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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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side 1

그가 다녔던 학교에는 온실이 있었다. 물론 학생들은 평하게 학교생활을 한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장소에 있었다. 본관 1층의 숨겨져 있는 문을 열어야 나오는 그 온실은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가 온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을 시절, 여름 방학식 날에 있던 일이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서 옆 사람의 목소리조차 태양 빛에 사그라드는 빛나는 여름날.

교실마다 있던 텔레비전으로 송출되는 이미 녹화된 교장 선생의 훈화 말씀 영상이 느긋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필 교실의 에어컨은 타이밍 좋게 고장이 나버렸고, 볕이 잘 드는 창을 그대로 열어두고 싶어 하는 부담임 선생 덕에 교실은 금방 끓어올랐다. 반 친구들은 불평불만을 쏟아내면서, 방학식이 끝나면 곧장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캡 모자를 푹 눌러 쓰고서, 시끄러운 반 분위기에 선생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 운 좋게 그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나 있는 창으로 자신이 조금 전까지 있었던 교실 안을 보니, 소년이 교실을 나온 것은 정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 반대편 창을 보니, 해를 등지고 서 있는 건물 덕에 시원한 공기가 소년의 귀 옆을 살며시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선생을 향해 소리 없이 한껏 웃은 뒤에, 소년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직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말자. 해 봤자 수위 할아버지에게 걸려서 호되게 혼날 게 뻔해.’

소년은 아무도 없는 1층 복도를 마음껏 걸어 다니면서, 벽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힘껏 뛰어서 천장에 손끝을 닿게 해 보며 시끄럽게 놀았다. 한참을 놀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질리기도 해서 숨을 고를 겸 학교 도서관 옆의 벽에 기대어 잠시 쉬기도 했다. 슬슬 교실에서 자신이 사라진 걸 눈치챌 때가 되었을 텐데, 친구들이 알면 분명 자신을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벽이 그를 살포시 안아주듯 소년의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렸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뒤로 고꾸라졌다. 무척 아플 것 같아 꼬옥 눈을 감았다.

결과만 말하자면, 아프지 않았다. 분명 바닥에 부딫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소년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소년을 감싸 안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할아버지는 소년을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괜찮니, 학생?”

따스한 햇볕처럼 말을 걸어오는 할아버지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 괜찮...아요.”

어디서 많이 봤는데. 소년은 정체를 모르겠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쩌다 보니 결국 걸리고 말았구먼... 여기라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의 혼잣말에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벽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걸렸다’ 라고 말하는 게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데 누구세요?” 소년은 벽을 힘겹게 닫는 할아버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나? 언젠가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텐데. 이 학교의 학생이라면.”

 인자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가 대답했다.

“얼굴이 낯이 익긴 한데 잘 모르겠네요.”

“뭐, 지금 방송을 보지 않고 여기서 날 만났다면 평소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겠지.”

조금은 실망스럽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혀를 차는 모습에 소년은 머릿속에서 번뜩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 학교 방송으로 연설하던 교장 선생님, 체육 대회 때 10분 넘게 연설하던 교장 선생님이 눈앞의 그와 겹쳐 보였다.

“설마 교장 쌤이에요?” 뒤늦게 놀라서 소년은 급히 물었고,

“설마 정말로 모르다가 이제야 깨달은 게냐?” 그는 오히려 더 놀란 듯 보였다. 설마 정말로 까먹었겠어,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죄송해요. 설마 진짜 학교의 짱이 여기서 나올 줄 몰랐죠.”

“놀리는 거냐?” 그가 약간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근데 저 벽은 뭐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소년이 물었다.

“어? 아? 음, 그, 글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두지 않은 저 말 더듬는 태도는 그가 이 사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소년은 머뭇거리는 그를 뒤로하고 자신이 고꾸라졌던 벽을 손으로 힘껏 밀었다.

벽이 손쉽게 밀리며 보여준 광경은, 푸른 캔버스 속 점으로 피어있는 화려한 파도처럼 빛나는 각양각색의 꽃들이었다.

"아, 이런..." 그는 소년을 잡으려고 뒤늦게 뻗은 손을 다시 집어넣었다.

"학교에 이런 비밀 장소 만들어도 괜찮은 건가요?"

화려한 향기에 어지러운지 당황한 듯한 소년의 목소리는 교장에게 향했다.

"사립 학교 교장인데 뭘 못하겠니."

"역시 그런가요? ... 어물쩍 넘겨 달라는 거죠?"

"...그래준다면 고맙겠구나." 멋쩍은 듯 그가 웃었다.

"음, 저도 가끔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면 비밀로 해 드릴게요." 잔꾀가 생각난 소년이 키득거렸다.

조금 곤란한 건지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없이 벽을 바라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년이 소리쳤다.

