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05
료켄유사♀
지난 요약 - 유사쿠는 사랑을 고백하는데 성공했지만 료켄이 자수 사실을 밝혔다.
빗소리와 함께 스펙터가 돌아왔다. 1층 라운지를 서성이던 바이라가 복도로 나와 그를 맞았다. 간접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는 집 안을 둘러보던 스펙터는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료켄님이 방에 들어가셨다는 걸 안 모양이다. 그녀는? 바이라가 물었다.
"언덕 밑에서 택시를 태워 보냈습니다."
"그래……"
"료켄님은?"
"방에 계셔."
"네.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야겠군요."
다시 스펙터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경애하는 료켄님이 괴로워하시지만 옆에 있는 것 보다는 물러날 때라고 생각한 듯 했다. 평소보다 일찍, 스펙터는 겉옷을 챙기고 현관으로 나섰다. 비오는 밖을 나갔다 왔는데도 여전히 깔끔한 신발을 신고 나서 위층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바이라도 위층을 올려다보곤 나가기 직전의 스펙터의 의지를 확인했다.
"료켄님의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
"료켄님의 약점을 감히 제가 어떻게. 그리고 당연히 료켄님께서 극복 하실 테니 제가 주제넘게 끼어들 것이 아니지요."
"맞아, 극복 하실 거야……"
"내일 뵙죠."
찰칵. 조용히 닫힌 현관문. 바이라는 그 앞에서 '극복 하실 거야……'를 읊조리듯 입 안에서 굴렸다. 극복, 하실 거라 믿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듯 했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 그라는 인간이 걱정되었다. 소리를 치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박사님께서… 괴로운 생각을 닫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안쪽에 상영하듯 그날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니라며, 일어나시라며 울다가 어른들이 상황을 설명하려 하자 방으로 도망쳤다. 그날 타키는 천천히,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 소년의 방 앞으로 갔다. 방 앞에 선 것은 좋았으나 무어라 말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심하다 조심스럽게 똑똑, 노크를 하였다.
"……"
"……"
"들어와도 좋다."
문 안쪽에서 료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떨림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
아이는 도저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사쿠가 료켄 녀석에게 또 청혼하러 갔다는 것은 가방을 대신 가져온 타케루가 알려주었다. 걱정이 되어 몰래 쫓아갈까 싶었지만 유사쿠 혼자 극복할 문제라고 해 물러났더니…… 역시 예상 경로와 그곳의 카메라를 전부 쫓아갔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늦게 온 이유도 모르겠고 오자마자 료켄 녀석이 자수한다는 걸 알고 있었냐고 물어서(무슨 소리냐고 반문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엄청 놀랐고 직후 VR룸에 들어가 계속 거기 박혀있는 유사쿠가 걱정되어서 사고회로가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유사쿠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무얼 하는지 눈에 보이게. 다시 유~사쿠~ 불러도 보고 똑똑 노크도 해보았지만 답은 역시 없었다. 물론 이딴 문, 가볍게 열 수 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은 아이도 알고 있었다. 유사쿠가 집안으로 급히 들어와 아이에게 큰 소리로 물었을 때의 표정은 아이가 정말로 처음보는 표정이었다. 무거운 감정들이 많이 담긴 표정. 판도르에게 연락해 읽어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그런 감정들을 그대로 표면에 내보낸 것으로 보아 유사쿠는 지금…… 심각한 상황이다.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 아아 안에 카메라라도 있으면 유사쿠가 뭐 하는지 알 텐데!! 아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곧 쿠사나기가 오겠지만 그렇다고 문을 열어주진 않을 테니 우선 솔티스의 기능들을 활용해 보았다. 열심히 활용해 본 결과 다행히 바닥에 털썩 앉아 벽에 기대고 가만히 있다는 것 만이라도 알아냈다. 감정들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있는 것이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고.
"주인님께서는 오늘도 힘드신 것 같습니다…(ToT) 이잉 이잉 로봇삐는 슬퍼요..."
"나도……"
아이는 AI에 입력된 '주인님께서 힘드실 때 공감하는 행동'을 출력하는 로봇삐를 껴안고 침대에 앉았다. 힘든 유사쿠, 더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도 로봇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작은 집 안은 비가 내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쏴아아…… 아이는 비가 창문을 씻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밖은 어둡고, 비가 내리고, 추워보였다.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등장인물이 비를 한껏 맞으며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어……'라고 말했다. 다시 VR룸을 바라보았다. 유사쿠의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겠지. 아이는 품 안의 작은 로봇삐를 쓰다듬었다.
