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12
료켄유사♀
지난 요약 - 이틀만에 찾아온 위기
날조와캐붕특히주의
나흘
료켄은 낯선 부드러움 속에서 깨어났다. 평소처럼 새벽에 눈을 뜨자 아직 멍한 정신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안고 얼굴까지 파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까지 깨달았을 때는 그저 너무나도 편안하고 기분좋은 느낌이었지만 그 무언가가 사랑하는 유사쿠이며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유사쿠의 가슴이라는,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까지 떠오르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 탓에 료켄을 안고 자고있던 유사쿠도 잠에서 깼다. 유사쿠가 눈을 부비며 일어나 료켄과 눈을 마주치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료켄……? 무슨 일이야?
"그, 아무것도, 아니다."
최대한 당황한 것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착하게 넘겼다. 료켄의 눈에 어둑한 새벽의 빛으로도 졸린 눈을 꿈뻑이는 유사쿠의 귀여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자는 모습은 계속 봤지만 막 일어난 모습은 보지 못했군, 료켄이 유사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커다란 하품마저 귀엽다. 뭘까, 이 생물.
"정말? 뭔가 엄청 급히 일어난 것 같은데."
"정말이니까, 더 자. …아."
"정말이지?"
서로 '정말'만 몇번을 말했는데도, 유사쿠가 료켄을 감싸안고 재차 물었다. 어제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있어 괴로운 것이 아닌가 걱정해주는 마음이 료켄에게도 진하게 전해졌다. 진한 사랑이 가득 차오른다. 료켄도 유사쿠의 어깨를 껴안고 이마에 여러번 뽀뽀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괜찮으니 좀 더 자라고 귓가에 속삭이며 유사쿠를 다시 눕혔다. 따뜻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유사쿠의 의식이 다시 잠의 저편으로 떨어졌다. 유사쿠는 완전히 잠들기 직전까지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옹알이를 하듯 말했다. 이 아이는 의식이 잠드는 그 순간까지 남을 걱정한다. 그 점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료켄은 내심 유사쿠가 그런 모습을 자기에게만 보여주길 바랐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약간의 독점욕. 유사쿠도 그런 마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무척 사랑스러워 료켄의 온 몸이 간질간질하다. 가볍게 옆으로 눕고 유사쿠가 잠든 모습을 보았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아주 천천히 방이 밝아진다. 료켄의 아침 하늘 같은 눈동자에 유사쿠가 점차 또렷하게 비춰졌다. 볼살의 동그란 선이 귀여워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기도 했다. 색색 자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나저나 유사쿠가 일어나기 전까지 식사 준비를 끝내야 한다. 아내가 깨지 않게 볼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대고 침대에서 나왔다.
도톰하게 썰린 식빵이 노란색을 깊히 품고 노릇노릇한 갈색 옷을 뽐내고 있다. 유사쿠가 나이프로 프렌치 토스트를 썰어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버터의 고소함과 시럽의 달콤함이 느껴졌고 곧 계란물을 흠뻑 흡수한 빵의 촉촉함이 시나몬 향과 함께 느껴졌다. 입에 걸리는 식감 없이 부드럽다. 단 맛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아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키고 우유를 마시면 딱 적당한 단맛이 차올랐다. 맛있다. 단 맛을 돋우는 우유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되어 눈이 반짝 동그래졌다. 유사쿠의 입에 맞나 살피느라 반도 못 먹은 료켄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오래 재운 듯 한데. 너무 흐물거리진 않나."
"기준은 모르겠지만, 난 마음에 들어."
"그럼 됐다."
그가 과일도 먹으라며 베리가 든 그릇을 유사쿠 쪽으로 드륵 밀었다. 마치 루비 같은 빛깔의 라즈베리 두 알을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신체에 활력을 더해준다. 달달한 식사가 끝나가자 유사쿠가 료켄에게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 료켄은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스펙터와 대대적으로 집안 청소를 할 예정이다. 요즘 손을 못 대서."
"그래, 바빴었으니까. 그럼 나도 일찍 와서 도울게."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넌 네 일이 있으니까."
"내 일?"
