었다.

네가 왜 그렇게 힘들고 슬픈 곡에 이끌리는지 알 것 같았다.

-

"이 곡은 어때요?"

"아…."

나는 그 다음부터 너에게 달달하고 행복한 곡만을 골라 들려주기 시작했다. 밝고 톡톡 튀어서, 듣는 이도 행복해지는. 내가 그러한 노래를 들려줄 때마다 너는 퍽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왜요? 그닥 어려운 곡도 아닌데."

"그, 분위기가 어려워서…."

"은광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어색한 미소를 짓는 네가 너무나도 귀엽게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나는 네가 밝은 곡을 쳐주길 바랐다. 슬픈 곡만 친다면 듣는 이도 지쳐 오래 감상하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겐 밝은 곡이 꼭 필요했다. 다시 한 번 곡을 재생시키며 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놀란 너의 어깨가 손 밑에서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밝은 곡을 치는 것도 많이 도움이 돼요."

"그런가요…."

"감정 표현을 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기쁜 일이 있으면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우는 것처럼. 나의 말에 네가 마치 수업을 처음 듣는 아이 같은 표정을 했다. 힘이 바짝 들어가 움츠러든 어깨를 천천히 주물렀다. 피아노를 칠 때 얼마나 감정을 얹어 내는 건지, 어깨가 돌덩이마냥 굳어있었다.

"피아노를 칠 때 어떤 생각해요?”

"그냥, 잘 해야 한다, 틀리지 말자…. 그리고, 다음에 나올 음들…."

"또? 그냥 그 생각만 해요?"

"슬프고…. 가끔 화도 나고…."

"은광씨는 피아노를 칠 때, 만날 화났었어요?"

"아뇨, 처음엔…. 즐거웠죠. 행복하고. 처음에는…."

고개를 숙인 네가 웅얼거리며 말을 삼켜냈다. 뭉친 곳을 꾹꾹 누르며 풀어 줄 때마다 손 밑으로 움찔거리는 너의 어깨가 그렇게 여려보여서, 마음이 쓰렸다.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부드럽게 너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맹인 피아니스트가 많진 않으니까요."

"그렇죠…."

"그래도 즐거웠어요.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피아노의 음색들이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그렇게 말한 너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무릎위에 올려져 있던 손은 둥근 주먹으로 변하여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네가 피아노 건반의 위에 손을 올렸다.

"부모님도 기뻐했어요. 제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으셨나봐요. 그 후로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죠."

"좋았겠네요."

"네, 좋았죠. 하지만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 생각보다 정말 힘들더라고요. 건반의 위치가 몸으로 익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피아노마다 음이 다 달라서 청음으로만 음을 짚어내기도 힘들었죠. 곡이 어려워질수록 틀리는 게 점점 많아졌어요. 선생님의 한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죠."

건반 위에 올려져있던 손이 자세를 잡더니 우아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쇼팽의 왈츠 7번이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너의 손은 월광 3악장을 칠 때와는 다른,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의 모습을 꼭 닮아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하면서도, 애절한.

"하루는 방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더듬거리며 점자 악보를 보고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외어보려 노력하고 있었어요. 틀리면 선생님이 다시 한숨을 쉴까봐. 그러던 중에 밖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군요."

흑조의 춤이 멎었다. 건반 위에 작게 몸을 웅크린 흑조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음악적 재능이 엄청나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입술을 꾹 깨문 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흑조는 사라지고 건반 위에 굵은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템페스트 3악장이었다. 철철 흘러내린 선율이 발밑에 고여 바닥을 적셨다.

"그때부터…. 정말 맹목적으로 연습했어요. 죽을 것처럼. 틀리지 않으려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어도 해야죠.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살풋 웃는 너의 모습이 그리도 서글퍼서, 너의 어깨를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꾸욱 눌리는 어깨에 네가 움찔거리고 나서야 손을 땠다. 밑으로 내리깔린 눈에서 눈물 내음이 물씬 풍겨났다.

