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04
료켄유사♀
지난 요약 - 유사쿠는 자신이 료켄을 사랑한다는걸 받아들이고 다시 청혼하러 갔다.
유사쿠가 씻는 동안 료켄은 바이라에게 간단한 사정을 말하고 유사쿠가 입을 옷, 감기약을 부탁했다. 바로 움직여줄 테지만 그녀의 새 거처는 코가미 저택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바이라도 유사쿠가 다 씻기 전에 오는건 불가능 하다고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옷은 포기했다. 속옷은 바이라가 새것을 가져다 줄테니 우선 옷이라도 빌려주려 집에서 입는 옷들 중 적당한 것을 찾았다. 좀 넉넉한 옷이면 좋을 것 같았지만 료켄은 그런 스타일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품이 그나마 큰 것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샤워기 소리를 확인하고 인기척 없이 조용히 들어가 옷을 놓아주고 나왔다. 욕실 안 바구니가 비어있길래 스펙터에게 묻자 가볍게 세탁했고 지금은 건조 중이라고 바로 답했다. 고맙군. 스펙터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끄덕이고 옆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곧 9시네요. 료켄도 시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늦은 시각.
"아마 완전히 건조되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리겠지요."
"음."
그때까지 이 집에 유사쿠를 들여놓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접촉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료켄의 미간에 다시 깊은 주름이 잡혔다. 역시 무작정 내보냈어야 했나. 그래도 유사쿠의 작은 기침소리와 차디 찼던 손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못하면 심한 감기가 들 수도 있으니 저 때문에 앓는 것은 싫으니까. 이미 상처를 잔뜩 주고 있지만 마음은 또 그러했다. 마치 이율배반 같은 감정이 료켄에게 냉소지었다. 리빙 룸의 고급스러운 소파에 깊게 앉아 등을 기댔다. 머리까지 기대니 천장의 밝은 등에 눈이 부셨다. 유사쿠를 보는 것 처럼 눈이 부셔 살짝 눈을 감았다.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떨린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뻔하니 대답하지 않고 자세만 고쳐앉았다.
"료켄. 여기 있어?"
료켄이 그렇게 가라앉아있던 동안 유사쿠가 료켄의 옷을 입고 리빙 룸에 들어왔다. 바지가 길어 조금 끌렸고 옷도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그렇게까지 큰 옷은 아니지만 유사쿠가 료켄보다 몸집이 작아 예상보다 넉넉했다. 옷 자체는 어두운 색에 매우 심플해도 어쩐지 그 모습이 귀여웠다. 유사쿠는 료켄이 잠깐 흘겨봤을 뿐 다른 반응이 없자 말 없이 료켄의 건너편에 앉았다. 료켄은 유사쿠를 아예 무시하고 창밖만 바라보기로 결심했지만 창문에 비친 유사쿠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이렇게 보니 작군. 오늘따라 평소보다 작아보인다. 유사쿠는 제 모습이 낯선지 소매와 다리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다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였다.
"왜, 냄새라도 나나?"
"아니. 나에게서 네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
"나쁘지 않아, 네 냄새."
아, 또 말을 걸어버렸군. 한숨과 함께 료켄은 소파 팔걸이에 얹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유사쿠의 지금 모습도,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그 말도, 은은한 미소도 사랑스럽다. 유사쿠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더니 그 이후로 사랑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생생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안돼.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 그 심장에 다시 못을 박았다. 유사쿠에게 호감을 가지면 안된다. 좋아해서는 안된다. 지워야 한다. 지금 나의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해서는 안될 상대다.
"료켄님. 차를 내왔습니다."
**
"꿀과 생강을 함께 우린 차입니다."
