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마법사, 전장에 서다 - 4. 프레나이트와 플루오라이트
그날, 프레나이트가 잊을 수 없는 날은 장맛비가 오는 날이었다.
프레나이트는 비공정 도서관이 주차된 곳에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하프 엘프 소녀를 발견했다. 프레나이트는 소녀를 다독여 보았다.
“왜 이런 곳에서 비 맞고 있나? 감기 걸리게.”
그러나 소녀는 울면서 자신이 온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일단 비가 오니 안에서 씻고, 비 안 오면 가라.”
“……알겠어요.”
프레나이트는 소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비공정 맨 밑 측면 샤워실에서 씻게 하고, 수건을 주어 물기를 닦게 했다. 소녀는 조금 보송해진 채 프레나이트가 준 담요를 덮었다.
“이쯤 해줬으면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어쩌다가 이곳에 왔지?”
그러자 소녀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플루오라이트 에리카에요. 열다섯 살이고요.”
“그래서. 그 다음엔?”
“교통사고 때문에 부모님을 잃어 떠돌며 살고 있었어요. 용돈도 다 떨어져 지하철 객실에서 사람들한테 구걸해 돈을 얻었는데, 애초부터 돈이 적어서 다 써버리고, 내일에는 지하철에 다시 탈 돈조차 없어 울고 있었어요.”
프레나이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래. 고생 많았다. 저쪽에 손님용 방이 있으니 묵도록 해라.”
소녀를 재워두고 프레나이트는 고민했다. 저 아이를 계속 여기서 재워줄 건지, 재워준다면 자신이 공부를 가르쳐야 할지, 아마 소녀의 부모 중 하나인 엘프는 왜 말살당했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기타 등등을 생각했다. 이대로 플로우라이트를 놓고 가면 그는 정말로 굶어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플루오라이트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플루오라이트는 벽난로 앞에서 따뜻한 온기를 받아들이며 잤고, 프레나이트는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다.
프레나이트는 전날 밤 고민해 두었던 것을 플루오라이트에게 통보했다.
“이제 앞으로 네 숙식은 내가 해결해 주마. 네가 할 일의 매뉴얼을 만들 테니 다 읽었으면 말해라.”
“네, 알겠어요.”
그리고 오후, 플루오라이트에게 매뉴얼이 전달되었다. 매뉴얼에는 이용자들이 마실 차는 어떻게 대접하고, 이용자가 책을 빌리려 할 때 바코드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등등. 이용자가 읽고 북 트럭에 가져다 두거나 가져다 두지 않은 책들을 제자리에 두는 것은 자신의 마법으로 가능한 일인데, 그건 플루오라이트가 앞에서 말했던 것들을 숙지하면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못하면 자기가 하면 되니까.
오전에 프레나이트는 열심히 청소하고, 플루오라이트는 간식을 먹으며 매뉴얼을 읽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온풍기 (주의: 앉지 마시오) 위여서 프레나이트는 야단을 쳤다. 간식도 폐기 처분하고, 간식은 도서실 말고 맨 위층, 갑판 바로 밑에서 먹으라고 했다. 플루오라이트는 입이 댓 발 나왔지만, 순순히 따랐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에게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이 도서관은 유사시 전투를 생각하고 만들어졌는데, 이런 곳에서 아이를 보호해도 되냐는 불안감, 엘프족의 멸망 이유를 모르는 듯한 플루오라이트에게 그런 걸 알리는 건 괜한 참견이 아닌가 하는 걱정, 인간처럼 자란 하프 엘프는 인간인가 엘프인가 등등.
프레나이트는 오늘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어제는 도서관 휴관일이었고, 본격적으로 도서관이 바쁜 날은 휴관일의 다음 날이었다. 그런데 비공정 중간층으로 가는 프레나이트를 플루오라이트가 붙잡았다.
“프레나이트 선생님. 이제 저도 일할 수 있어요!”
“매뉴얼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이용객 접대는 실수하면 돌이킬 수도 없다고.”
“매뉴얼 열 번 읽고 선생님이 일하는 것도 봤어요.”
“너는 하프 엘프라 귀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안 돼.”
“사람들은 그냥 제가 귀가 큰 편이라 생각하던데요?”
“하프 엘프를 못 본 사람이나 그렇겠지. 이용객 중에 아는 사람이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머리카락으로 귀 가라면서 할게요. 그럼, 상관없죠?”
