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세계관

전교 1등 짝남한테 고백으로 공격하기

키르쉬블뤼테는 정원의 꽃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체부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가는 것을 보자 궁금해서 물뿌리개를 내려두고 헐레벌떡 우체통으로 뛰어갔다.


그가 받은 편지는 마탑에서 온 것으로, 본래 다니던 학교의 수학 실력이 우수하여 후천적 마법사인 위저드 전형의 기준에 통과하여 마법 학교인 마탑에 입학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마탑이 있는 위치가 기재되어있었고, 일주일 안에 답장을 하면 일주일 뒤 오후 세 시에 지정된 정류장에서 마탑으로 향하는 버스에 탈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신이 나서 얼른 물을 다 주고 아버지인 위르겐에게 달려갔다.


“아빠! 저 수학 잘해서 위저드가, 그러니까 후천적 마법사가 될 수 있대요!”


위르겐은 키르쉬블뤼테를 꼭 안아주었다.


“마탑에서도 인정받아서 기특하다, 예쁜이. 그래서 우리 둘이 작별 인사 보낼 시간은 언제니?”


“일주일 뒤에요!”


“알겠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 잘 보내자꾸나.”


키르쉬블뤼테는 편지에 입학하겠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아버지가 일이 없을 떄 최대한 둘이서 함께 지냈다. 같이 배드민턴 치기, 자전거 산책, 산행, 팝콘 먹으면서 영화 보기 등등. 그러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 입학 하루 전이 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신나게 짐을 쌌고, 위르겐과도 인사를 나누고 나서 지정된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법 학교의 문장을 단 2층 대형 버스가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났고, 키르쉬블뤼테의 옆자리에도 사람이 탔다. 키르쉬블뤼테는 옆자리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가는 동안 같이 얘기하는 것 괜찮은가요?”


“괜찮아.” 흰 앞머리를 무지개색으로 염색한 약한 곱슬머리의 여학생이 수락했다.


“이름이 뭔가요? 저는 키르쉬블뤼테 바이스에요. 그쪽은요?”


“이레네 마를레네. 편하게 이레네라고 불러도 돼.”


“좋아요, 앞머리 색이 멋진 이레네 씨. 이레네 씨도 위저드인가요?”


“응, 내 위로 디트리히라고 오빠가 있는데 오빠도 위저드야.”


“대단하시네요. 둘 다 수학에 소질을 보였다는 뜻이니까요?”


이레네는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 그건 맞지만, 혈통 없이도 마법을 쓰고 싶어서 둘 다 수학만 엄청 공부했어.”


키르쉬블뤼테는 놀랐다.


“아, 혈통에 의해서도 마법사가 될 수 있어요?”


이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서러라고, 조상 중에 마법사가 있어서 그 혈통을 물려받아 마법을 사용하는 작자들이 있어.”


키르쉬블뤼테는 의아한 눈으로 이레네를 보았다.


“마법을 선천적으로 쓰느냐, 후천적으로 쓰느냐가 그렇게 달라요? 이레네 씨가 그 사람들을 ‘작자’ 라고 부를 정도로?”


이레네는 말하기에도 역겹다는듯 코를 씰룩였다.


“우리 오빠 말 들으면 대단하던데. 같이 교실을 쓰지만 절대로 힘을 합치려 하지도 않고, 위저드한테 ‘뼈대도 없는 놈!’ 이라고 하질 않나, 자기네들은 조상 잘 얻어걸려서 마법 쓰는 주제에 귀족처럼 구는 거 진짜 어이 없어.”


“이상한 사람들이네요. 학교에서 마주할 일이 있다면 관계를 좋게 하는 편이 나을텐데.”


“내 말이 그 말이야.”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키르쉬블뤼테와 이레네가 탄 버스는 웅장하고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뾰족한 고딕 양식의 마탑 앞에 도착했다. 마탑의 모습이 꽤나 장관이라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버스 기사의 말에 키르쉬블뤼테는 기대감으로 물든 표정을 하고 내려서 교사인 듯한 사람들이 안내에 따라 줄을 섰다. 키르쉬블뤼테가 선 곳에는 ‘위저드’ 라고 쓰여있었다. 벌써부터 소서러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키르쉬블뤼테는 부담스러웠다.


“지금부터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기숙사 배정이 있겠습니다. 위저드는 왼쪽의 붉은 공을, 소서러는 오른쪽의 푸른 공을 골라서 제게 보여주십시오.”


교장이 설명하자 사람들은 각각 한 줄로 서서 공을 열어보았다. 그 결과는 교장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홀로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반영되었다.


“이레네 마를레네, 610호.”


“너도 610호 골랐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겠네요.”


마침내 키르쉬블뤼테의 차례가 되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빨간 공을 열자… ‘610’이라 쓰여있었다. 610호는 이제 두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레네는 키르쉬블뤼테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와! 우리 같은 방이야!”


“저도 엄청 기뻐요!”


“이제 나머지 두 자리는 누가 채우게 될지 궁금하다.”


“맞아요. 좋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즐겁게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보라색-분홍색 투톤에 각각 왼쪽, 오른쪽으로 한쪽으로만 묶인 머리카락에, 눈 색은 연보라색인 귀여운 인상을 주는 쌍둥이 여학생들이 공을 뽑았다.


“리프리히 폰 비올렛발트 610호.”


“루트비히 폰 비올렛발트 610호.”


“진짜 귀엽게 생겼다. 성격도 잘 맞았으면 좋겠어.”


“맞아요, 맞아요!”


교장은 마이크에 가까이 갔다.


“방 배정이 끝났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드리며, 자세한 안내는 밤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해드리겠습니다.”


교사들의 통제에 따라 학생들은 1층의 대연회장에서 각 층 기숙사로 향했다. 교사들이 각 방의 인원을 모이게 한 뒤, 각 층에 마법으로 전송시키는 방식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이레네의 손을 꼭 잡고 610호로 함께 갔다. 


610호에는 이미 쌍둥이가 와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손을 흔들었다. 


“당신들도 여기로 배정받았어?”


키르쉬블뤼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할게. 나는 리프리히 폰 비올렛발트.”


왼쪽에 사이드 포니테일을 한 소녀가 인사했다.


“나는 루트비히 폰 비올렛발트. 참고로 내가 동생이야.”


오른쪽에 사이드 포니테일을 한 소녀가 인사했다.


“너희들 모두 잘 부탁할게. 나는 이레네 마를레네야.”


“제 이름은 키르쉬블뤼테 바이스에요. 잘 부탁드려요.”


“응. 우리도 잘 부탁할게. 그나저나 여기 코 고는 사람?”


키르쉬블뤼테가 쭈뼛거리며 나섰다.


“저… 코 고는 건 아니고 잠꼬대를 한대요.”


리프리히가 잠깐 고민하자 이레네와 루트비히에게 귀마개를 나누어주었다.


“이거, 평범한 거 아니고 마법 도구야. 최대 100데시벨까지 소리를 차단해줘.”


“100데시벨이라면 안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레네가 농담을 하자 키르쉬블뤼테는 웃었다.


“아하하. 그럴 리가요.”


루트비히가 하품을 했다.


“이야기 다 끝냈으면 잠 자자. 졸려.”


“알았어, 잘 자.”


“다들 잘 자.”


불이 꺼졌고, 그들은 다음날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뽀송해지며 씻은 모든 1학년 위저드와 소서러는 푸르고 흰 색의 투톤인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을 한 남학생에게 시설 안내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 마탑의 학생회장인 2학년 소서러반의 로젠 크란츠입니다. 시설 안내를 하러 여러분께 왔습니다. 제 통솔에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이래네 등의 학생들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키르쉬블뤼테도 마음에 활기가 돌았다.


“우선 여기는 1층 대연회장, 평소에는 식당 겸용입니다. 저쪽에 (로젠은 오른쪽 맞은 편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리실이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도록 합시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국어, 수학, 라틴어 교실이 있고, 3층에는 마법 역사학, 몬스터학의 교실이 있고, 4층에는 연금술, 마도구 제작술 교실이 있고, 5층에는 마법 전투슬과 마법 치유술 교실이 있습니다. 학년별로 층을 구분했습니다. 각 층의 끝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로젠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각 층의 순간이동 마법이 발동되었다. 


“질문 있습니까?”


어떤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말씀해보십시오.”


로젠은 그 남학생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저희는 이전 학교에서에서 국어와 수학을 배운데 꼭 여기서도 다시 배워도 되나요?”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어 시간에는 마법사가 쓴 문학 작품도 배우고, 수학은 위저드들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축의 수식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소서러는 필요 없으니 안 배워도 되죠?”


"예, 그렇습니다."


소서러들은 좋아했다. 반면에 수학을 싫어하는 위저드들은 죽상을 했다. 


로젠은 모두를 6층으로 안내했다.


“6층은 교장의 집무실입니다. 7층은 여성 위저드 기숙사, 8층은 여성 소서러 기숙사, 9층은 남성 위저드 기숙사, 10층은 남성 소서러 기숙사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여성이 남성 기숙사에, 남성이 여성 기숙사에 방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11층은 교직원 기숙사, 12층은 연구실, 13층은 교무실, 14층은 연구원 여자 기숙사, 15층은 연구원 남자기숙사가 있습니다.”


“감옥도 있나요? 이런 오래된 성에는 꼭 있는…”


장난기 어린 여학생의 말에 로젠은 진지하게 말했다. 


“네. 하지만 보안을 위해 위치는 공개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좌중은 얼어붙었다.


“뭐, 여러분이 죄를 안 저지르면 갈 일은 없을 거에요. 그러면 안내는 여기까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1학년 마법사들은 시설을 쭉 둘러본 다음에 다시 대연회장으로 돌아왔다. 황금빛으로 바삭한 껍질을 자랑하는 돼지 다리 요리인 슈바인스학세가 메인인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이레네의 입이 트였다. 이레네는 주변의 학생들과 선후배들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고, 때로는 키르쉬블뤼테와 쌍둥이들을 대화에 끼워넣도록 했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나이는 몇 살이야?”


“베를린에서 왔어요. 나이는 열 아홉이에요.”


“어조 들으면 알겠지만 난 뮌헨. 나도 열 아홉이야. 여기 학교는 1학년이 열아홉인가봐. 그러면 여기는 대학교의 대체인가?”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각종 신상에 대한 질문 등등. 그 과정에서 이레네는 상당히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사회성이 나쁜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레네는 더했다. 결국 기가 다 빨린 키르쉬블뤼테는 배부르다는 핑계로 기숙사로 돌아갔다. 기숙사 문은 자신의 마력에 반응한듯 스르르 열렸다. 그 안에는 더 작은 방의 문에 방의 번호가 붙어있었다. 610호의 문을 여니 오늘치 사교성이 바닥난 쌍둥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키득거리면서 잘 자라고 했다. 그들은 대답을 하자마자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시간.


“마법사가 되어서도 국어랑 라틴어랑 수학을 해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애석하네요…”


키르쉬블뤼테는 기운 빠지게 말하며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섞어서 먹었다.


“아니야. 생각보다 재미있어.”


디트리히가 답했다.


“어, 정말로요?” 키르쉬블뤼테의 의외라는 눈빛.


“응. 국어 시간에는 마법사들이 쓴 문학 작품을 공부하고, 자기가 쓰는 주문을 만들기도 해. 라틴어 수업에서는 라틴어가 마법사들끼리의 공용어라서 배워. 또 주문의 뜻을 읽고 해석해서 새로운 주문을 발명해낼 수도 있어. 수학 수업은 위저드들만 필요하고, 마법에 사용하는 수식의 암기하고 이해를 위해서 필요해. 그러니까 모든 게 다 마법의 기초라는 뜻이지.”


“그으래요? 젠장. 그래도 1학년 때 배우는 게 기초과목이라니 어쩔 수 없네요.”


디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다수의 강의는 위저드와 소서러가 같이 수업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여러 애로사항을 꽃피웠다. 두 종류의 마법사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알 한다 자알 해! 그 문제는 지나가는 새도 맞추겠다!”


“말 다 했어? 내일 2시까지 운동장으로 따라와!”


애로사항 말고 좋은 점이라면, 잘생기고 모두에게 평등하고 위저드와 소서러를 막론하여 인기 최강인 학생회장 로젠 크란츠를 3층으로 올라가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여학생과 소수의 남학생을 막론하여 로젠이 홀로 바라보기만 해도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며 꺄악거렸다. 하지만 키르쉬블뤼테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키르쉬블뤼테는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해서 로젠이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둘은 각각 1학년과  2학년으로 학년은 달랐지만, 어찌되었든 각 학년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면 로젠의 눈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 키르쉬블뤼테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떤 여성이 쇠사슬로 양 팔과 양 다리로 묶여있었다. 그리고는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여기 있는 거지…? 느껴져. 보고 싶어…”


여성은 울고 또 울었던 듯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무의식이 끝나며…


이레네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끼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레네. 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


“어떤 여자가 쇠사슬에 묶여 있고, ‘여기 있는 거지…? 느껴져. 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 꿈이었어요.”


“에이. 그거 저번에 감옥에 대해 얘기 들어서 꾼 개꿈 아닐까?”


키르쉬블뤼테는 푸스스 웃었다.


“역시 그렇죠? 잊어버리는 게 낫겠어요.”


“그럼, 그럼!”


오늘은 매일 그랬듯이 국어, 라틴어, 수학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열심히 수업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집중이 안 되어 필기를 하다 멈추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자신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꿈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집중하려 노력 시작. 그러나 이번에는 교과서 한구석에 로젠의 얼굴을 그리고 앉아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채찍질했다.


각 기숙사의 게시판에 ‘1학년들은 동아리를 들 것’ 이라는 권고 사항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클래식 음악 감상 동아리와 제과제빵부 사이에서 고민했다. 인문학 책 토론 동아리도 끌렸다.


“이레네. 이레네는 어디에 들어갈 건가요?”


“글쎄. 인문학 책 토론 동아리는 정신적으로 힘들 것 같고, 제과제빵부는 육체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말이지. 클래식 음악 감상 동아리는 어때?”


“사실 마음같아서는 이 세 개 다 하고 싶어요. 그래도 만약 한다면 제과제빵부를 하고 싶어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고 나서 달콤한 결과물을 맛보는 게 꽤 괜찮지 않나요?”


“그래, 그럼 제과제빵부를 들자.”


일주일 뒤, 결과가 취합되어 수요일 오후 3시 이후에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레네와 함께 근처 요리학원 건물에 들어간 그들은 쌍둥이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어라! 리프리히랑 루트비히도 여기 신청했네요?”


리프리히와 루트비히가 대답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어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요. 오늘 만들 건 꿀과자라니 한 번 만들어볼까요?”


“그래!”