스펙터가 료켄의 찻잔에 차를 따르자 매력적이고 향긋한 향이 났다. 아, 쿠사나기씨가 자주 말했던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곧 유사쿠의 잔에도 차가 따라졌고 '당신은 한 잔이라도 반드시 비우십시오.' 스펙터가 당신때문에 우린 차니 마시라고 권했다. 그의 호의(순수하게 유사쿠만을 위한게 절대 아니란걸 알지만)에 알았어, 짧게 답하고 차를 입에 댔다. 마음속으로 생강 맛이 강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적당히 달고 맛있는 정도라 입에 맞았다. 그래도 조금 뜨거워 한 모금만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확실히 속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옷과 차 덕분에 포곤포곤하니 기운이 나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떠올랐다. 말하자. 테이블 한 가운데 놓여있는 아직 물기가 있는 부케. 집으려 했지만 잠시 손이 머뭇거렸다. 료켄은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는 어둠만 바라보고 있다.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현관에서 화를 내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 생각하자 어제 거절한다고 말했던 그에게 다시 말할 용기가 사그라들었다. 부케까지 가지 못한 손을 다시 허벅지 위에 얹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꾹 닫힌 유사쿠의 입 속에서 '료켄'이 메아리 쳤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메아리는 힘이 없다. 찻잔 속의 유사쿠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듯이, 일단 기다리라는 듯이. 그때 뒤에서 웅- 소리가 다가왔다. 유사쿠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래다. 아래에는 로봇청소기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요즘 덴시티에 많이 있는 안드로이드에 가까운 가사용 로봇이 아닌 원시적인 형태의 납작하고 순수하게 청소기능만 붙어있는 것이었다. 청소기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고있자 료켄이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의 목소리로. 고작 그런 목소리에도 유사쿠의 귀는 잠시 황홀함을 느꼈다.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신기한가?"
"응. 너는 이런거 쓰지 않을 것 같았거든."
료켄은 전부터 AI와 인터넷 세상에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현실을 중시하는 편이었으니 당연히 이곳엔 이런 것이 전혀 없을거라 생각했던 유사쿠는 의아해했다. 료켄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사쿠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마주친 눈동자에 유사쿠가 비쳤고 유사쿠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
콩닥.
"네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아냐. 내가 혐오하는건 '과도한 AI'지, 이렇게 사용기능에만 충실한 AI라면 반대하지 않아. 인간이 편리를 누리기 위해 AI를 만들었고 적당히 사용하는 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네가 보는 청소기의 경우, 어느 집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필요성에 비해 청소를 자주 하지 못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경우 꼭 필요하겠지. 하지만 편리함에 지나치게 의존해 청소 기능과 AI를 고도로 발달시켜 사용하다 나중에 스스로 청소나 정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아이에게도 그런 교육을 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에게는 독이 된다. 나는 그런 것을 경계한다."
"……AI가 지나치게 발달해 폭주할 수도 있고……"
"그것도 포함되지."
로봇삐가 생각났다. 지금은 아주 예전으로 돌아가 다시 자신의 역할과 AI에 걸맞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는 로봇삐의 AI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녀석이 지금 행복해하면 됐어.'라고 웃었다.
"나는 인원에 비해 이 집이 크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건 가능한 하지. 중요한 것은 '적절한 선'과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 해?"
집안일 하는 료켄은 AI를 사용하는 료켄보다 더욱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의 행실과 무게있는 카리스마에 비해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 듯 했다. 의아해하는 유사쿠의 생각을 읽은 듯 료켄은 피식 웃었다. 비웃는 것이 아닌 정말 웃은 듯 분위기가 풀어진 것이 느껴졌다.
또 콩닥.
"뭐, 자주 듣는 소리지. 하지만 집안일은 중요하다. 결코 가볍고 하찮은 일이 아냐. 어떤 사람에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따질게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그건 알아."
"그래, 그렇겠지. 사실 나도 네가 청소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어. 그래도 스스로 그런 것을 자꾸 되새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까와 비슷하게 독이 된다."
"맞아."
유사쿠도 공감을 표했다. 다시 료켄의 입꼬리가 내려간 것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료켄과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행복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 조차 행복할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구나. 유사쿠는 다시 자신이 료켄을 좋아한다는 걸 느꼈다. 고백, 해야하는데. 아까부터 계속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결심했을 때, 적어도 저택 앞에 서 있었을 때는 분명 전부 말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 상황까지 오니 갑자기 용기가 휘발된 듯 했다. 료켄이 절대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아까 료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고 반드시 고백할 의지는 있지만 대화를 잔뜩 하고 싶었다. 절대적으로 숫기 없고 말없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일단은 고백보다 지금의 행복함을 잡고 싶었다. 잘 없는 기회다보니 유사쿠는 조금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스펙터가 많이 할거라고 생각했어."
