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00제

우리 친구지?

글러 100제 1번째

팔레트 by 알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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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자기 모습을 감추며 하늘을 반짝이는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간, 리아트는 홀로 교실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밝은 회색 머리는 노을빛에 하늘처럼 주황색으로 빛났고 붉은색의 눈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점점 커지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리아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학생들이 언제나 벌레 같다고 놀리던 검은 머리카락과 은은하게 빛나는 남보라색 눈이었다. 질려버릴 정도로 항상 보던 눈, 리아트는 그런 눈이 무척이나 좋았지만 동시에 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반짝였지만 끝은 언제나 공허한 어둠만이 남아있었다.

“혼자서 뭐해? 집에 가자.”

레이고는 그런 리아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늘고 새하얀 손이 그의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에 겹치며 그의 손을 가득 채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그리고 시원한 바람, 싸늘한 가을 공기가 가득 채운 공간과 대조되는 따뜻한 체온, 리아트는 항상 겪어왔던 체온이 익숙했지만, 이 익숙함의 끝은 그에게 허망함만을 줄 것을 알기에 그녀의 손을 피했다. 하지만 레이고는 이러한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그의 손을 양손으로 다시 잡으며 말했다.

“왜 피하고 그래. 서운하게…”

“네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부담스럽다고.”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리아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그녀에게 날카로운 거짓말을 뱉어냈다. 하지만 레이고는 그러한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즐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둘의 사이는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기에 리아트는 자기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리지는 않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심장은 원래 뛰는 것이고 얼마나 가깝게 있던지 상대에게 들리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하던 그였지만,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가 레이고였기 때문에 이러는 건지 그의 머릿속은 헛소리에 가까운 맥락 없는 소리로 가득 찼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레이고는 계속하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리아트는 고개를 돌린 채 계속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리아트의 얼굴은 노을빛만 없었더라면 지나가던 새도 알아차릴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더는 안되겠다는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리아트는 레이고를 밀어냈다.

“보통 이러지는 않아. 네가 이상한 거야.”

“그래? 하지만 너도 좋았잖아? 이제야 밀어내고. 역시, 리아트는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리아트의 날카롭고 신경질 적인 반응에도 레이고는 마냥 즐거운지 꺄르르 웃으며 리아트를 바라봤다. 레이고는 리아트가 그녀에게 뭐라 하던지 웃으며 넘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의 곁으로 왔다. 언제나 같은 상황과 같은 결말, 리아트는 이런 상황에 한숨을 내쉬고선 열려있는 창문을 닫았다.

모든 창문을 닫고 잠근 뒤 리아트는 레이고를 지나 반 밖으로 나갔다. 레이고는 언제나처럼 그의 뒤를 따라 나갔고 리아트는 그녀가 다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았다.

시간이 늦은 만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리아트와 레이고의 발소리 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계속해서 울리는 발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느껴지는 정적 속에 레이고의 휴대폰으로부터 짧은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람 소리가 들린 순간 레이고는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확인하더니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살짝 감긴 눈, 아까보다 힘이 빠진 걸음걸이에 리아트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였어?”

“뭐가?”

리아트의 물음에도 레이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리아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아트는 표정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레이는 이런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크게 뜨더니 그를 이리저리 피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뭐였길래 네가 그런 힘없는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서 직접 보려고.”

리아트는 계속해서 휴대폰을 가져가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뻗었고 레이고는 계속 피하더니 이제는 그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리아트도 오기가 생겼는지 그녀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건물 밖을 빠져나갈 때까지 둘은 계속해서 달렸다.

“그거 보여주면 죽냐고!! 그냥 보여 달라고!!”

“아, 진짜 성가시네! 그냥 내가 보여줄 테니까 그만 따라와…!!”

“진짜지? 나 멈춘다?”

레이고의 외침에 리아트는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자리에 멈춰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고에게 점점 다가가며 핸드폰을 보여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레이고는 리아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대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믿냐, 바보 자식아!!”

“야!!! 미쳤나 봐!!! 야!!! 레이!!!”

레이고는 계속해서 달렸고 리아트도 뒤늦게나마 다시 달리며 그녀를 쫓았지만, 그가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버스에 올라타며 상황은 끝났다. 리아트는 이런 상황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지칠 대로 지쳐 버스정류장 의자에 주저앉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레이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은 언제나 같았고 변함이 없었다.

그날 밤 리아트는 집에서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대폰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방안을 가득 채웠으며 여러 악기 사이에서 돋보이는 목소리는 그의 귀에 꽂혔다. 그 순간 노랫소리가 끊기더니 짧은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아트는 집중이 깨져 짜증 났지만, 알람을 보낸 대상을 보더니 짜증이라는 감정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우리 친구지?

메시지를 보낸 이는 레이고 의도를 알 수 없는 문자에 리아트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카로운 거짓을 전송했다.

그럴 리가. 그냥 네가 일방적으로 따라오는 것뿐이야.

그 뒤로 리아트는 답장을 기다렸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고 리아트는 이러한 자기 모습이 꼴사나워져 모든 불을 끈 채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둘 사이 마지막 연락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며 생긴 주황빛이 새하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하얀색으로만 가득 찼던 병실 안은 주황색으로 가득 찼고 새하얀 소녀의 머리카락도 주황색으로 가득 물들었다.

레이고가 리아트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던 날, 그날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리아트를 볼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병으로 학교에 나가는 것도 힘든 일이 되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헛소문 때문에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그녀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겨졌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걸까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겼다. 현재 상황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빠르게 바뀌는 상황만큼 레이고의 마음도 썩어들어갔다. 제대로 된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레이는 멍하니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날처럼 선명한 주황빛 하늘은 그날과 달랐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말소리도 서늘한 바람 소리도. 지금 들리는 타자 소리도 그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일 뿐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차가운 공기만이 맴도는 병실 안, 레이고는 자신의 양손을 맞댄 채 붙잡았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백한 색을 가진, 손톱이 다 망가져 피와 멍으로 얼룩덜룩해진, 가늘다 못해 뼈의 형태가 완전히 보이는, 세상에 온갖 기분 나쁜 수식어는 가져다 붙인 것 같은 손이 레이고의 시선에 들어왔다.

“우리 친구지…? 친구… 친구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레이고는 리아트에게 보낸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렸다. 친구라는 단어에 이질감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레이고는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다른 말을 전해야 했다며 후회하였다.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것에 대한 사과라던가, 자신과 어울려줬단 것에 대한 감사 인사라던가. 부담스러운 질문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니 허탈감에 레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레이고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계속해서 같은 문장을 중얼거리고 웃었다. 친구라는 단어가 뭐가 그리 중요했는지, 망상과 헛된 기대뿐인 관계에서 무엇을 착각하고 바랬던 것인지, 레이고는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싫다고 귀찮다고 항상 말하던 그였는데 왜 자기 친구라고 생각했는지 레이고는 자신의 어리석은 자만심과 바보 같은 순수함을 원망하였다.

“친구… 친구라…”

다 쉬어버리고 너덜너덜해진 목소리는 익숙한 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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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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