“내가 졌다 졌어…”
플루오라이트는 손님맞이를 무탈하게 잘 해냈고, 그때 십진분류법을 익혀 프레나이트를 속으로 감탄하게 했다.
프레나이트는 직접 연구한 정리 마법을 부렸다. 그러자 엉뚱한 곳에 꽂혀있던 책들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관내 분실된 책에는 답이 없어 프레나이트가 직접 단골손님들의 아지트(!)에 박혀있던 책을 구출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아지트를 발견했다. 입가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붙어있는 게 정말 가관이었다.
“일하기 전에 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나 좀 떼어라.”
“쳇, 먹을 때 붙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오후. 플루오라이트는 이용객들에게 자기 과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프레나이트는 어이가 없어져서 플루올라이트가 하는 짓을 구경했다. 하지만 손님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과자는 뭐냐? 어디서 구웠나?”
“주방에 박력분이랑 버터, 설탕, 꿀 등등이 있길래 만들어봤어요.”
플루오라이트는 깜찍하고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꿀 쿠키를 프레나이트에게 내밀었다. 프레나이트는 차가운 표정으로 쿠키를 먹었다. 그러나 감탄사가 나오며 얼굴이 저절로 펴졌다. 프레나이트는 결국 도서관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은 책을 훼손하지 않고 냄새가 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하다고 규칙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프레나이트는 제한구역 서고에 있었다. 금서, 혹은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프레나이트는 전자의 이유로 이 서가의 문을 열었다.
「엘프, 그들은 누구인가?」, 「엘프의 생애」, 「엘프의 사상」, 「그들은 왜 환경운동가가 되었나?」, 「엘프족의 멸망」, 「떠나간 그들을 위해」
위의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장서들의 존재 이유는 이 책들이 움직이는 도서관에 승선하게 된 이유와 같다. 엘프는 이 더워지는 지구에서 더 이상의 환경 파괴를 멈추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10년 전 완전히 멸종한 존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몰살하는 데에는 정부의 용병과 석유회사의 자금이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아는 전부였다. 그것도 도서관장이 되자 그 권한으로 금서를 읽어 겨우 알게 된 진실이었다.
하지만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자신이 죽으면 이 방에 걸린 출입 금지 마법과 보존 마법은 풀릴 것이다. 프레나이트가 밖에 나가서 함부로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라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좋을 텐데, 단지 그 때문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이 책들은 썩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불태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프레나이트는 행동하는 정의가 될 수 없었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에게, 이 막중한 역할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젊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늙고 죽지 않을까. 그 아이를 후계자로 양성해 두면 마음이 편할 듯했다. 프레나이트는 푹 자고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를 휴관일 틈틈이 가르쳤다. 도서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플루오라이트를 위한 일이었다. 프레나이트는 대학생 시절에 과외로 학비를 충당한 적이 있다며 자랑했다. 과연 가르치는 실력 하나는 좋아, 플루오라이트는 실력이 쭉쭉 자라 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학업 능력이 향상되었다.
프레나이트로서는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플루오라이트를 대학에 보내자니 플루오라이트의 목숨이 위험했고, 그렇다고 안 보내자니 플루오라이트의 두뇌가 아까웠다. 왜 엘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이렇게 숨어 살아야만 하는가.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플루오라이트 같은 엘프의 후예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플루오라이트는 도서관 안의 제 아지트 안에서 책을 읽다가 프레나이트에게 또 걸렸다. 온풍기 위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번에 하지 말라고 한 짓을 또 하나?”
그러자 플루오라이트는 뻔뻔하게 말했다.
“제가 이럴 때마다 선생님이 관심을 기울여 주니까요. 그렇지만 그걸로는 부족했어요.”
“내가 그렇게 부족했니…”
마치 구 남자친구 같은 말을 한 순간, 비공정에 비상사태 감지 사이렌이 울려다. 이 사이렌이 울리면 이용객들은 저절로 도서관의 밖으로 내보내진다. 그런데 플루오라이트는 나가지지 않아, 프레나이트는 둘이 함께 몇 주간을 같이 지냈으므로 단순한 손님으로 판별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비무장인 플루오라이트가 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
“플루오라이트, 네 아지트에 숨어있어라!”
프레나이트의 비장한 표정 때문인지 플루오라이트는 순순히 아지트에 숨었다.