"거절이라는 거죠? 애들한테 소문 다 내야겠다."

당장이라도 다시 교실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소년이 등을 돌렸다.

"그래, 보여주마. 망가뜨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자신의 비밀 정원이 비밀이 아니게 될 위기에 처한 그는 급히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뭐, 노력은 최대한 해 보죠.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 이게 선생님을 가지고 노는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그는 손에 주먹을 쥐고 소년의 정수리에 딱밤을 먹이려고 했지만, 겨우 참고 손을 펴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그러면 보여주신다는 거죠? 지금 들어가 봐도 돼요?”

그가 대답할 새도 없이, 소년은 당당하게 벽을 넘어 온실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의 코끝에 향기로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무슨 꽃향기일까, 눈을 감았다. 한여름에 피어 있는 꽃이라면 역시 장미일까? 라일락일까?

“지금은 데이지를 심어두었단다. 마가렛이라고도 하지.”

관심을 보이는 듯한 소년에게 친절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마가레트?” 온실 앞에서 소년이 멈춰섰다.

“과자 이름과는 관련이 전혀 없단다.” 언짢은 듯이 그가 중얼거렸다.

“여기를 지금까지 혼자서 가꿔오신 거예요?”

온실 밖에서 흐릿한 유리창 안을 바라보던 소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학교에서 처리해야 할 건 교사들이 다 알아서 하다 보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아직은 체력이 남아서 말이지.” 껄껄껄. 그는 친근한 이미지의 할아버지 웃음소리를 냈다.

“나중에 관리 안 되면 보기에 안 좋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이제 고민을 좀 해봐야겠구나.”

잠시 소년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그는 조용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하얀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왜 벌써 머리가 셌니.”

“아? ….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요.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주변에서 뭐라고 하긴 하는데, 귀찮아요.”

그는 조금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 학교 학생이 교칙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불편한 외형이었을 것이다.

“상관은 없지만, 염색하는 편이 눈에 안 띄고 좋지 않겠니?”

“나중에요. 고등학교에서도 똑같이 뭐라 하면 그렇게 할게요. 지금은 내 머리가 좋은걸요.”

그는 할 말이 목 언저리에서 턱 막혀오는 감각을 느꼈다. 더 이상 소년에게 머리색과 관련된 말을 하는 건 서로 불편해질 것 같아 하려던 말은 삼키기로 했다.

소년과 교장은 더 이상 말없이 온실을 바라보았다. 통유리 밖에서 바라본 온실은 조금 엉성한 면이 있었지만 혼자 관리한 것 치고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였다. 소년은 생각했다.

‘교장 쌤이 나를 믿고 여기를 맡겨 주면, 여기는 나만의 비밀 공간이 되는 거 아냐?’

사실 그런 것도 있지만, 오랜만에 본 가꾸어진 들꽃들이 낯간지러울 정도로 소년의 마음을 살랑였기에,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제가 여기 가꿔도 돼요?”

소년에게는 충동적으로 뱉은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그는 내심 기뻐하는 듯 보였다.

“진심이니? 일부러 망가뜨리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거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제가 왜 쌤한테 부탁을 하고 있겠어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아까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긴 한데, 일단 어린아이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진 않으니까, 지금은 조금씩 배워두기로 하고, 어른이 되면 일을 하는 건 어떻겠니?”

정말로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는데. 소년은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좋아요! 열심히 해 볼게요.” 반은 진심, 반은 거짓이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순수한 어린아이가 어른 앞에서 꾀를 쓰고 있으니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몇 년 후, 소년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소위 말하는 ‘취준생’이 되어 있었다.

 서류를 내고, 면접을 보고, 질문에 대답하고…. 그런 날들이 달의 모양이 대여섯 번 바뀔 동안 이어졌다. 아니, 대체 내가 뭐가 문제길래 취직을 못 하는 거야. 그는 방 안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방 안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못 버렸던 쓰레기봉투 두 개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 전환도 하고 바람도 쐬면 좋을 것 같아 그는 힘겹게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후 쓰레기봉투 두 개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낮부터 술을 먹었는데 벌써 하늘이 붉게 변하다니, 취해서 얼굴이 붉게 변한 그와 그의 눈에 반사된 붉은 하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자신이 왜 밖에 나왔는지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 손에 무언가 있네. 어쩐지 몸의 기울어진 쪽의 손을 들어 보니 쓰레기봉투가 손에 들려있었다. 맞다. 쓰레기 버리러 나왔었지. 그는 정신을 차린 후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와서, 건물에 지정해 준 장소에 쓰레기봉투를 툭 떨어뜨려 놓았다.

이제 뭐 하지. 다시 집에 돌아간다면 또 마시고 취하겠지. 그는 잠시 주변을 서성였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싫고, 또 뭔가 사러 가기에는 지갑이 없었다.