"오프 하는 것이 좋겠네. 오늘은 일찍 자라."
"주인님은 괜찮으실까요?"
"네 주인은 극복할 거야. 믿고 오프 해."
늘 그랬으니까. 유사쿠를 믿는다. 지금은 힘들어도 곧 극복할거야.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아이는 마음을 굳게 가졌다. 오프된 로봇삐를 자리에 두고 창가에 다가가 밖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쿠사나기의 트럭이 주차하는 것이 보였다. 쿠사나기가 트럭에서 방까지 올라오는 속도를 계산해 딱 맞게 문을 열어주었다. 유사쿠는? 쿠사나기가 방으로 들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VR룸을 가리키고 역시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아직도 저기 틀어박혀있어."
"어이구……"
"유사쿠 왜 저러는 거야?"
"일단은…… 료켄이 자수한다는 것이 충격인거겠지. …결국 직접 들었나보네…"
"녀석이 진짜로 자수를 한대? 잠깐, 쿠사나기는 알고 있었어?"
쿠사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왜 유사쿠에게 말 안 했던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뒤이어 쿠사나기가 말한 다른 녀석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다들, 그걸 알면서, 유사쿠를 료켄에게 보낸거야? 인간들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 되짚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청혼을 받아주지 않을 상대에게 청혼하라고 보내다니, 그것도 함께 미래를 잡고 싶은 그 사람이 자수한다는 걸 유사쿠만 모르고…
자수. 료켄의 죄는 무겁다. 리볼버는 인간 사회에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고 아이가 아는 한 '감옥'에 들어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와의 격리를 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미래를 잡고 싶은 사람이 사회와 격리된다. 나와 격리된다.
꿈꾸고 희망하던 것에 벽이 세워진다. 이룰 수 없다.
아이는 지금 유사쿠가 왜 힘들어하는지 일부분을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만큼 유사쿠를 슬픔으로 내몬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쿠사나기는 조용히 VR룸 문에 다가가 노크했다. 똑똑.
"유사쿠. 나야. ……괜찮아?"
"……"
"……"
"아니……"
아주 희미하게, 슬픈 대답이 들렸다. 유사쿠답지 않은 대답이. 언제나 어떤 어려움에도 일어서던 유사쿠답지 않은 대답이.
아이는 유사쿠가 가여웠다.
**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방. 방 안의 가구들도 혼자 사용하기에는 많이 크지만 애당초 가구가 많지 않아 방은 비어있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쓸쓸함과 슬픔이 가득한 방의 한쪽, 통유리창 앞에 커다란 안락의자가 놓여있다. 불빛은 창밖에서 옅게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전부지만 타키의 눈에는 방 안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몸에 휘감기는 슬픔의 공기와 함께 말없이 의자에 다가갔다. 등받이가 뒤로 젖혀진 안락의자. 료켄님은 의자에 앉아 여전히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등도, 팔도, 다리도 안락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있지만 료켄님의 몸에는 안락이 없었다. 그래도 분명 그렇게라도 앉아계셔야 마음을 억누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처럼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웅크린 채 울고 계셨을 테니까. 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료켄님의 표정을 보며 타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괴로움과 슬픔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마음을 이겨 낼 수 없는 표정으로 어둠을 바라보는 료켄님께 바이라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료켄님, 후지키군은 스펙터가 아래에서 택시를 태워 보냈습니다."
"음."
"……"
"……"
바이라는 료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렸다. 나가라는 명령도, 솔직한 말도 괜찮으니 무엇이든 말씀하시기를 바랐다. 료켄님께서 괜찮아지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빗소리만이 방 안에 울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바이라는 무심코 자신에게도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괜찮으신가요?' 여쭈었다. 료켄님께서 대답하듯이 창 너머에서 시선을 거둬 옆에 서있는 바이라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있었고 어둠이 가득한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 날 엉엉 울던 작은 소년은 훌쩍 자라 키도 많이 커졌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한참 어리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모두가 경애하며 진심으로 따르는 리볼버가 되었다. 여섯 아이들과 아버지를 향한 죄책감과 함께 무거운 죄가 그의 어깨에 놓여져 있어도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
"타키누나…… 나는…… 나는 어떡하면 좋지…?"