"우리, 재미있게 해요."

"네?"

"재밌게, 즐겁게 해봐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너의 곁으로 손을 뻗어 건반을 눌렀다. 사계 중 봄이었다. 바이올린으로만 알던 악보를 피아노로 치려니 어색한 감이 있어 금방 틀려버려서, 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피아노 쳤었어요?"

"아뇨, 저는…. 다른 거."

"뭐였는데요?"

순수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너를 차마 매몰차게 거절 할 수가 없어, 결국 실소를 흘렸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린 네가 내가 손가락을 놀렸던 것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색하기 그지없던 나의 손놀림과는 다른 우아한 동작이었다.

"바이올린이요."

나의 대답에 귀를 간지럽히던 달콤한 봄내음이 멎었다. 의외라는 말이 그대로 쓰여 있는 표정에 무심코 손을 뻗어 볼을 감싸 쥐었다. 놀란 네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의외에요?"

"네. 손에 굳은살이 없어서…."

"그만 둔지 좀 됐거든요. 금방 없어지더라고요."

그에 살짝 표정을 굳힌 네가 볼을 감싸 쥔 손을 겹쳐 잡았다. 자그마한 손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를 위로하는 듯한 느낌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왜 그만 뒀어요?"

"저도 괴로웠거든요."

"아…."

"그래서 은광씨는 저처럼 안됐으면 좋겠어요."

물론 내가 괴로웠던 이유와 네가 괴로운 이유는 천지차이였지만, 난 네가 피아노를 그만둔다는 것이 싫었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이 생각보다 색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민혁씨 얼굴, 만져 봐도 돼요?"

너의 질문에 살짝 놀랐다가, 이윽고 그들이 사람의 얼굴을 보는 방법이 이것임을 알아채곤 너의 양손을 쥐고 내 볼을 감싸게 했다. 내 볼에 닿은 손이 작게 떨리고 있어 웃음이 나왔다. 엄지로 천천히 내 볼을 문지르던 손이 내 눈가와 콧대위로 내려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굴 되게 작으시다…."

"그래요?"

"그리고 콧대도 높으시고…."

"푸흐…. 부끄럽게."

"쌍꺼풀은 없는 건가?"

"아뇨, 속쌍이에요."

"아…."

"별로 티는 안나요. 진짜 얇게."

내 얼굴 위를 더듬는 손길이 싫지가 않아서, 손을 때려는 낌새가 보임에도 너의 손을 붙잡고 계속 볼에 대고 있게 했다. 당황한 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여 웃음이 났다. 멈칫거리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내 입술을 짚었다. 입술 위로 매끄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감촉이 찌릿하고 등을 타고 내려왔다.

"잘 생겼네요, 민혁씨."

"그래요? 잘 생겼나?"

"네. 엄청. 얼굴도 작고 코도 높고 입술도 예뻐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근데 은광씨도 예뻐요."

"네?"

충동적으로 툭 튀어나온 말에 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놀란 표정에 천천히 볼에서 손을 때내어 너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은광씨도 엄청 예뻐요. 특히, 피아노 칠 때."

"…."

"그런데 예쁘면서도, 너무 슬퍼 보여."

"…민혁씨."

"이제 즐겁게 쳐요, 행복하게. 신이 주신 손을 매일 울릴 순 없잖아요?"

제 말 들어줄 거죠? 웃으며 눈을 맞추자, 네가 눈을 휘며 웃어 살짝 촉촉해진 달을 닮은 회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눈매 사이로 사라졌다.

-

창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커피를 한잔 내려놓고 나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네가 치던 템페스트가 떠올랐다. 네가 치던 선율은 아직도 내 마음 바닥에 고여 질척이고 있었다.

띠링- 띠링-

울리는 초인종에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멍하니 앉아있는 와중에도 초인종은 계속해서 눌리고 있었다. 창 밖에는 비가 폭우 수준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하늘이 찢어지는 듯 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편지입니다.]