“아. 오랜만에 학교나 가 볼까.” 그의 혼잡한 머릿속에 드디어 뚜렷하게 보인 하나의 생각이, 그의 발을 가볍게 만들었다. 비록 이제는 현실을 깨달은, 술에 취한 하찮은 인간일 뿐이었지만,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는 어린 시절의 그 소년이 되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분명 그의 기억이 맞았다면 이대로 쭉 걸어서 분식집 앞에서 우회전하고, 그대로 쭉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붙어 있었다. 머리로 기억하기보다는 몸을 따라서 그는 발을 옮겼다.

조금 걸었을까, 건물은 바뀌고 세상도 바뀌었지만 학교로 향하는 길과 그의 기억만은 그 소년의 시절에 머물러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모교 정문 앞에서 조금 서성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고, 학생들은 물론 소년이 알던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했거나 다른 학교로 발령받았을 테니 말이다. 해가 져 어두운 학교를 밖에서 바라보니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다. 소년이 보았던 학교는 정말 반짝거리는 벽면에 항상 시끄러운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정문에 항상 열려있던 철창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이 시간에 허락받고 들어가도, 받지 않아도 문제가 생길 것은 뻔해 보였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그런데. 아쉬운 마음을 손에 머금은 채로 소년은 뒤로 몸을 돌렸다.

“어딜 가시나?”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소년은 깜짝 놀라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키가 작은 백발의 노인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이 학교 졸업생인데, 잠시 생각이 나서 들른 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아…. 언젠가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텐데.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면 말이지.”

“어디선가 뵈었던 것 같긴 한데….”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과거의 조각이 소년의 정수리에 꽂혔다. 열다섯 살의 여름 방학식. 미리 녹화된 연설. 푹푹 찌는 여름날. 숨겨진 비밀 온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눈앞에 있는 노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 소년은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금방 깨달았네. 껄껄껄….”

노인은 소년이 자신을 금방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기쁜 듯 소리를 내 웃었다.

“설마 학교의 짱이신 분이 아직도 여기 계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소년이 노인의 말을 맞받아쳤다. 기억하고 있었던 마지막 모습보다 얼굴에 주름이 지고, 눈가는 쳐졌지만 소년은 그 모습에서 노인이 젊은 교장이었을 시절의 눈빛을 보았다. 세월의 흐름에도 노인은 여전히 작게, 꾸준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는 은퇴해서 내가 여기 올 일은 없지만, 온실만큼은 아직 내가 관리하고 있었지.”

“이제는 연세가 있으신데…. 쉬어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너 옛날 약속은 엿으로 까 잡숴 먹었냐?”

갑자기 돌변한 노인의 태도에 소년은 적잖게 당황했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사람이었지만,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을 했었는지 그 부분만 지우개로 지운 듯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네가 어른 되면 일하러 오겠다고 한 건 다 날려버렸냐?”

“아.” 확실히 기억이 났다. 중학생 때 그 비밀 온실에서 생각 없이 말했던 그 약속. 그때부터 확실히 식물을 기르는 것에 관심이 생겨 집에서도 허브를 종종 기르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끼친 그때를 잊다니, 소년은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확실히 그랬었죠, 뭐…. 직장도 잘 안 구해지고,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조금 일이라도 할까 봐요.”

그때 배웠던 원예가 아직도 손에 익어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소년은 지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정말로 생계가 위협받을 정도였기에 노인의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역시 아직 생각은 하고 있었구먼. 좋아! 내일부터 아침 7시에 온실로 오게. 다시 처음부터 알려줄 테니까. 통로는 아직 그대로니 할 수 있겠지?”

노인은 무척 기뻤는지 한 손으로 소년의 등을 힘차게 쳤다. 힘 조절이 안 되었는지 소년의 등은 좀 아팠지만, 일단 예전에 좋아하던 일을 한다는 사실이 소년을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정원사 side 2

오랜만에 마주한 온실은 옛날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아침에 내리쬐는 따스한 온기, 잔디 들판 위에 고스란히 놓인 직육면체의 유리 공간이 밤이 들어선 시간 동안 머금은 달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니 전 교장 선생이었던 노인이 온실 너머 창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식물을 다루는 법은 예전에 알려줬으니, 인수인계만 하면 되겠지?”

노인은 과거에는 소년이 원해도 절대 알려주지 않았던 온실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6943. 무슨 의미인 건지 모르겠는 숫자 네 자리의 연속이었다. 육구사삼.

“웃고 살라고. 육구사삼. 웃고 사삼. 웃기지 않냐?”

 노인은 주름진 입가를 한껏 늘리며 웃었다. 쭈글쭈글해진 얼굴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자물쇠 하나에도 뜻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둬야 소중히 여기지.”

