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아직도 삐졌어?”
아, 실수했다. 해연은 뒤늦게 후회했다. 허나 말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멍청하게도 인간이란 자신과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방심해선 생각보다 입이 가벼워지곤 하지 않은가.
“아니.”
답지 않게 단답으로 툭 내뱉고는 자신을 봐주지도 않은 남자친구가 못내 섭섭한거 보면 자신도 참 문제구나, 싶었다. 너 이기적이다, 최해연. 그렇지만 내가 회식 때문에 늦는게 한두번도 아니고… 늘 이해줬으면서… 식탁 위엔 차려진 밥상이 랩에 싸여져선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전부다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들 뿐이다. 일종의 시위일지도. 그와 연인이 된지도 오늘로 딱 3000일이었다. 햇수로는 뭐... 대략 9년? 정도?
이런 세세한 면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 늘 권 택의 역할이었지.
… 사실 그래서 이 사단이 난 거지만.
윽. 냉장고를 열어보니 해연의 더 양심이 찔려왔다. 큼지막하게 ‘최해연♥권 택’ 그 밑에 3000이란 숫자가 떡하니 적혀져 있는 레터링 케이크라니.
그 날은 일찍 올 수 있어. 가볍게 장담했던 자신과, 헤실거리며 달력에 큼지막하게 표시했던 택의 모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부장 새끼를… 죽여버릴걸 그랬네.”
“… … .”
해연으로서는 나름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이었다. (8할 정도는 진심이었지만.) 곁눈질로 살펴보면 어둑한 거실에서 무드등 하나만 켜놓고 원고 뭉텅이를 팔랑거리는 택의 등만 보일 뿐이었다.
이걸 어쩐다. 얼른 방에 들어가서 준비해뒀던 선물이라도 꺼내볼까? 백화점의 브랜드 관에서 고른 셔츠는 나름대로 해연도 오늘을 기대했다는 증거긴 했다.
“얼른 씻고 자. 피곤하잖아.”
“… 너는?”
“난 오늘 중으로 이거 교정해야 해.”
“아…”
아… 정말 멍청하게 그런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상황은 감탄보단 한탄임에도! 9년차니까 알 수 있었다. 권 택이 자신 앞에서 덤덤하고 사무적일수록 화가 났다는 증거다.
“음…”
해연은 가방을 대충 의자에 내려놓고는 조심스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등 뒤에 바짝 앉으면 곧게 편 큼지막한 등팍이 살짝 옴실거렸다.
“많이 기다렸지…”
침묵. 여기까진 예상범위라 상관없었다. 해연이 검지 손가락으로 느릿히 택의 등에 글자를 써내려간다. ㅁㅣㅇㅏㄴㅎㅐ간질거리는 느낌에 택의 어깨가 씰룩거렸다가 이내 마음을 다시 굳게 먹은듯이 살짝 등근육에 힘을 주고선 꼿꼿해졌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아니. 몰라.”
“진짜?”
다시 써줄게. 이번엔 아까보다 더 천천히, 글자보단 그림을 덧그리는 감각으로 해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얘 여기 만지면 간지럼 타는데. 혼자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 바로 아래 옴팍 패인 부분을 간지르자 택이 움찔거리며 몸을 바르작 움직였다.
“하지마.”
일부러 딱딱하게 유지하려는 목소리톤에 되려 해연이 푸핫, 웃어버린다. “왜애~? 간지러?” 술기운인척 두 팔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아, 하고 숨을 내뱉고 깊게 들이마시면... 눈에 익은 티셔츠에서 맡아지는 익숙한 체향에 절로 기분이 나른해졌다. 아 얘 기분은 풀어줘야 하는데... 눈을 슬며시 감고는 몸을 더 가까이 붙여왔다.
“연아, 졸려?”
약간 걱정이 담긴 목소리. 심장을 누가 끈으로 묶어 꽉 죄여오는것 같았다. 권 택, 너 너무 쉽게 풀리잖아… 이 남자는 늘 그랬다. 지겹지도 않은걸까. 이런 식으로 깨지는 약속도, 익숙함을 사랑이라 덧칠해놓곤 아직 저희들은 건재하다는 얄팍한 속임수도.
나는, 좀 지겨운데.