이 폭우에 편지라니? 보통은 우편함에 꽂아두고 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굳이 초인종까지 누르는 것에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집배원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중하게 품에 안고 온 듯, 하나도 젖지 않은 편지였다.

*[서은광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연주회를 기획 중에 있습니다. 이민혁씨가 꼭 참가해주시길 원한답니다.]

남자의 말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새하얘지는 머릿속으로 검은 폭우가 몰아쳐 떨어졌다. 내 손에 편지를 우겨 넣어 쥐어준 남자가 뒤를 돌아 떠났다. 문이 닫히고 집 안에는 다시 고요한 빗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방금 내가 들은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남자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써져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네가 죽은 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여기가 우리가 살 집이야-"

너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장애물이 어디에 있으며, 집안에 계단이 어디에 있는지를 천천히 짚어주며 걸어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집이라 당분간 네가 움직일 때마다 옆에 딱 붙어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여기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야. 우리 자는 방이랑, 다른 방엔 아예 피아노만 놨어."

"아, 진짜? 그게 편하긴 하겠다."

"계단이 조금 높으니까 조심하고."

내 손을 꼭 잡고 한발 한발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처음 걸음을 때는 아이 같아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가 바로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너를 인도했다. 런던에 오는 김에 아예 너를 위한 그랜드 피아노를 맞췄다. 네가 자주 쓰던 피아노에 맞춰 건반을 거의 흡사하게 제작해냈다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에서 비추어지는 햇빛이 그대로 밀려들어와 피아노를 덮어내고 있었다.

"와, 햇빛 냄새가 나."

"여기가 제일 해가 잘 든대. 피아노 쳐볼 거지?"

"어! 당연하지!"

신이 나 외치는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리며 너를 의자에 앉혔다. 뚜껑을 열어 걸어놓고, 건반의 뚜껑도 연 뒤 덮개를 치워주었다. 손 올려도 돼- 나의 말에 손을 마주비비며 긴장감을 풀어내던 네가 조심스럽게 가온 도를 눌렀다. 맑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너의 입 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조율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웃음 짓던 너의 손이 흑건 위에서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왈츠였다.

"푸핫- 기분 좋아?"

"응! 한국에서 쓰던 거랑 완전 비슷해!!"

즐겁게 울려 퍼지는 음에 나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톡톡 발을 놀리듯 가볍게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손이 네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표현해주고 있었다. 너의 등 뒤로 돌아가 머리위에 턱을 올렸다. 등 뒤에 닿는 나의 체온에 네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려 시야가 들썩거렸다.

"우리 은광이 내일부턴 다른 선생님이 가르쳐줄텐데. 힘들겠네-"

"배우려고 온 건데, 뭐. 그래도 그 분 말하는 목소리가 엄청 부드러워서,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숙여 너의 뺨에 내 볼을 대고 비볐다. 보드라운 살결이 비벼지자 네가 웃었다. 네가 치던 음이 바뀌어 다른 곡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썸머였다. 초여름, 나뭇잎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드는 바람이 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너는 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 밝은 곡을 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너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뉴에이지며 클레식까지 온갖 곡을 끌어 모아 들려주는 날 보며 곤란한 듯 웃음 짓던 너의 표정은 아직도 나의 망막 뒤쪽에 맺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나 둘씩 바뀌는 너의 분위기는 연주에서도 티가 나기 시작했고, 너를 찾는 곳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었다.

“저기, 민혁씨. 런던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

“은광씨를 만나보고 싶대.”

네가 착실히 지명도를 쌓아올리던 와중 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너에게 흥미를 느끼고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기교를 많이 부리지 않음에도 우아하고 풍부한 느낌이 들어 나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가 은광이를 가르치고 싶어 함을 알곤 꽤나 놀랐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면서, 천사의 날갯짓 같은 손놀림이라는 극찬에 나의 어깨에도 한껏 바람이 들어 갈 정도였다. 부탁이니 런던으로 유학을 올 생각이 없냐는 그의 말을 나는 그대로 은광이에게 전달을 했고, 너는 이 기회를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민혁아, 나 꼭 가고 싶어. 같이…. 가줄 거지?”