이레네와 쌍둥이, 키르쉬블뤼테는 요리도구를 짠 하고 건배하듯이 부딪혔다.


네 사람은 실온에 두었던 무염버터를 부드럽게 풀고, 슈가파우더를 2번에 나눠 버터와 잘 섞어주었다. 이 때, 꿀을 같이 넣었다. 실온 달걀을 풀어 달걀물을 만든 후 버터와 설탕 반죽에 넣고 하나로 섞어주었다. 그런 후 베이킹파우더와 소금을 체에 내린 뒤, 체 친 가루들을 버터 반죽에 넣고 주걱으로 11자를 그리며 섞어주었다. 섞은 반죽을 한 덩어리로 뭉쳐 위생 백에 담아 냉장고에서 20~30분 정도 휴지시켜두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반죽을 5~6mm 두께로 균일하게 밀어주었다. 이때 원하는 모양의 쿠키 틀을 사용해 찍어주었다. 17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13분 정도 구워주었더니, 달콤하고 맛있는 향기가 났다.


다 만들어진 달콤한 꿀 쿠키를 모두가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키르쉬블뤼테는 동아리 선택을 참 잘했다고 느꼈다. 


그 뒤에는 밴드부 모집 공고가 떴다. 밴드부는 신청률이 높은 편이었는데, 바로 마탑의 아이돌 로젠이 보컬로 있기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도 로젠과 함께 학교 생활을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행히 키르쉬블뤼테는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알아서 키보드로 신청을 했고, 이레네는 드럼에, 리프리히는 기타, 루트비히는 베이스, 디트리히는 작곡에 지원을 했다.


신청자가 폭주해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키르쉬불뤼테는 로젠에게 예전에 배워온 ‘왕벌의 비행’으로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었다. 오디션을 보고 나오는 키르쉬블뤼테에게 친구들이 응원의 박수를 쳐주었다. 키르쉬블뤼테 또한 친구들의 합격을 기원하며 박수를 쳤다.


오디션 결과는 대성공. 키르쉬블뤼테의 친구들이 모두 합격한 것이었다. 


“밴드부의 모든 인원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연습하고, 학교 축제 때 새 곡을 냅니다. 가끔 학교 밖 대회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로젠이 오디션에 이긴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면 난 최대한 빠르게 곡을 써올게. 작사는 다같이 할까요?”


그렇게 하자는 결론이 났다.


벚꽃이 핌과 동시에 중간고사 기간이 왔다. 평소 공부를 하지 않던 학생들은 급하게 모든 개념을 머릿속에 쓸어담느라 분주했고, 키르쉬블뤼테는 내일 있을 국어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이레네와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레네는 하고 싶은 과목만 하는 스타일이었고,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안 들킬 커닝 방법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켠 상태로 있어 키르쉬블뤼테는 중간에 잠이 깼다.


“커닝을 할 거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요점 정리를 해서 외우는 게 어때요?”


키르쉬블뤼테는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조언을 주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날이 밝고, 결전의 주가 시작되었다. 국어 시험의 앞 문제는 객관식으로, 키르쉬블뤼테는 술술 잘 풀어나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창작 시를 짓는 문제가 튀어나왔다. 키르쉬블뤼테는 솔직히 자신 없었지만 힘껏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담아 시를 지었다.


벚꽃


키르쉬블뤼테 바이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축제

금관악기 오케스트라처럼 가볍고도 웅장하게 펼쳐진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벚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이 오케스트라의 관객이 된다.


그리고 마치 한 사람의 인생처럼 덧없이 벚꽃 잎이 떨어지면

무대가 내려갈 때 마지막 음을 낸다

그 시간은 아름다웠노라.


국어 시험이 끝나고, 이레네와 쌍둥이는 기숙사에 모여 시험 결과에 대해 떠들었다.


“난 사실 문학적 소양이 좀 있는 편이거든. (이레네는 콧대를 높게 세웠다.) 솔직히 시 짓는 게 객관식 문제보다 더 쉬웠어. 키르쉬블뤼테, 긴장 좀 해?”


이레네는 자만하며 키르쉬블뤼테를 웃겼다.


쌍둥이는 “커닝 페이퍼를 너무 열심히 만든 나머지 객관식 문제는 다 맞은 것 같아.” “그치만 시 창작은 도통 감이 안 잡히더라. 빈 칸으로 냈어!”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따.


둘째날의 라틴어 시험 또한 객관식과 서술식 문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키르쉬블뤼테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서술식 문제 하나는 라틴어로 한 문장을 작문하는 것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문법이 조금 헷갈렸지만 뭔가 쓰기는 했다.


이레네는 시적 재능을 다시 발휘하여 멋있는 라틴어 문장을 하나 썼다고 했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역시나 커닝페이퍼(라고 쓰고 요점 정리가 되어버린 것) 덕분으로 괜찮은 성적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라틴어 문장 작문은 어려워하며 수업시간에 들었던 문장 하나를 변형해서 적었다고 했다.


내일은 학생들이 가장 긴장할 만한 수학 시험. 그러나 이전 비마법사 고등학교에서 수학은 항상 전교 1등이었기에 키르쉬블뤼테는 자신만만만 표정이었다. 하지만 수학을 싫어하는 이레네와 디트리히, 리프리히와 루트비히 쌍둥이는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울상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눈치를 챙기고 상냥하게 그들을 위로했다.


마치맨 마지막 시험일이 왔다. 벚꽃이 만개하여 사방에 봄기운이 가득했지만, 학생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시험 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빛의 속도로 계산했다. 정확하고 빠르게. 서술형 문장은 함수 역계산이었느데, 마법을 하려면 수식을 제 손 제 발처럼 다뤄야 한다고 하니 꼼꼼하게 공부했었다. 키르쉬블뤼테가 마지막 문제를 풀자마자 종이 울렸다. 키르쉬블뤼테는 후련하게 샤프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레네, 쌍둥이 모두 얼굴이 우중충했다. 그들은 실력있는 마법사가 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러다가 키르쉬블뤼테가 과외를 해주겠다고 하자 반가워했다.


마침내 성적이 발표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미리 정해져 있었던듯 전교 1등을 차지했고, 이레네는 중상위권,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중위권 성적을 받았다.


시험을 본 뒤에는 짧은 방학이 찾아왔다. 머리를 식히고 바깥 공기 좀 맡아오라는 교장의 배려였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벚꽃나무 아래에서 피크닉을 열곤 했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명문가 비올렛발트의 영애들로, 상당히 호화스러운 도시락을 사용인으로부터 받아서 이레네와 키르쉬블뤼테, 디트리히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이때, 로젠이 키르쉬블뤼테에게 말을 걸었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상냥한 그 말에 소녀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당연히 되죠!!!”


키르쉬블뤼테는 이상하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로젠은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지만 친구를 단 한 명도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젠에게 푹 빠진 아이들에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이로 인해 피크닉 인원은 여섯명으로 늘었다. 키르쉬블뤼테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연 로젠은 내 존재를 의식하고 있던 걸까?


“당신이 바로 1학년 전교 1등이죠? 축하해요. 이번 시험 문제가 꽤나 까다로웠던 모양인데도, 실력이 굉장하신 모양이에요.”


쿵쾅거리던 심장이 터질 뻔했다. 로젠이, 이 잘생긴 로젠 크란츠가 날 의식해! 나만을 바라보아준다고!


“칭찬 감사드려요. 로젠 씨야말로 학생회장 일과 밴드부와 공부를 동시에 하느라 힘드시죠?”


“괜찮아요. 공부는 선생님들이 도와주고 있어서 셋 다 수월해요.”


모두가 실컷 먹고 떠들다가 해산했다.


“이따 봐.”


“나중에 봐요.”


그렇지만 키르쉬블뤼테와 로제는 기숙사로 가지 않고 남아있는 채로 밤 벚꽃을 즐겼다. 벚꽃이 도시의 조명에 투과되어 벚꽃이 빛나는 것 같은 낭만적인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키르쉬블뤼테란 이름도 양친이 준 거에요?”


“네, 지금처럼 벚꽃이 예쁘게 필 때 낳았다고 해서 엄마가 지어줬다고 해요.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힘들어해서 유품을 싹 다 정리해버렸는데, 이 이름만큼은 남겨두셨어요. 지금은 저도 제 이름도 무지 아끼세요. 좋은 분이죠?”


“그래요. 좋은 분이네요. 나는 고아라 양친이 모두 없어요.”


“그러면 친척 집에서 사시는 거에요?”


“아뇨, 혼자 살죠. 쉬지 않고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연명했죠. 이걸로 마탑 등록금도 냈고.”


키르쉬블뤼테는 감탄했다.


“아, 장학금 제도가 있었군요. 대단해요. 저야 제 머리 좋은 거 믿고 좀 허술하게 공부하는데 로젠은 완전 천재 아니에요?”


“천재기는요. 사회에 나갔을 때 속칭 ‘일머리’가 좋지 않은 편이라 아르바이트 할 시간에 더 공부해서 장학금을 벌자 주의였거든요.”


”분명 앞으로도 잘 할 거에요. 사회에 나가기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고민하지 말자고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단 머리가 좋은 거니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있겠죠.”


“당신 말을 들으니 놀랍게도 마음이 편해지네요. 설마 혹시 벌써 마법 부려요?”


키르쉬블뤼테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들어주는 걸 잘하긴 해요.”


이때 갑자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런. 일기예보를 못 봤는데. 혹시 우산 있나요?”


“있어요. 잠시만요.”


그리고 로젠은 큰 우산을 펼쳐들었다.


“잠깐만, 그렇게 서면 당신 옷이 젖잖아요. 더 가까이 와요.”


키르쉬블뤼테는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 네에…”


‘그냥 비가 내리니까 맞지 말라고 가까이 붙어서자고 한 거야! 괜히 스프 헛들이키지 마라, 키르쉬블뤼테 바이스!’


“그럼, 가요.”


봄비에 잎을 떨구는 벚꽃도 있었지만 키르쉬블뤼테는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까이 몸을 붙이고 걷고 있었고, 설레고 간지러운 느낌이 온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어서였다. 


두 사람은 마탑에 도착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좋은 꿈 꾸어요.”


“네. 당신도 좋은 꿈 꿔요.”


기숙사에 들어가니, 이레네와 쌍둥이가 진지한 회의 중이었다. 주제는 ‘로젠이 키르쉬블뤼테한테 반했는지 아닌지’였다.


“둘 다 각자 학년의 전교 1등이니 서로 눈이 맞는 건 당연하지!”


리프리히의 주장이었다.


“로젠은 사람들로부터의 관심같은 건 너무 많이 반해서 염증이 난 게 분명해.”


루트비히의 주장이었다. 두 주장은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대립 중이었다.


이것은 졸업 시험을 볼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4학년을 제외한 1~3학년들의 대단한 관심사였다. 게시판을 보니 내기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아주 가지가지 한다. 이럴 시간에 이번 시험의 오답노트라도 만들어두세요.”


키르쉬블뤼테는 한심하게 여겼지만, 방학의 달콤함에 젖어있는 다른 학생들은 우우 야유할 뿐이었다.


로젠은 키르쉬블뤼테에게 오늘 식사 한 번 하자고 하였고, 키르쉬블뤼테는 단박에 승낙했다. 키르쉬블뤼테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예쁘게 꾸몄다. 정확히 말하자면… 3학년 언니들이 도와주었다.


“넌 원래도 예쁘니까 꾸민 듯 안 꾸민 듯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인조 속눈썹을 가닥가닥 심어야 더 자연스러워. 섀도우는 이만큼, 콧대 살짝 쓸어주고 얼굴 라인 살리고.  로젠 키가 몇이라고?”


“키는 180 정도에요. 아마?”


“이 데이트가 끝나고 네 남친으로 만들어주지. 키가 180쯤이면 너는 굽 7센치짜리 하이힐 신어도 될 것 같다. 귀걸이는 이걸 하고. 좋았어. 이제 한 번 걸어볼래?”


키르쉬블뤼테는 마치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안돼, 안돼. 그런 걸음걸이로는 그를 꼬실 수 없어. 조금 더 연습하고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


“으아아… 아아아… 악!”


키르쉬블뤼테는 여전히 비틀비틀 걷다가 하마터면 발목을 접지를 뻔했다. 


“어휴, 정말, 됐다 됐어. (그 언니는 7cm자리 통굽 구두로 바꿔주었다.) 이걸로 하는 게 낫겠다. 무슨 열아홉살 짜리가 하이힐도 못 신어!”


“다들 어림짐작 하다시피, 로젠이 제 첫사랑이라 그 전에 딱히 이런 걸 신을 생각도 못해봤거든요. 그런데 언니들은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이제 누구라도 좋으니까 우리들의 학생회장 모범생하고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때문이란다.”


키르쉬블뤼테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키르쉬블뤼테와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왁스로 빗어넘긴 로제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당신, 엄청 멋지게 입었는데 패션 감각이 좋은 편이에요?”


키르쉬블뤼테는 차마 진실을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으음, 꾸미는 법을 잘 몰라서 고학년 언니들한테 도움 받았어요.”


키르쉬블뤼테의 구두 굽높이 떄문에 거의 구두에 타고 있는 것 같아 몸이 휘청이지 않게 대화 내내 신경을 써야 했다.


두 사람은 마탑 근처에 있는 ‘마법사의 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마법사 노동조합, 떠들썩한 시장, 여관부터 5성 호텔까지의 숙박시선 등등으로 활기찬 곳이었다. 마법사 노동조합에서는 위저드와 소서러의 임금을 동일하게 하라는 벽보가 붙어있었고, 떠들썩한 시장에서는 마법으로 키운 대형 과일부터 마법 지팡이 등 마법 도구를 판매하고 있었다. 


“참, 키르쉬블뤼테. 아직 지팡이가 없을텐데 사드릴까요?”


“네, 저야 좋죠!”


“실제로 지팡이를 쓸 일은 마법 전투술과 치유술을 배우는 4학년부터지만 말이에요, 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마법사에 대한 로망이 채워져서 좋더라고요.”


“정말로요. 신난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지팡이 가게로 갔다. 그곳에는 튤립, 장미, 목련 등의 꽃가지들이 있었다.


“어서오세요.”


로젠이 직원에게 질문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꽃가지들이 마법 지팡이인가요?”


“네, 맞습니다. 영구 보존 처리 되어있습니다.”


“여기 꽃가지 종류마다 성능이 다르나요?”


키르쉬블뤼테의 질문에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벚꽃 가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로젠은 거스름돈을 돌려받고는 키르쉬블뤼테에게 벚꽃 가지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감사해요! 정말정말로 잘 쓸게요!!”


키르쉬블뤼테는 길바닥에서 펄쩍펄쩍 뛸 기세로 기쁨을 표현했다.


