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깨아/NCP] 해바라기
죽었다 깨어나도 아이돌 2차 창작, 신제준 중심
백업 :: 2021. 07
다른 분들도 잠시 대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안내하는 스태프 뒤로 다른 스태프들의 모습이 부산스러웠다. 여럿이 모여 쑥덕거리는가 싶더니 또 금방 이리저리 뛰고 전화하는 둥, 모르고 봐도 문제가 있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신제준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것을 알아챈 스태프의 표정이 멋쩍어졌다. 그러면서도 덧붙이는 변명이 없었다. 신제준이 알았다고 대꾸하자 고개를 꾸벅인 스태프가 바쁜 걸음으로 돌아갔다.
“형, 뭐래요?”
“별건 아니고, 고장이라도 났나 봐. 강혁이는 조금 기다려야겠다.”
첫 타자로 촬영을 마친 김봉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갓 잡은 짐승의 피로 신을 위한 제전을 벌이자.”
“그게 이번 컨셉이랑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거냐?”
“쯔쯧, 이래서 무지한 인간들은…….”
컨셉이 정해진 뒤로 나날이 과몰입을 더해가고 있는 김봉팔이 팔랑거리는 손짓으로 자신의 금발에 고정된 월계관을 어루만졌다. 투명하게 나풀거리는 하얀 천이 손길을 따라 보기 좋게 나부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과할 정도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문강혁이 멋스러운 하얀 셔츠의 소맷자락을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곧 이를 발견하고 지를 스타일리스트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촬영 순서가 돌아와 미리 들고 있던 소품 창이 문강혁의 손에서 위협적인 흉기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강혁아, 그거 이리 줘.”
한숨을 삼키며 신제준이 손을 뻗어 붉은 창을 붙잡자, 문강혁이 얌전히 손을 놓았다. 소품만 뺏어들고 신제준이 물러나자 그칠 줄 모르는 투닥거림이 오갔다. 옆에서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박현의 한숨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실컷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문강혁이 터지기 직전에 김봉팔이 재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리께까지 오는 해바라기들이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을 따라 거칠게 흔들렸다. 우직끈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을 따라 시야에 노란 물이 얼룩덜룩 드는 것 같았다. ‘타임!’과 ‘잠깐!’을 번갈아 외치는 김봉팔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멋스러운 차림새로도 가려지지 않는 문강혁의 근육과 박력이 김봉팔을 덮쳤다.
달아나고, 쫓아가고.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두 사람의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는 스타일리스트들의 소리마저도 여름의 일부 같았다. 엉망진창이지만 정겨운 풍경에 웃음만이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그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신제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너른 해바라기 밭 바깥에서는 촬영 스태프들이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촬영 재개에는 생각보다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린 신제준은 제 눈높이에 위치한 두 마리의 뱀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자 차분한 얼굴로 지팡이를 거둬들이는 박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품을 지금이라도 전부 걷어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응, 현아.”
멋쩍어하는 신제준의 모습에도 박현은 아무렇지 않게 해바라기 밭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민익이 형 혼자 가던데 데려와야 할 것 같아요.”
“…나보고 데려오라는 거야?”
“네.”
“…….”
당연한 걸 말한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박현의 얼굴에 신제준이 눈을 껌뻑거렸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뒤돌아서 우리 쪽 스태프를 찾아가는 모습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나, 저 이거 잠깐 빼면 안 돼요?” 커다란 날개 모양 이어커프를 달고 발갛게 부운 귀를 가리키고 있는 박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박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꽤나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는 최민익의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신제준은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고, 땅에는 노랗게 태양이 피어있었다. 굵은 녹색 줄기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진 채 잎새가 바람을 따라 손짓하며 여유롭게 흔들렸다. 경계를 문지르는 색이 어지럽게 번졌다. 흔들리는 것들이 하늘과 땅을 이었다. 여름이었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해와 하늘을 등지고, 말간 웃음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큼직한 이파리가 매달린 포도덩굴과 함께 땋아내린 머리가 해바라기들과 홀로 다른 계절처럼 보였다.
“…….”
이름을 부르려 뻐끔거리던 입이 목소리를 삼켰다.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가끔은 꿈처럼 시야가 뭉개졌다. 멀고 고독한 곳에서, 가끔은 세상이 빛을 바랬다. 그의 기억에 남은 가장 큰 얼룩. 평생을, 죽었다 깨어나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그곳에 있었다.
“…제준이 형?”
가만있는 신제준이 이상했는지 최민익이 가까이 다가와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최민익. 그 이름은 얼룩이었다. 작은 액자틀에 갇혀 회색빛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던 과오였다. 외롭던 그 시절엔 계절 잃은 국화꽃 향기가 아침에 떠밀려 사라지곤 했다. 기회를 되찾고도 소리 내어도 괜찮을까 종종 아침을 고민에 빠뜨리곤 했던 부름이었다. 신제준은 조용히 눈을 문질렀다. 시야 끝, 뭉개진 곳도 없이 색들이 사이좋게 자리를 잡았다.
파란 하늘, 노란 해바라기.
지워진 시간을 따라 액자틀을 벗어난 얼굴이 눈이 쨍하게도 다시 빛을 냈다. 사라진 것을 따라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선명한 빛이었다. 온통 긍정적인 감정들로만 빚어낸 눈동자가 반짝이며 그를 담았다. 늘 우중충하고 구질구질하다고 여겼던 그 시절에는 바라보지도 못했을 평화로움에 눈이 시렸다. 세상에 칠해진 색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서야, 멀리 그들을 부르는 부름이 들려왔다. 신제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가자. 촬영 시작할 것 같아.”
이번에는 제대로 끝에 이르러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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