"너는 '결정'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텐데. 너도 더 생각할 게 있을 수 있고."
"……그렇군. 그럼 바로 오진 못 하겠어."
"대청소는 신경쓰지 마. 너는 네 일에 집중해."
그릇에 남아있던 베리 두 알 중 한 알을 입에 넣은 료켄이 마지막 남은 것을 유사쿠에게 양보했다. 유사쿠 쪽으로 그릇을 미는 왼손에서 반지의 보석이 빛났다. 유사쿠는 그 손에 잠시 손을 얹었다. 따뜻하다.
마지막에 먹은 베리는 무척 달콤하면서도 뒷맛이 씁쓸했다.
맨 무릎에 닿는 공기가 어제보다 차가웠다. 계절은 명백히 겨울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볼이 시리고 가방을 대충 맨 손은 조금씩 굳어졌다. 낙엽이 거의 떨어진 나무들도 추위에 떠는 듯 했다. 이럴때는 학교의 난방이 고맙다. 유사쿠는 따뜻한 교실에 들어가 언제나 앉던 뒷자리로 향했다. 타케루는 유사쿠가 자주 앉는 자리의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그가 자주 앉는 자리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유사쿠가 가까이 갔는데도 타케루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 한 듯 멍하니 책상에 시선을 두었다. 언제나 먼저 유사쿠를 발견하고 밝게 인사했는데.
"타케루."
"어…… 아, 유사쿠구나. 안녕?"
"안녕."
유사쿠의 부름에 반짝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금세 아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 타케루가 걱정되었다. 말을 걸지 않고 곁눈질로 타케루를 살폈다. 책상 아래쪽에 눈길이 갔다. 타케루는 비어있는 그의 듀얼 디스크를 양손으로 꼬옥 쥐고있었다. 그가 이번 일로 마음이 무척 복잡해 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유사쿠가 왼팔에 착용한 듀얼디스크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없다.
하노이의 기사 - 료켄과 삼기사의 자수로 인한 로스트 사건-하노이 프로젝트의 공표, 이그니스의 공표.
더없이 복잡하고 무겁다. 유사쿠는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을 했는데도 부담감과 망설임이 있었다. 아마 타케루도 그럴거라 생각했다. '이번 일의 결말은 최선이 아닐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유사쿠의 시야 한 켠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자이젠 아오이다. 아오이는 곧장 유사쿠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유사쿠와 타케루도 인사를 했다.
"학교가 끝나고 둘 다 시간 있니?"
"응. 무슨 일인데?"
"……내 친구를 소개하고 싶어서."
오늘의 카페나기는 퍼블릭 뷰잉 광장에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지만 큰 이벤트도 없고 애매한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야기를 방해 할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은 것이 좋았다.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은 학생들 앞에 커피와 주스가 놓여졌다. 쿠사나기도 의자를 가지고 유사쿠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스기사키 미유라고 합니다. 아오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보는 소녀가 모두에게 첫 인사를 건넸다. 어른인 쿠사나기가 먼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우리도 네 이야기는 아오이에게 들었어. 어서와라."
"네. 사장님이 쿠사나기씨죠? 이쪽이 후지키군이고 그쪽은 호무라군이구나."
"맞아. 그럼 우리 정체도 알겠네."
스기사키 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한 미소가 잠시 사라진 것을 보아 아오이에게 같은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정을 들었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아오이가 이번 만남은 미유가 원했던 거라 말했다. 그 이유도 바로 추측할 수 있다. 굳이 이 시기에 만나길 원했다는 건 분명 이번 일 때문이리라. 유사쿠가 예의상 '사건의 공표때문이지?'라고 물었다.
"그래. 그런데 그 전에 다른 이유도 있어. 다들, 정말 고마워. 다 함께 싸운 덕분에 지금 내가 있을 수 있는거잖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와 함께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모두 멋쩍음에 감사를 받으려 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스기사키 미유의 감사를 표하려는 의지는 확고했다. 그녀는 아오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감사에는 아오이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도 담겨있었다. 고개를 들자 미소가 돌아와있었다. '그리고,'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이그니스를…… 한 번 보고싶었어."