“아참, 저 로젠 씨 지팡이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생겼어요?”


로젠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푸른 장미 꽃가지를 꺼내들었다. 로젠의 머리색과 눈색처럼 푸르디 푸른 색이었다.


“역시 로젠 씨가 드니까 지팡이도 패션이네요!”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키르쉬블뤼테.”


키르쉬블뤼테는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을 진정시켰다.


“제가 받았으니, 이제 돌려줄 차례네요. 저기 저, 카페에서 음료수 한 잔씩 마시며 이야기 좀 할까요?”


“그래요.”


로젠이 승낙하여 둘은 예쁜 카페에 도착했다. 그런데 조금 신기한 메뉴가 있었다.


“허니버터커피 -페어리가 직접 딴 꿀 포함-”


“이거 마음에 들어보이네요. 이거 같이 먹어볼래요?”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자 커피가 나왔다. 둘은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 밖으로 마법사의 거리의 모습이 잘 보여 볼거리가 되어주었다. 허니버터 커피를 마시자 몸이 손 끝 발 끝까지 따뜻해졌다. 


“아, 이거 엄청 맛있네요. 꿀의 달콤함과 버터와 커피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진짜 신기하게 맛있어요.”


“그러게요. 새롭게 도전한 보람이 있네요.”


“네. 저 좀 궁금한 게 있는데, 위저드는 수식을 계산해서 마법 효과가 발생할 지점을 지정하잖아요. 소서러는 어때요?”


“음? 소서러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직감에 따라 날리면 돼요.”


“우와… 그거 우리 기숙사의 수학싫어인간들이 들으면 너도나도 소서러가 되고 싶겠어요.”


로젠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약점이 있어요. 마법을 쓸 때 마력의 흐름이 혼란스러워져 엉뚱한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해요. ‘마탄’같은 마법을 다섯 발씩이나 적에게 쏘는 유리한 효과가 날 수도, 자신을 중심으로 ‘불의 구체’같은 마법이 튀어나와서 자기를 포함한 자신 주위에 있는 아군도 같이 구워버릴 수도 있다고 해요.”


“아, 로젠 씨도 아직 2학년이라 책을 보거나 선배님께 듣거나 해서 안 거에요?”


“책을 봤죠.”


“소서러한테 그런 약점이 있는 게 신기해요. 위저드는 수식을 계산해서 마법을 쓸 수 있는 대신 안정되게 마법을 쓸 수 있는데.”


“각자 서로의 장단점이 있으니, 그만 좀 싸웠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냥 마법사로만 볼텐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키르쉬블뤼테는 메뉴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앗, 저거 꿀케이크 되게 맛있던데 한 번 먹어볼래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런데 혹시 꿀 좋아해요?”


추가 주문을 하면서 로젠이 물어보았다.


“좋아해요! 꿀은 맛도 좋고, 생으로 떠먹어도 맛있고, 벌집꿀도 맛있고, 꿀케이크도 맛있고, 토스트에 발라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나도 꿀 좋아해요. 그런데 당신은 좀 유별나네요.”


“하하하. 그래도 전 이런 제가 좋아요.”


“나도.”


키르쉬블뤼테가 깜짝 놀랐다.


“네?”


“선후배로서 좋다고요.”


로젠은 뭐 어떻냐는 표정이었다.


“아하… 아… 네…”


키르쉬블뤼테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표정이어었다. 하지만 위저드 모두가(?) 자신에 대해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부끄러워도 꾹 참았다. 그 모습을 보고 로젠이 짧게 웃었다.


“왜죠, 내가 부끄러워하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아뇨, 귀여워서.”


키르쉬블뤼테는 심장이 발치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 알겠다고요. 이제부터 안 귀엽게 굴 거니까 괜한 기대 하지 마세요.”


그리고 꿀케이크가 오자마자 케이크의 단맛을 탐닉하였다. 


“맛있게 먹네요. 보기 좋아요.”


키르쉬블뤼테는 암냠냠하며 먹었다.


“로젠도요.”


두 사람의 접시가 비자 직원이 치워주었다.


“저녁은 마탑 가서 먹죠.”


“네, 솔직히 거기 되게 맛있게 나오니까요.”


“그럼 일어나죠.”


“네, 맛있게 먹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키르쉬블뤼테는 카페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로젠과 함께 마탑으로 돌아갔다. 


1학년 전교 1등 키르쉬블뤼테가 2학년 학생회장이자 전교 1등인 로젠과 ‘마법사의 거리’에서 데이트하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선남선녀가 예쁘게 사랑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반,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누구에게나 벽을 치는 로젠이 왜 이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르쉬블뤼테는 몹시 바빴다. 동아리 하랴, 1학년 친구들의 과외 해주랴, 디트리히가 작곡 다 하면 작사에 동참하고 밴드부 연습도 해야 하지, 1학년 과정을 예습으로 뛰어넘고 2학년 과정을 공부하랴 쉴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2학년 과정으로 가려 하는 이유는, 로젠과 함께 수업을 듣고 싶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마탑의 교사들은 이 학구열 넘치는 학생에게 특별 보충 수업을 해주게 되었지만 말이다.


드디어 디트리히가 작곡과 작사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여섯 명은 카페에 모였다.


“자, 어때?”


머릿속으로 보컬을 연주한 로젠이 흡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습니다. 매력적인 멜로디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어떻습니까?”


다들 괜찮다고 했다.


“자, 이제 생각할 게 있는데… 가사 내용은 화창하게 청춘을 만끽한다는 내용은 어때?”


키르쉬블뤼테는 동의했다.


“청춘 하면 여름이지. 학교 축제가 여름에 있으니 여름 소재를 집어넣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여름 하니까 물놀이가 생각나네.”


“바캉스! 바캉스도 넣자!”


“좋습니다. 모든 이의 의견을 합해서 가사를 붙여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섯명은 음료를 마시고 떠들면서 기다렸다. 한 30분쯤 뒤에 디트리히는 모두를 불렀다.


“자, 어때?”


바다의 부름


작사 디트리히 마를레네


해는 화창 날씨는 맑음

바다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철썩, 철썩, 솨르르 솨아

자신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어


바다의 부름에 따라

몸을 싣자 우리를 데려다줄 차에

기다리고 있어줘

우리의 여름은 이제 시작이니까


도착한 바다는 

투명한 보석처럼 맑고 푸르러

하늘이 끝나는 수평선에는

하늘이 바다에 맞닿아있어


바다의 부름에 따라

노래를 부르면서 달려라 달려

기대하고 있어줘

우리의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디트리히가 로젠에게 물어보았다.


“괜찮아, 로젠? 이대로 불러볼래요?”


“그러죠.”


로젠은 악보에 새로 적은 가사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다들 멍하니 로젠이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섬세한 속눈썹, 소년같은 아름다움이 총체적으로 합쳐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만한 모습을 자아냈다. 로젠은 노래를 끝내고 그들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매혹 상태에서 깨워주었다. 솔직히 디트리히도 감동한 눈치였다.


“자, 그러면 이제 곡도 다 썼으니 매주 토요일에 대연회장을 빌려 쓸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악기 대여 가능 여부도 알아보고.”


로젠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떴다.


며칠 뒤, 매주 토요일에 대연회장에 악기를 가져다둘테니 쓸 사람은 쓰라는 교장의 통지가 내려왔다. 이레네는 집에 있던 드럼이 망가진 상태라 대여 악기를 쓰기로 했다. 모두들 토요일마다 꾸준히 연습했다. 학교 축제에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며칠 지나지 않아 키르쉬블뤼테는 2학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로젠의 앞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서. 키르쉬블뤼테는 수업에 집중하려 애를 썼지만, 또다시 자꾸만 교과서의 빈 곳에 로젠의 얼굴을 그려넣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중해서 그리십니까?”


키르쉬블뤼테는 귀가 발개져서 손으로 탁 가렸다.”


“몰라도 돼요!”


당연하게도 수업이 일부분을 빠뜨렸고,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에게 쉬는 시간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로젠. 필기 쓴 거 잠깐 봐도 되나요?” 


“대신, 아까 그린 그림을 보여주십시오.”


키르쉬블뤼테는 정말 부끄러웠지만, 탁 가린 손을 들었다.


“...... .”


“뭐야 이거, 엄청 잘 그렸잖습니까? 조그만 그림에도 특징이 쏙 다 들어가 있고.”


“으으… 보여주기 싫었는데…”


“보여주는 게 왜 부끄럽습니까?”


키르쉬블뤼테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딴짓한게 부끄러워서요. 그래서 필기한 건 언제 보여줄 건데요?”


“그으래요. 옛다, 여기 있습니다.”


키르쉬블뤼테는 콧방귀를 뀌면서 필기의 빠진 부분을 베껴 쓰고 다시 돌려주었다.


2학년은 마법의 역사와 몬스터학을 배우게 되어있었다. 둘 다 키르쉬블뤼테에게는 재미있는 과목이었다. 이제야 마법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물론 새롭게 장만한 지팡이를 아직 쓸 일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고학년 과목에는 마법 지팡이가 꼭 필요하다니 키르쉬블뤼테는 학습 의지가 샘솟았다.


오늘은 두 과목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교과서 두 권을 챙겨 로젠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 블라우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마법의 역사는 뛰어난 위저드이자 악마인 스피넬로부터 시작하네. 스피넬은 인류에게 불 마법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인류가 다른 동물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오른 이유가 되었네. 인류는 석기 시대를 빠르게 벗어나 철기 시대를 맞았네. 마법사들은 왕이 되거나 왕의 참모가 되었네. 전쟁은 누가 더 강력한 마법사를 많이 보유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지.


반면에 마법의 암흑기도 있었네. 인구가 늘고 경작지가 부족해지자 인간은 동물의 영역을 침범했네. 그러자 동물의 전염병이 사람들에게 옮겨지게 되었네. 병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치유하는 마법사는 여기저기 모셔져 갔지만, 방어와 공격계의 마법사들은 천대받았다네. 심지어 치유의 마법사 외에 다른 마법사들은 악마 스피넬을 섬기는 악마 숭배자이자 질병의 원인으로 낙인찍혀 화형당하고 말았네.


이에 마법사들은 지하 조직을 만들어 지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썼네. 이때 혈통으로도 마력이 유전되는 현상이 일어났고, 그들은 선천적 마법사라는 뜻인 소서러라고 불렸네.”


키르쉬블뤼테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렇다면 원래는 모두 위저드라 불린 건가요?”


“그래, 맞네. 종교의 힘이 잦아들고 마법이 허구적인 이야기 소재로 전락하자, 10년 전 3월 31일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시위를 했네.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지.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숙제는 교과서를 한 번씩 모두 읽어오는 거다. 양심에 따르도록.”


“고생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이 일찍 끝나 환호성을 지르며 교실을 떠났다. 


키르쉬블뤼테의 학창생활은 화창했다. 그가 2학년 사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비밀스러운 사람인 로젠과 가까워지지기 전까지는. 그후 사방에서 키르쉬블뤼테를 질시하는 적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키르쉬블뤼테가 한 발표에 공격적으로 질문하거나, 나쁜 소문을 퍼뜨리거나, 마법 피구에서 키르쉬블뤼테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 등이었다. 


마침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레네가 마법 피구를 하자고 운동장에서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레네 곁에 키르쉬블뤼테가 있는 것을 보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이레네는 운동장의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마법 피구의 블록 소환 주문을 외웠다. 얄궃게도 가위바위보 때문에 키르쉬블뤼테는 선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법 피구는 일반 피구와 비슷하게 선 안쪽의 사람을 선 바깥쪽이나 반대편의 선 안쪽의 사람이 공격하고, 선 안에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은 팀이 지는 것은 같았다. 그러나 발 아래에 그려져 있는 정사각형을 밟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투명하게 되거나, 하늘을 날게 하거나, 공격을 발생하게 하는 여러가지 효과가 발생하거나 했다.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드디어 마법 피구가 시작되었다. 팀은 아주 자연스럽게 위저드 대 소서러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 그들을 방패로 삼았으나 점점 사람이 줄어들며 키르쉬블뤼테만 남았다 . 상대편은 소서러 2학년인 마가레트 요하네스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먼저 키르쉬블뤼테는 ‘투명’이라 적히 블록으로 뛰어가 투명하게 변했다. 공이 마가레트에게 넘어가있었기 때문이어다. 마가레트는 매서운 표정을 하며 키르쉬블뤼테가 발자국 하나라도 남기는지 살폈다. 키르쉬블뤼테는 실수로 운동자 모래에 낀 자갈을 밟았고, 마가레트는 키르쉬블뤼테에게 공을 발사하듯 던졌다. 키르쉬블뤼테는 간신히 공을 안아 막아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위치는 알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투명 사각판에서 대각선 앞쪽에 있는 ‘작게’ 라고 쓰인 발판을 밟았다. 그러자 키르쉬블뤼테의 투명 마법이 풀리고 작아졌다. 


키르쉬블뤼테는 이건 그다지 현명한 판단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몸이 작아져서 공을 잡고 입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키르쉬블뤼테는 선 바깥, 반대쪽에 있는 위저드 팀에게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공을 던졌다. 


공을 무사히 받은 위저드는 마가레트에게 공을 던졌지만, 마가레트도 척 받아내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마가레트는 ‘날개’ 칸에 들어서서 공중으로 솟구치고는 하늘 높이서 키르쉬블뤼테를 내려다보았다. 키르쉬블뤼테는 불길함을 느껴 ‘크게’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커져 마가레트와 눈높이가 맞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가레트는 공을 던져고, 키르쉬블뤼테는 바로 받아들어 마가레트의 몸이 아닌 살짝 옆 지점을 향해 강속구로 던졌다. 마가레트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해서 몸이 커졌고, 당황해서 공을 받아내지 못하여 맞고 말았다. 키르쉬블뤼테와 위저드 팀은 몹시 기뻐하며 손에 손을 잡고 운동장을 돌며 시계 방향으로 달리며 춤을 추었다. 


그 시합 이후로 마가레트는 위저드에 대한 과격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몬스터학 수업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마법 사용 방식이 전혀 다른 위저드랑 소서러를 한 학교에 집어넣는 거, 좀 아니지 않아요?”


키르쉬블뤼테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아뇨. 인간이 다른 인간과 분리해서 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집단간의 소속감이 생기고, 타 집단과는 적대감이 생기죠. 이건 학교가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되는 말이에요.”


“넌 다수인 위저드니까 모르겠지. 이 학교에서 고귀한 소서러들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박대당하는지를.”


“글쎄요. 정말로 위저드가 소서러를 억압한다면, 요하네스 씨는 그런 발언조차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거 봐. 소서러랑 사귀고 있어서 자기가 소서러와 동급인 줄 아나봐.”