프레나이트는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적은 열 명쯤. 옷차림을 보니 정부의 용병인 바그너 군단인 것 같았다. 바그너 군단은 엘프를 집단 학살한 주범으로 마법사계에서 지목되는 자였다. 프레나이트는 문을 부수고 들어온 바그너 군단들을 마법으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먼저 거리를 벌리고 ‘불의 구체’ 마법을 써서 군단 모두가 화상을 입게 했다. 쫓아오는 군인들은 드라이아이스 얼음으로 가두고, 산소 부족으로 죽게 했다.
괴한들을 순식간에 진압하고 도서관 밖에 버리고 온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높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우와! 방금 불 마법이랑 얼음 마법이었어요? 저 사람은 선생님을 왜 없애려고 했어요?”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그 사람들은 도서관의 책이 탐나서 왔지.”
둘 중의 하나는 진짜,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플루오라이트의 눈이 불길하게 반짝였다.
“그러면 저한테도 마법 가르쳐주세요!”
프레나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을 배운다는 건, 언젠가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괜찮나?”
“네! 완전 괜찮아요! 너무 괜찮아요!”
프레나이트는 저 녀석이 내 말의 반의반만이라도 알아듣긴 한 걸까 하고 의심스러워했다.
다른 잔당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비공정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프레나이트는 핸들을 돌리고 레버로 움직이며 비공정을 운전하고 있었다.
“이거, 비공정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작고 신기하게 느껴져요!”
“이건 시뮬레이션 마법으로 연습할 수 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면허를 딸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네!”
비공정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상공에 멈추었다. 밖은 구름의 밭처럼 보였다.
“같이 갑판으로 올라가자.”
“왜요?”
“거기다가 연습용 나무 인형을 설치할 거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비공정 위.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를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러고는 나무 인형을 조금 멀리 설치했다. 그가 은으로 되어 보석 프레나이트가 세공된 지팡이를 뻗자, 구체의 불이 지팡이 끝에 나타났다. 그것을 나무 인형에 던지자, 나무 인형이 불타올랐다.
“...!”
플루오라이트는 깜짝 놀라서 프레나이트를 껴안았다. 프레나이트가 냉정하게 떼어내고 나서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에게 마법의 위치 설정과 수식의 풀이를 가르쳤다. 프레나이트는 다른 마법도 알려주었다. ‘마탄’이었다.
“이쪽이 좀 더 쉬울 거다.”
“좋아요. 언제나 적을 놓치지 말지어다, 마탄이여!”
플루오라이트는 한 번에 성공해서 프레나이트를 놀라게 했다. 플루오라이트는 펄쩍펄쩍 뛰며 몹시 기뻐했다.
프레나이트는 잘 시간이 되어 플루오라이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다. 그리고 날아가는 비공정 갑판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혈통에 의해 물려받는 것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조상 쪽이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마법과 친한 종족인 엘프의 혼혈이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처음 해보는 마법을 잘할 수는 없었다. 양친이 아니라 조상이 의심스러운 이유도, 플루오라이트의 양친이 강한 마법사였다면 그렇게 쉽사리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이 아이의 친부모는 따로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워낙 어릴 때 죽어서 자신의 친부모가 따로 있었던 줄도 모른다든지.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계속 공격 마법을 익히게 해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원수와의 결투를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나이트는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플루오라이트는 홍차를 끓여 이용객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오늘의 이용객들도 친절하고 상냥했다.
이용객들이 플루오라이트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 전까진.
프레나이트는 섣부르게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괴한을 차갑게 보았다.
“너희는, 저번의 녀석들과 같은 놈들이지? 엘프 학살에 미쳐서 인간의 피도 섞인 하프 엘프까지 살해하는 꼴이 딱 그쪽인데? 그 아이의 부모를 죽인 것도 네 녀석들이지?”
“만약 그렇다면?”
프레나이트가 소리쳤다.
“죽여버리겠어!”
“…… .”
플루오라이트는 아직 말이 없었다. 대신 자기 자신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고는 괴한의 손에서 칼을 낚아채었다. 단숨에 이동한 그는 원소계 공격 마법을 발사하여 ‘이용객’들을 쓰러뜨렸다. 프레나이트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지속 치유 마법을 걸 때 안정적인 체력을 확보했고, 방어 마법으로 플루오라이트를 엄호했다. 플루오라이트가 고드름 화살 마법으로 아직 살아있는 잔당을 공격해 심장을 꿰뚫게 하자 전투가 끝이 났다.