"아이말이야?"
"아쿠아는 이제 없지만 적어도 그 아이라는 이그니스를 만나면 이그니스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음……"
"어, 유사쿠. 그러고보니 아이가 없네?"
타케루가 유사쿠의 듀얼디스크를 보고 말했다. 쿠사나기도 몸을 살짝 들어 듀얼디스크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이 까맣다. 유사쿠의 눈동자에 어둠이 비춰졌다.
"아침부터 오지 않았어."
"어제 헤어지기 전에 어디 간다는 말 안 했잖아."
"그래서 이따 집에 가서 흔적을 찾아보려고. 아이도 생각이 복잡할테니 그럴 수 있지…… 미안하지만, 보다시피 오늘은 아이가 없어."
"그렇구나. 있잖아, 오늘 아이를 만나게 되면 내가 보고싶어한다고 전해주겠니?"
"알았어."
아이의 연락없는 부재가 걱정이 되었지만 유사쿠는 아이에게 큰 트러블이 벌어진 것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여기 모인 모두처럼 괴로운 고민을 안고 생각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소처럼 로봇삐를 껴안고 드라마를 보거나 넷서핑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좋으니 감정을 잘 처리하고 있길 바랐다. 또 폭주하지 말고……
잠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이제부터 논할 문제는 선뜻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것이니 당연했다. 음료를 마시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늘에 큰 구름이 떠다니는지 햇빛이 오랫동안 가려져있다. 싸늘하다.
쿠사나기가 시작점을 끊었다.
"좋아, 이제 '그' 얘기를 해보자. 우선 나와 유사쿠는 로스트 사건에 대해 공표하지 않는 쪽이야."
유사쿠는 눈빛으로 긍정했다. 쿠사나기는 자연스럽게 그 눈빛을 읽었다.
"다음은 타케루, 어제 조부모님께 연락 한다고 그랬지. 어땠어?"
"네, 네에…… 전부 설명하긴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지 꽤 긴 시간동안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들 그를 이해했다. 타케루는 왼팔에 찬 듀얼디스크의 화면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당연히 사건에 관해 공표를 하고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이 옳다하셨지만…… 그것보다 제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제가 피해자로 손가락질 받는 건 결코 원하지 않으시다고……"
"……타케루……"
"나는 내가 과한 관심을 받아도 당당하게 살고, 나답게 살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어. 플레임의 파트너로서,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서…… 그게 옳은 길이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할거야. 그렇지? 그래도…… 그래도……"
깊은 한숨.
"이번에는 옳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 보다는, 덮는 것이 나을거란 생각이 들었어. 내가 참아서 사회가 조용해지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나름 생각을 해 보았는데 사건이 알려지면 이그니스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그럼 나는 평생 로스트 사건의 피해자란 꼬리표가 달린다. 사회는 나를 그저 사건의 피해자로만 바라본다. 그래, 그건 견딜 수 있어. 아마 이겨낼 수 있을거야.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분명 어린 자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못난 부모라는 꼬리표가, 플레임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데 멋대로 죽은 도구라는 꼬리표가 달릴테지…… 그들이 모욕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어. 내가 사회적으로 항의를 해도 어딘가의 누군가는 비뚤어진 말을 할테고…… 차라리 공표하지 않고, 나도 사건에서 독립하며 사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 내가 그 길을 선택해도 플레임도 부모님도 나를 지켜보며 응원하실거야. 저도 공표하지 않는 것에 찬성합니다."
찬성한다고 말하는 타케루의 목소리가 떨렸다. 커다란 괴로움을 밝힌다는 옳은 길을 걷고 싶지만 그 길을 걸어도 사회에게는 그저 이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미래와 주변 사람들은 또 다른 괴로움에 직면한다. 그런 현실이 부당하고 분하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기사키 미유도 타케루의 뒤를 이어 의견을 말했다.
