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이설/청명이설] 타생지연他生之緣

[청명이설/검존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 12. 몽중설몽

구화산에 트립한 유이설

* 급전개 주의, 개연성X, 무협알못, 원작설정숙지 잘 안됨 

* 夢中說夢(몽중설몽) : 꿈 속에서 꿈 얘기를 함.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나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도 통합니다 

※해남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없다면 읽고나서 보실것을 권장합니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느려져버린 양 천천히 흘러갔다. 

치열한 전투 중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른 듯 느껴졌다느니, 그런 거 다 자신의 무용담을 길게 늘어놓기 위한 무림인들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이런 느낌인가.’

유이설이 검 끝으로 유려한 꽃잎을 뿜어냈다. 언젠가 유이설의 검을 보며 당장 매화가 피어나도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풍성한 매화검기를 뿌려대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처음 만날 적부터 일부러 자신의 검법을 감추려 했던 유이설을 떠올렸다. 

저건 완벽한 화산의 검이다.

‘진짜… 무슨 선계에서 내려온 선녀라도 되나?’

어릴 적 화산의 어느 연못엔 선녀가 내려온다더라, 하는 말을 베갯잇에서 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연못에서는 선녀가 아무도 없는 새벽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간다고. 진짜인지 알고 싶으면 새벽 수련을 나가면 된다는 우스갯 소리와 함께 말이다.

물론 청명은 조금도 그 전설을 믿지 않았다. 선녀가 내려온다고 콕 집어 언급되던 그 연못은 여름날 청명이 분주를 시원하게 보관해두는 데에 애용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청명이 술병을 한아름 안아들고 사형의 눈을 피해 바삐 연못을 오가는 동안에도 그는 선녀는 커녕 날개옷 자락 하나 구경하지 못했었다. 당연하게도.

그랬던 그였는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이가 선녀가 아니라면 대체 무얼까. 

청명을 보는 여자의 눈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그것마저도 기꺼웠다.  

‘아직 하늘로 올라가버릴 생각 따윈 없어 보이네.’

시야를 가득 수놓은 매화 검기가 멈춰 서 살피고 싶을 정도로 붉었으나, 그럴 틈 따윈 없었다.

“정신 차려.”

“그렇게 말 안해도 눈빛이 무서워서 정신이 바짝 드는데.” 

“앞 뒤로 일곱 명.”

청명과 유이설은 서로의 등을 지키고 섰다. 매복한 마교도들은 이전에 청해에서 본 이들과도 사뭇 달랐다. 아주 잠시였지만, 이만한 쪽수로도 청명과 유이설도 순간 방심할 정도로 기척을 지웠었다. 그러나 아직은 상대할만한 수준이다. 청명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유이설. 잘 들어, 마교도를 상대할 때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을 박찬 유이설이 들이닥쳐오는 마기를 흩고는, 곧장 검은 복면을 한 마교도의 목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반듯하게 눕힌 칼날 좌우에서 표출된 검기가 마교도의 힘줄과 뼈를 완전히 끊어내었다. 솟구쳐 뿜어나오는 피가 그녀의 얼굴을 적셔도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이어지는 청명의 목소리는 당혹스러움으로 인해 힘이 쭉 빠져있었다.  

"목과... 머리를..."

"알아."

청명은 놀라움을 표현할 새도 없이 제 목을 노리는 조도를 검신에 걸어 밀쳐내는 한편 계속 그녀를 흘끔거릴 수 밖에 없었다. 유이설은 매화검기로 만든 벽이 부서지자마자 먼젓번보다도 더욱 높이 뛰어 올라 망설임 없이 또다른 상대의 목을 노렸다. 가볍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처음 마교도를 본 이의 태도가 아니었다. 마교도를 처음 상대하는 평범한 무인이라면 그 음침한 기운이 목을 조이는 감각에 최소한 머뭇거리기라도 했을 텐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마공을 어떻게 상대할지 기탄없이 판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공과 마기의 상성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고 그 이점을 톡톡히 이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교도들의 가공할 재생력을 이미 알고 있는지 그들의 머리나 목만을 맹렬하게 노려대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고 있었다. 서안에서 종남의 검을 막아내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차분하고 더더욱 날카로운 검이었다. 마치 이전에도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는 듯이. 

‘대체...’

얼마 가지 않아 뼈를 잘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베어 마구 솟구친 피를 뒤집어 쓴 유이설이 청명 쪽을 돌아보았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정신이 어리론가 팔려있는 듯한 청명을 향해 미미하지만 선명한 분노가 들어있었다. 정신차리라 당부했는데도 벙찐 기색인 청명이 답답한 듯, 전투 중만 아니면 또 한대 쥐어박았을 것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

"알겠어, 알겠어."