“우리 사귀는 소리 아닙니다. 친구입니다.”


키르쉬블뤼테의 심장께가 싸해졌다.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남들에게 친구일 뿐이라고 한 점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또한 로젠의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누구에게나 벽을 치는 성격’이라는 평가가 사실임을 절절히 느꼈다. 자신에게라면 특별하게 굴어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전과 달리 어색한 기류 속에 수업을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키르쉬블뤼테는 저번의 그 여성에 대한 꿈을 꾸었다. 여성은 제정신이 아닌지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했다.


“키르쉬블뤼테, 보고 싶어…”

“키르쉬블뤼테, 너는 내가 안 보고 싶니?”

“키르쉬블뤼테, 왜 여길 오지 않는 거야…?”


키르쉬블뤼테는 그 여성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누군데 저를 계속 부르시는 건가요?”


여성은 말하려고 했으나 말하기 전에 꿈에서 깨버렸다.


키르쉬블뤼테는 잠에서 깨어난 동시에 이건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젠 빼놓고는. 그는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키르쉬블뤼테는 남자 소서러 기숙사의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와서 키르쉬블뤼테에게 물었다.


“바이스 씨 아니에요? 누굴 찾나요?”


“2학년의 로젠 크란츠를 찾고 있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키르쉬블뤼테는 그가 혹시 자신이 위저드라는 이유로 비협조적으로 나올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잠시만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문을 열고 로젠이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요즘 어떤 여자가 감옥에 갇힌 채 저를 계속해서 부르는 꿈을 꿔요. 뭔가 특별한 현상인 걸까요?”


로젠은 잠시 굳은 얼굴을 했다.


“실은 나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정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우리가 동시에 잠이 들면 함께 꿈에서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게 가능해요?”


“마법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죠.”


키르쉬블뤼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이번에는 함께 잠에 들어요.”


키르쉬블뤼테는 여성 위저드 기숙사로 돌아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또다시 저번의 여성이 갇힌 감옥. 그리고 이번에는 로젠이 함께 있었다. 로젠은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로젠이 보기에 그 여성은 키르쉬블뤼테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로젠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키르쉬블뤼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다음 번에는 정보 습득의 차례였다. 꿈 속의 그 여성이 무언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라면, 역사적 기록이나 마법사 법정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일주일간 얼마 없는 여가시간을 쪼개어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안 나오면 지하 서고에 가야겠는데…”


“그런 것도 있어요?“


“너무 오래된 책이나 금서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1학년 때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서 기억이 났습니다.”


“가보죠, 오늘 밤.”


“좋습니다.”


그날 밤, 키르쉬블리테와 로젠은 도둑들처럼 은밀하게 투명 마법을 건 채 지하 서고로 향했다. 서고로 향한 길은 죽 곧아보였다.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랬고, 로젠은 한 걸음 걷자마자 키르쉬블뤼테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달려렸다. 그러다가 앞에 산성 슬라임이 가로막고있자 키르쉬블뤼테는 기겁했다.


“저거랑 싸워야 해요? 둘 다 마법 전투술 아직 안 배웠지 않아요?”


“저렇게 무언가가 가로막는다면 공격하지 말고 피하거나 기절시켜요. 괴물들이 죽으면 우리가 침입한 티가 날 테니까.”


그들은 미로 안에서 길을 찾으러 뛰어다녔고, 괴물들은 그런 두 사람을 뒤쫓아갔다. 5분간 뛰고 나니 두 사람은 도서관 문 밖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미로같은데 길을 꽤 잘 찾으시네요?”


“이용자들이 오래된 책을 빌리려 할 때마다 미로 찾기를 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키르쉬블뤼테도 하시겠습니까?”


“싫어요.”


키르쉬블뤼테는 단칼에 거절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들을 맞아주는 것은 먼지 냄새가 나고 텁텁한 공기와 낡은 책과 그것들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금서였다. 그리고 서가만큼 커다란 마법 인형. 로제는 반사적으로 마법 지팡이를 꺼내드는 키르쉬블뤼테를 막고는,


“저건 책 검색을 돕는 마법인형이니 공격하면 안 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마법인형에게 검색을 요청했다.


“금서 중에서 최근 19년 내 만들어졌고, 성이 ‘바이스’인 자가 피고인 재판 기록이 있는지 살펴주시겠습니?”


“검색 중…”


“잠깐만, ‘바이스’는 내 성이잖아요. 내 친족일 거라고 왜 확신하는 거에요?”


“키르쉬블뤼테는 자기 얼굴을 잘 안 봐서 모르겠지만, 당신, 그 사람하고 얼굴이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그럴 수가…”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검색 인형이 두꺼운 판례 책을 가지고 왔다.


“혹시 아까 말했던 그 조건으로 다시 검색 가능할까?”


키르쉬블뤼테의 말에 인형은 판례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보여주었다.


피고: 아펠블뤼테 바이스

죄목: (열람 불가)


키르쉬블뤼테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대체 엄마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죄목이 모두 열람 불가냐' 라며 마법 인형에 대해 삿대질을 했으나… 마법 인형은 침묵을 지켰다. 


“로젠. 아펠블뤼테는 죽은 우리 엄마 이름이에요. 죄목이 궁금해 미치겠는데 혹시 더 검색 가능해요?”


로젠은 사색에 잠겨들었다가 키르쉬블뤼테가 “로젠!” 하고 강하게 소리치자 로젠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미안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펠블뤼테는 죽은 엄마 이름이라고요. 그런데 마법 인형은 열람 못 하게 해요. 어떻게 할까요?”


로젠은 키르쉬블뤼테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 잠시간의 침묵. 그러다가 로젠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위저드와 소서러의 장점만 취한 신인류 ‘메이지’ 탄생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뇨, 전혀 모르고 있는데요 왜요?”


“그럼 모르고 있는 편이 낫습니다.”


로젠은 뚜벅뚜벅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또 뭔데요, 신경쓰이게.”


로젠은 무감정하게 말하며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또다시 침묵.


“몰라도 되니까 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 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왔던 길을 따라서 지상 도서관으로 몰래 들어왔다.


하지만 키르쉬블뤼테는 지상에 들어올 수록 점점 화가 났다. 그러다가 분노를 터뜨렸다.


“이봐요, 크란츠 씨. 내 엄마가 당신하고 관계가 있어보이는데, 지금은 이상한 정보를 줘서 날 혼란스럽게 하고 혼자만 알고 있으면 다에요? 또, 평소에는 그렇게 달콤하게 굴다가 누가 물어보면 친구라고 대답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그제서야 로젠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눈꺼풀을 움찔했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잔혹한 현실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키르쉬블뤼테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걸 알아 더 신중하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당장 직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요, 그게 맞습니다.”


“날 좋아해요?”


“사랑합니다.”


“얼만큼?”


“벚꽃이 피고, 그 때 당신과 함께했던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나는 매 년마다 벚꽃이 피는 때를 기다릴 겁니다. 그만큼 사랑합니다.”


“나도 사랑해요. 색색깔의 장미가 피는 여름을 기다릴 정도로.”


어찌되었든 두 사람은 성사되었고, 연애하고 있음을 주변에 알리자 축하를 받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을 째려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마가레트 요하네스를 보고 깔깔대면서 로젠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사실 이 관계는 불안정한 점이 있었는데, 이 관계는 어느 정도 키르쉬블뤼테에게 진실을 숨긴다는 전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대체, 누가, 어떻게, 왜, 언제 위저드와 소서러의 장점만 살린 신인류 ‘메이지’ 탄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학기 중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마법 역사학과 몬스터학을 예습, 복습, 오답노트, 기출문제 (마법사의 거리에서 어떤 선배가 만든 것을 샀다.) 풀이를 하느라 잔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1학년 때보다 과목 수는 더 적어졌지만 그만큼 문제는 더 복잡하고 세밀해져 학생들이 틀리라고 내는 문제도 있는 듯했다. 


특히나 키르쉬블뤼테가 이번 기말 고사에 긴장하는 이유는 로젠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의 월반으로 두 사람이 같은 학년이 되었다는 것은, 곧 두 사람은 전교 1등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누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지 매일 대결 중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은 무시무시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둘은 일련번호가 가까운 학업을 위한 AI라던가, 이해하지 못한 개념은 빵에 샌드위치처럼 넣어서 씹어먹는다던가, 자신의 목 뒤에 전선을 달아서 교과서의 내용을 다운로드 하는 중이라던가. (교과서는 종이책이었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그런 소문에 어이없어서 깔깔 웃곤 했다.


드디어 기말과 날이 왔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 쌍둥이는 키르쉬블뤼테가 해준 수련이 끝난 뒤라 온 몸을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레네와 디트리히, 키르쉬블뤼테와 로젠 역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잘 해!”


“좋은 결과 있길 바라요!”


1교시 마법 역사학의 문제는 연표를 거의 달달달 외우고 있어야 풀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역시나 많은 학생들이 못 맞출 것 같았다. 키르쉬블뤼테조차도 백점을 장담할 수 없어 예외가 아니었다. 유일한 예외는 시험이 쉬웠다고 눈치없이 말하는 로젠이었다. 그는 재수없게 말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간지럼 형벌을 받았다. 


2교시 몬스터학 또한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거나 오답을 내는 경우가 속출했다. 겨우 2학년인 학생들을 너무 시련에 내던지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많았다. 그러자 4학년 학생들이 내가 맞으면 남들도 맞고 내가 틀리면 남들도 틀린다는 이야기를 하며 간신히 진정시켰다. 


기말고사가 끝나자 학교 축제가 시작되어, 밴드부의 공연을 보며 모두들 웃고 노래하고 춤췄다. 여러가지 길거리 음식은 식욕을 자극했고, 손으로 만든 수공예품은 소장욕을 자극했다. 키르쉬블뤼테는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만든 푸른 장미 화환을 사서 로젠과 커플 아이템으로 나누어 가졌다. 


모두들 2주 뒤에 집으로 성적표가 발송된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신 그들은 키르쉬블뤼테가 전교 1등일지 로젠이 전교 1등일지 내기하는 편을 더 좋아했다. 지금은 안정적으로 로젠이 1등일 것에 거는 사람들이 더 많아, 키르쉬블뤼테 쪽으로 건 사람들은 배당금을 더 받는다고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짐을 쌌다. 이번 여름방학은 연인과 친구들이 집을 순서대로 방문할 예정이었다. 순서는 로젠 - 이레네와 디트리히 - 리프리히와 루트비히 - 키르쉬블뤼테일 예정이었다.


여섯 사람은 먼저 로젠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로젠은 도착하기 직전 당부의 말을 했다.


“내 집 보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에이, 그런 일이 있겠어요? 그런 예의 없는 녀석이 여기에 있다면 절교해버릴 거에요.”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을 제외한 모두에게 경고했다.


로젠은 조금 더 걷더니 팔을 들어보였다. 그곳에는 허름한 시골집이 있었다.


“여깁니다.”


로젠을 제외한 다섯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장학금 받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도…?”


“장학금에서 생활비, 등록금, 교재비 빼면 남는 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집에서 여러분이 자기에는 싫습니까?”


다섯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고아라,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반드시 벗어날 거야. 힘 내.”


“고맙습니다, 이레네.”


로젠은 부엌으로 와서 정성껏 닭고기 오트밀 수프를 끓여주었다. 친구들은 로젠이 왜 그토록 오는 사람에게 벽을 치는지 알 것 같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계를 허물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키르쉬블뤼테 덕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제 남은 수프를 싹싹 해치운 친구들은 이레네와 디트리히의 집으로 향했다.


“참, 여기 고양이 알레르기 있는 사람 있어?”


디트리히의 말에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디트리히와 이레네는 모두를 안내하며 집에 다다랐다.


이레네는 울타리 문을 열고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 우리랑 예전에 말했던 친구들 데려왔어요!”


“그래, 들어오렴!”


이레네와 디트리히의 집은 고양이 다섯마리와 함께 사는 집이었다. 디트리히는 고양이들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저 흰 녀석은 아렌트, 검은 녀석은 하이데거, 노란 녀석은 버틀러, 등만 검은 녀석은 마르크스, 삼색인 녀석은 엥겔스야.”


“사상가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네이밍 센스네요.”


키르쉬블뤼테가 감탄(?) 하자 이레네가 한 술 더 떴다.


“그럴 줄 알고 내가 트럭 면허를 따놓았으니 안심하라고!”


“트럭 면허는 대체 왜 따둔 거에요?”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면 그게 좀비 사태지 뭐야? 내 가족이랑 친구들 데리고 도망다니려면 트럭이라도 몰아야지.”


“그것 참 감동적이네요…”


키르쉬블뤼테의 어이없어하는 대답도 잠깐, 손을 씻고 소파에 앉자 고양이들이 앞다투어 인간들의 무릎을 차지했다. 리프리히는 혼자 남게 되었는데, 리프리히는 루트비히랑 자기랑 똑같이 생겼는데 자기만 동물들이 싫어한다고 입이 댓발 나왔다. 선택받은 다섯 사람은 실컷 고양이들의 배와 젤리를 만지고 쓰다듬으며 천상의 행복을 즐겼다.


“이거봐! 마르크스랑 엥겔스가 너무 귀여워! 나한테 애교 떨어!”


루트비히의 외침에 리프리히가 삐진 상태로 말해주었다.


“기분 이상하니까 제발 괄호 열고 고양이 괄호 닫고 말해줄래?”


루트비히는 리프리히에게 메롱메롱 메에롱을 시전했고, 키르쉬블뤼테는 그들의 진짜 정신연령은 몸의 나이 열아홉살에서 앞자리를 뺴야 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고양이를 데려오신 거에요?”


키르쉬블뤼테의 질문에 디트리히가 답했다.


“모두 길에서 주워왔어. 당연히 어미가 며칠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데려왔지. 원래는 임시 보호였는데, 임시 보호를 일 년 넘게 하고 있어서 슬슬 우리 식구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사랑스러운 고양이들한테 사랑받는다는 것도 참 복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이 한 마디씩 말했다. 


고양이를 놀아주다가 시간이 다 갔다. 여섯 사람은 한데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이 시간이 끝남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으아악!”


로젠의 비명소리에 모두가 깨버렸다. 로젠의 배 위로 떨어진 버틀러는 태연하게 그루밍을 했다.


“이 집에서는 모닝콜을 고양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해줍니까…?”


로젠의 황당한 표정을 본 이레네는 버틀러처럼 태연했다.


“응. 참고로 걔가 살 쪘을 때 디트리히는 갈비뼈가 나간 적도 있었어.”


“그래서 다이어트를 시켰지.”


디트리히 또한 태연하게 말했다.