“…… .”
플루오라이트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제 방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고는 늦게 달려온 프레나이트에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저한테 모든 걸 숨겼어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네가 그 진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존재라고 생각해서 보호해 주고 싶었다.”
플루오라이트는 더욱 분노하며 말했다.
“그건 과잉보호예요! 과잉보호해서 절 못 자라게 하는 거죠!”
프레나이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진실을 알리지 못해 미안하다. 나는 너를 양녀나 다름없이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래.”
그러나 플루오라이트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저리 가요!”
“…그래. 좋은 밤 되거라.”
프레나이트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괴한 습격 사건 이후 두 사람은 어색하게 지냈다. 플루오라이트는 도서관 일을 할 때 쓰는 마법을 배우고, 여지없이 단 한 번에 성공했다. 두 사람 다 사적인 말이 없었지만, 비슷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음은 똑같았다.
‘우리 엄마나 아빠가 엘프였다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마법을 잘하는 걸까?’
‘플루오라이트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렇게 강력한 마법사라 그 혈통을 부여받은 걸까?’
두 사람은 일주일간의 냉전 체제를 끝내고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플루오라이트의 양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플루오라이트의 말대로라면 경찰들은 조사했으나 미제 사건이라고 했다. 프레나이트는 자신도 마법사라고 밝히며 수사를 하고 싶다고 했으나 형사들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프레나이트와 플루오라이트는 저러고도 저 사람들이 민중의 지팡이냐고 화를 냈다. 마침내 사건 현장으로 두 사람은 들어섰다.
“플루오라이트. 양친의 종족이 무엇이었나?”
프레나이트가 플루오라이트에게 물었다.
“두 분 다 인간이셨어요.”
프레나이트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두 분의 네 친부모가 아니라던가.”
플루오라이트는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확실히, 두 분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었어요. 그 때문에 저는 귀가 좀 긴 편인 인간으로 알고 자랐고요.”
사건 현장을 수색하던 프레나이트는 시신을 발견했다. 죽은 지 오래되어 백골 상태였다. 프레나이트는, 이 백골에 ‘사물의 기억’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시신에 있었던 일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한 여성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수석에서는 남성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뒷자리에서는 어린 플루오라이트가 잠들어 있었다. 한 여성은 갑자기 역주행하는 트럭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서 핸들을 틀었다. 그러자 가드레일에 차가 처박혔다.
여성과 남성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남성이 있는 힘을 쥐어짜 아이를 밖에 내놓았다. 그가 아이를 내놓는 순간, 트럭이 한 번 더 차에 부딪혔다.
그러고는 시야의 암전.
플루오라이트는 영상으로 양친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기 시작하다, 두 사람의 최후를 보고서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괜찮나? 네가 보기에는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못했다.”
“…괜찮아요… 저는 이 기억을 잊고 있었어요. 충격적인 기억이라 그랬나 봐요.”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를 다독였다.
“저 트럭 운전자, 다들 지옥 갈 나쁜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자들을 잡아 심판대에 올리자.”
“네, 그렇게 해요…”
플루오라이트는 프레나이트에게 안겨왔다. 그러자 플루오라이트는 안정감을 느낀 듯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는 한참 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영상을 몇 번 더 봐도 되겠나? 원한다면 귀를 막고 뒤를 돌고.”
“네, 알겠어요.”
프레나이트는 영상을 여러 번 재생했다. 그러고는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휴대전화로 그 영상을 촬영했다. 그리고 땅에 대해 다시 한번 ‘사물의 기억’ 마법을 걸었다. 반경 1km로.
밖에 내놓아진 플루오라이트는 죽을힘을 다해 현장에서 도망쳤다. 트럭에서 나온 괴한들은 플루오라이트에게 총을 발사했지만, 플루오라이트는 예닐곱 살 아이 특유의 대단한 체력 덕분에 잡히지 않았다. 플루오라이트는 산비탈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플루오라이트가 울지 않았다.
“이 후에는 떠들다가 프레나이트를 만났어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프레나이트는 촬영했던 영상을 남김없이 형사들에게 전달해 수사가 다시 개시되게끔 했다.
형사들은 그래도 재수사는 열심히 해다. 괴한의 정체가 정부의 용병인 바그너 군단인 것을 추리해 낸 것이다. 바그너 군단은 정부의 음지를 담당하고 있으며, 살인부터 고문까지 다양한 일을 담당했다. 정부는 이를 숨기려 들지조차 않았다. 그 때문에 수사는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 정부의 용병을 건들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프레나이트는 쓰게 웃었다.