비록 청명도 청해에서 큰 위기감 없이 마교도들을 상대했었지만 방심 따위는 금물이다. 다른 이들도 아닌 저 끈질긴 마교도 놈들에게는. 심지어 이 놈들은 청해에서 마주친 것들보다도 한 단계 더 강한 무공도 사용할 줄 아는 듯 했다. 

그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 채 제게 달려드는 마교도가 수인을 맺기 전에 그 손목을 잘라버리고는, 무공의 전개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쾌속한 검으로 그 목을 노려대었다. 또 한 명의 목이 피를 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거침없는 제압에 조금은 신중해진 마교도들이 협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셋이 마기를 끌어 두른 채 한꺼번에 방향을 분담하여 그에게 달려들었다. 청명은 동요 없이 검을 들고 검강을 끌어내었다. 마기가 그에게 닿기 전에 검강으로 그들을 베어 밀어내어야 했다. 

"하아아압!"

청명이 기합을 내뱉었다. 누구의 공격이 먼저 닿는지 완벽히 장담은 할 수 없었으나, 여러 명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지금은 이 수가 최선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찰나 속 선후를 앞다투는 치열한 수들이 양쪽에서 펼쳐졌다. 

청명의 검이 빠르게 마교도들을 베어냈지만, 광기가 고통을 압도한 마교도들은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닌 이상 끄떡도 않았다. 되려 그들은 자신의 피와 살 조차도 청명의 발목을 잡는데에 철저히 이용했다. 청명은 역청처럼 검신에 들러붙어오는 살점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몸을 위에서부터 갈라내었다. 허리를 베인 마교도는 쓰러지는 와중에도 조도를 놀렸다. 아마 자신이 죽은 줄도 인식하지 못한 채 였을 것이다.

동료들의 죽음을 보고도 비웃음이 담긴 웃음을 짓는 마인은 몇번을 보고도 소름이 돋았다. 청명은 피를 잔뜩 머금은 칼날을 휘둘러 털어낼 새도 없이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또다시 날아드는 검과 조도를 받아쳤다. 

한 명씩 침착하게 머릿수를 줄여 갔음에도 더 치열해질 뿐 전혀 상하지 않는 적들의 기세에 청명이 진절머리를 냈다. 그들이 내던진 것은 강력한 마기가 맺힌 병장기들이었으나, 청명이 시덥잖은 날붙이들을 밀어낼 즈음엔 그저 주인 잃은 팔들이었을 뿐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징그러운 놈들이!"

"청명!"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서 유이설의 검기가 날아왔다. 붉은 화산의 검기가 손목 잃은 적들의 목을 찢었다. 외인이 구사하는 완벽한 화산의 매화검법. 그리고...

'내 검과도 조금 비슷해.'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의 심중에 드는 것은 의문이나 경계심이 아닌 안도감이었다. 

잠시나마 유이설의 걱정했던 청명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유이설은 충분히 강했다. 그를 도울 수 있을 만큼.

어쩌면... 그를 지킬 만큼. 

두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홀로 도망치는 적을 뒤쫓았다. 이 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청명이 앞섰다. 

"쫓아야 해!"

"이걸 놓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이상해.' 

유이설은 부상을 입은 채 도망치는 마교도의 등 뒤를 추격하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마교는 힘으로, 그리고 많은 머릿수로 모든 것을 압도하고 파괴한다. 마교도들의 소동이 일어나면 본디 그들이 나타난 성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부터 들려온다. 그리고 맞닥뜨릴때는 이미 수십 수백의 시체들을 밟고 있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의 인원들끼리 은밀하게 사분오열한 사파세력들과 결탁하였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적은 인원들만?

유이설은 지금은 죽은 적융회주의 말을 떠올렸다.

- 점쟁이 계집의 건이라면...

무언가 알려지지 않고 달성해야 하는 목적이 있을 터였다. 게다가, 마교도들은 왜인지 시문령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막이 있던 거였지?

두사람은 추격 끝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적을 포위했다. 바로 죽여야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단전을 꿰뚫으니 그 성가신 재생력도 한참 느려져 목을 끊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었다. 

청명의 검병이 이미 숱한 부상을 입은 마교도의 목을 눌렀다. 입에서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정파에서 쓰기엔 방식이 잔혹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적융회, 개방의 어린 거지, 다 니네가 죽인거지? 어디들 숨어있는 거냐?"

마교도는 죽음을 예감하니 더욱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자신들만의 진언을 외울 뿐이다.

"우리는 예언을 찾아내고 예언의 시기를 앞당긴다."

"예언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수단이 되리니..."