네 사람은 고양이 키우는 것도 쉽지 않겠다고 말해주고는 나란히 욕실에서 씻고 나와 나갈 채비를 했다. 이레네와 디트리히의 집 앞에서 그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리무진이 도착해있는 것을 보았다. 리무진의 안에서 사람이 나와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뒤에 있는 분들은 친구입니까?” 라고 물었다. 루트비히가 그렇다고 말하자 기사는 리무진의 뒷문을 열어주고 여섯 사람이 모두 탄 뒤에 문을 닫았다. 리무진이 출발했다.


한참 달린 끝에 그들은 쌍둥이의 집 앞에서 내렸다. 다채로운 빛깔의 장미가 핀 정원을 걷자 장미 향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멀리 보이는 성은 하얀색 석조에 보랏빛 지붕이 덮인, 규모가 대단한 성이었다. 


“우리 집 정원 예쁘지? 장미는 향도 좋고 여러 색상이 많아서 참 좋아.”


“네, 엄청 예쁘네요. 저기 사진 찍고 노는 커플이 있는데 개방된 곳이에요?”


“우리는 그냥 들어간 거지만, 원래는 돈을 내야 해. 일종의 유료 개방으로 하는 관광 사업이지.”


“장미의 철이니 사람도 엄청 많겠습니다. 수입은 짭짤하고?”


리프리히가 픽 웃었다.


“맞아. 조상님의 사치 덕분에 우리들이 먹고 살지. 또 뭐였더라,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히틀러 암살 작전에도 참가하셨는데 실패해서 영국으로 피신하고, 다시 돌아와서는 성 지하 창고에 유대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을 숨겨줬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지상으로 올라온 한 사람이 보랏빛 장미의 꽃씨를 선물해줬어. 그 덕분에 보랏빛 장미가 성 밖을 에워쌀 수 있었지. 아, 저기가 정문이야. 내가 초인종을 누를게.”


리프리히와 루트비히가 뽀르르 달려가, 리프리히는 초인종을 누르고 루트비히가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와, 비올렛발트의 저택에!”


쌍둥이와 그의 친구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다. 쌍둥이의 아버지가 직접 비올렛발트라는 이름의 보랏빛 숲에서 직접 사냥한 사슴 고기 구이를 메인으로 조개, 새우, 게, 생선류를 끓인 스튜, 라드 바른 소시지와 샤프란과 육두구를 비로한 각종 고체 향신료로 향을 더한 음식이 화려한 식탁에 올라왔다. 


배불리 먹은 쌍둥이의 친구들은 쌍둥이의 엄마로부터 말 한 필씩을 선물로 받고 승마를 배웠다. 그리고는 성 안의 연병장이었던 곳을 말과 함께 뛰어놀았다. 사람도 말도 지쳐서야 승마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날 밤.


“여기 밤 되면 유령 나온다?”


“아니, 무슨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키르쉬블뤼테는 핀잔을 주었지만 루트비히는 정말이라는 표정이었다. 루트비히가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지하로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유령이 천장에서 뚝 떨어졌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만 빼놓고 모두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깜짝이야!!!”


기겁하는 그들에게 유령은 “그간 초대객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달래줘서 고맙군.” 하고 낄낄 웃으면서 사라져 쌍둥이를 제외한 모두가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의 집 위치를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리무진은 고속도로를 달려가 키르쉬블뤼테의 집에 다다랐다. 여섯 사람은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키르쉬블뤼테의 짐은 평범한 규모의 가정집이었다. 그곳에서는 키르쉬블뤼테의 아버지 위르겐 바이스가 손님 맞을 채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앞치마를 입은 채 키르쉬블뤼테의 아버지는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내놓았다. 애피타이저로는 소고기 타르타르, 메인 메뉴는 후추 베이스로 오븐에서 통째로 구워낸 치킨이 갈릭 마요네즈 소스와 잘 어울리는 ‘로스티드 치킨’이었다. 디저트로는 커스터드에 얇은 캐러멜 층을 덮어 만든 크렘 브륄레였다.


“우리 아빠, 저번에는 러시아 요리를 해줬어요. 요리로 세계 일주를 하는 게 아빠의 꿈이에요.” 라며 키르쉬블뤼테는 웃었다.


위르겐와 친구들과 키르쉬블뤼테는 식사 후 정원에서 허브와 꽃향기를 맡아다. 위르겐은 이 정원에서 자라는 꽃 중 식용 가능한 건 판매하고 있다며, 키르쉬블뤼테의 친구들에게 허브차와 꽃차 선물 세트를 안겨주었다. 모두들 잘 마시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모든 학생들에게 성적표가 발송되었다. 


“아빠, 저 너무 떨리는데 성적표 아빠가 좀 열어봐주시면 안돼요?”


“그래. 하지만 네가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를 얻었었는지 신경쓰지 않는단다.”


위르겐은 성적표 편지를 개봉했다.


“모두 100점, 전교 1등이구나!”


“와아아악!”


키르쉬블뤼테가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평소 성적인데 왜 그렇게 기뻐하니?”


“제 애인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거든요. 그 사람도 공동 1등일지도 모르겠지만.”


“선의의 경쟁은 좋지. 고생했구나.”


“헤헤. 아빠 많이 고마워요. 사랑해요.”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송아지 고기로 만든 소세지인 바이스부르스트,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돼지 정강이 부위를 양파, 샐러리, 향신료를 넣고 부드럽게 삶은 슈바인학센, 버터에 볶아 익히고 소스를 얹은 국수인 슈패츨레  등등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식사가 제공되었다. 교장은 맛있게 먹고 이번 학년도 열심히 공부해달라고 했다.


“내 성적은 너무 들쭉날쭉한데다가 수학 점수가 너무 낮아…”


이레네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키르쉬블뤼테는 이레네에게 제안을 했다.


“이레네도 저한테서 과외 한 번 들어볼래요?”


“좋아, 나야 좋지. 아주 좋지. 고마워!”


이레네는 식사 중인 것도 잊고 일어서려 하다가 퍼뜩 다시 앉았다.


“아, 맞다. 키르쉬블뤼테한테 과외비 주는 거 까먹었다. 여기, 받아.”


루트비히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실링 왁스로 봉해진 흰 봉투를 주었다. 그 안에는 거액이 현금이 들어있었다.


“아, 이거 액수가 너무 큰데요. 게다가 전 그냥 친구 사이에 호의로 해준 거였는데.”


키르쉬블뤼테는 사양하려 했지만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굴하지 않았다.


“제발 받아줘. 응? 키르쉬블뤼테가 받아주지 않고 돈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가면 엄마 아빠한테 경우 없는 인간들이라고 혼날 거란 말야. 키르쉬블뤼테가 없었다면 우린 고르게 중상위권에 들어갈 수 없었을걸?”


“알겠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번 학기도 잘 가르쳐줄게요.”


“키르쉬블뤼테, 혼자서 가르치기 좀 힘들면 내가 좀 일을 나눠서 맡아줘도 괜찮겠습니까?”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의 볼에 입맞춤했다.


“아유 기특해라 기특해. 고마워요!”


그러자 로제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입술과 입술이 닿을 뻔해서 키르쉬블뤼테는 식겁했지만, 로젠의 ‘오늘 동시에 잠에 듭시다.’ 고 속삭여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시에 잠이 들었고, 이번에도 한 여성이 묶여있는 공간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이 바로 아펠블뤼테 바이스죠?”


“그래. 너는 누구지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로젠은 팔짱을 꼈다. “그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화를 종료하지.”


로젠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로젠 크란츠입니다.”


“몰라. 기억 따위 안 나. 별로 안 중요했나보지.”


아펠블뤼테는 콧방귀를 뀌고는 키르쉬블뤼테에게 질문했다.


“혹시 너는 키르쉬블뤼테니? 내 자식…?”


“정말로 엄마에요? 아빠는 엄마가 제가 어렸을 때 죽었다고 했는데, 살아 계셨어요?”


“그래. 사랑하는 내 아이야. 어서 오렴. 날 좀 풀어줘.”


키르쉬블뤼테는 홀린 듯이 천천히 다가가, 그에게 걸린 ‘결박’ 마법을 풀었다.


“안 돼! 키르쉬블뤼테! 하지 마십시오!”


로젠은 물리적인 간섭을 위하여 잠에서 깨자마자 먼저 여자 위저드 기숙사에 가보았다. 하지만 여자만 들어올 수 있게끔 마법이 걸린 문이라 손잡이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로제는 험한 말을 내뱉고는 창문으로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아펠블뤼테가 키르쉬블뤼테를 업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로젠은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교직원 기숙사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로젠 크란츠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열고 오게나.”


방 안에 들어간 로젠은 빠른 속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펠블뤼테 바이스가 딸 키르쉬블뤼테에게 마법을 걸고, 탈옥을 했습니다.”


“자네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나?”


“키르쉬블뤼테와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이후 잠에서 깨자마자 아펠블뤼테가 키르쉬블뤼테를 업고 함께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려주어서 고맙다. 이후 일들은 우리가 앞장서서 할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감사, 감사합니다.”


교장은 당장 대통령 리누스 하인리히에게 전화를 걸어 범죄를 저지른 마법사 아펠블뤼테가 마탑의 감옥에서 탈출했음을 알리기 위해 재난 문자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새벽에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자다 깨서 혼란스러워했다. 


곧이어 마법 경찰 세오리프가 출동해 아펠블뤼테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마법의 기운은 마법사마다 달라, 마법부에서는 마법을 이용한 범죄자들이 기운을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세오리프는 펜듈럼을 들고, 펜듈럼이 마치 자성을 띤 듯 아펠블뤼테가 있는 곳을 향하자 그쪽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수십명의 마법사들이 일렬횡대로 날아가는 것은 꽤나 장관이었다. 그들은 아공간을 파괴하며 안으로 강제 돌입했다.


맨 먼저 보인 것은 투명한 유리관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키르쉬블뤼테를 눕히고 자신은 밖에서 앉아 키르쉬블뤼테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백발을 낮게 머리카락을 묶어 한쪽으로 내린 적안의 여성이 있었다. 세오리프의  펜듈럼이 일제히 그를 가리켰다.


“아펠블뤼테 바이스, 맞습니까?”


“너희들은…? 또 내 연구를 방해하러 왔구나!”


“연구가 아니라 범죄겠지요. 저들도 당신의 범행 수법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오갈 곳 없는 고아 아닙니까?”


아펠블뤼테는 단체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세오리프는 주문을 방해하기 위해 마법 그물을 던졌다. 아펠블뤼테는 그물을 피하려다가 주문의 범위 설정을 잘못했다. 그래서 키르쉬블뤼테는 주문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다른 아이들은 아펠블뤼테와 순간이동해 사라졌다. 그러자 아펠블뤼테를 향해 꼿꼿이 떠잇던 펜듈럼들이 모두 축 늘어졌다.


키르쉬블뤼테는 그제서야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에요?”


“아펠블뤼테의 아공간입니다.”


“어머니, 아니, 아펠블뤼테는 어디로 갔나요? 아니면 이미 잡았나요?”


“안타깝게도 잡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펜듈럼의 탐지 범위를 벗어난 것 같습니다. 키르쉬블뤼테 바이스 씨는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국 하나 없었다.


“없어요. 감사합니다, 모두들.”


“예, 얼마든지 비상 상황에 처하면 이쪽으로 꼭 연락 주십시오.”


세오리프 중 한 명이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공손히 받아들었다.


“네, 알겠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파괴된 아공간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온 뒤, 키르쉬블뤼테는 치유마법사의 검사를 받았다. 확인 결과 아펠블뤼테가 그를 세뇌한 바람에 정신에 상처가 났다고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치유마법사의 치유 마법을 받고 편히 쉬었다.


마침내 키르쉬블뤼테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보건실을 떠나 기숙사로 향하자 1학년부터 3학년들까지의 위저드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연 상태였다. 키르쉬블리테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사방이 마법사들로 뒤섞여 비집고 들어갈 데가 없었다.


“아펠블뤼테를 무지른 용감한 영웅 키르쉬블뤼테 만세!”


무찌를 기회조차 없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키르쉬블뤼테에게 쏠려있었다. 정작 그를 구해준 건 세오리프들인데도. 로젠은 어디 있나 싶더니만 구석에서 ‘힘내십시오!’ 하는 표정으로 보고는 인파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왜 자신을 최초로 발견했는데도 영웅 자리는 자기한테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키르쉬블뤼테는 그동안 그가 ‘잘생긴 전교 1등’으로서 받았던 과도한 관심에서 좀 쉬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봐주기로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무엇보다도 아펠블뤼테가 데려간 아이들이 신경쓰였다. 그들은 어디에 쓰일지.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대비 뿐일 것이었다.


큰 모험이 있었다고 해도 시간은 자비없이 흘러갔다. 키르쉬블뤼테는 못 들은 수업을 일과 후 보충 학습으로 들었다. 그러다가 키르쉬블리테는 마법 역사학 교사인 블라우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자네는 왜 공부를 하는가?”


“어… 글쎄요. 그냥 한 만큼 결과가 잘 나오니, 성취감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그, 뭐냐, 게임 캐릭터 키우듯이.”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는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했네. 성취감도 공부하는 이유가 충분히 될 수 있지. 좋은 대답이었네.”


‘감사합니다. 수업 고생하셨습니다.”


키르쉬블뤼테는 학교 구내 카페에서 친구들을 불러놓고 이 질문을 자신이 해보았다. 대답은 이레네 - 디트리히 - 쌍둥이 - 로젠 순이었다.


“난 악한 마법사가 나타났을 때, 걔네들을 쓰러뜨리고 정의를 되찾고 싶어.”


“그럼 나는 이레네를 도와줘야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가문에 누가 되지 않거든.”


마지막으로 로젠의 차례.


“나는 키르쉬블뤼테를 지키기 위해 마법을 배웁니다.”


눈꼴시리다는 학생들은 야유를 하고, 어떤 이들은 너무 멋있다며 이미 임자가 있는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지고 싶다고 했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성취감 하나 뿐이지만, 로젠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마법을 공부하고, 저도 로젠을 위해 마법을 배우는 것도 좋겠네요.”


야유하거나 낭만적이라고 황홀한 표정을 짓는 이들 앞을 당당히 지나치며 키르쉬블뤼테는 급식을 먹으러 갔다. 키르쉬브뤼테는 로젠이 자신을 지키는 게 꿈이라 했으니, 자신은 세상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2학년 중간고사. 보충수업으로 개념을 메꾼 키르쉬블뤼테는 파바박 답을 적어내려갔다. 이번에도 마법 역사학은 연표를 가로세로위로 아래로 입체적인 암기를 요했고, 몬스터학은 함정 문제로 학생들을 헷갈리게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움직이는 돌다리를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문제의 답을 검토하자 시험 시간이 끝났다. 