“아니… 그냥, 따뜻해서…”
그래. 따뜻해서. 익숙하니까. 사실 네 빈자리를 상상해 본적 조차 없어서. 그러면 과거의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으니까. 최근의 밤마다 떠올리던 여러 상념들을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 해연은 슬며시 눈을 떴다. 손등에 닿아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둥둥. 등에 대고 있는 뺨을 통해 느껴지는 심장고동도. 너 진짜 못됐다. 최해연.
“늦어서 미안해.”
죄책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결국 직접 입술을 열어 사과의 말을 뱉었다. 취기는 이미 가셨는데도 목이 살짝 메여왔다. 추억이 쌓인 감정이란 성가셨다. 아니 사실은 그 상대가 너라서… 그저 너니까…
“아직도 화났어?”
“… … 화 안났어…”
언제나 먼저 안아주는건 권 택이었다. 더는 못하겠다고, 나는 네 앞에선 도저히 계산하고, 젠체할 수가 없다며. 사실 화 안난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풀려지는 것 뿐이면서.
몸을 돌려 자신을 꽉 안는 단단한 팔이, 깊게 숨을 들이키고 목덜미에 뺨을 부비작거리는 움직임이 대신 말해준다. 나는 몇번이고 널 용서해줄 수 있어.
네가 날 버리지만 않으면…
알아. 알고 있어서 괴로운거지. 해연이 팔을 그의 등 뒤로 둘러선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이다 뒷목을 살 간지럽히면 택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넌 너무 쉽게 풀린다고.
“밥은? 먹었어?”
“응. 먹었어... 걱정 안해도 돼.”
“내일 일 나가?”
“왜?”
“나 월차 내게. 어디 놀러가자. 오랜만에.”
“정말?”
확 밝아지는 목소리가 꼭 산책하잔 말을 들은 강아지 같다. 아니… 크기로 따지자면 강아지라는 말보단 개라는 말이 더 잘어울리나? 어감이 좀 그렇지만.
“너 일 나가야하면 그냥 다음에 가고.”
“잠깐만! 기다려봐… 일정 한번 볼게!”
택이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이것저것 확인하는 옆얼굴을 해연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가항적으로 올라간 입꼬리하며, 안경 너머의 부드러운 녹안이라던가... 그리고, 눈가의 흉터.
가슴이 욱씬거린다. 아직도 자신의 상처를 후벼 판것 마냥. 저것 때문에, 저것 덕분에, 저것이 있었으니까... 해연아 괜찮아? 너는 늘 자신이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그걸 묻고는 했다.
괜찮지 않아 바보야. 네가 더 아프잖아.
“연아... 괜찮아? 역시 졸려?”
“… 키스할까?”
으응? 택의 눈이 그대로 커지다 입이 뜨악 벌어졌다.
“취, 취한거야 연아? 얼른 자야겠다.”
“야! 이 씨... 너 내가 그 정도로 취할거 같아?”
그렇게 기겁하면 이쪽이 되려 창피하다. 그야 자신이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물어본적은 흔치 않았지만… 그냥 갈겼으면 갈겼지. 자신은 권 택처럼 내 것에 닿는 거 하나하나에 일일이 허락 맡는 성격은 아니었다.
“연이 너 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하잖아...”
“너 나랑 키스할때마다 그런 생각했냐?”
“아, 아니… 나는 갑자기 네가 이러니까 이상해서…”
“아, 그러셔?”
됐다. 안할련다. 홱 바닥에 누워선 입을 댓발 내밀고 있으니 힐끗힐끗 택이 눈치를 보았다. 상황이 역전되었음에도 해연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확, 팔이라도 꼬집어 버릴까보다. 역시 아직 취기가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 그, 연아…”
“뭐야.”
“…삐졌어?”
“그래보이냐?”
삐졌구나... 무력하게 중얼거린 권 택이 좀 망설이는가 싶더니 슬 허리를 숙여 해연과 시선을 맞추었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정리하며 귀 뒤로 넘겨준다. 부루퉁한 얼굴도 사랑스럽다. 자신이 헤실 웃으면 가늘어진 파란 눈동자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자신의 기분을 심해로 떨어트리는 것도, 다시 우주까지 끌어 올리는것도 최해연, 그녀였다.