"흠. 녀석이 많이 하긴 해. 본인이 잘 맞는 것 같고 꼭 하게 해달라며 거절하지 말아달라길래 적당히 하게 내버려두고 있지. 녀석도 바쁜데, 고마울 따름이야. 그것보다,"
료켄이 턱짓으로 유사쿠의 차를 가리켰다. 식기 전에 마시는 것이 좋다는 뜻이리라. 잊고있었다. 후릅, 다행히 아직 따뜻한 차. 마시기 좋은 온도라 꿀꺽꿀꺽 금방 마셨다. 목부터 뱃속까지 화아 알싸하면서 따뜻해졌다. 이 분위기를 타고 료켄과 더 대화하고 싶은 유사쿠지만 공교롭게도 딱히 생각나는 화제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할 기술은 없다. 료켄도 굳은 얼굴로 창밖-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는-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쉽게도 대화가 끊긴 듯 했다. 추욱 처진 부케의 꽃들처럼 유사쿠도 축 처졌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분위기가 곧 바뀌었다.
"료켄님.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후지키군, 이리로."
어느새 온 건지 바이라가 리빙 룸에 들어와 유사쿠를 불렀다. 무엇때문인지 모르는 유사쿠는 료켄을 보았고 료켄은 갸우뚱한 유사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료켄을 믿고 바이라를 따라갔다.
**
유사쿠가 바이라를 따라가 속옷을 입고 간단한 진단을 받는 동안 료켄은 스펙터가 잔을 치우는 것을 도왔다. 스펙터는 달그락달그락 컵들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료켄을 만류하지 않았다. 스펙터가 예상한 대로 료켄은 잔을 싱크대에 넣고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과는 반대로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던 유사쿠의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대화를 해버렸다. 유사쿠가 청혼을 잊을 주제라 생각해 대화를 한 것 까지는 좋은 계산이었지만 유사쿠와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아서 그만 분위기를 타버렸다. 경계가 풀어진 사냥개가 꼬리를 흔들 듯 유사쿠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는걸 깨닫고 서둘러 대화를 끝냈어도 두근거리는 가슴과 단호한 이성이 료켄 속에서 아우성이었다. '유사쿠와 잘 되는 느낌'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 아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유사쿠. 유사쿠에게 더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머리 속에서는 유사쿠를 멀리 해야 할 세가지 이유를 되새겼다. 첫째, 곧 자수한다. 나는 나의 미래를 가는 것이지만 유사쿠는 분명 충격을 받을테니 숨기고 그때까지 거리를 둬야 한다. 둘째, 유사쿠에겐 유사쿠의 미래가 있다. 나와 엮이는 것은 그 미래에 방해가 될 뿐이다. 셋째, 나는 유사쿠에게 원수나 다름없다. 그런 내가 유사쿠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버지…… 료켄은 혼자 많은 못을 심장에 박았다. 그 가슴이 무거워 땅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오늘 더는 유사쿠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 것 같아 덜 마른 옷이라도 꺼내주고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다시 리빙 룸에 나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혹시, 유사쿠가 감기라도? 료켄의 마음이 다시 초조해졌다. 입 안쪽에 쓴 맛이 감돌았다. 힘없이 소파에 앉아 손에 턱을 괴었다. 아픈 것이 아님 좋겠는데. 료켄의 눈에 힘없는 부케가 보였다. 결혼하자는 유사쿠의 목소리가 다시 반복재생 되기 시작했다. 안돼. 그만둬. 나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마…… 귀를 막았다. 그러자 어렸을 적, 실험 당하는 유사쿠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내가 데려오지 않았었다면 연구진들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텐데…… 가장 깊은 곳에 박혀있던 못에서 심한 통증이 퍼졌다. 그런 유사쿠를 내가 좋아한다. 료켄의 마음이 격한 통증으로 아렸다.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유사쿠. 이름을 부르자 아까부터 계속 보았던 유사쿠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마음 속에 퍼져 통증을 지우기 시작했다. 호흡 속으로 아픔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이것이 곧 더한 아픔으로 올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계속 유사쿠를 밀어낼 것이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습니다. 스펙터, 내가 도울 일이라도?"