"그놈의 예언 예언. 갑갑해 죽겠네."

청명이 여전히 그의 목을 누른 채 무게를 실어 짓누르자 그 마라같던 마교도의 입에서도 고통에 겨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비열한 비소 뿐이었다. 찢어진 입매 사이로 피에 붉게 젖은 흰 이가 드러났다.  

"이 목숨 하나로, 화산의 불신자 둘을..."

"?"

"물러서!"

유이설이 급히 청명에게 뛰어들었다. 제 온 몸의 무게까지 동원하여 청명의 어깨를 밀쳐 넘어뜨렸다. 

쿠웅.

엄청난 폭음을 끝으로 순간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불길한 정적이 한 몇 초간 이어졌을까, 곧이어 양쪽 고막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닥쳐왔다. 머리를 울리는 이명에 얼굴을 찌푸렸다. 

품 안의 무게감에 시선을 내려보니 유이설이었다. 청명은 급히 유이설을 살폈다. 무복 곳곳이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잠시 의식을 잃은 듯 했다. 숨소리가 옅고 불규칙한 것이 매우 불길했다.

"젠장... 야, 유이설!"

유이설을 흔들어 깨우려던 청명의 동공이 순간 떨리다가, 퍼뜩 주변을 경계했다. 다른 이들이 폭발이 일어난 소리를 들었을 터이다. 일단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특히 이 소리를 들은 자가 마인이라면 방금의 폭발음이 제 동료가 최후에 사용한 수단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터.  

청명은 일단 기감을 곤두세운 채 유이설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전에 없이 팽팽한 긴장감은 마치 관자놀이 사이를 잡아당기는 듯 했다. 일단 눈을 부릅 떴다. 

그러고보니 애초에 이런 폭발은 어떻게 일어난 거지? 청해에서는 보지 못했던 수작이었다. 

'화약...?'  

마교도들이 화약을 쓰다니, 그럴거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청명은 목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피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낭자한 피와 함께 마교도의 것이었을 살점들이 이리 저리 흩어져 있었다. 

인편(비늘 조각)처럼 잘게 쪼개져 흩뿌려진 살점들과 피가 땅을 스며든 형태를 보니, 놈의 몸 자체가 폭발한 모양이었다. 놈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어떻게 이딴...'

그나마 폭발에 쓸만한 동력이라면 아마 아까 깨진 단전에서 새던 기운 뿐일텐데, 상식적으로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발상이었다. 

사람 자체를 폭발 장치로 이용하다니. 마치 사람의 몸을 철저히 도구로 만든다는 그 발상 자체가 사람새끼에게 가능키나 한가? 청명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사실 그는, 아니 그를 비롯한 중원은 마교 것들이야 그저 사파의 일종일 뿐이라 여겨왔었다. 그러나 청해에서 느낀 바와 같이 이 놈들은 사파 것들과는 비교할 것들이 아니다.

'방심하다간 큰 코 다친다.'

청명은 지원을 해줄 이들이 있는지 기감을 펼쳐보았으나 이상하게도 반경의 모든 것들이 고요했다. 

'...?'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마교 것과 싸우느라 꽤 먼 거리를 이동했다 해도, 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던 개방도와 화산의 제자들의 기척이 전혀 없을리가...

'설마?'

어떤 생각이 스치자 청명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개방도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각자 다른 곳에서 적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곳까지 다다를 여유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어쩌면 장사의 외곽 숲이 모두 교전중일지 모를 일이었다. 기감을 촘촘하게 펼치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럴 여유는 없어.'

그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둘러메인 채 잠들어있는 유이설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는 땅을 박차 솟아났다.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는 편이 좋다.

'일단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더욱 깊이 들어갔다. 우거진 숲속, 그리고는 높이 솟은 절벽에 나 있는 동굴을 용케 찾아내었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내부 중 그나마 평평한 곳을 찾아 유이설을 눕혔다. 숨이 불규칙하고 몸에 흐르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명백한 내상이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입은 부상이 단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의식이 끊어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온 몸에 퍼져있는 다른 기혈들도 엉망으로 뒤틀려있었다. 그 충격파는 단순한 물리적 파동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청명이 답지않게 분주했다. 숨이 가빠왔다. 

"하여간 사람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듣고...!"

그러나 그 꾸중을 들어줄 자는 지금 내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청명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내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청명은 심호흡을 하고 유이설을 일으켜, 자신의 품속에 앉도록 했다. 힘없는 몸이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그는 자세를 고친 후 유이설의 단전에 손바닥을 얹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그 안쪽이 영영 차갑게 식을 것만 같아 초조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청명은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유이설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애써 숨을 골랐다. 