"나도 아오이에게 설명을 듣고 오래 고민했어. 나, 꽤 최근까지 병원에 있었어.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그때, 내가 구해져서 병원에 있을 때가 떠올랐는데…… 정신이 희미할 때 본 건데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은 기억이야. 우리 부모님이……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병원 원장선생님께 입막음을 당했어. 아냐 당한 게 아니라 부모님도 동의하신 거겠지. 이번 유괴사건은 절대로 알려지면 안된다, 일이 커지면 괴로운건 따님일거다, 우리 애를 가슴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들을 했었어. 얼마 뒤, 어떤 기자가 내 병실에 들어와 취재를 하려고 했고 부모님, 의사선생님들, 정장 입은 사람들 모두 달려들어서 그를 쫓아냈는데…… 우리 애는 그런 일을 당한게 아니다, 어쩌다 길을 잃었을 뿐이다, 부모님이 소리치며 나를 감싸는 걸 보며 깨달았어. 나, 말도 안되는 일에 휘말렸구나…… 그걸 이겨내고 살아 돌아온 게……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랬던 건가, 싶었어."
"미유쨩……"
"정부나 솔티스의 개입이 있었던건 사실이었구나. 나도 정장 입은 사람들은 몰랐어. 아마 나도 어려서 부모님이 숨긴것이겠지……"
빠득, 유사쿠는 쿠사나기가 이를 가는 소리를 혼자 들었다. 소중한 동생이 가장 망가진 피해자인 그는 다른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동생이 떠올라 슬프고도 분할 것이다. 유사쿠도 사건 이후가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사건은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피해자를 괴롭힌다. 그 사건의 마지막 처분을 두고 피해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괴로워도 듣고 생각해야한다.
"그 이후로도 부모님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하셨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을 거야. 나도 두 분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고 사건이 잊혀지자 함께 힘든 시기를 보낸 부모님을 보며 힘을 냈어. 지금까지 그렇게 자라왔는데 그걸 깰 용기는 솔직하게 말해 나에게 없어. 아오이쨩도 있고, 다들 함께니까 공표를 하려면 할 수 있지. 그런데 나는 다시 나로 인해 부모님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은 절대로 보고싶지 않아. 설령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돕는다 하더라도 속은 그렇지 않으시겠고. 나는 우리 가족이 그 사건을 이겨낸 그대로 살기 바라. 세상에 사건을 알리고 싶지 않아. 아, 호무라군 다음에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
"아니야. 나는 우리 부모님이 먼저 떠나셨다는 걸 받아들였어. 누구씨가 좀 도와줬지만……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계셨다면 너희 부모님처럼 하셨을 거야. 괜찮아."
아오이가 다시 스기사키 미유의 손을 잡았다. 아오이의 격려에 기운을 얻었는지 이야기를 하며 점점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폈다. 은은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그니스에 관한 건 어떤 존재인지 직접 체감한 적이 없어 자신이 의견을 낼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아쿠아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다 말했고 아오이도 동의했다.
"이그니스에 관해 결정을 내리는 건 아이지만."
"그래도 타케루, 스기사키양, 아오이쨩. 플레임과 아쿠아를 기억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면 그들도 만족할거야."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기, 내일도 여기 모여도 괜찮나요? 어쩌면 내일 아이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모두 일정이 없어 괜찮다고 말했다. 유사쿠는 일단 아이를 찾아보겠다고 했고 오늘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내일 보자, 음료 잘 마셨어요, 그런 말들 사이로 작은 진동소리가 들렸다.
[유사쿠쨩. 나 리볼버 선생이랑 있어.]
아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강렬한 햇빛이 세상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언덕을 오르는 유사쿠 역시 오렌지 빛깔이었고 그 옆으로 갈매기 두어 마리가 날아 저 멀리 사라졌다. 간간히 철썩- 철썩-,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도 들렸다. 찬 바닷바람이 치마 끄트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며 일렁이는 햇살의 비늘이 눈부셨다. 언덕 너머 코가미 저택의 정문에 료켄이 서 있었다. 그의 발끝부터 조금씩 시야에 드러날 때 마다 유사쿠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얼른 뛰어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료켄이 천천히 나타나는 것이 좋았다. 유사쿠의 미소를 보았는지 료켄도 미소를 지었다. 정문 안, 코가미 저택의 소유지 안에서 유사쿠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료켄. 나 왔어."