"아~ 좋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바이라는 리빙 룸에 유사쿠를 보내고 스펙터에게 갔다. 스펙터도 딱히 도움이 필요할 일이 없으니 바이라가 상황설명을 요구했고 그걸 받아들인 듯 하다. 료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사쿠에게 갔다.
"이야기가 길었나 보군. 어떤 이야기를 했지?"
"브래지어와 생리."
"그거 말고. 컨디션."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약과 비타민 챙기래."
"그 약, 반드시 챙겨먹도록. 음?"
소파에 앉으려는 유사쿠의 한 쪽 바짓단이 접혀 올라가있다. 다리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별 것 아닌 크기지만 그쪽도 신경쓰였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여기 올 때 풀에 긁혔길래 붓지 않게 약 발랐어."
"잠깐, 너 여기는 어떻게 온 거냐. 정문이 닫혀 있었을 텐데."
"타케루가 올려주어서."
"하아……"
료켄의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유사쿠가 뒤이어 한 말로 추정해보면 정문과 담이 높아 그 앞에서 기다리던 유사쿠에게 호무라 타케루와 자이젠 아오이가 왔고, 부케는 자이젠이 선물하고 호무라 녀석이 유사쿠가 담을 넘는 걸 도운 듯 했다. 그 둘은 료켄이 자수하는 것과 유사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유사쿠를 도왔다. 그것이 유사쿠를 괴롭게 할 거라 생각하지 못 한건 아니겠지만 둘의 행보가 료켄은 불만이었다. 더불어 유사쿠가 '타케루가 보기보다 힘이 세다는 걸 처음 알았어.'라고 말했을 때는 표정이 있는 대로 찡그려지는걸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럼 우산은?"
"어?"
"녀석들이 우산은 주지 않았냔 말이다."
"글쎄."
둘 중 누구 한 명은 비가 올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우산을 주지 않은 덕에 유사쿠가 비를 잔뜩 맞았다. 물론 가방도 없던 것으로 보아 유사쿠가 부케 말고는 전부 신경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우산을 줬어야지. 료켄은 유사쿠와 그들이 조금 답답했다. (사실 타케루가 황급히 부르는걸 유사쿠가 못 들었다.) 앗,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버린 걸 료켄은 늦게 깨달았다. 청혼을 잊게 하려고 했었는데. 유사쿠도 어느새 부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유사쿠의 눈에 어제같은 순수하고 굳센 빛이 돌았다. 이렇게 된 이상 료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청혼, 거절할 테니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마라."
"……"
"조용히 있어. 그게 너에게도 좋을거다. 아니면 옷이 거의 다 건조되었을 텐데 스펙터에게 물어보든지."
유사쿠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부케를 들고 나갔다. 료켄도 유사쿠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료켄은 역시 라운지에 있었다. 유사쿠가 교복으로 갈아 입고 왔더니 리빙 룸의 불이 꺼져있길래 료켄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방에 갔을 확률이 높지만 높은 확률보다는 라운지에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가미 박사의 육체가 머물러 있었고 리볼버인 그와 처음 대면한 곳. 거대한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이 무척 멋졌던 그 라운지는 불이 꺼져있었다. 그래도 그 깜깜한 어둠 속 료켄이 창 밖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밖은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새까만 하늘과 바다는 그 경계가 모호했다. 아까 료켄의 걱정이 힘을 준 덕분에 그런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부스럭하고 유사쿠가 부케를 양손으로 힘차게 잡았다. 료켄은 다가오는 유사쿠를 돌아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한다고 분명 말했을 거다."
"하지만 난 말해야 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알아. 사실 널 설득시키려고 말하는 것이 아냐."