울먹이는 목소리.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으려던 소년은 무너졌다.
타키는 소년이 너무나도 가여웠다.
**
유사쿠의 입에서 세가지의 마음을 들은 순간 료켄은 행복함이 가슴 저 아래에서부터 가득 차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짝사랑이 아니다. 서로의 사랑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기분에 행복이, 기쁨이, 황홀함이 료켄의 모든 것이 되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료켄. 그 누구라도 이러한 순간은 더없이 행복하리라. 그러나 료켄의 사랑은 잠시였다. 곧 몰아치듯 떠오르는 현실이 어두운 폭풍이 되어 그의 사랑을 가시로 바꾸었다. 가슴에 아픔이 느껴졌다. 만개의 가시가 심장을 찌르듯 아팠다. 차라리, 차라리 유사쿠의 진심이 거짓말이었으면. 유사쿠의 모든 고통의 시발점인 자신을 유사쿠가 사랑할 리가 없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깨뜨린 시발점인 나를, 네가 좋아할 리가 없다고 물었지만
"진심이다."
유사쿠의 사랑이 진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루어졌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된 료켄은 자신이 모든 죄를 고백하고 벌을 받을 각오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러면 안되는 나. 나는 사랑조차 죄가 된다. 나는 죄에서 비롯된 사람인가. 유사쿠가 사랑하는 자신이, 유사쿠를 사랑하는 자신이, 자수하기로 결심한 자신이, 리볼버인 자신이, 하노이 프로젝트를 고발했던 자신이, 10년 전 우연히 만나 집으로 초대한 첫사랑과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던 자신이, 료켄은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미웠다. 죄와 고통만이 나의 전부다. 사랑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
"유사쿠와… 도망가고 싶어……"
타키는 자신의 손 보다 한층 더 큰 소년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양손으로 료켄의 손을 감싸고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췄다. 그때처럼. 그때처럼 료켄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말없이 료켄이 더 괴로움을 내뱉기를 기다렸다.
"유사쿠가 말했던 것처럼, 둘이 새로운 미래를 잡고 싶어…… 나의 길에서 벗어나서, 유사쿠와……"
"……"
"나는, 유사쿠를 사랑하면 안 되는데, 사랑을 지울 수가 없어. 차라리 그때, 듀얼하지 않고 플레이메이커와 같이 사라졌으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
첫사랑보다 사명이 더 중요했던 그때의 '죽음'보다 지금이 더 괴롭다는 료켄의 말에 타키는 강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타키는 말했다.
"우리는 네가 도망쳐도 괜찮아."
"당신들을 어떻게 두고 가……"
료켄님께서 하노이 기사의 죄를 부하들에게 온전히 떠맡기고 떠나도 그 누구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죄를 지을 것이다. 그의 삶은 '료켄'보다 '료켄님', '리볼버님'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가 선택했다 한들 소년이 소년답게 살지 못하게 된 죄가 삼기사 모두에게 있으니까. 대의를 위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꺼내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집념으로 가시밭 길을 걷는 그가 늘 안타까웠기에 기꺼이 그의 몫의 벌까지 받을 수 있다. 어차피 받을 벌, 료켄이 행복의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더한 벌도 두렵지 않고 그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이 된다. 타키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젊지만 아직 20살 조차 되지 않은 소년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늘 바랬으니까, 행복하게 웃기를 바랬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타키는 다시 말했다.
"안돼……"
마음 안에 상냥함을 품고 있는 소년은 망설였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 도망치기를 바라지만 그 만큼 망설일 이유도 충분했다. 타키도 그걸 알고 있다.
10년 동안 피해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노이 프로젝트의 피해자들과 그 관련자들, 하노이의 기사들이 활동하며 입힌 피해, 전뇌 바이러스, 플레이메이커가 저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힌 하노이의 탑, 자기들끼리 싸우다 자멸한 이그니스들, 남은 단 하나의 이그니스.
그 피해자들에 대한 참회는 너무나 무겁다. 죄의 결과물과 책임을 소중한 동료들에게 넘기고 자신의 행복을 쟁취해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은 없다. 결국 소년이 선택 할 것은 어떤 것이든 고통이 될 뿐이다.