 그는 조금 녹이 슬어버린 노란 자물쇠를 손에 쥐었다. 작지만 묵직한 것이 지금껏 이 온실을 홀로 지켜왔겠구나. 옅은 쇠의 냄새가 세월을 짐짓 짐작하게 했다. 그는 자물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손을 얼굴에 가까이 대고 숨을 들이켰다. 자물쇠의 녹슨 냄새가 손에 배어 코끝을 간지럽혔다. 온실 안에서 풍겨오는 황홀함과는 대비되는, 그 유사한 바깥의 내음에 취해 있다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노인의 얼굴에 놀라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그렇게까지 의미를 두진 말고.”

노인은 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찬 후 마저 인수인계하기 위해 온실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부끄러워 일부러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노인을 따라 걸어갔다.

구석에는 온실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컨트롤러가 있었다. 마치 교실의 에어컨 온도와 강도를 조절하는 판처럼 생겼네, 그는 그리 생각했다. 원리는 비슷하니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노인도 이 장치를 직접 설계하고 만든 것은 아니기에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버튼이 어느 기능을 하는지는 뜨문뜨문 설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고 써 왔던 컨트롤러이니 감으로 사용한 세월이 노인의 설명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인생 25년 동안 온실이라고는 어릴 적 갔던 놀이공원에 작게 있었던 온실과 이 학교에 있는 비밀 온실 외에는 없었으므로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다면 아마도 좋겠지, 하며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빨간 버튼은 별일 없으면 누르지 말어.”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그래요.”

“…온실이 날아가 버려.”

노인은 3초 정도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폭소했다. 으하하하하. 그는 그 개그가 웃기지는 않았으나 따라 웃기로 했다. 아하하하.

“농담이고. 종료 버튼이야. 근데 다시 켤 때 좀 오래 걸리니까 온실을 완전히 갈아엎을 거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고. 전기세는 걱정하지 말고.”

얼마나 오래 걸리길래 이렇게 경고를 하는 건지. 그는 그 버튼을 건드려 보고 싶었지만 분명 노인에게 혼날 것이 훤히 보였으므로 먼 훗날 정말로 온실을 갈아엎을 때 지금의 호기심을 해소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물쇠…컨트롤러… . 이제 뭘 더 알려주면 되려나… .”

 작은 온실 속 화사히 퍼지는 꽃향기에 폐가 파묻혀 갈 즈음 되었을까, 노인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찾고 있었다. 일단 문을 열고 잠그는 문제, 온실의 환경을 조절하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니 알려준다고 해 봤자 사소한 노인의 팁 정도일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때 노인의 수상한 점을 눈치채고 119를 불렀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온실을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그를 등지고 서 있던 노인은 잠시 벽을 짚고 가만히,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잠시 밖에 나가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는 노인을 향해 발을 한 걸음 옮겼다. 어제는 분명 건강해 보이셨는데. 곧게 펴 있던 허리가 굽고 고르게 내뱉던 숨이 불규칙적으로 변해 있었다. 둔감한 그가 보아도 그는 충분히 몸에 이상이 있어 보였다. 충분히 거리가 좁혀져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건강할 거라고 믿었던 노인의 몸이 천천히, 점점 빠르게 바닥을 향했다. 그는 뇌가 모든 판단을 끝마치기도 전에 몸을 날려 노인을 붙잡았다. 원래 이렇게 가벼운 분이셨던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도 굳게 그 자리를 지키던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부정하고 싶었다. 잠깐 놓으면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노인을 안고 온실 밖으로 빠르게 나와 잔디밭에 노인을 눕혔다.

“선생님.”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노인을 보았다. 전 교장 선생님의 호흡이 흔들릴수록 그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지금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게 훤히 보였다. 그는 주머니를 다급히 뒤져 떨리는 손으로 긴급 전화를 걸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학교 근처의 병원 안에 있었다. 갑갑할 정도로 하얀 냄새. 일정한 속도로 들려오는 비프음. 삐걱거리는 바퀴가 달린 동그란 의자. 주변을 둘러싼 푸른 빛 얇은 커튼.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크기의 침대 위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손목에는 링거가 꽂혀 있고, 손가락에는 집게처럼 생긴 기기가 집혀 있었다. 한결 나아진 노인의 안색과 표정을 보고 그는 안도했다.

아마 잠시 후에 왔던 그 의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노인의 증상은 뇌졸중 전조 증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노인 대신, 대처가 조금 늦었지만,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살릴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아마 두 달 넘게 병원에 있어야 할 것이고 앞으로는 힘든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알려주려고 했던 걸까. 그는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붙잡고, 삐걱대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쏟아지는 잠과 싸우고 있었다.

“…,”

쓰러진 지 한참 뒤에서야 노인은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의사를 부를 준비를 했다.