프레나이트는, 이 사실을 플루오라이트에게 전달하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한참 뛰놀고 공부하고 자기 꿈을 키워나가는 아이로 자랐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지. 정말로 미안하다.”
플루오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나는 어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적이 된 정부와 싸우는 것이라던가.”
플루오라이트는 놀라서 숨을 헉 들이마셨지만, 프레나이트는 눈썹을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플루오라이트, 네가 노려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네가 엘프의 피를 이은 자이기 때문이다. 엘프는 대체로 환경을 중요시해, 토지 개발로 이익을 얻는 인간들과 충돌이 있었다. 그러자 엘프들은 환경운동가가 되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을 비판했지.”
플루오라이트는 뒤에 나올 이야기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에 대한 인간의 대항은 집단 학살이었다. 플루오라이트,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엘프 혈통을 가진 자다.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해 버렸지.”
플루오라이트는 큰 충격을 받아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런 플루오라이트를 프레나이트가 부축해 주었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정부와 싸울 수밖에 없겠네요.”
“우리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겠지. 지원군을 불러오겠다.”
프레나이트는 세계 간 통신 마법으로 전설 속의 존재, 세오리프를 호출했다.
“세오리프. 이 세계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유는 엘프 학살 사건의 조사와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입니다."
‘예. 지원군을 데리고 합류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자, 세오리프가 여러 세계에서 영웅들을 불러 모아 왔다.
“이분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는, 유클레이스 바이컬러와 아이올라이트 스텔라입니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그들의 앞으로 갔다.
“바이컬러 씨와 스텔라 씨, 이 아이는 플루오라이트 에리카입니다. 세계를 평정할 영웅의 재목입니다.
“으악, 그 정도까진 아닌데요?!”
플루오라이트는 펄쩍 뛸 듯이 놀랐지만, 유클레이스는 아이올라이트와 함께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은 내 옛 친구와 많이 닮았군.”
“누구요?”
유클레이스는 그리움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동료이자 친구들이었네. 그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신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그 신의 반대급부이자 존재 의의인 악마가 되어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다.”
“걔네들 아이 있었나? 워낙 그때 경황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에리카, 언젠가, 꼭 친부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네.”
“알겠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세오리프의 마법사들까지 모이자, 그들 중에서 지휘관을 뽑아야 했다. 대군을 이끈 적이 있다는 유클레이스가 군단을 지휘하기로 했다.
“내 세계에서는 ‘슬라브니 제국’이 가장 발달한 국가였네. 그들과 맞서 싸워 이긴 경험도 있으니,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될 거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플루오라이트…. 정말로 이 싸움에 참여하는 건가? 미성년자는 군대에 세우기는….’
플루오라이트가 프레나이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난 내 엄마랑 아빠를 죽인 범인에 대해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네 마법 재능을 아쉬워하던 참이다. 그러면, 다치지 말고 와라.”
“선생님도 다치지 마요.”
그들은 출정식을 간단하게 마치고 정부 청사 건물로 나아갔다. 손에 손에 피켓을 든 채.
“정부는 엘프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그러나 이중 시위가 평화롭게 끝날 것이라 예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부군에서 마법사 한 명을 총을 쏴서 죽이자,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군이 입은 피해는 경미했다. 방어 역할 마법사가 엄호를 잘한 덕분이었다.
아군과 적군 둘 다 너무 지쳐 전투를 잠시 쉬게 되자, 플로우라이트가 왜 적군에는 마법사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전우가 “마법사들은 자연에서 힘을 얻기에 환경 보호를 목숨보다 더 중요히 여겼던 엘프와 같은 편이었어.”라고, 말해주었다.
플루오라이트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워했다. 그중에서 유클레이스와 아이올라이트가 내놓은 모험담은 플루오라이트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프레나이트는 옆에서 들으면서 귀를 기울였따.
“와! 그 마법들 완전 반짝반짝하고 화려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유클레이스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허상일 뿐이네. 전쟁은 언제 동료나 본인이 죽을지 모르는, 쓰레기 같은 것이네. 우리들은 전쟁할 때 그걸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다음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이올라이트가 전장에서 쓰러졌다. 유클레이스가 나름 치유를 했지만, 원상태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나서겠다. 치유의 밤이여, 이 자리의 상처를 이불처럼 감싸 안아라.”