갑작스러운 유학에 너의 부모님들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지만, 강력하게 유학을 가고 싶다 말하는 너의 의견에 결국 그러마 하고 허락을 했다. 매니지먼트에서도 너의 능력을 높이 사, 모든 것을 지원해주겠다며 나선 참인지라 나도 너의 안내자 겸 동반자로 런던 행에 동참을 하게 되었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떠난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우리는 그때, 이미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뒤여서 더욱 신이 나있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 같은 침대위에서 눈을 뜨는 현실은 설탕마냥 달콤했다. 수업을 받으며 즐거워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쳐야 선생님이 말하는 느낌이 나올지 고민을 하는 너의 모습은 선생님도 나도 절로 미소가 흘러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너의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하여 선생님도 너의 재능을 극찬할 정도였다. 그러한 칭찬에 민망하며 몸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은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는 모습이었다.

매일같이 너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너의 곁에 앉아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자기 전, 너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달이 떠올라 날 비춰주었다. 네가 내 인생에 등장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난다. 신은 아름다운 사람을 일찍 곁에 두고 싶어 한다고.

"아, 비 오네."

저녁거리가 똑 떨어지는 바람에 집에 너를 두고 장을 보러 나온 참이었다. 런던은 비가 자주 온다더니,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은 나를 비웃듯 하늘에서 하나 둘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품에 종이봉투를 꾹 껴안곤 겉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집까지 거리가 택시를 타기도 애매한 거리라, 그냥 뛰어갈 생각이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이 쉬이 그칠 비가 아니어서, 열심히 뛰는 나의 발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품에 짐을 들고 뛰는 터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옷이 젖어가 움직이기가 더욱 힘들었다.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은 나를 걱정하고 있을 너를 알아서, 더욱 급하게 뛰어가는 중이었다. 저 멀리, 집 앞에 있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보였다.

끼이이익, 콰앙!!

"꺄아악!!"

찢어지는 듯한 타이어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길을 지나가던 여자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폭우에 시야가 가려져 있던 듯 질주해오던 차가 길을 건너던 사람을 그대로 친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쓰러진 남자를 보며 뭐라 뭐라 소리를 쳤다. 바닥에 붉은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놀란 나도 사고현장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있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케인과 우산이, 작은 손 위에 걸려있는 팔찌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불과 서너 시간 전에 보았던 옷들이라서, 빗물에 하얗게 질린 옆얼굴이-

바닥에 누워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서.

"ㅇ, 은광아…."

손에 들고 있던 짐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전화기에 대고 뭐라 뭐라 소릴 지르고 있는 운전자를 밀쳐내고 너에게 달려갔다. 너를 품에 끌어안자 손에 붉은 피가 한 움큼 묻어나왔다. 놀라 옷을 잡아당겨 너의 뒷머리를 꾸욱 눌렀다. 내가 너를 끌어안음에도 너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다.

"은광아? 일어나…. 서은광! 정신 차리라고!!"

차가운 너의 뺨을 문지르며 이름을 외쳤지만 굳게 닫힌 너의 눈꺼풀은 들리지 않아 달을 지워버렸다. 축 늘어진 몸이 차가운 빗방울에 적셔져 식어가고 있었다. 이럴리가 없다며 떨리는 손을 올려 너의 목을 짚었다. 그 순간, 귓가에 들리던 빗소리조차 멈췄다.

