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근데 어제 BL소설 읽고 잤는데 공 남동생 이름이 켄이치더라
심지어 와중에 켄치이로 오타 나 있었음
팬픽을 보면 그런 장면 흔하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어느 날, 집 앞에 쓰러져 있던가 갈 곳 없이 오도카니 앉아 비를 맞고 있는 잘생긴 남자를 줍게 된다던가. 우산을 씌워 주면서, 왜 이런 곳에서 비를 맞고 계세요 하고 말을 건네며 시작되는 로맨스라던가. 여러 번 P지부에서 (뭐 또는 상업작에서도) 읽었지만 직접 겪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본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일단 운명같은 만남이 이루어지긴 좀, 무드가 없지. 강의가 끝나고 남은 시간동안 아르바이트 하다가, 이번 달 들어온 월급으로는 어떤 만화책을 사면 좋을까 신나서 걷고 있던 찰나였던 말이다. 당연히 비도 안 오고 있었다, 참고로.
“…아, 치이. 찾았다.”
“네, 네? 네?”
그래, 그런 오후.
나는 즐겨 보던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에게, 자취방 앞에서 덥석 손목을 붙들린 채로 잡혀 있었다.
저 그런 사람 아닌데요
좋아하던 만화 속 캐릭터가, 현실로 튀어 나왔어.
그렇게 말하면 믿어 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황 자체가 제정신 아니게 비현실적이다. 나는 멍하니 머그컵에 오렌지주스를 따르다 말고, 내 침대를 뻔뻔히 차지하고 앉아 아이폰 스크롤을 태연자약하게 내리고 있는 켄마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리고, 다시 봐도 믿기지 않아서 넋 놓고 보다 말고 주스를 쏟았다. 입고 있는 새까만 후드티 아래 빨간 네코마 체육복 바지. 아몬드 모양으로 가늘어진 탁한 노란색 눈동자와 새초롬한 고양이를 닮은 눈매. 애매하게 염색을 하지 않아 금발과 흑발이 공존하는 머리카락이 목덜미 아래에서 살랑거린다. 자, 생각해 보자. 오타쿠라고는 하지만 별로 같은 오타쿠 동지 신세의 친구도 그다지 없는 나에게, 난데없이 코즈메 켄마 코스프레를 해서(또는 의뢰해서) 나에게 찾아올 만한 뜬금없는 장난을 칠 만한 사람? 없다. 그런데 그 와중에 목소리까지 완벽히 Cv. 카지 유우키로 커스텀 되어 있다면? 두 배로 글렀군. 꿈을 꾸고 있다고 하는 쪽이 조금 더 나을 것 같았다. 와중에 켄마는, 내가 침대 머리맡에 꽂아둔 하이큐 단행본을 이것저것 뽑아 기웃거리며 펼쳐 보고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중얼댄다.
“치요……그런 이름이었지, 여기선.”
이름은 또 언제 찾아서 읽은 거야. 방에 들여다 놓자 마자 빠르게 눈을 굴려 방 안을 죄 스캔하는 듯 싶더만은. 원작에서도 두뇌 패러미터 5였지, 등골이 다 서늘하네. 이번에는 내가 오렌지 주스 쏟은 것을 치우고 있는 꼴을 보더니 돕지는 않고 앉아서, 그렇게 비난한다.
“여전하네, 덜렁거리는 건.”
“그…….”
미안한데, 우리 언제 봤다고!? 하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우리 집 (정확하게는 자취방 빌라) 1층에 쪼그려 앉아서 인터넷 없어도 되는 미니게임 따위를 아이폰으로 하다가 말고, 내가 오자마자 귀신같이 손목을 덥석 붙잡은 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찾았다, 치이. 찾느라 고생깨나 했는데……무사히 만나서 다행이네. 그때도 똑같이 되물었다. 저기, 실례지만 우리 아는 사이……?
‘나, 몰라?’
아무렴, 알지요. 알기야 알지. 2010년대를 휩쓴 스포츠 물 소년만화 하이큐─!! 의 라이벌, 네코마 고교의 2학년생 세터……인 동시에 그 뭐냐, 네코마의 뇌이자 심장이자 척추? (근데 이제 그 말 면전에서 들으면 질색하는.) 원작 모에화는 삼색 고양이. 좋아하는 건 애플 파이. 원작 공인 두뇌 패러미터 5지만 체력이 약했었지. 그렇지만 그 뭐냐, 내가 알고 있는 네가 그 인물이 맞다면 내 눈 앞에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차원을 뚫었다고?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이거, 꿈이나 영화의 영역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적어도 백 번 양보해서 이런 만화나 팬픽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치자! 그럼 너는 왜 나를 알고 있는 건데!! 너는 나를 몰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됐네.’
새초롬한 어조로 중얼댄 켄마는 당당하게 앞장서라는 듯 턱짓했고, 나는 의아해할 의욕도 푸쉬쉬 잃어버려 터덜터덜 일단 자취방 안으로 그 비현실적인 인물, 만화 캐릭터를 들였다. 정말로 만화 속에서 튀어나왔다면 어차피 갈 곳도 없겠지. 그리고 어떻게 들여서 이야기를 듣건 말건 해야 사태를 해결하건 파악하건 할 거 아니야. 빌라 1층에서 멀뚱히 이상한 소리만 고함 지르듯 나눠대는 게 아니라.
“치이는 여기서도 바보네.”
이윽고, 홀로 잠깐 싱긋 웃으며 눈을 휜 (어라, 무섭다. 진짜 진지하게 무서웠다. 뭐였지, 방금?) 켄마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숨 섞어서, 약간은 피곤하다는 어조로. 혼잣말처럼.
“이쪽은 이 세계까지 와서도 나름대로 길 안 잃고, 찾아왔는데……누구랑 다르게.”
“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하아아, 그런 클리셰인가…….”
저기, 미안한데. 클리셰 운운해야 할 입장은 이쪽이거든. 대체 네가 왜 그런 말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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