프레나이트가 나머지의 치유를 담당했고, 유클레이스는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마침내 아이올라이트가 안정을 되찾자, 유클레이스가 재빨리 프레나이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정말로 고맙네.”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아이올라이트는 유클레이스가 초기 조치를 잘해준 덕이 크다고 유클레이스의 손에 입맞춤했고, 유클레이스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모두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부터는 어제보다 힘들었다. 어제 정부군의 무장이 총밖에 없었던 것은 시위대가 민간인처럼 무력이 없을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정부군은 탱크, 기관총 등 살상력이 강한 무기를 사용해 마법사 군을 압박했다.
“안돼, 이대로는…”
방어계 마법사가 모두의 위에 씌운 방어막이 한 겹 한 겹 깨져나가고 있었다. 전투가 서서히 더욱 격렬해지자 부상자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프레나이트가 배치된 의무소도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플루오라이트가 다쳐서 돌아온 것이다.
“플루오라이트!”
프레나이트가 긴급하게 맞이했다.
“어딜 다쳤나!”
“...다리요. 지팡이의 크기를 키워서 짚고 왔어요.”
“무섭고 괴롭고 아팠지? 전쟁은 원래 그런 거다. 그래도 계속하고 싶나?”
“아팠지만, 총알 하나를 빼고 새살로 채우는 건 작은 수술 아니에요?”
플루오라이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위해 전선에서 버텼어요.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도 버릴 수 있어요.”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말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혹시 날 사랑해서 그러나?”
플루오라이트는 당당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프레나이트는 뒷목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네가 바라는 게 나와의 연애라면 지금은 들어줄 수 없다. 어른이 된다면 고려는 해보지.”
플루오라이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왜 지금은 안 돼요?”
“내가 어른이라서. 정상적인 어른은 아이와 사귈 수 없어.”
“전 충분히 성숙해요!”
플루오라이트는 화를 내며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전투가 벌어졌으나 플루오라이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 전투에서도. 플루오라이트는 부상이 없어도 자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프레나이트는 의무 막사를 동료 의무병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다.
전선에서 프레나이트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플루오라이트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듯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강력한 원소 마법으로 마법사들 쓸어버리고 있었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입술의 움직임으로 알아채었다.
“선생님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프레나이트는 자신이 본 것을 상관에게 보고했다. 이 소식은 총사령관 유클레이스에게까지 전해졌다. 유클레이스는 십 대 청소년의 사춘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아이올라이트는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문제에는 답도 없어. 저 실연당한 소녀를 잡아다가 세상의 쓴맛을 보게 해줘야지.”
“결국 구출 작전인가. 알겠다.”
교전은 지속되었다. 프레나이트 측에서는 플루오라이트를 구하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
프레나이트와 아이올라이트가 한 조가 되어 투명화 마법을 걸고 적진에 들어간다. 플루오라이트를 기절시킨 후 비행 마법으로 먼 상공으로 올라간 후 안전하게 아군 진영으로 데려온다. 이때 플루오라이트에게 비행 마법이 걸리면 적들이 눈치를 채고 말 테니, 방어 마법을 걸고 최대한 체력전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작전이 개시되었다. 프레나이트는 아이올라이트와 자신에게 투명한 마법을 걸어 적진에 잠입했다. 프레나이트는 적병을 보고 메롱메롱 해대는 아이올라이트 때문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플루오라이트는 적진에서 미친 듯이 공격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먹지도 쉬지도 않고 자신을 스스로 불사르는 모습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 프레나이트는 번개 속성 마법으로 플루오라이트를 기절시켰다.
적들은 플루오라이트를 후송해 치료받게 하려다 프레나이트의 비행 마법으로 플루오라이트를 포함한 세 명이 날아오르자, 자신이 뭘 잘못 봤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관의 벼락같은 지시가 떨어져 그들을 저격했지만, 아이올라이트의 정신 공격과 화살 세례와 프레나이트의 방어계 마법으로 적의 공격을 흐트러지게 한 후 아군 중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고 후방으로 돌아왔다.
프레나이트가 본 플루오라이트의 상태는 심각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해 허약한 상태였고, 세뇌 약물을 먹인 듯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레나이트는 세뇌된 마음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긴장하며 보석 프레나이트가 세공된 은 지팡이를 꺼냈다.