내 인생에서 음악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사실 너의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병원에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 조차도. 오열하는 너의 부모님의 앞에 고개를 숙인 나는 아무런 말조차 건낼 수 없었다. 너의 부모님은 고개 숙인 나의 어깨를 쥐며 내 잘못이 아니라며 나를 위로해주셨지만, 나는 이미 너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였다. 울음소리가 판을 치는 장례식장의 구석에서 나는 그저 벽에 기대어 앉아 공허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장례식장에는 계속해서 네가 치던 샤콘느가 울려 퍼졌다. 그 많은 곡들 중 유독 샤콘느만이. 너의 곡들 중 가장 유명한 곡이였으니 그러할 만 했다.

사람들이 날 보고 힘내라며 말을 하던, 안됐다며 말을 하던 머릿속에 들어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너의 사진 앞을 지나가며 하얀 국화꽃을 내려놓고 가기를 반복했다. 너의 영정사진은 너의 양 눈에 있는 환한 보름달이 예쁘게 비춰져 있는, 내가 직접 찍었던 사진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너의 부모님들도 지쳐 잠이 들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너의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샤콘느는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득 네가 샤콘느를 칠 때마다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랑 합주하자, 민혁아.'

나는 매번 그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해왔다. 너에게 내 형편없는 바이올린을 들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네가 내 바이올린을 듣고 비웃거나 동정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천천히 손을 뻗어 너의 사진을 끌어안았다. 이제 나는 너를 이런 식으로 끌어안을 수 없었다. 너의 작은 손을 쥘 수도, 너와 숨결을 나눌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네 눈에서 빛나던 아름다운 회색 빛 달을 볼 수 없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하나 둘씩 떨어지던 눈물이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목이 틀어막혀진 마냥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꾸욱 깨문 입술 사이로 억누른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는 너의 샤콘느에 음을 맞춰줄 수가 없었다.

-

편지는 이제 반듯하게 펴진 채 테이블의 위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몇 번 씩이나 읽어본 탓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거실 한쪽 구석에 놓아져 있는 CD 플레이어 앞으로 향했다. 플레이어도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먼지를 손으로 쓸어낸 뒤, 옆에 잘 정리되어 있던 CD들 중 하나를 꺼내 재생시켰다.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곡은 샤콘느였다.

익숙한 그 곡을 틀어놓고 하루 종일, 플레이어의 옆에 앉아 너의 샤콘느를 들었다. 귓가에 윙윙 울리는 피아노의 음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이런 너의 노래에, 정말 내 바이올린을 올리고 싶었니? 은광아?

정말 그게, 너의 소원이었니?

그 후로 나는 집 밖을 나서 너를 가르쳤던 피아니스트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그에게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했다. 실력 좋은 바이올린리스트를 소개시켜달라고.

*[갑자기 바이올린은 왜?]

*[은광이랑 합주를 하려구요.]

나의 대답에 그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작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의외였을 것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유를 더 묻지 않고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새로 만난 선생님은 꽤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바이올린을 빌려들고 익숙하게 턱을 받쳐 활을 댔다. 긴장감에 손이 떨렸다. 몇 년 만의 감촉인지,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활을 움직이니 음정도 함께 떨렸다. 긴장이 그대로 드러난 나의 표정에 선생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바이올린을 잡는 손길이 꽤나 익숙해 보이는 군요. 혹시 바이올린을 배웠었나요?]

*[네. 놓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호오…. 기대해보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긴장을 풀고 아무 곡이나 켜봐요.]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선생님의 표정에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긴장을 풀라더니, 더욱 긴장을 시키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귓가에 너의 샤콘느가 울려 퍼졌다. 그런 너의 선율을 따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꺼풀 너머로 피아노를 치는 네가 보였다.

살짝 눈을 뜨니 놀람에 가득 찬 선생님의 표정이 보였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몇 년을 잡고 있지 않았던 터라 손을 바꾸는 것이 어색했다. 현을 잡고 흔드는 손가락의 끝이 아려왔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싶진 않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 겨우 하루.

너를 위해 내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고 시작하는지 겨우 하루.

하늘에서 신의 왼편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을 천사를 위한 샤콘느.

은광아, 나의 천사야.

이 곡을 너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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