그래도 그 아이가 있으면, 료켄은 조금이라도 행복할 텐데. 타키는 료켄이 사랑하는 유사쿠를 떠올렸다. 죄의 피해자 중 하나.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하노이의 탑을 저지함으로 복수심과 증오를 끊은 아이. 로스트 사건에 평생 묶여있을 료켄을 보며 괴로워하기 보다 사랑하기를 선택한 아이. 그 아이라면, 료켄의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아까 전, 유사쿠와 단 둘이 이야기 했던 것이 되감기 되었다.
처음 주었던 브래지어가 컵이 작은 데도 유사쿠는 그냥 불편하게 입었다. 다른 것은 맞을 거라며 컵이 조금 더 큰 것을 주었더니 유사쿠는 이해하지 못 했다. 타키는 유사쿠에게 몸에 맞는 브래지어와 브래지어의 종류에 대해 알려주다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소녀는 여자들의 커넥트가 전혀 없다. 다른 이들과 속옷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보니 속옷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다른 여자들과 친해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타키는 여자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생리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진통제나 옷에 묻은 피를 지우는 법이라던가…… 유사쿠는 경청했다. 문득 타키는 생각했다. 지금 내 눈앞의 소녀가 정말 플레이메이커인가? 당연히 내가 미울 텐데. '네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라던가 '괜한 참견이야.' 그렇게 거부할 법도 한데, 그저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학생 같았다. 평범한 여자아이. 그 날 연구원들이 이 아이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덴 시티의 한 여학생으로 자라 다른 여자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재밌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 억지로 이어붙이게 한 죄책감이 타키를 내리눌렀다. 타키의 분위기가 바뀌자 소녀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약간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미안해……"
타키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유사쿠는 곧 어떤 미안함인지 알아챈 듯 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눈빛에 증오나 미움은 없었다. 상냥한 아이다. 료켄처럼. 둘의 인생은, 어른들의 손에 처절하게 찢겨졌다. 타키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눈물이 료켄의 손등에 떨어졌다. 타키는 두 아이가 행복한 미래를 살기 바랐다. 그렇게 해서 두 아이에 대한 참회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벌을 받음으로써 다른 이들에 대한 참회를 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좋으니, 제발. 적어도 두 아이라도 행복했으면. 서로 사랑하는 두 아이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 주었으면.
"그 아이와 함께 도망쳐서 사랑을 하며 살아. 벌은 우리가 전부 받을게.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줘. 너희의 인생을 살아줘. 리볼버를 버려줘."
"그럴 수 없어. 나는 리볼버야. 나는, 나는……"
리볼버는 료켄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리볼버를 든 팔은 유사쿠가 붙들고 있다. 탄환이 갈 곳은 둘에게 달렸다.
타키는 모든 죄책감과 미안함에 죽을 듯이 괴로웠지만 두 아이의 아픔이 더 클 거라 생각해 울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 료켄은 리볼버로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탄환은 료켄의 심장에 박힐 것이다. 료켄은 그렇게 결심하리라. 타키는 료켄을 한참 동안 안아준 뒤 방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는 너의 선택이 어떠하든 그 결정에 따를 거야. 그래도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걸 알아줘."
조용히 문을 닫고 타키는 흐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리고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싶었지만 벌을 받아야 하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독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내일 료켄의 결정을 들어야 하니까.
**
료켄은 아까 소란이 있었던 라운지에 들어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보이는 라운지의 광경. 비가 내리는 풍경까지 완벽하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니, 료켄의 마음을 투영하는 듯 하다. 오래도록 멍하니 창밖을 보던 료켄은 쓰레기통에서 부케를 꺼냈다. 세차게 내리쳐져 망가진 부케. 꽃 몇 송이는 모양이 망가졌고, 어떤 것들은 줄기가 꺾이거나 꽃송이가 떨어져 나갔다. 망가진 부케를 들고 라운지를 서성이다 아버지의 육체를 모시고 있던 연명기기에 기대어 앉았다.
"유사쿠……"
료켄은 부케를 꽈악 안고 유사쿠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과 미안함으로 상처입은 유사쿠의 부케를 품에 넣고 웅크렸다.
비는 그칠 기미가 전혀 없다.
정말로 내일은 맑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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