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ham_Springfield

귀향

스프링필드로 향하는 여행

comu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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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스프링필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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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바깥의 풍경은 한없이 고요했고 새파랬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고 푸른 대지 위를 덮는 새하얀 눈은 내리쬐는 햇빛을 이리저리 반사해 그 어디에도 없을 보석처럼 빛났다. 스프링필드 대목장이 자리한 땅의 겨울은 항상 이런 풍경이었다. 춥지만 너무 춥지도 않은, 하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쉽지 않은 곳.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서로 힘을 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그레이엄 스프링필드는 나고 자랐다. 유난히도 고향 땅으로 가는 기차가 빠르게 느껴졌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레이엄은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3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 땅이 반갑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어린 아이처럼 기대가 되냐고 물으면 그 또한 아니었다. 이전처럼 자신이 있을 자리가 부재함에 상처를 받는 어리숙한 망아지 티는 벗었다. 그렇다고 고향 땅에 가는 길이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념에 잡혀 있을 때 툭툭 케이지 속에서 앞발을 빼내어 열심히 테이블을 두드리는 검은 앞발을 보며 그레이엄은 실소를 흘렸다.

“조금만 참아, 콜. 이제 다 왔으니까.”

담요를 덮어놓아 케이지 안은 온통 새까맸는데 노란색의 두 보석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미 잃은 것을 발견한 지 3년, 어설픈 책임감으로 주워온 것이었는데 어느새 귀향길마저 함께 하는 가족이 되었다.

"네가 우유만 잘 먹었어도 스프링필드의 우유를 맛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쉽네."

그레이엄은 익숙하게 고양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철창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어릴 때는 풀만 흔들어주어도 잘 가지고 놀았는데 나이를 좀 먹더니 결국 끝내 찾는 것은 제 손이었다. 익숙한 것만 자꾸 찾는 걸까, 연중무휴 매일 같이 물어뜯느라 손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상처가 남았지만 그레이엄은 개의치 않고서 매번 제 손을 내어주었다. 몇 번인가 버릇을 고쳐보려고 시도는 했지만 그때마다 처량하게 저를 바라보는 노란 빛의 두 눈 때문에 모질게 굴 수 없던지라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래도 참 다행인 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애교떨고 재롱부리느라 손가락을 탐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제 손을 세 번은 더 깨물었지.

“여하간… 취향도 참 까다로워.”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점인 스프링필드 목장. 스프링필드 목장입니다. 내리시는 물건은 없으신지…

3년만에 밟는 고향 땅은 의외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길다면 길지만 강산이 바뀔 정도의 긴 시간은 아니란 뜻일까. 역에서 내린 뒤 그레이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시계를 한 번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새파란 하늘에 해가 떠 있었는데 어느샌가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붉은 빛으로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질 판이다. 심지어 집은 목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탓에 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을 더 움직여야 한다.

“부지런히 가야겠네.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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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대지를 차고 달리는 소리가 밤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내뱉는 숨이 모두 새하얗게 연기로 피어올라 하늘 위로 맺히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귓불을 때리고 지나갔다. 좀 더 옷을 두껍게 입고 올 것을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스쳤다. 귀향길은 처음이라 무얼 챙겨가야할지 몰라 대부분 버리고 왔는데 옷가지는 챙길 것을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던 와중에 눈가루가 흩날리며 뺨에 닿자 그레이엄은 놀라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이 부는 탓에 나뭇가지 위에 걸려있던 눈들이 중심을 잃고 내려와 달빛에 반짝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람에 나부끼는 눈가루인데 어째 그리도 예뻐 보였는지. 어디서 시작되었건 그것이 눈이라면, 그것이 흩날리기만 한다면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스무살의 겨울날, 그레이엄은 고향 땅에서 낯선 깨달음을 얻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계절 속에 의미 없이 올려다본 하늘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으로 가득했다. 눈들이 빛나던 것은 커다란 달이 아니라 저 작디작은 알갱이와도 같은 것이 쏘아내는 별빛을 산란하며 마치 수정이 내리는 듯했다. 아마도 꽁꽁 여민 품속에서 저를 재촉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레이엄은 달이 지고 해가 뜰 때까지 그 자리에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발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조금 더 힘내어서 달렸을까 어느샌가 눈에 노란색의 따스한 불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붕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곳. 누가 혼나는 일이 있으면 일가족 전체가 알 수 밖에 없는 곳. 내 것이라고는 없지만 우리의 것은 있는 곳. 한없이 얄밉고 서운하지만 그래도 온기가 넘치는 곳. 집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제 친누이였다.