"그럼 왜,"
료켄이 돌아서서 유사쿠를 바라보았다. 료켄의 눈은 저 바깥과도 같았다. 그 어둠 속에 유사쿠가 놓여졌다.
"대체 왜, 청혼하려는 거냐…"
"네가 들어주었으면 해서. 내 마음을."
"그건 어제 들었어. 너는 그저 약속을 지키고 싶을 뿐 아닌가."
"어제는 그랬을지도 몰라. 내가 너에게 왜 청혼하는지 제대로 된 마음을 말할 거야."
유사쿠가 숨을 들이쉬었다. 유사쿠가 이렇게 긴장한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강대한 적과 싸웠을 때나 큰 위기에 처했을 때보다 더 긴장했다.
다시 부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동자는 똑바로 료켄을 바라보았다.
"첫째, 나는 널 좋아한다.
둘째, 나는 널 사랑한다.
셋째, 그래서 너와 결혼하고 싶어. 너와 함께 미래를 잡고 싶어.
이게 내 마음이다."
**
그 찰나, 료켄의 눈에 별빛이 반짝였다.
**
말했다. 드디어 마음을 말했다. 유사쿠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료켄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며 유사쿠는 거절당하는 것과 다른 슬픈 예감이 들었다.
료켄의 눈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폭풍. 무심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매우 괴롭고, 슬프게. 바라보는 이 조차 가슴이 아플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래…"
"거짓말 하지 마라. 플레이메이커, 네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진심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나는,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료켄이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 유사쿠는 그를 보듬으려 다가갔다. 료켄이 폭풍 속 분노가 빛나는 눈빛을 하고 유사쿠의 양 팔뚝을 거칠게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아팠다.
"읏……"
"네가 그러면 나는 널 밀어낼 수 없어!!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너와 함께 운명에서 도망가고 싶어……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돼, 나는 그러면 안돼…!"
"어째서……"
"자수할 거다."
유사쿠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
결국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자수한다고. 지금 사랑하는 유사쿠를 거칠게 잡고 있는 것도, 상처와 충격을 준 것도 료켄은 스스로가 너무나도 미웠다. 하지만 이 순간 그래야만 한다. 둘 사이에 사랑은 없어야 한다.
**
"자수라니…… 아니, 분명 그렇지만……"
"그러니 네가 이러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다. 나를 사랑하지 마! 내 앞에서 사라져라! 나를 잊어! 너에게 나는 숙적인 리볼버다. 10년 전 부터 우리를 얽매 온 운명의 사슬만이 너와 나의 전부다. 너와 나는 이래서는 안돼! 특히 너는!! 나가, 당장 여기서 나가!!"
"료켄!!!"
혼란한 유사쿠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료켄이 유사쿠의 손에서 부케를 낚아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비어있던 금속 통이 터엉 크게 울렸다. 유사쿠가 부케를 다시 집으려 하자 료켄이 아까 집에 들일 때 보다 더 강한 힘으로 유사쿠의 손을 잡아 끌었다.
"너, 정말 자수하는 거야?"
"다른 녀석들은 알고 있을 거다. 녀석들에게 확인해 봐!"
"잠깐, 놔 봐, 으읏…!"
유사쿠는 어느새 현관 앞까지 끌려왔다. 이래서는 안돼,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료켄과 더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료켄이 손을 놓았다.
"힘으로 잡아당긴 건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제 이 집에서 나가라."
"료켄!"
"후지키군."
료켄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바이라다. '지금은 돌아가줘.' 그녀가 멀리서 속삭였다. 유사쿠는 한 풀 꺾였다. 유사쿠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자 스펙터가 가로막았다.
"료켄님. 이 여자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아직,"
"나가시죠. 당신의 존재가 료켄님을 괴롭게 합니다."
스펙터가 귓가에 속삭인 뒷말에 유사쿠는 말없이 신발을 신고 스펙터가 씌워주는 우산 아래에 서서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이 집에서 한 약속에서 비롯된 소란은 서로에게 큰 아픔을 남기고 끝났다.
거친 비와 어둠이 둘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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