이윽고 들어온 플루오라이트의 의식 세계는 프레나이트가 자신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모습, 울고 있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모습, 마침내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 등등 온통 프레나이트로 가득했다. 프레나이트는 골이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 세계를 열었다.
무의식 세계는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하여 프레나이트는 목이 메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말을 심하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나이트는 꽁꽁 잠긴 문을 보았다. 그 문을 만지자 흐느낌 소리가 더 강해졌다. 프레나이트는 용기를 내어 자물쇠에 손을 가져다 댔고, 자물쇠가 스르륵 풀렸다. 그러자 무의식 세계에서 세뇌가 풀렸다.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무의식에서 빠져나왔다.
플루오라이트는 모두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적들이 저를 납치 감금하고 약물로 세뇌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점이 참작되어 플루오라이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마법사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프레나이트와 플루오라이트는 한참 어색하게 지내다가, 플루오라이트가 쭈뼛쭈뼛 프레나이트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미안해요.”
“무엇이 미안하나?”
플루오라이트는 심호흡했다.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힘들게 해서 미안하고, 무엇보다 저는 어린데 어른인 프레나이트를 좋아해서, 선생님을 난처하고 곤란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요.”
플루오라이트는 그 말을 하자 눈물을 흘렸다. 프레나이트는 그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정 네가 나와 연애하고 싶다면, 성년인 19세가 되는 해에 내게 다시 고백해라. 그때 가서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지.”
플루오라이트는 뛸 듯이 기뻐했다.
“4년의 시간쯤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다만… 무언가 조금 위화감을 느낀다. 혹시 네 무의식에 한 번 더 들어가도 괜찮겠나?”
“괜찮아요. 얼마든지요.”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무의식에 다시 한번 들어갔다. 이전에 본 신경이 쓰이던 기억이 있었다. 바로 가장 오래된 기억인데, 푸른 머리카락의 악마 스피넬이 플루오라이트에게 남긴 말이었다.
악마 스피넬은 플루오라이트에게 젖을 주다가, 도시의 어떤 집 앞에 플루오라이트를 상자에 넣어 이유식 통과 함께 봉했다. 악마 스피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정말 너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악마라 할 일이 많고, 내가 악행을 부추기는 건 네게 악영향을 끼칠 거야. 그래서 우리들은 헤어져야 해. 미안해.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주어서 고마워. 영웅의 혈통을 가진 너는 이 세계 최강의 마법사가 될 거란다. 부디 행복하게 살아가렴. 안녕, 안녕…”
프레나이트는 플루오라이트의 무의식에서 빠져나오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플루오라이트도 마찬가지였다. 플루오라이트가 악마 스피넬과 유일신 세루사이트의 독생자였다니?
하지만 프레나이트는 이해할 법도 했다. 저번에 세뇌당했을 때 쉬지 않고 마음껏 마법을 시전하는 것을 보고 프레나이트는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가르쳐주지도 않은 주문을 오로지 주문 창조를 통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악마, 아버지가 신이라니, 마법을 못 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자신은 플루오라이트를 아끼고 챙겨주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한데.
마법사 군에 플루오라이트가 다시 돌아오자, 전선은 정부 청사 건물 문턱 앞까지 밀어나갔다. 마법사 군은 이에 다시 시위했다. 통령이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거리에서. 그러나 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마법사들은 시위를 멈추고 정부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누군가 통령의 시신을 찾아냈다. 입 안에는 깨진 청산가리 사탕이 있었고, 입천장에는 권총을 발사한 흔적이 나있었다.
통령의 가족들도 청산가리 사탕을 깨물어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법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통령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프레나이트와 플루오라이트는 그 시신들을 하나하나 보며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개발로 얻는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높았길래 환경운동가 종족을 ‘청소’할 지경이 되었냐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오리프가 데려온 엘프 중에서 엘프가 환경 운동을 하고 드워프가 철강 산업에서 일하는 이 세계에 매력을 느끼며 용감하게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말한 자가 있는 점이었다.
보궐 선거가 이루어졌고, 이번에 당선된 통령의 첫 번째 일정은 하나 남은 하프 엘프 플루오라이트에게 양부모를 죽인 책임을 지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프레나이트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고, 귀를 드러낸 플루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 있었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왔다. 프레나이트와 플루오라이트는 잔잔한 기쁨 속에서 서로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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