“어, 레이? 레이야?”

그레이엄은 이전과 같은 옅은 웃음이 아니라 당찬 웃음으로 제 누이를 반겼다.

“응.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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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크게 바뀐 것이 없다 생각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바뀌는 모양이다. 집이 한 채가 더 늘었고 칠도 새로 했다. 내부 인테리어도 조금 바꾸었나? 현관 안 쪽부터 시작하여 이전보다 좀 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티가 났다. 자신이 없던 곳에서 무언가 변화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세계가 온전히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게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레이엄은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현관에 서서는 품속에서 제 팔뚝보다 조금 작은 검은 고양이를 꺼내어 누이에게 맡겼다.

“엑, 이건 뭐야? 가서 고양이를 주워온 거야?”

“어지러울까봐 케이지 안에 못 둬서 추워할 거야. 목욕 좀 시켜줘. 엘리 누나.”

“왜 네가 안 하고! 일단 날도 추운데 빨리 들어오기나 해.”

“으응, 베일리만 보고. 어머니는?”

갑자기 떠맡겨진 귀찮은 일에 엘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나 더 어이가 없던 것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낮던 그레이엄을 어느새 올려다보아야 했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그레이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시켰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집에서 빌빌대며 소심하게 쭈그려 있던 애가 어느새 누나에게 잔심부름도 시킬 정도로 성장한 것을 축하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너 갈 곳에. 너 온다고 한 번 더 정리하러 가셨어.”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다시 이능력으로 말을 꺼내었다. 집까지 달려올 때는 그렇게 세차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멎었고 말발굽 소리마저 주변에 쌓여서 산을 이룬 눈더미가 먹어 치웠다. 쏟아지는 별빛이 소리를 내어준다면 이토록 고요하지 않을 텐데 세계는 한없이 조용했다. 마치 세계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저 스스로 입을 다문 느낌에 그는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곧장 유포니엄으로 떠나야 했기에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만들어질 당시에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점차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3년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다가갈 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흔들리는 시야에 타고 있던 말에 거의 몸을 기대듯이 움직였다.

“왔니?”

그냥 입김이라기에는 달큰한 블루베리향이 공중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레이나 스프링필드가, 그러니까 그의 모친이 그를 반겼다. 두 사람의 말이 누운 자리에서. 3년 전,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를 제 손으로 직접 땅을 파고 묻고 나서 묘비를 세우는 일을 어떻게 잊을까. 베일리가 떠난 지도 벌서 3년이 지난 것이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 것이고 그 어느 순간에서라도 그리워하며 살아가겠지. 그레이엄이 무릎을 꿇고 얼음보다도 더 차가운 묘비를 쓸었다. 습관적 외톨이의 말. 레이나의 말로 태어났지만 떠날 때는 그레이엄의 말로 떠난 아이였기에 그리 적혔다. 항상 홀로 있던 아이를 달래주던 듬직한 가족. 아이는 이제 더 이상 그때처럼 눈물을 흘리며 배에 달라붙기에는 훌쩍 크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면 베일리는 어떻게 생각해줄까. 대견하다고 느껴줄지, 인제야 속 썩이는 어린애가 사라졌다고 속 시원해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온기를 느낄정도로 가깝지는 않지만 마음이 느껴지기에는 충분한 거리에서 묘비 앞에서 두 사람은 그런 말 없는 대화를 쭉 이어갔다. 별의 아이는 드디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3년이 지나서야 받아들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의 모친의 말만 없었더라면.

“그런데, 그레이엄 스프링필드, 너 어디에 있던 말을 타고 온 거니?”

그의 별빛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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