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 上

자캐 단편 연성. 공백포함 5,306자.

소녀 side 1

"다녀올게요!"

하늘이 푸르고 맑은, 약간은 쌀쌀한 늦가을 날 아침이었다. 본인의 생일을 맞이한 열여섯 살 소녀는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섰다. 평소와 같이 차들이 지나가고, 가게는 서둘러 문을 열고, 정비공은 고장난 신호등을 점검하는 평소의 일상 그대로였지만 소녀에게는 일 년에 단 한 번 주어지는 24시간의 특별한 날, 생일이었기에 모든 것이 다 따스하게만 보였다.

"수아야! 요즘 계속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그래도 오늘 드디어 만났네! 좋은 아침이야."

등굣길에 작년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소녀는 그 아이의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친구는 소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주고 있었다.올해에는 아쉽게도 같은 반이 되진 못 해 가끔 복도에서나 마주치는 사이였다가 오늘 등굣길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좋은 아침."

이라며 짧게 대꾸하고 소녀는 다시 학교로 걸어가려는데,

"아 맞다! 이번 주에 생일이었던가? 이왕이면 오늘이면 좋겠는데. 좀 늦었거나 일찍 말한 걸 수도 있지만, 생일 축하해!"

소녀의 다급하고 답답한 마음은 몰라준 채 계속 재빨리 쫓아오며 소녀에게 말을 건다.

"응, 오늘이 생일이야. 축하해줘서 고마워."

짤막하게 답하고서는 친구들이 교실에서 기다릴 거라며,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소녀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 그 친구는 소녀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 험담을 소녀의 등 뒤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는 것처럼 해온 아이였다.

그 친구를 굳이 만나서 다시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역겨웠다. 

자신이 해온 짓을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소녀는 친구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서둘러 학교로 뛰어갔다.

소녀는 점심시간 직후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국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옷에,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친구들의 반응이 더욱 잠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적에는 생일이 항상 재미있고 기대되는 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덧 중학교 졸업반이 된 소녀는 학교 수업에는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소녀가 기다리는 오늘의 남은 일정은 온실 구경뿐이었다.

소녀가 다니는 학교에는 온실이 있었다.물론 일반적인 학생들을 위한 온실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자기만족을 위해 마련한 방 한 칸 정도의 작은 온실이었다.

소녀가 그곳을 처음 들어갔던 건 작년 겨울방학 때였다. 자신의 옛 교실에 두고 왔던 공책을 찾으러 목도리로 둘둘 싸맨 채 힘겹게 학교에 왔던 날, 소녀는 이미 집 밖을 나온 겸 학교의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기로 결심했다.

이미 건물 안쪽은 모두 둘러봤던 소녀였기에, 1층 아래 지하실을 몰래 들여다보거나, 교직원 전용 화장실이나, 아이가 순수하게 궁금해할 것 같은 곳을 모두 둘러보고 나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온실이었다.그곳에는 하얗게 머리가 샌 백발의 할아버지가 5월에나 만개할 데이지에 물을 주고 있었다.소녀는 조용히 온실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평소에 적막 속에서 일하던 그는 오랜만에 듣는 사람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 움찔거렸다.

“아이고, 여기는 학생이 오는 곳 아니다. 빨리 나가.”

꽤 젊고 힘있는 목소리가 답했다. 소녀의 생각보다는 젊은 나이인 것 같았다.손을 휘저으며 절대 안 된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그가, 소녀는 오히려 궁금해졌다.

“왜요? 어차피 겨울방학이라서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저밖에 없어요.”

소녀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꽃만 꺾어가지 마라.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투박하게 할 말만 툭 뱉고 다시 일을 시작한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지금은 1월인데 데이지를 벌써부터 키우시게요?”

“학교의 짱이라는 놈이 키우라는데 어쩌겠냐.”

“아, 교장 선생님 온실이구나. 소문으로만 들어서 몰랐네요. 고용되신 거에요? 수위 일도 안 하시는 것 같던데.”

잠시 소녀를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젊은 청년에 가까운 그가 입을 열었다.

“귀찮게 하지 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너무 빨리 쫓겨날 것만 같아서, 소녀는 엄지 손가락 만한 작은 데이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봄에 방긋 피어날 그것이 한겨울의 자신 앞에 서서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마치 이곳은 영원히 봄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소녀를 흘깃 바라보던 그는 소녀가 그저 장난을 치러 학교에 들어온 장난꾸러기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참 뒤에 가끔 말동무라도 해 주러 온실에 찾아와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그 후부터 소녀는 꽤 자주, 기쁜 날이라면 기뻐서, 슬픈 날이라면 슬퍼서 그 온실에 찾아가서 그 날 있었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그는 항상 소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에 투덜거렸지만, 진심으로 슬퍼하는 날 만큼은 데이지 꽃에 물 주는 것도 잊은 채 소녀를 달래 주느라 바빴다.그리고 그 모든 날들을, 온실의 꽃들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렸다.분명 소녀는 마지막으로 들은 수업이 국어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영어 교과서와 연필 한 자루였다. 무의식적으로 교과서만 바꿔 두고 생각에 몰두했을 거라고 짐짓 생각하던 소녀는 다시 책상 위를 깔끔히 정리한 후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않게끔 조용히 온실 속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저 오늘 생일이에요. 생일 축하해주세요.”

“야 임마, 이제는 당당하게 들어온다? 여기 원래 나 말고는 들어오면 큰일 나.”

“사실 축하해주고 싶었으면서. 그렇게 사니까 아직까지 여자 친구가 없지.”