이레네와 디트리히, 리프리히와 루트비히,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을 함께 붙어다니며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과 다른 친구들이 너무나도 좋고 소중했다. 소서러인 로젠이 끼어있어지만 그 누구도 서로를 멸시하지 않았다. 키르쉬블뤼테는 다른 마법사들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레네, 리프리히, 루트비히의 성적이 차츰차츰 더 오르고 있었다 2학년 때부터는 키르쉬블뤼테가 바빠서 과외를 해주기 어렵다고 하자, 그들은 키르쉬블뤼테의 공부 방법을 배워갔다. 그냥 수업 열심히 듣고, 필기하고, 요점 정리하고, 마법사의 거리에서 기출 문제집 사서 풀고, 오답노트 정리해서 읽고 반복 또 반복밖에 없지만 말이었다. 로젠에게 이게 맞냐고 세 사람이 묻자 똑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키르쉬블뤼테는 좀 믿으라고 한소리 했다.


중간고사 후 짧은 방학. 다섯 사람은 옥토버페스트에서 맥주와 소시지를 먹고 즐겼다. 그런데 키르쉬블뤼테는 맥주를 많이 마시지 않아 로젠이 묻자, 맥주는 배가 부르니 더 많은 소시지를 즐겁게 먹기 위해 맥주를 덜 먹기로 했다고 했다. 로젠은 역시 키르쉬블뤼테는 먹을 줄 안다며 콩깍지 씐 칭찬을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의 볼에 연신 입맞춤을 하며 나머지 네 명의 술맛을 떨어지게 하였다.


짧은 방학 후 학교로 돌아간 여섯 사람은 마법 피구를 했다. 여섯 명으로는 부족해서 지나가는 1~3명을 끌고 왔다. 여러 발판을 밟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다보니 키르쉬블뤼테와 로젠밖에 남지 않았다. 


“전 연인이라고 봐주지 않겠으니 로젠도 그렇게 해줘요.”


그리고 정말로 봐주지 않는 로젠 때문에 최후의 1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삐져버렸고 로젠은 풀어주고자 키르쉬블뤼테의 뒤에서 포옹했다.


피구가 끝나고 각자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잠시 회의했다.


“키르쉬블뤼테. 4학년 과목인 마법 전투술하고 마법 치유술을 더 먼저 배울 수 있도록 교사들에게 부탁드려볼까요?”


“네, 안 그래도 제가 하려 했던 말이에요.”


아펠블뤼테는 세오리프조차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갔고,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모두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이 두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4학년이 되어 과목을 수강할 수 있을 떄까지 기다렸다가는 아펠블뤼테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법 전투술, 마법 치유술 교사의 의견은 긍정적이었다. 교장의 의견도 일치했다. 두 사람은 2학년이 끝난 후 내년부터 마법 전투술과 마법 치유술을 배우게 되었다.


몬스터학 시간에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실험용으로 데려온 그리폰이 난데업이 키르쉬블뤼테에게 기습 공격을 한 것이다. 교사가 직접 길들인 녀석이라서 교사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키르쉬블뤼테가 반사적으로 불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것도 마법을 시전하려면 3차원 좌표 계산을 해야 하는 위저드와 달리, 소서러처럼 직관적으로 마법을 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키르쉬블뤼테를 쳐다보았고, 키르쉬블뤼테는 부끄러움 속에서 수업을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가려 하다가 몬스터학 교사 베푸어펜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베푸어펜은 여러가지 질문을 했지만, 키르쉬블뤼테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모른다’ 밖에 없었다. ‘정말로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나요?’ 하면서. 


그래서 이 사건은 키르쉬블뤼테를 더 유명하게 만든 미스터리가 되었다. 이 미스터리가 어떻게 풀릴지, 그 때의 키르쉬블뤼테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법 역사학의 강의에서는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유물과 유적들을 실제로 보기 위해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하고 조사했다. 먼 고대에는 위저드와 소서러가 각자 맡은 일을 협동해서 수행했지만 마법사들이 국가로 나뉘고 위저드와 소서러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위저드와 소서러 사이는 적대적으로 변했다. 그러자 기독교가 세력을 넓히자 마법사들은 악마숭배자로 몰려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현대에 와서는 존재함을 널리 알리며 위저드와 소서러는 다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마법 역사학 교수는 그 주장에 동의한다고 말했지만, 시큰둥한 표정을 짓지 않은 학생들은 키르쉬블뤼테와 로젠, 그리고 디트리히 뿐이었다.


2학년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디트리히, 키르쉬블뤼테, 로젠은 마법 역사학과 몬스터학을, 이레네, 리프리히, 루트비히는 국어와 라틴어, 그리고 수학 과목을 시험보게 되었다. 난롯불에 마시멜로우를 구워먹고, 허니버터 디카페인 커피도 한 잔 한 그들은 높은 성적을 받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마법 역사학과 몬스터학은 저번에 너무 어려워졌다고 학생들의 불평이 거세었던 모양인지 이번에는 상당히 쉽게 나왔다. 이번 시험은 역시나 (임시) 자유를 찾은 학생들의 환호성 속에서 끝이 났다.


키르쉬블뤼테는 다섯 사람을 모이게 했다.


“이번 방학에는 함께 해외에 가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요?”


리프리히가 나섰다.


“요즘 한국 드라마가 인기던데 한국에 가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로젠의 여행비는 모두 우리 사비로 낼게.”


루트비히는 로젠의 손에 카드를 쥐어주었다.


“마음껏 써.”


“정말 고맙습니다.” 로젠이 조심스레 카드를 받아들고는 미소했다.


그들은 서울에 가기로 하고는 계획을 짰다. 한국의 전통 의상이라는 한복을 입고는 궁궐 산책, 인사동의 전통 음식점과 전통 찻집 가기등을 야무지게 계획에 꽉꽉 눌러담았다. 내일 아침 여섯 사람은 마탑 근처의 마법사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모두들 잠에 들었다.


마법사의 카페에 속속 일행들이 도착했다. 가장 먼저 도착해 돌체 라떼를 마시면서 기다리던 키르쉬블뤼테는 친구들이 올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에 이레네와 디트리히가 도착하자, 그들은 짐에 빠진 것은 없는지 체크하고는 공항을 향해 떠나다. 그들은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가 올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비행기가 오자 탑승했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거라 몹시 신나고도 긴장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법, 산소 마스크가 내려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긴장된 자세로 꼼꼼히 배웠다. 옆의 로젠을 보니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레네와 디트리히, 그리고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멍하니 있는 것을 보니 해외여행을 좀 하는 것 같았다.


기내식으로는 한국 음식인 비빔밥을 먹었다. 각종 채소와 고기에 매콤달콤한 고추장이 어우러져 상당히 맛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수면 안대와 귀마개를 사용하며 수면을 취했다.


아펠블뤼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엄마가 너를 그 자들로부터 꼭 되찾을게. 사랑한다.”


키르쉬블뤼테는 식은땀을 흘리며 소스라치게 놀란 채 잠에서 깼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펠블뤼테가 나를 찾는 꿈을 꿨어요.”


로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평범한 꿈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일단 여행 동안 잘 때 불침번을 섭시다.”


“아까 전에 푹 잤으니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설게요.”


키르쉬블뤼테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 점이 더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펠블뤼테를 찾아내 뭘 하기에는 일행 모두 마법 전투술과 치유술을 배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키르쉬블뤼테는 만일의 경우 자신만 넘기면 나머지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섯 사람은 비행기에서 낼 일단 숙소부터 찾아가 짐을 풀었다. 세 개의 커다란 침대에 쌍둥이가 퍼질러 누워서 뒹구르르 굴렸다. 비행기에서 자는 잠이 편치는 않았던 것 때문에, 여섯 사람은 외출복 차림으로 반나절 꿀같은 잠을 자고 말았다.


“내 차례였는데, 잠들어버려서 미안합니다.”


로젠이 어쩔 줄 모르며 사과의 말을 했다.


“괜찮아. 비행기에서 처음 자본 게 불편했지?”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섯 사람은 주섬주섬 신발로 갈아신었다. 그리고는 일단 산책을 갈 에너지 확보를 위해 인사동의 음식점부터 가보기로 했다.


인사동은 활발하고 떠들썩한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여러가지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전통적인 문양으로 꾸민 기념품점도 있었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가 그걸 사려고 할 때마다 키르쉬블뤼테는 가지고 가서 항상 쓸 결심이 있냐고 물었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물론!” 하면서 기념품들을 쓸어담았다.


여섯 사람은 ‘인사동 숯불갈비’ 라고 쓰인 곳에서 멈추었다. 지나칠 수 없는 고기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홀린듯 들어간 그들은 4인분을 주문했다. 자리가 배정이 되고 밑반찬이 나왔다. 키르쉬블뤼테는 밑반찬 갯수에 놀랐다 계란말이와 간장양념 소스를 얹은 양배추 등을 집어먹다가 고기가 나왔다. 직원이 먹기 좋게 직접 잘라 구워주었다. 


접시에는 갈색 액체에 동그랗고 얇게 썬 양파가 있어서 고개와 곁들여먹기 좋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상추에 갈색 액체를 찍어 먹은 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양념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쌈장에 곁들여도 굉장히 맛있었다. 디트리히는 쌈장에 청양고추를 찍어먹어보는 간 큰 짓을 저질렀는데, 입에서 불을 뿜는 한 마리 레드 드래곤이되었다. 다행히 계산대 옆에 무료 아이스크림이 있어서 매운 입을 달랠 수 있었다.


고깃집에서 퍼간 아이스크림을 든 채 여섯 명의 여행자들은 인사동 거리를 누볐다. 그러다가 키르쉬블뤼테가 저거로 단체복을 입자고 해서 모두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외국인’ 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파는 노점상이었다. 지금 입기에는 얇은 옷이지만, 키르쉬블뤼테는 모두에게 선물로 한 장씩 나눠 호텔 잠옷으로 입자고 했다. 이유는 세 글자가 맘에 들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기어이 그 티셔츠를 구매한 키르쉬블뤼테는 티셔츠에 쓰인 단어의 뜻을 번역기로 알려주며 깔깔 웃었다.


다음에는 전통 찻집. 인사동을 걸어다니다 보니 입간판에 차 사진이 있는 가게가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향긋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번역기의 힘으로 ‘오미자차’를 시켜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메뉴를 골랐다.


잠시 기다리자 오미자차가 나왔다. 설명에는 다섯가지 맛이 난다고 해서 마셔보았는데, 설탕이 많이 들어간 탓인지 신맛과 단맛밖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맛있어서 키르쉬블뤼테는 맛있게 마셨다. 차에 곁들여 나온 건 ‘약과’ 라는 기름에 튀긴 한국의 전통과자라고 하는데, 역시나 기름지고 달콤한 맛이 났다. 여섯 사람은 약과를 추가 주문하고 맛있게 먹었다.


그 다음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 이라는 곳을 산책하기도 했다. 한복 거리에 들어서자 색색깔의 한복이 눈에 들어와 너무나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여섯 사람은 가장 많은 수의 한복을 진열해둔 가게로 갔다. 여자들은 여성 한복을, 남자들은 남성 한복을 입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도 남자 한복을 입어보고 싶어했지만, 가게 주인이 그에게 맞는 사이즈의 남성 한복은 없다고 해서 시무룩해졌다.


여섯 사람은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복을 입고 가서 무료였으며, 무료 해설 관람을 영어로 신청했다. 경복궁의 상징으로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근정전, 한글 창제가 이루어졌다는 집현전이 있던 수정전,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였던 경회루, 왕의 공식적인 업무가 치러지던 사정전, 왕의 일상생활공간인 강녕전, 왕비의 침전이었던 교태전, 떠오르는 해처럼 다음 왕위를 이끌 사람인 세자가 활동하던 동궁, 왕의 수라와 잔치 음식을 준비하던 소주방,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를 위해 지어진 자경전, 연못인 향원지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향원정,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되었던 집옥재, 죽은 왕과 왕비를 모시는 곳인 태원정을 둘러보았다.


즐거웠던 기억을 남긴 채 한복을 반납하고 지친 일행은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좀 쉬엄쉬엄 가죠…”


모두들 찬성하고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10초안에 기절하듯이 잠을 잤다 불침번인 리프리히를 제외하고는.


아침 9시에 일어난 여섯 사람은 호텔 조식을 먹었다. 프렌치 토스트, 소세지, 양상추 샐러드, 모닝빵과 잼을 집어 담고는 양껏 맛있게 먹었다. 


아침을 다 먹고는 TV로 개그 영화 몇 편을 보고 깔깔댔다. 평소 차분한 표정을 짓는 로젠 마저도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가 떨렸다. 키르쉬블뤼테는 웃기면 웃어도 좋다고 로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로젠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른 네 사람이 깜짝 놀랐다.


“와! 이제 로젠이 폭소도 해요. 저 덕분이죠?”


“예, 키르쉬블뤼테 덕인데… 고맙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말해요, 빨리.”


“…고맙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자 호텔 석식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깨끗하게 씻고, 여자들은 여탕에서, 남자들은 남탕에서 모여 스파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여자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물 피하고 웃어대고 난리난리 났지만, 남탕에서는 침묵이 이어졌다. 디트리히와 로젠의 사이를 이어주는 키르쉬블뤼테가 없기 때문이라고 로젠은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목욕을 마친 뒤 ‘외국인’ 티셔츠와 잠옷 바지로 갈아입었다.


목욕을 마친 여섯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고 보니 일정에서 하루가 남는지라, 호텔 근처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한 후 PC방에서 게임을 하자고 했다. 호텔 조식을 먹은 그들은 백화점에서 명품 향수도 시향해보고 명품 가방도 구경한 그들은 훨씬 더 짧게 지속되지만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아이쇼핑만 한 그들은 지하의 푸드코트에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먹는 방법은 번역기를 통해 직원에게 들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샤브샤브에 스위트 칠리 소스를 듬뿍 묻혀서 먹었다. 매콤달콤한 맛이 굉장하고 소고기 풍미가 있어서 먹기 좋았다.


조금 멀긴 했지만, PC방도 있었다. 모두들 잠시간 PC방의 푹신한 의자에 누워 여행의 노독을 잠시 풀었다. 그리고는 독일어 설정으로 PC의 언어를 바꾸고, 게임도 글로벌 서버에서 설치했다.


이 게임은 10대 중반~20대 후반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게임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게임 용어를 하도 들어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제는 서로의 모습으로 게임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고는 캐릭터의 이름을 짓는 데 고심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키르쉬블뤼테의 캐릭터는 로즈로, 로젠의 캐릭터는 체리블러섬으로 결정했다. 아주 볼품없는 1레벨 옷을 입고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인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만으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솟구쳤다 둘은 함께 초반 퀘스트를 하며 알콩달콩 놀았다. 