'추궁과혈.(推宮過穴)'

접촉을 통해 기운을 불어넣어 기혈을 바로잡고 내상을 치유하는 것. 사실 해본 적은 몇번 없었다. 내공 운용에 타고난 재능과 감각이 있는 그라도, 이런 부상에 하는 추궁과혈은 아주 작은 실수에도 큰일이 날 수 있는 요법이다. 익숙해질 만큼 하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다.

'해내야 한다.'

청명이 유이설의 배를 쓸었다. 그간 쌓아온 기운을 유이설에게 불어넣었다. 

❀  

"젠장...!"

화산의 제자들이 바삐 검을 놀렸다. 화산을 요주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마교도들은 몇몇 사파병력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습격해왔다. 그들은 갑작스레 깨진 평화에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화산을 유린하고자 달려들었다. 

"서쪽이다! 그 곳부터 막아야 해!"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청명. 

청명은 다른 제자들이 자신을 지키려 막아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 청명은 다수의 적들을 이끌고 화산 밖으로 향했다. 다른 제자들과 유이설은 침입자들을 홀로 감당하려는 그를 악착같이 뒤쫓았다. 아무리 청명이지만 저 양의 병력을 혼자 상대하는 것은 위험했다. 

"청명!"

이런 상황을 맞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여겼는데, 

아직은 부족한 모양이다. 

세상은 나약한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유이설의 검기가 꽃잎을 그리기도 전에 마인의 목을 꿰뚫었다. 그 틈에 짐승처럼 달려드는 마기가 그녀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그러나 끝내 숨통을 끊었다. 이번엔 검날을 돌리기도 전에 다른 방향에서 그녀의 목을 노려오는 조도를 검병으로 겨우 가로막았다. 

마기에 당한 오른 발목이 뼈째 타들어가듯이 고통스러웠지만 유이설은 연신 진각을 밟고 솟구쳐 마인들을 베어냈다. 어떤 마교도들의 피부는 베이고 나서도 유이설의 검에 달라붙어 그녀의 검을 무디게 만들었고, 어떤 적은 제 목숨과 맞바꿔 그녀의 손목을 넝마짝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유이설은 끈질기게 마교도들을 베었다. 닿을 듯 계속 멀어져만 가는 청명을 뒤쫓았다. 

그리고, 그러나, 이윽고.

유이설은 죽음을 맞고 있었다.  

한껏 끌어올려 두르던 공력, 온 몸을 지탱하던 근육의 마지막 한가닥까지 전부 다 하였다는 감각. 그리고 이 다음은 분명 죽음일 것이라는 당연한 예감.

"……." 

 안돼.

여기서 쓰러질 순 없다. 

죽어 축 늘어진 한심한 시신을 사형제들에게 보일 수 없었다.

유이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장문인의, 사형의, 사질들의 영원한 후회로 남는 것. 그리고 그들을 후회의 지옥으로 떠미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살아야 한다. 당장 청명의 곁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는 유이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흐려져 가는 그녀의 시야에는 등이 검게 물든 채 검을 휘두르는 청명이 있었다. 

그녀는 청명아, 라고도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저 마음으로만 한 것인지 입에서 난 소리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처절한 속삭임이었다. 

이내 냉정한 어둠이 시야를 서서히 까맣게 물들어갔다. 

"……." 

이런 감각을 예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  

"...청명."

"유이설."

"청명, 청명아..."

"정신 차려."

청명은 유이설을 뒤로 안은 채 그녀의 뒤틀린 기혈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바로 잡았다. 뭉친 기운은 풀어 흐르게 하고, 충격에 손상된 곳도 내력이 돌아 복구가 되도록 도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의 턱에 맺혔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해야 몸의 회복과 치유를 돕는 것. 의식을 차리는 것은 순전히 유이설 스스로가 해내야 하는 일이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추궁과혈을 통해 그녀를 치료하던 도중, 갑작스레 그녀의 몸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연신 청명의 이름을 부르더니, 온 몸의 핏줄이 피부 아래 드러날 정도로 불거지고 맥이 혼란할 정도로 불규칙하게 뛰는 것이다. 이는 주화입마의 전조였다. 청명은 여기서 그녀가 잘못되면 빠지게 될 후회의 수렁이 두려웠다. 

청명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유이설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녀의 손을 감싸 잡고 다시 진기를 불어넣었다. 

"청..."

"그래, 나 여기 있어."

"……."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유이설은 이젠 숨을 고르는 것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나약한 들숨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이내 그녀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치는 청명의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유이설, 제발..."

내가 널 부르고 있어. 

그만 찾고 돌아와.

난 여기 있으니까, 

제발...

청명이 고개를 숙여 유이설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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