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날
사비나와 빌의 만남
사비나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좋아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훔쳐 내 것으로 만들었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았다. 먹기 싫은 것은 먹지 않고 제게 잔소리 하는 사람 하나 없이 즐겁게 살았다고.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지금, 사비나의 그러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마등이라고 불리우는 미련이 떠올랐다.
참 재수도 없었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외곽의 외딴 집을 훔쳐 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외졌기에 도움 하나 받을 수 없다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살려주세요!”... 평소라면 가오빠진다고 하지도 않았을텐데. 역시 사람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와야 본성이 드러나는구나.
후들거리는 팔로 한 번 더 방망이를 드는데, 이게 왠걸. 방망이로 내려치기도 전 좀비가 저만치 옆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내리쬐는 태양을 등져 그림자가 진 거구의 인간은 그 사비나라고 할지라도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좀비 다섯을 해치운 생존자가 사비나에게 다가오고, 사비나는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도 못했다.
“한참 젊은이구먼. 괜찮나? 위험했구만그래!”
자신을 ‘빌’이라고 소개한 생존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사비나를 무 뽑듯이 쑥 올려 더러워진 옷을 탁탁 털어주었다. 그것이 빌과 사비나의 첫 만남이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고, 누구든 한 번만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미모를 소유한 빌은 아름답게 웃으며 어쩌다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상대가 천사든 악마든 인간이든간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비나는 그 웃음에 넘어가지 않았다.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빌을 노려보다가,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빌은 아무런 책망이나 보채는 말 없이 그저 자신이 너무 서둘렀노라 말하며 사과했다. 이런 세상에서 저렇게 착해빠진 인간이 있을리가 없지. 사비나는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벗겨질 가면일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제 이름 하나 말하지 않고 날을 세우기 바빴고, 빌은 그저 웃었다. 저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도 제대로 안한 이에게! 사비나는 더더욱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세상이 아니더라도 저런 인간은 이 땅위에 있을리가 없다. 늙으면 늙을수록 더욱이. 그 헛된 신념이 지금까지의 사비나를 지키고 버티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비나는 살기 위해 의심을 선택했다. 좀비에서 벗어나자마자 이런 상황이 되다니. 내심 혀를 찬 사비나가 가늘게 뜬 눈으로 빌을 노려본다. 빌은 그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자네에게 해가 될까 걱정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좋네. 난 그냥 식량과 물자를 찾으러 왔고, 그것에 주인이 있다면 건드리지 않을 것이야.”
거짓말. 웃기는 소리! 이런 세상에서 약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저 거구의 남자같은 이가 물자와 식량의 주인이 되겠지. 헛웃음을 삼킨 사비나가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 빌은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사실 빌은 간만에 만난 생존자-코니를 제외한 생존자 말이다-덕분에 꽤 들떠있었다. 어쩌면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머릿속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빌과는 다르게 사비나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함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것도 그것 덕분이었다. 짐승을 대할 때엔 등을 보이고 도망가면 안된다고 했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데, 빌이 다시금 웃으며 입을 연다. “그나저나 여기가 자네의 거점인가? 혼자서 지낸다면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데. 도움을 줄 사람이나 동료는 없나?”
이젠 제 주변 인간관계까지 파악하려 들다니! 사비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말했다. “... 아빠가 잠깐 나갔어요.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썩 돌아가요!”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말에도 빌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사비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음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젊은이는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구나. 그것만으로도 빌은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자네의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같이 있어줌세. 이 부근에 좀비가 늘어나 또 위험할 수 있어. 난 밖에서 있을테니 자네는 들어가 있어도 좋아.”
사비나는 입을 꾹 다물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썩 꺼지라고 외치기엔 제 목숨이 꽤나 소중했다. 사비나가 느리게 발을 움직여 문에 도착하고, 문을 열고 그것을 닫은 후 잠글 때까지 사비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비나에게는 적어도 아니었기에, 사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닫힌 커튼을 살짝 젖혀 밖을 확인해보면 평소와 다름 없는 풍경에 이질적인 거구의 남자가 불순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 제 동료가 올 때까지 여기에 있을 셈인가? 그건 사실 핑계고 절 구워먹을 생각으로 저러고 있는거라면 어쩌지? 초조함에 손톱을 뜯는데 불현듯 노크소리가 들린다. “젊은이, 혹시 아빠가 언제 나갔는지 알 수 있을까?”
사실 빌은 사비나의 아빠가 오래 전 나가 혹시라도 죽었을까 염려되어 물은 것이었으나 사비나에게는 저승사자의 질문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왜 궁금하지?! 사비나가 소리를 죽이고 현관문 옆에 바싹 붙는다. 혹시라도 저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이곳이 가장 도망치기 편할테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문 너머를 안쓰러운 눈으로 본 빌이 뒷목을 긁적인다. 아까까지 위험에 처했던 연약한 젊은이를 이곳에 두고갈만큼 빌은 냉정하지 못했다. “젊은이,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우리 거점이 있네. 괜찮다면 자네의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같이 있을텐가? 마침 거점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 곤란했던 참이거든!”
물론 거짓말이다. 이곳에 코니가 있었다면 소리를 지르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고 했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에는 빌과 사비나 뿐이었다. 사비나는 빌이 말한 ‘우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거구의 남자가 동료가 있다면… 그 동료가 가족같은 것이라면 사비나의 생각처럼 처참한 결과가 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일 잠깐이나마 확인한 저 성격이 정말 본연의 것이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이건 사비나도 모르는 작은 비밀이다. 사비나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아무리 인간이 불신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하여도 어디 매사에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꼬투리 잡는 것이 힘들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비나는 못이기는 척 딱 한 번만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제 목숨을 판돈으로 건 도박이었지만 왠지 사비나는 그 끝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쭈뼛쭈뼛 나온 사비나를 본 빌이 활짝 웃고, 간소한 짐을 챙겨 빌과 코니의 거점으로 도착했을 때 코니를 본 사비나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던 것은 아주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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