 “선생님. 가만히 계세요. 아직 일어나면 위험합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노인에게 다급히, 그러나 차분히 중얼거렸다.

“...래도… .”

 “…네?”

“그래도…네가 있어서…믿고 맡겨도 되겠구나… .”

노인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아. 갑자기 찾아온 부담감이 심장을 압박해왔다. 하지만 그가 그걸 내려놓아 버린다면, 힘없는 침대 위의 노인은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혼란스러운 심정을 품에 안고 그는 다시 온실로 돌아왔다.

뉘엿뉘엿 져 가는 태양 아래 비스듬히 서 있던 그는 주머니에 든 묵직한 무언가를 꺼냈다. 녹슨 노란빛이 감도는 자물쇠였다. 아마 노인을 병원에 보낼 때 차마 온실을 잠그지 않고 뛰쳐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그 전에 노인에 의해 수없이 열리고 잠겼을 자물쇠를 들고, 이제는 그가 온실의 문을 닫았다. 아, 잠그기 전에 온도와 습도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노인이 쓰러지기 전에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은 석 달 뒤에 겨우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는 낮에는 온실을 관리했고, 밤에는 병원에서 노인과 시간을 보내거나 온종일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온실을 관리하는 대가로 돈도 받았다. 물론 최저시급에 가까운 돈이었지만, 그는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노인이 퇴원한 후에도 그의 루틴은 변하지 않았다. 아침에 6943, 자물쇠를 열고, 온도와 습도를 점검하고, 시든 꽃은 뽑고, 낮잠을 잔 후 다시 6943, 온실을 닫았다. 반년 정도 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그는 점점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고, 입을 다물었으며, 사색을 즐길 때가 많아졌다. 분명히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나뭇잎이 푸르렀는데. 어느덧 잎이 붉고 노래지더니 떨어져 바스러졌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눈꽃이 핀 날에도 그는 6943, 자물쇠로 문을 열었다. 전혀 웃고 살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문을 열 때 갑자기 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버벅댔고, 온도와 습도를 반대로 맞출 뻔했으며, 발을 헛디뎌 애꿎은 꽃만 죽일 뻔했다. 내가 진짜 왜 이러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슬슬 머리가 아파와서 그는 제 자리에 구부정하게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주변에서 말을 할 줄 아는 건 그밖에 없었으므로.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한순간의 적막을 깬 건, 그 아이였다.

그는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반년 동안 이곳을 아는 사람은 그와 전 교장이었던 노인밖에 없었을 터였다. 분명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아이고, 여기는 학생이 오는 곳 아니다. 빨리 나가.”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서일까, 그의 입에서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소리가 났다. 헛기침을 조금 하고 나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다루지 않은 목은 뻑뻑해지기 일쑤였다. 그는 대신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왜요? 어차피 겨울방학이라서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저밖에 없어요.”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박살 났다. 그는 잠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 나도 저렇게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지. 그는 과거의 자신이 받았던 작은 친절을, 그 아이에게 나눠 주기로 했다.

“꽃만 꺾어가지 마라.”

오랫동안 사람과 마주하지 않아서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잊어버린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만을 던져놓았다.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꽃에 물을 아직 안 줬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옆에 있던 물 호스를 잡았다. 몸에 힘을 주고 겨우 일어난 그는 허리를 주먹 쥔 한 손으로 통통, 두드리고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뒤에서 옆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움직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움직이는 손님이 그에게는 반갑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감정은 불안이었다.

“지금은 1월인데 데이지를 벌써 키우시게요?”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눈 주변에 스쳤다. 그는 그 움직임을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학교의 짱이라는 놈이 키우라는데 어쩌겠냐.”

“아, 교장 선생님 온실이구나.”

그는 속으로 꽤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소문으로만 들어서 몰랐네요. 고용되신 거예요? 수위 일도 안 하시는 것 같던데.”

하긴, 세월이 있는데 그동안 소문이 아예 안 날 리 없지. 그는 옆에 자연스럽게 쪼그려 앉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금빛 눈을 가진 열댓 살 되어 보이는 아이. 금빛 소녀의 눈과 금빛의 그의 눈이 마주 보았다. 그는 소녀에게 조금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온실에 대해 누구에게 들은 건지. 일단 그라는 존재는 처음 알게 된 것 같으니 된 건가, 하며 생각 한 번에 눈 한번 깜빡임을 반복했다. 그러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어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귀찮게 하지 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그 말 이후 소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물을 주는 걸 끝내고 호스를 정리한 다음, 그는 소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꽃을 보고 있었다. 정말 순수함 그 자체인 그 소녀가, 딱히 여길 망치러 들어온 손님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그는 입을 열었다.

“어이.”

그가 생각해도 참 젊은 사람의 인칭 표현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오고 싶으면 와도 괜찮아. 가끔. 심심했거든.”