다른 친구들은 4인 던전을 돌며 더 좋은 무기와 옷을 얻기 위해 캐릭터를 쉼없이 움직이며 마법과 물리 공격을 하며 던전의 졸과 보스를 쓰러뜨렸다.


PC방을 나오자 슬슬 체크아웃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달려가자 체크아웃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공항에 가서 수다를 떨며 기다렸다. 공항에서 비행기가 오자 차례대로 탔다. 이번의 불침번은 루트비히였다. 일행들은 루트비히를 믿고 푹 잠들었다. 


잠시 후 키르쉬블뤼테는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드는것을 느끼며 깼다. 그는 루트비히였다.


“무슨 일 있나요?”


“아펠블뤼테라는 사람이 하늘을 날아와서 비행기 안의 승객들을 납치했어.”


앞을 보니 비행기의 문이 떨어져나가 있었다.


아펠블뤼테가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내 품으로 되돌아오지 않겠니?”


“싫어요. 꺼지세요!”


키르쉬블뤼테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대로라면 저 자의 손짓 한 번으로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해버릴 수도 있었다. 로젠은 옆에 있던 키르쉬블뤼테에게 눈짓을 보냈다. 키르쉬블뤼테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로젠은 키르쉬블뤼테를 사로잡고는 그의 목에 마법 지팡이를 겨누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당신 딸을 죽여버리겠어!”


키르쉬블뤼테는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초인적인 연기력으로 로젠과 아펠블뤼테를 번갈아 두려운 표정으로 보았다. 그러자 아펠블뤼테는 성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다음에는 자비 따윈 없을 거다.”


아펠블뤼테는 경고를 하고 갔다.


사람들은 안도의 환호성을 지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 때문이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단히 고마웠다. 이윽고 비행기가 공항으로 도착했고, 여섯 사람은 짐을 든 채 공항에서 벗어났다.


“다들 고생했어요. 모두들 새 학기 때 봐요.”


키르쉬블뤼테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쉬블뤼테, 로젠, 디트리히에게는 3학년, 이레네, 리프리히, 루트비히에게는 2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각종 해산물 요리와 와인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과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직원 기숙사를 방문했었다.


“교장선생님. 혹시 아펠블뤼테의 악행은 과거에도 있었나요?”


“처음엔 그냥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다. 항상 전교 상위권이었지.”


“그렇다면, 어머니가 비틀리게 된 계기가 저라는 걸까요?”


교장은 철저히 부정했다.


“아니야.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런 오롯이 아펠블뤼테 바이스의 죄이고, 그가 선택한 악의 길이다.”


“고맙습니다.”


키르쉬블뤼테의 말이 끝나자 로젠이 입을 열었다.


“4학년 과정인 마법 전투술과 마법 치유술을 미리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펠블뤼테로부터 위협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 사건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 담당 교사에게 미리 말해두겠다. 더 용건 없나?”


“없습니다.”


“그러면 나가보도록.”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이 언급했던 ‘메이지’ 탄생 프로젝트에 대해 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왜 아펠블뤼테가 자신에게 일반적인 모성애 수준을 뛰어넘은 집착을 자신에게 보이는지.


‘메이지’란, 위저드와 소서러의 장점만을 가진 가상의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마법사 문학에 몇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또한 메이지는 위저드와 소서러의 화합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어지는 존재라고 한다. 키르쉬블뤼테가 조사한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왜 이렇게 다들 제가 바로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거죠?”


“어떤 사실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로젠은 공범자가 된 듯한 표정으로 키르쉬블뤼테를 다독여주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각자 남은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냈냐고 이야기를 했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연애라고 답하여 리프리히는 “어휴 눈꼴시려!” 라고 했다. 관심이 싫은 로젠은 “나는 공부하느라, 이만 갑니다!” 라고 말하자 도망쳐버려서 남은 키르쉬블뤼테에게 간지럼 공격이 집중되어,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을 보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말하며 수업용 교실이 있는 3층으로 도망갔다.


드디어 마법 전투술 강의를 듣게 되었다. 4학년 학생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 빼고 수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제야 좀 마법사가 되었나 하는 심정이었다.


가장 약한 불 마법인 ‘불 화살’의 주문, 마법 지팡이의 동작, 수식 순으로 배운 뒤, 미리 준비된 나무인형에 던졌다. 이때, 키르쉬블뤼테는 수식을 푸는 척 하면서 몰래 주문과 마법지팡이만 가지고 쏘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무인형에 세 발 모두 명중하였다. 혹시나 해서 교수에게 제일 약한 얼음 마법인 ‘냉기 쏘기’를 배웠고, 이번에도 수식 없이 발사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혼란에 빠졌다. 후천적 마법사인 위저드는 그 비상한 머리로 수식을 암산하고 좌표를 지정하는, 그래서 마법을 배우려면 수학 계산 능력이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사실 자신은 소서러였던 것일까? 


그렇게 마법 전투술 시간이 지나갔다.


마법 치유술 수업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직 주문 난이도도 낮은, 상대의 어깨 등에 접촉하여 치유하는 ‘치유의 손길’ 마법을 배울 때는 수식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의 집중력이 빠져나가 엉뚱한 사람을 치유했던 것을 빼면 별 일 없이 지나갔다.


키르쉬블뤼테의 스푼에서 고기 국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리니 건너편의 쌍둥이가 로젠에게 물었다.


“로젠, 로젠! 키르쉬블뤼테가 졸아!”


로젠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키르쉬블뤼테에게 물어왔다.


“키르쉬블뤼테, 많이 피곤하십니까?”


“아, 아니요. 그냥 생각에 깊게 빠져서.”


“무슨 생각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자신을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로젠에 대한 복수였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때 이상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해 해답을 바랐다. 가설 중 하나는 자신은 사실 소서러지만, 마법을 쓴 적이 별로 없어서 소서러의 마법 시전시 마력의 흐름이 혼란스러워져 무작위로 걸리는 페널티를 안 받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최대한 여러번 마법을 사용해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키르쉬블뤼테는 실험을 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에는 몇 대의 나무 인형이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나무인형에 오늘 배운 ‘불 화살’과 ‘냉기 쏘기’ 그리고 ‘치유의 손길’을 반복하며 연습했다. 그러자 숫자가 100번을 넘어가도 소서러의 특징인 마력의 혼란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어라, 이거 이상하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보건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어?”


“네에… 전 어떤 상태였나요?”


“마력이 떨어져 죽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마법 공부를 하느라 그랬어요.”


키르쉬블뤼테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무슨 마법 공부를 지쳐서 죽어갈 때까지 하니! 널 찾던 로젠이 없었더라면 넌 방치되어서 죽을 뻔했어!”


보건교사의 화에 키르쉬블뤼테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걱정해주신 만큼 다음 번에는 절대 마법을 과도하게 쓰지 않을게요.”


“그래라.”


주변을 둘러보자 4학년 위저드반과 마법 공격술과 치유술 교사, 그리고 로젠이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먼저 로젠에게 포옹을 하고는,


“한 번 같이 강의 들은 게 인연의 전부였는데, 4학년 위저드반이 찾아왔다는 것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아니야, 너는 우리 위저드의 자부심이라고. 우리는 모두 네가 잘 되기를 바라.”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그러나 키르쉬블뤼테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위저드 중 한 명이,


“바이스 씨가 마법을 쓰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는데, 혹시 노하우 있어요?”


라고 하여 키르쉬블뤼테의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기만의 비밀을 동네방네 퍼뜨리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연습하다보니 손에 익어서 점점 더 빨라졌어요.” 라고 거짓 해명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의문의 투명한 액체로 된 수액을 맞으며 사흘 간 요양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세 번, 즉 하루에 한 번씩 도망가려 시도했다. 이유는 4학년들과 같이 마법 연습을 더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픈 학생들의 다사다난한 심리를 경력으로 인해 터득한 보건 교사의 방어로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키르쉬블뤼테는 너무 지루해서 창문 바깥의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며 실의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로젠이나 다른 친구들은 수업 듣고 공부하기에 바빠 잘 오지 않는 듯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연스럽게 상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체, 아펠블뤼테의 의중, 기타 등등. 소서러의 무작위 페널티 마법은 5퍼센트의 확률로 나타나게 된다는데, 자신은 100번 넘게 마법을 써도 한 번도 마력의 혼란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이 수식을 써도 되지 않아도 되는 위저드, 혹은 마법 사용시 마력의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 소서러,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두 종류 마법사가 가진 장점만을 가진다는 뜻은… 자신이 혹시 아펠블뤼테의 성공작은 아닌가? 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론에 다다랐다.


아펠블뤼테가 자신에 대해 지나친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라면 설명이 되었다. 마법 경찰 세오리프들이 아펠블뤼테의 실험실을 급습하고, 실험체들을 데리고 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은 아펠블뤼테의 딸이면서 성공한 실험작이니 더욱 더 집착할 것일테다.


그 다음은 로제. 수상할 정도로 ‘메이지’ 탄생 사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이 자신에게 접근해서 감시하는 아펠블뤼테의 스파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이상하게 키르쉬블뤼테에 대해 정보를 알려주는 방식이 뒤늦고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메이지’ 탄생 프로젝트에 대해 먼저 언급한 사람 또한 로젠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안전을 위해 로젠을 경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나흘째 아침날. 도끼눈을 뜬 보건 교사의 허락 하에 퇴원하게 되었다. 마법은 몸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한 달에 너무 많이 쓰지 말라는 보건 교사의 잔소리에 네에네에하고 답한 키르쉬블뤼테는 마법 전투술의 보충 강의를 들었다. 수식이 어려운 만큼 꼼꼼하게 암산하라는 교사의 말에 키르쉬블뤼테는 심란한 감정을 느꼈다.


마법 전투술 교사가 보충 수업으로 배운 마법이 시험을 본다고 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마법을 시전할 때 열심히 수식을 암산하는 척하면서 일부러 느리게 나무인형에 불과 얼음 마법을 사용했다. 교사는 다행히 못알아챈 모양이었다. 4학년 중 위저드가 그저 ‘잘하시네’ 하는 표정으로 있었다. 소서러들이 표정은 뭔가 께름칙하다는 느낌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제발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고 싶었다. 로젠의 표정은 다행스럽게도 무표정이었다.


그러나 키르쉬블뤼테는 과연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아마도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에 실험을 당한 피해자가 아닌가. 가해자는 잡히지 않은 채 어딘가의 아공간, 혹은 인적 드문 곳에서 실험을 하고 있을텐데, 피해자가 꼭꼭 자신을 숨겨야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했다. 하지만 키르쉬블뤼테는 더 이상의 관심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4년 내내 전교 1등으로 받는 거라면 모를까.


그로부터 몇주일간,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새 마법들을 배우느라 눈 코 뜰 새 없었다. 마법 전투술에서는 각종 속성의 주문과 무속성 주문과 전장 제어 마법을, 마법 치유술에서는 여러 사람들을 동시에 치유하거나 질병 등등을 치유하는 방법,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방어와 강화 효과를 걸어주는 마법을 배웠다.


외워야 할 수식이 쏟아지고 학생들은 힘겨워했다. 키르쉬블뤼테 또한 배우지 않아도 될 수식을 외워야 해서 죽을 맛이었다. 쉴 새 없이 진도를 나간 다음에는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창문 너머로 활짝 핀 벚꽃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평소와 똑같이 탄탄하게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벚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벚꽃잎을 다 떨어뜨릴 비 소식이 조금이라도 늦게 있다면 좋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마법 전투술과 마법 치유술 둘 다 필기 따로, 실기 따로였다. 필기는 여러 방법으로 꼬아서 낸 문제들로 가득했다. 실기는 쉬운 편이었는데, 열심히 수식을 풀고 마법을 써야 하는 보통의 위저드들과 달리 마법 사용 시 무작위적 부작용조차 없이 마법을 쓰려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재시험을 봐야 할지 조금 걱정이었다. 


이번에도 중간고사 이후 짧은 방학이 있었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다행히도 풍성함을 유지한 벚꽃 나무 아래를 걸으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다행이에요. 우리 시험 보는 동안 봄비가 와서 꽃잎이 떨어질까 걱정되었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열심히 시험 봤는데 이만한 보상은 있어야하죠.”


“그쵸. 아, 벚꽃에는 향기가 미미한데 왜 이토록 그윽하게 향기가 느껴질까요?”


“우리 둘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달콤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정말, 내가 부끄러워서 못 살아!”


키르쉬블뤼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젠의 볼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근처 유명 카페에 가서 딸기와 밀크 초콜릿으로 벚나무를 표현한 라떼를 주문했다. 키르쉬블뤼테는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두어다


“이거, 체리향에 미묘한 화장품 맛이 별로군요.”


“화장품 먹어봤어요?”


키르쉬블뤼테가 로젠을 놀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맛이 아니라 향이지요.”


“별로면 저한테 줘요.”


“자, 여기 있습니다.”


“와, 완전 이득!”


“이 쿠키도 맛있습니다.”


로젠이 벚꽃 모양 쿠키를 가리켰다. 벚꽃 모양에 분홍색, 중앙에는 건체리가 토핑되어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맛을 보았다.


“쿠키랑 건체리 향이 엄청 잘 어울려요. 맛있어요!”


둘은 카페에서 나가 벚꽃의 거리를 걸으며 갖가지 물건을 샀다. 벚꽃 레진 목걸이는 구체 레진 안에 벚꽃잎 압화를 넣은 것이었는데, 빛을 받아 펄이 반짝반짝했다. 점토로 만든 벚꽃 귀걸이도 샀다. 상당히 원본 꽃과 흡사한 모습에 키르쉬블뤼테는 감탄했다. 그리고 키르쉬블뤼테는 벚꽃 반지 앞에서 고민했다.


“저게 사고 싶어요.”


“남은 돈이 충분하다면 사지 그렇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먼저 로젠하고 커플링을 맞추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테니까 1주년 기념으로 일 년 안에 맞춥시다.”


“저는 괜찮은데, 괜히 로젠한테 고생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괜찮습니다. 원래 돈은 힘들게 버는 게 맞습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이 끓여주었던 오트밀 닭고기 죽이 생각났다. 그는 공부를 잘하니, 학교를 졸업해 취업에 성공해서는 고생길이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기만적인 것 같아 로젠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짧은 방학이 끝날 즈음 결과가 나왔다. 키르쉬블뤼테는 전교 2등, 로젠이 전교 1등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기숙사 소파 쿠션을 팡팡 두드리며 열받아했다. 아마 손동작 문제에서 하나를 틀려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키르쉬블뤼테는 틀린 부분을 발견하고 집중해서 오답노트로 만들어서 복습했다.