소녀와 그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본 만큼 웃음 포인트가 맞춰진 모양이었다.

“그래. 생일 축하한다. 근데 선물이 딱히 없어서 어쩌냐. 밥이라도 사 주랴?”

순수하게 말 뿐인 축하여도 충분했는데, 그의 성의에 소녀는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야, 정신 차려라. 곧 있으면 일 끝나니까 저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는 흙 묻은 장갑을 벗겨내고선 소녀의 머릿결 따위 신경쓰지 않고 이리저리 쓰다듬었다.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조금 기분이 상한 소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온실 입구 쪽으로 가서 서 있었다.항상 온실에서 일할 때 몰래 빠져나가서 그가 온실 밖에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못 했는데,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그를 보니 그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를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와서 본 그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사내였다.그는 소녀에게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은 뒤, 딱히 없다는 답을 듣자 무척 고민하더니 지극히 평범한 중식집으로 소녀를 데려갔다.

“와, 대충 아무거나 사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짜장면 먹으러 올 줄은 몰랐는데.”

“네가 먹고 싶은 게 딱히 없다고 했으니 주는 대로 먹어야지. 아주머니! 여기 짜장면 두 그릇이요.”

이렇게나 뻔뻔한 아저씨는 처음 본다며 소녀는 투덜거렸지만, 그런 점 때문에 그가 온실에 계속 방문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며 적당히 웃어넘겼다.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차도 없는 거 같은데 여기 근처에 사시나?”

“나? 어… 어디 근처긴 하지. 왜, 놀러오게? 학생이 성인 남성 집 놀러 오는 건 절대 안 된다.”

“미쳤나 봐, 제가 아저씨 집을 왜 가요. 동네 사시면 졸업해서도 자주 만날 수 있으니까 그랬죠.”

“동네에서는 나 못 볼걸. 하루 종일 집에 있던가 온실에 있던가 둘 중 하나라서. 나중에 보고 싶으면 그냥 온실로 놀러 와. 교장한테 미리 말 해두면 되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변이었기에, 소녀는 그저 실실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웃어, 밥 먹다가 기분 나빠지게 만드는 속셈이냐?”

“에이, 아니에요. 졸업하면 꼭 찾아뵐게요.”

어느 새 하늘은 붉게 물들어있었다.곧장 집으로 갈 수 있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 불빛이 초록색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소녀에게는 매일 등하교 할 때마다 지나다니던 횡단보도였다. 당연히 신호등이 초록빛 불로 바뀔 시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곧 있으면 해가 지겠네. 얼른 집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소녀는 해 지기 전에 꼭 돌아와야 한다는 집안의 규칙을 생각해냈다.눈 앞의 신호등을 적당히 보니, 당장 뛰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소녀는 급히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오늘 같이 밥 먹어줘서 감사합니다! 내일은 좀 바빠서, 모레에 온실로 놀러 갈게요! 먼저 갈게요, 안녕!”

“잠시만, 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녀는 곧바로 차도에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단지 소녀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오늘 아침 정비공이 신호등을 손 보며 신호가 바뀌는 시간을 조금 늦췄다는 것이다.

소녀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생일이었을 뿐이고, 그녀의 끔찍한 친구가 말을 걸어 그 광경을 흘깃 보고 넘겼을 뿐이다.뒤에서 소녀를 바라보던 그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소녀를 다시 뒤로 끌어두려고 했으나,

한 박자 엇갈린 불협화음은 처음에는 외침을,

그 다음에는 경적을,

그 다음에는 충격을,

그 다음에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정신을 잃지 못한 불쌍한 소녀는 자신의 질긴 몸뚱아리를 원망하며 생각했다.괜찮아. 생일에 죽는 사람도 꽤 많대. 어릴 때 죽는 사람도 많고.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이야.하지만 흐릿하게 울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침착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공포가 소녀의 몸뚱아리를 움켜쥐었다.

“119 불렀어, 조금만 더 참아. 아직 죽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살 수 있을 거야.”

이미 빛만 간신히 보이는 눈에 일렁이는 그의 형체와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소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뭐라도 말해주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숨 쉬기에도 벅차 내뱉어야 할 문장들을 도로 삼켜버리고 만다.그도 더욱 격양된 목소리로 무언가 외치고 있었지만 소녀의 몸이 듣기를 포기해버렸다.처음에 그녀를 한 번에 데려가려고 했던 통증은 이제 그녀를 구슬리려고 점점 상냥하게 변해갔다.

몸이 통각마저 포기해버릴 정도라면 이미 틀렸구나.아저씨, 성인이긴 하지만 이런 거 보면 힘들 텐데. 처음부터 고생만 시킨 건 아니겠지.

소녀의 마음을 알아준 건지, 아니면 죽기 전에 제정신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무언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할 말을 계속하라는 것 같았다.

“데이지의 꽃말은 순수함이래요. 학교에 계속 남아있는 아저씨 같지 않나요?”

마음을 바꿔 그만 말하라는 듯이 계속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글렀네요. 아저씨, 제가 죽으면 매년 오늘이 올 때마다 데이지 꽃을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물론 5월에 피는 꽃을 10월에 가져다달라니, 이렇게나 이기적인 제안도 없을 것이다.

“아, 저희 부모님께도 연락 드려주실 수 있을...까요?”

슬슬 그만 이야기하라는 듯이, 소녀는 자신이 땅 아래로 서서히 잠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이렌 소리가 귀에 울리다 이내 잠잠해진다. 소녀는 이제 한계라는 듯 그저 눈을 감고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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