소녀는 더듬더듬 말하는 그를 보고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더니, 이내 해맑게 웃었다.

“우와, 정말요? 그래도 괜찮아요?”

“… 그래. 뭐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소녀의 미소에 그는 오랜만에 한겨울 속 온실의 따듯함이 아닌, 무언가 마음속을 데워 주는 온기를 마주했다. 어릴 적 교장에게서 느꼈던 그 이름 모를 몽글함이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정원사 side 3

소녀와의 첫 만남이 있던 그날 이후로 그의 삶은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인간관계가 넓어졌을 때 인간의 보편적인, 긍정적인 반응이리라. 소녀는 그의 예상보다 자주, 가끔은 아예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식물보다 훨씬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긴 하지만,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소녀는 정말로 꽃만 구경하러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올 때마다 그를 찾았고, 꼭 그에게 하려던 말을 전하고 떠났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랬다.

“아저씨, 쪽지 시험 만점 받았어요!”

라던가,

“제 생일은 10월 27일이에요! 아저씨는 생일이 언제인가요?”

라던가, 아니면

“아저씨는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해요? 전 들꽃이면 다 좋아요.”

같은, 사소하지만 순수한 질문들이 대다수였다. 그는 이런 질문이 올 때마다 처음에는

“그래.”

“몰라도 된다.”

“여기 있다 보면 다 똑같아.”

같은 무뚝뚝한 답으로 소녀의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었으나, 점점 대화와 기억의 양이 쌓여갈수록 그의 정보를 꺼내는 빈도가 늘어갔다.

소녀가 오는 날에는 온실의 자물쇠가 일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예전에는 의미를 잊고 그저 되뇌었던 6943이, 정말로 웃고 살게 되니 그 할 일을 다 한 모양이었다. 꽃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꼴값 떤다.”

정도로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소녀의 학교에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그는 여름의 느낌에 걸맞게 한 편에는 해바라기를, 다른 편에는 장미를 심었다. 그는 여름을 좋아했다. 딱히 조절하지 않아도 꽃들이 좋아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여름에 그가 할 일은 단지 창을 열어 바깥 공기를 들이고, 물을 주고, 낮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평소의 그 루틴에 따라서 그는 따스한 햇볕을 누리며 해바라기 가운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학생들이 실수로라도 찾아올 일이 없었고, 교직원들도 적었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어 좋았다.

“주무세요?”

아, 소녀다. 간만에 즐기던 햇살이 뺨을 따갑게 간질인다. 이내 얼굴에 그늘이 졌다. 차가운 감각에 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방학인데 왜 왔냐? 학원 안 가?”

소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가 태연히 말했다.

“학원 원래 안 가요. 수요일은요.”

“그래? 아, 한동안 안 왔었지. 이번에는 해바라기를 좀 심어 봤는데, 어떠냐? 좀 색다르지?”

그는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웃으며 소녀를 바라본 그는, 이내 얼굴에 묻은 물방울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야, 무슨 일 있냐?”

처음 보는 인상 쓴 얼굴. 붉어진 눈가. 옥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방울. 하나만 있었더라도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

소녀는 아무 말 없이 훌쩍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세상의 불편한 감각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이런 게 가시방석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는 어쩌다 보니 관용구를 하나 깨달아버렸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소녀를 진정시키기에는 자신의 말솜씨가 그저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앞치마 주머니 속에 있던, 자신이 가끔 쓰던 손수건을 꺼내 소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녀가 눈물을 닦는 동안 그는 소녀를 자신이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의자에 앉혔다.

한참 뒤에 소녀는 어느 정도 진정한 듯 보였다. 훌쩍이는 빈도가 줄었고, 호흡도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돌아온 것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친구랑 좀 싸웠어요.”

소녀가 발아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친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니?”

“아니요. 아마 제가 먼저였을 거예요.”

“…말해서 편해진다면 들어줄게.”

소녀는 다시 감정이 복받쳤는지 울먹이며 한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마 정리하자면 자신을 뒷담화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같은 학원이었다. 대충 A라고 불리는 같은 학원의 그 친구는 이번 학기까지도 잘 지내고 있었는데, 여름 방학에 좀 일찍 학원에 갔을 때 A가 과거 뒷담화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소녀를 욕하고 있었단다. 그래서 그날은 학원 수업을 듣지 않고 도망쳤으나, 오늘 길가에서 태연히 말을 거는 그 친구와 싸우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정리하니 정말 어린 아이들 싸움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조금 진정한 소녀의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속상했겠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저씨라면 오늘도 여기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왔는데, 일하는 데 방해만 된 것 같고...”