방학이 끝나고, 또 새로운 마법을 배웠다. 마법 전투술에서는 각종 공격 마법의 상위 버전과, ‘마법의 갑옷’이라는 방어 마법을 배웠다. 광역 보호 마법도 배웠는데, 이것을 얼마나 넓게 펼치는지에 따라 전투에서 몇 명이 살고 몇 명이 죽는지 판가름하게 되는 마법이라며 반드시 잘 외워야 한다는 말에 키르쉬블뤼테는 아펠블뤼테를 생각하며 소름이 돋았다.


학생들은 이번에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진도를 나간다고 투덜거렸다. 솔직히 키르쉬블뤼테가 생각해도 이 수업들은 너무했다. 게다가 4학년 학생들은 졸업 논문도 써야 해서 더욱 벅찰 것이다. 하지만 교사가 진도를 많이 빼는 것도 어쩔 수 없었는데, 세상에 발명된 마법은 많고, 현재까지도 옛 나라의 터에서 새로운 마법의 두루마리가 발견되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4학년에게 필수인 졸업논문의 의무가 없을 때, 미리 이 수업들을 듣겠다고 한 자신의 선견지명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법 치유술은 ‘치유의 파동’, ‘무의식 안정’을 배웠다. ‘치유의 파동’은 광역으로 상해와 독과 질병을 같이 치료하는 마법이었다. ‘무의식 안정’은 크게 피해를 입고 쓰러져 무의식 상태가 된 사람에게 숨을 붙여주고 안정화하는 마법이었다.


공격 마법과 치유 마법은 마법사끼리, 그리고 비마법사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마법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징집되어 전장에 설 것을 생각하자 키르쉬블뤼테는 조금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전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 점이 키르쉬블뤼테에게는 씁쓸하게 다가왔다. 


오늘의 꿈에도 아펠블뤼테가 나왔다.


“그 마탑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하자.”


“제가 엄마한테 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되나요?”


“현재 생존한 모든 마법사들을 ‘메이지’로 만들어 위저드와 소서러간의 갈등을 없애는 것이란다.”

 

“하지만, 엄마…”


까지 말하고 키르쉬블뤼테는 꿈에서 깼다. 리프리히가 옆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또 아펠블뤼테 꿈을 꿨어?”


키르쉬블뤼테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리프리히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고아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절대 안전해보이지는 않는데.”


“이번 꿈은 심상찮으니 교장선생님께 보고할 거에요.”


“알겠어. 힘내.”


그날 밤, 키르쉬블뤼테는 정부 청사 안을 걷고 있었다. 마법사군의 장관이 앉아있을 의자는 텅 비어있었다. 키르쉬블뤼테가 이를 의아하게 여기자 의자 뒤에서 아펠블뤼테가 나타났다.


“이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 키르쉬블뤼테. 내가 네 아빠와 마법사 사회를 없애고 너를 되찾는다면. 이젠 더이상 빼앗기지 않을 거야, 내 아가.”


키르쉬블뤼테는 또다시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무슨 일이야?” 이레네가 물었다.


“제 꿈이 현재를 보여주거나 예지몽이 맞는 것 같아요.”


“네 꿈이 어떤 내용이었는데?”


“미안해요. 지금은 설명할 시간조차 없어요.”


키르쉬블뤼테는 다급하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키르쉬블뤼테는 교직원 기숙사로 달려가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아 집에 잠깐 다녀올 수 있는지 물었다. 교장은 별 일 없기를 바란다며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마법으로 비행을 하며 키르쉬블뤼테는 집에 도착했다. 집의 문은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파편을 자박자박 밟고 휴대전화의 손전등 기능으로 집안을 설펴보던 키르쉬블뤼테는 비명을 질렀다. 거실과 안방을 분리하는 두꺼운 벽 한 가운데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위르겐이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쓰러져있었기 때문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호흡과 매을 재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학교 측에 전화를 걸려고 하다 기절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천장, 보건실이었다. 보건 교사가 드디어 눈을 떠서 다행이라고 했다.


“선생님. 아무 일도 없었죠? 우리 아빠한테 아무 일 없었죠?”


보건 교사의 표정이 안쓰러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안하다, 키르쉬블뤼테. 네 아버지는 내가 봤을 때부터 이미…”


키르쉬블뤼테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일찍 집에 갈걸. 그러면 아빠가 죽는 일도 막을 수 있었을텐데. 아펠블뤼테는 나를 해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하니까. 내 한 몸 바쳐서라도 아빠를 구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키르쉬블뤼테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는 보건 교사에게 물었다.


“퇴원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네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해줄게 없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도움 많이 되었어요.”


키르쉬블뤼테는 교장이 있을 6층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교장 집무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키르쉬블뤼테 바이스, 너구나. 방금 전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안됐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염을 마친 채 네가 장례식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먼저 식사를 하거라. 의식이 없는 동안 한 끼도 못 먹었잖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층의 조리실에는 늦게 먹어서 못 먹은 학생들이나 교직원을 위해 여분으로 배식을 받아놓는 것이 있었다. 키르쉬블뤼테는 그것을 받았다. 그는 식어빠진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자신 또한 죽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키르쉬블뤼테는 끊임없이 과거에 어떻게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면서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음식을 다 먹고 기숙사에서 양치를 하고는 입을 옷을 검은색으로 보이게 하는 환영 마법을 걸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전교생의 앞에서 진행되었다. 아버지의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함에 담겨졌다. 교장 선생님이 추도사를 읊고 전교생이 마법사가 작곡한 추모곡을 불렀다. 


친구들, 같이 수업을 듣는 4학년 선배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부의금을 받았다. 키르쉬블뤼테는 홍차와 스콘과 잼 등 간단한 다과를 사와서 홍차를 끓여주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밤이 되어서야 로젠이 왔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버텨주십시오. 시간만이 해결책이 되어줄 겁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의 손을 잡고 무너져내리며 통곡했다. 로젠은 할 말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키르쉬블뤼테도 나도 같은 상처가 생겼군요. 아펠블뤼테의 손에 가족을 잃은.”


“로젠이 고아가 된 건 그때문이었어요?”


“그래요. 내 부모님은 길바닥에서 잔혹한 방식으로 죽임당했는데, 정황상 아펠블뤼테의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펠블뤼테는 나만 필요했을 겁니다. 아무리 잔인한 방식으로 인체실험을 해도 그것이 새로운 일상이라 받아들이는 백지같은 아이들을.”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나는 아펠블뤼테의 실험 재료가 되어 갖은 고통을 겪다가 겨우 도망나왔습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을 껴안고는 등을 두드렸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잔혹한 일이…”


로젠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펠블뤼테, 그 자를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절대로…”


애석하게도 시간은 쉼없이 흘러갔고, 기말고사 날이 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필기 시험을 망쳤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다섯 문제나 틀렸기 때문이었다. 엉망이 된 기분으로 실기 시험을 보았으나 이번에는 정확하게 맞아서, 실험으로 끌어올려진 강력한 마법사의 피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의 방 침대에서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그 때 리프리히, 루트비히, 이레네가 왔다.


“울어도 괜찮아.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네 자신을 탓하는 말도 하지 마.”


쌍둥이는 그를 다독거렸고,


“그 자에게 복수하려면 싸울 준비가 되어야겠지. 지금 듣는 과목들 열심히 들어둬.”


이레네는 키르쉬블뤼테에게 힘을 주었다.


이번 방학에 키르쉬블뤼테는 학교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직 자신의 집에 남아있을 아빠의 흔적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래도 아펠블뤼테 측의 마법사들에게 대항이 가능하도록 사용이 불법인 마법의 특징과 그 주문을 어떻게 해제하거나 방해가 가능한지에 대해 교장으로부터 배웠다.


“아펠블뤼테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는 소서러였다. 마법의 혼란을 극복하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애를 썼지. 그리고 위저드와 소서러의 다툼이 비효율적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그런 떡잎이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상했던 대로 아펠블뤼테가 확성 마법으로 학교에 경고를 했다.


“학생들이여! 내 아래에 들어오겠다고 말하면 더 올바르게 가르쳐줄 것이다! 너희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마!”


사흘 뒤, 학교에는 4학년 과정을 듣는 학생, 교사, 졸업생들이 왔다. 그리고 마법 경찰 세오리프가 아펠블뤼테 몰래 합류했다.


키르쉬블뤼테는 목을 가다듬고 연설했다.


“여러분. 마법 범죄자이자, 제 친어미인 아펠블뤼테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펠블뤼테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아동에게 인체 실험을 하여 위저드와 소서러의 장점만을 합친 ‘메이지'를 더욱 많이 만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야망은 부서져야만 합니다. 위저드와 소서러의 화해는 그 과정도 미심쩍은 인체실험 대신 불의와 함께 맞서 싸우고 동료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전진합시다, 싸웁시다, 승리를 쟁취합시다!”


교장이 아군을 이끌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에게 건투를 비는 포옹을 하고는, 아펠블뤼테가 보일 만한 선두에 서있었다. 아펠블뤼테는 성 밖에서 “이제 학교 측의 마법사들을 만나고 싶다. 문을 열어라!” 라고 소리쳤다.


잠시 침묵. 그리고 각양각색의 빛을 땐 공격 마법이 쏟아져내렸다. 아펠블뤼테는 예상 못했다는 표정으로 있다가 잠시 뒤 노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앞뒤 사견 묻지 말고 모두 죽여버려!” 라고 하였다. 반대로 아군들은 적측 마법사들이 살아서 감옥에 수용될 수 있게끔 보다 세심한 공격이 필요했다. 


아펠블뤼테의 메이지 부대는 마법을 빠르게 쓸 수 있었으나, 마력이 바닥이 되고 대신 생명력을 다 써버리고 쓰러지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그런 것 같다고 키르쉬블뤼테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성벽 위에서 성을 기어오르려는 적군에게 기절 마법을 기관총 쏘듯이 퍼부었다. 


적들은 쉴새없이 몰려들었고, 여전히 아군은 인간 대포가 되어 마법을 쓰고 또 썼다. 키르쉬블뤼테는 마도구 제작술을 배운 학생들의 빌려준 천리안 망원경으로 아펠블뤼테를 찾았다. 메이지 군단의 가운데에 있는 아펠블뤼테도 자신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펠블뤼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 것 같았다. 키르쉬블뤼테는 성벽을 벗어나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 순간 아펠블뤼테의 ‘비행’ 마법과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해 키르쉬블뤼테를 끌어오려 했다. 기겁한 키르쉬블뤼테는 아펠블뤼테의 목적을 알아내고 주변 사물을 붙잡고 꼼짝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그때, 앞에서 공격을 하던 로젠이 키르쉬블뤼테를 끌어안았다. 마법으로 움직여야 하는 체중이 는 상태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로젠을 털어내고 키르쉬블뤼테만 데려갔다. 둘은 서로 “안돼!” 하며 비명을 질렀다. 


키르쉬블뤼테는 메이지 군대를 지휘했다. 산에서 나무를 잘라 공성추를 만들었고, 성문에 박아버린 다음 그 표면에 물을 뿌리고 얼리고 녹이는 행위의 반복으로 성문을 약하게 해 쉽게 부수어냈다. 사기가 오른 메이지들은 위저드와 소서러들을 보다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적군 중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었다. 저건 만들고 잊어버린 실패작이었던가? 녀석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러나 그는 대단히 많은 마법을 지치지도 않고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루고자 하는, 위저드와 소서러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는 불필요했다. 심지어 위험한 존재이니 없애야 했다. ‘불의 구체’ 마법을 높은 강도로 설정해 던지면…


‘안 돼! 그럴 수 없어!’


키르쉬블뤼테는 자신을 조종하는 아펠블뤼테에게 대항했다.


‘엄마 말 잘 들어! 둘이 무슨 사이니? 설마 서로 사랑하니?’


‘엄마가 알 바 아니에요. 더이상 이 악행을 그만 둬요!’


‘악행이라니? 나는 위저드와 소서러 간의 반목을 둘을 직접 결합해 평화를 이루고자 할 뿐이데, 너희들보다는 평화를 주장하는 우리가 더 선한 쪽이지 않겠니?’


‘엄마의 방식은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 방식으로 할 거에요.’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왜 메테오가 시전되고 있니? 게다가 범위는 우리 아군 전체로 설정되어 있는 건데?’


‘엄마한테 조종당해 내 사람들을 공격할 바에야, 차라리 나 자신을 희생시키겠어요.’


“불타는 혜성이여! 이 죄인의 머리 위로 떨어질 지어다!”


‘안 돼, 무슨 짓이야!’


그 순간 혜성이 적들이 머리 위로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다. 로젠은 제발 살아서 와달라는 심정으로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해서 키르쉬블뤼테를 빼오고, ‘마법 해제’ 주문으로 키르쉬블뤼테의 몸에서 아펠블뤼테의 빙의를 해제했다. 그리고는 전장을 보았다. 메테오로 인해 구덩이가 파였고, 메이지 군단은 모두 심하게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렸다.


위저드 - 소서러 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은 메이지들을 치료하고 그들을 속박했다. 


그리고느 아펠블뤼테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 그는 불타서 죽은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지 않았던 자에게 어울리는 처형 방식이었다.


꼭꼭 숨어 있었던 리프리히, 루트비히, 이레네, 디트리히가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에게 다가왔다.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생사와 우정을 확인한 그들의 머리 위로 청량한 여름 하늘이 흘러갔다.


‘메이지’로 길러진 아이들은 교장이 아동청소년 심리 치료 병원에 인계하여 집단 상담을 통해 또래 친구들처럼 말하고 웃을 수 있도록 사회화를 도와주었다. 그 아이들의 대모와 대부는 키르쉬블뤼테와 로젠이 되었다.


키르쉬블뤼테는 로젠과 함께 모든 과목을 이수한 뒤 졸업장을 받았다. 키르쉬블뤼테는 마법 경찰 세오리프가 되어 악한 마법사들을 잡기 위해 마탑의 연구생이 되었다. 로젠은 마법 치유술을 심화 공부하기 위해 키르쉬블뤼테의 손을 잡고 자신 또한 연구생이 되었다.


이레네와 디트리히는 여전히 이상한 이름을 가진 다섯마리 고양이와 함께 사는 중이다. 학교에서 공부에 치여 힘들 때면 부모님이 보내주신 고양이들의 사진으로 마음을 치유한다고 한다.


리프리히와 루트비히는 아동청소년 학대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한 인권 단체를 세웠다. ‘아펠블뤼테 사건’에 크게 충격을 받은 모든 이들이 이 단체를 홍보하고 직접 기부했다. 쌍둥이들은 쇄도하는 지원자의 면접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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