“뭐가 좋다고 웃어. 웃기는 아저씨네.”
“아직 아저씨일 나이는 아닌데…”
쭉 제 뺨을 꼬집어 당기는 애인의 손길. 생각했던 기념일과는 달랐지만, 행복했다. 앞으로도 쭉 이런 시간을 너랑 보낼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뭘 또 아니야. 밖에 애들한테 물어봐라. 너 나이면 다 아저씨지.”
“그럼 연이 너도 아줌마겠네?”
“이게... 난 언니 누나거든?”
아야야! 해연이 쭉 세게 잡아당긴 뺨에 택이 앓는 소리를 냈다. 푸핫, 웃은 해연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택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자연스레, 그의 뒷목을 감싸는 해연의 손. 입술이 가볍게 포개어지다 멀어진다.미약한 술 냄새. 그만 떨어질까, 택이 생각하던 찰나 그의 뒷목이 홱 다시 당겨졌다. 꾸욱 다시 맞닿는 말캉한 감촉.
평소처럼 해연이 살짝 제 하순을 물었다 놓으면 택은 심장이 간질거림을 느낀다. 이미 수십번도 더한 입맞춤임에도.
슬 벌려드는 틈을 비집고는 혓덩이가 안쪽을 침범해왔다. 핥아내고 서로 비벼내다 뺨 안쪽 점막을 끝으로 간질이며 다시 떨어진다. 하아, 하고 내뱉는 숨결 새로 이어진 타액의 선이 톡 끊어지는게 보였다.
거봐... 취하면 좀 거칠어진다니까.
택은 머릿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발개진 해연의 뺨의 열기에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고 싶어졌으니까. 오늘은 허락 안 맡을래. 아직 나 안풀렸다고, 이미 소용없을 어리광을 핑계로 하얀 목덜미를 빨아들이다 잘근 깨물었다.
아야. 해연이 나지막하게 내뱉자 택이 시선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깨물면 좀 풀릴거 같아?”
“음… 글쎄…”
해연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택이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화났다고 생각해서 해주려는거 아니지?” 아차. 생각만 하려고 했었는데. 권 택은 한박자 늦게 후회했다. 분위기 다 망쳤다고 가버리면 어쩌지? 괜히 다급해져선 다리를 옮겨 몸으로 그녀를 가두었다.
해연이 밀어내면, 어쩔 수 없겠지만…
“… 그런거 아니야.”
“정말?”
“진짜 분위기 다 깨게… 닥치고 키스나 해.”
“역시 술 취했잖아…”
택의 눈썹이 팔자로 늘여지자 해연의 미간이 팍 찌푸려진다. 멍청이. 몇년을 사귀었는데 아직도 모르냐. 거슬리는 그의 안경을 벗겨내곤 목덜미를 양팔로 감싸, 그대로 끌어 안으며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움찔거리다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축축한 작은 살덩이를 건들이고 살 깨물었다 놓으며 자극하니 택의 손길이 다시 다급해진다.
숨막혀. 고개만 움직여 떨어지면 입술이 이번엔 바로 쇄골로 내려온다. 가슴에 닿아오는 호흡이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연아… 나 사랑해?”
아래쪽에서 물어오는 목소리의 끝이 떨려왔다. 해연의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거렸다. 뭘 그런걸 묻느냐고, 타박을 하기에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은 자신이 너무나도 밉고, 애처로워서.
“응. 사랑해. 알면서 그래.”
너무 텀이 길진 않았을까. 그것에 네가 상처 받지는 않았을까. 그걸 걱정하는 자신이 있음에, 경멸을 느껴야 하는지 안도해야 하는지. 허나 마주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해연은 아연해졌다.
“응… 나도. 나도 사랑해.”
기쁨과 안도. 금방이라도 아롱져 떨어질 녹안과 희미하게 사라질것 같은 미소가 보여서. 해연은 훅 숨을 들이켰다. 가슴골을 핥아 올리는 감촉에 소름이 돋아와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분홍빛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껴선 쓰다듬는다.
그래, 우린 연인이니까. 이런 대화는 일상적인거야.
그게 괴로워져선 안되는거야.
시계가 12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그와 자신이 연인이 된지 3001일째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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