가끔 소녀는 기억이 왜곡되는 모양이었다. 분명 처음 마주했을 때 편히 낮잠 자고 있던 것은 까마득히 잊고 그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을 거라고 단정 지어버렸다.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괜찮아. 찾아와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해도 돼. 난 매일 여기 있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너무 오글거리고 쓸데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였던 소녀에게는 충분히 멋져 보이는 말이었다. 소녀는 한참을 그 앞에서 울었다. 그는 이제 슬슬 꽃에 물을 줄 시간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식물은 사람보다 참을성이 강한 아이들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이번은 소녀의 편에 섰다. 온실의 꽃들도 이해해주리라 믿으면서.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다. 여름에 먼저 피었던 장미는 학교의 교직원과 노인에게 선물로 주고, 온실에는 해바라기와 새로 심은 데이지가 있었다. 서로 키가 맞지 않아 마주 볼 수는 없었지만, 노랑과 하양은 꽤 어울리는 조합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머리색과 눈 색을 섞은 것 같기도 하고, 자기애는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는 그 색들을 좋아했다.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며 새벽에 온실 문을 연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저 오늘 생일이에요. 생일 축하해주세요.”

생일? 그는 구석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10월 27일이었다. 그는 소녀에게 뭘 줘야 하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둘러댔다.

“야 인마, 이제는 당당하게 들어온다? 여기 원래 나 말고는 들어오면 큰일 나.”

“사실 축하해주고 싶었으면서. 그렇게 사니까 아직까지 여자 친구가 없지.”

그는 농담이라는 듯 씩 웃는 소녀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준비한 것이 전혀 없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 생일 축하한다. 근데 선물이 딱히 없어서 어쩌냐. 밥이라도 사 주랴?”

밥 정도로 만족할지, 그는 소녀가 더 원하는 것이 있을까 약간 긴장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꽤 놀란 표정이었다. 왜 이런 것으로 놀라는 건지, 자기가 그렇게 구두쇠처럼 보였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는 그런 반응에 오히려 안심이었다.

“야, 정신 차려라. 곧 있으면 일 끝나니까 저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는 손으로 온실 문 앞을 가리키고선, 일하느라 흙이 묻은 장갑을 벗고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인상을 찡그린 소녀는 말없이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내가 그리 잘못했나? 의문 거리가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일을 끝낸다는 것이, 생각보다 조금 어색하다는 걸 깨달았다. 해가 아직 저물지도 않았는데 창고를 정리하고 있다니. 미친 게 분명하지, 하고 그는 작게 혼잣말했다. 그는 거울 앞에서 앞치마를 벗어서 벽에 걸어 놓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었다. 뭐…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름 괜찮아 보였다. 그는 창고에서 나와서 마지막으로 온실을 점검한 후 밖에서 온실 문을 잠갔다. 6943. 교장 선생님, 세상은 웃고 살 만한 것 같습니다. 자물쇠가 덜컥, 잠기며 그에게 답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세상은 웃으며 살아야지.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그는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는 건가. 그는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다. 한참 고민하다가, 그가 자주 갔던 중식집으로 소녀를 데려갔다.

“와, 대충 아무거나 사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짜장면 먹으러 올 줄은 몰랐는데.”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사실 웃었다고 해야 할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네가 먹고 싶은 게 딱히 없다고 했으니 주는 대로 먹어야지. 아주머니! 여기 짜장면 두 그릇이요.”

“와, 완전 뻔뻔해. 제가 짜장면 못 먹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내가 두 그릇 먹으면 되니까 걱정 마라.”

잠깐의 정적 후에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이렇게 챙겨 줘도 되는 건지, 그는 조금 소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꼭 미리 선물을 사 둬야지, 하고 다짐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짜장면 두 그릇이 두 사람 앞에 각각 놓였다. 저렴한 가격대에 걸맞은 평범한 짜장면이었으나, 그는 그 짜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젓가락을 한 짝씩 잡고 섞은 후 한 젓가락 먹으니, 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우와, 내가 왜 이런 맛집을 모르고 살았지? 아저씨 의외로 미식가였던 건가?”

소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의 예상보다 소녀의 입맛에도 잘 맞은 것 같았다. 실수가 의외로 기회를 만들어낸다고 하던가. 그는 찾아온 기회에 긴장을 풀었다.

“근데,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차도 없는 것 같은데 여기 근처에 사시나?”

“뭐, 놀러오게? 그러지 마라. 학생이 성인 남성 집에 놀러 가서 뭐 하려고.”

그는 얼굴을 무표정으로 굳혔다.

“제가 아저씨 집을 왜 가요. 제가 졸업해도 자주 만날 수 있나 해서 그랬죠.”

소녀도 그와 비슷하게 표정을 굳혔다. 남이 보면 심각한 대화인가 착각할 정도로. 그는 다시 표정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동네에서는 나 못 볼걸? 나중에 보고 싶으면 그냥 온실로 와.”

소녀는 그저 실실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왜 웃어, 밥 먹다가 기분 나빠지게 만드는 속셈이냐?”

“에이, 아니에요. 졸업하면 꼭 찾아뵐게요.”

식사를 끝낸 후, 그와 소녀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금빛 하늘이 선선히 바람을 불어주었다. 신호등 불빛이 붉은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신호등의 불빛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선선한 바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는 동안,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곧 있으면 해가 지겠네.”

소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집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소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그는 눈치챘다. 소녀가 다시 신호등을 보았다. 무언가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아저씨, 오늘 같이 밥 먹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일은 좀 바빠서, 모레 온실로 놀러 갈게요!”

그가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소녀가 속사포로 할 말을 내뱉었다. 잠시만, 그, 아니, 수아야, 그가 생각한 말은 많았지만, 어느 것도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먼저 갈게요, 안녕!”

그는 소녀의 그 말이 정말로 작별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당장 손을 뻗어 소녀를 붙잡았을 텐데. 소녀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얼굴빛이 어떤지도 모르는 채로 곧바로 차도로 날아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참새처럼.

“잠시만, 야-”

드디어 뇌에서 입을 열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오늘은 정말 의문투성이인 날이다. 특히 지금, 소녀가 대체 무슨 심정이었는지 감도 안 온다는 점에서. 그는 뒤늦게라도 손을 뻗었다. 하지만 뒤늦게라는 말은 아무 때나 쓰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손끝에서 붉디붉은 꽃잎이 수천 장 휘날렸다. 그가 노인에게 보냈던 장미꽃처럼 아스라이, 황홀하게 흩날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다시 조금씩이나마 흘러가는 시간은 그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냈다. 미처 멈추지 못한 트럭, 깨진 유리창, 날아드는 유리 조각, 황홀한 황혼의 햇살, 검은 머리카락, 붉은 꽃잎에 휩싸인 소녀, 관절이 다 뒤틀린 몸뚱이, 공중에 떠오른 덩어리, 경적, 비명, 침묵.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니 무언가 커다란 것이 몸을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현장은 참혹했으니, 무언가 지나간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자기 손 끝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의문이 잊혀지고 남은 단 하나의 의문이 그를 불렀다. 수아는 어디 있니. 그는 눈을 아래로 굴렸다. 소녀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정확히는, 팔과 다리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꺾인 채로 충격을 온전히 받은 덩어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수아야.”

그는 소녀를 불렀다.

“수아야, 대답 좀 해 봐.”

소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 조각이 박힌 손으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전화 기능을 눌렀다. 119. 그가 아는 세 자리의 번호 중 가장 누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휴대 전화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119입니다. 그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 사람이 트럭에 치였어요. 네. 중학교 앞 횡단보도에서요. 그는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오히려 침착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스팔트 바닥에 앉았다. 검은 아스팔트 바닥이 끈적한 붉은 액체에 물들어있었다. 그는 소녀를 가까이서 보았다. 누가 봐도 아직 살아있는 것이 대단할 정도로, 소녀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119 불렀어, 조금만 더 참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아직 죽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살 수 있을 거야.”

소녀가 약간 입을 벌려 무언가를 내뱉으려 했다. 그러다 소녀가 자기 심장을 뱉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꼈다.

“아니야, 수아야. 하지 마. 그러지 마…”

왜 이리 119는 발걸음이 느린 건지. 원망이 한 겹, 두 겹 쌓이고 있었다.

“아저씨.”

소녀가 결국 말을 꺼냈다. 그는 소녀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혹시나 저 말이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과 마지막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절망감이 그의 양팔을 잡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할 말을 계속했다.

“데이지의 꽃말은 순수함이래요. 학교에 계속 남아있는 아저씨 같지 않나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학교에 남아있는 이유는 순수함보다는 미련에 가까웠는데. 더 이상 보다가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아 그는 소녀에게 애원했다. 그만 해. 그만 말하라고.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글렀네요.”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 조각이 박힐 대로 박힌 그의 손은 점점 욱신거리고 있었고, 이제 와서 소녀를 막아 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한 가닥의 희망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것밖에는. 소녀는 그 외에 유언이랍시고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렸다. 딱히 듣지는 못했다. 저 멀리서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구급차가 보이는데, 소녀의 말 따위 들리겠는가. 구급차는 좀 떨어진 곳에서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곧 그의 근처에 멈추어 섰다. 그는 소녀에게 속삭였다. 수아야. 구급차가 왔어.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속삭였다. 수아야. 눈 좀 떠봐.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곧 소녀는 구급대원들이 가져온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긴장의 끈을 잠시 놓쳐버린 건지, 그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곧 뒤통수에 통증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차마 정신 차리지 못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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