"어서와, 유사쿠."
태양보다 더 눈부신 미소와 함께 어서와 키스를 나누었다. 료켄이 유사쿠의 왼손 약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료켄이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손을 다정히 잡은 채 저택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유사쿠를 반겼다.
"유~사쿠 쨩! 어서와용~."
"어서오세요, 주인님!(^v^)/"
키가 큰 솔티스에 들어간 아이와 작은 로봇삐가 유사쿠에게 다가왔다.
"로봇삐까지…… 그래, 안녕."
"나는 안 쓰다듬어 줘?"
"응."
"에."
우선 옷을 갈아입고 이야기를 하자며 료켄이 유사쿠의 어깨를 감싸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이가 로봇삐를 안고 따라가려 했지만 휘휘 내젓는 료켄의 손이 더 빨랐다. 아이는 뾰로통 입을 잔뜩 내밀고 유사쿠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쳇, 유사쿠의 남편이면 다야? 난 무려 유사쿠의 파트너라구……"
신혼방에서는 료켄이 유사쿠의 교복 겉옷을 정리해주며 식사를 할 지 물었다. 배가 고프지만 식사를 원할 정도는 아니었고 입맛이 없었다. 오늘 다 함께 이야기를 하며 자꾸 사건 생각이 나 심리적으로 많이 지친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료켄 혼자 식사를 하는 건 쓸쓸해 할 것 같아 조금만 먹겠다고 대답했다. 유사쿠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었는지 사실 자기도 그렇게까지 식사를 하고 싶진 않다고 그랬다.
"스펙터가 양파 수프를 만들었어. 가볍게 그것만 먹는 건 어때."
"알았어."
그때 붉게 열이 나는 무릎이 료켄의 눈에 들어왔다. 맨 다리로 다니기에는 많이 추워졌다. 집 앞에서 잡았던 손도 차가웠다. 료켄이 더 따뜻하게 입을 것을 권하려는 순간 유사쿠가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반쯤 끄르고 있었다. 단추를 완전히 풀기 전에 얼른 뒤로 돌았다. 살짝 보인 살갗과 속옷이 뭉게뭉게 떠올라 두근두근 했지만 료켄은 최대한 두근거림을 누르고 '저 차림은 춥겠다.'는 생각만 하려 애썼다. 유사쿠는 료켄이 갑자기 뒤를 돌자 옷을 벗다 말고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굳이 물었다. 료켄이 눈을 꾹 감았다.
"네가 옷을 갈아입고 있잖나."
"봐도 돼. 네가 보는 건 상관없어."
"으……"
"사랑하는 사이에다 부부니까 맨몸이 부끄러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유사쿠가 셔츠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서.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느껴졌다. 유사쿠는 정말 상관없다고 료켄에게 알리는 것이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 료켄이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유사쿠를 껴안았다. 몸에 닿는 유사쿠의 맨몸이 아침에 느꼈던 것처럼 너무나도 부드럽고 말랑해 심장이 더 크게 뛰었지만 막상 껴안으니 그것보단 몸이 찬 것이 걱정되었다. 료켄의 뜨거운 몸에 비해 더욱 차갑게 느껴져서 그런지 감기 걸린다고 옷을 입길 재촉했다. 따뜻해. 유사쿠가 재촉을 무시하고 좋은 느낌이 드는 품에 더 파고들자 료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잠, 잠깐…… 그 답지 않은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똑똑!!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자 유사쿠가 몸을 뗐다. 아이가 문 너머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
"저기요~. 거기 부부 너무 늦게 나오는데요~. 유사쿠 빨리 나와. 스펙터 녀석이 로봇삐에게 먹이를 주듯 먼지를 주고 있단 말이야."
유사쿠는 수프라길래 익히 알던 허연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맑은 것이 나와 조금 놀랐다. 게다가 오븐에서 구운 듯한 노릇한 치즈가 얹어져 있다. 스펙터가 수프가 담긴 깊은 그릇을 놓으며 매우 뜨겁다고 경고했다. 그릇 째 구웠겠지. 료켄이 작은 빵 바구니를 내밀며 바게트 조각을 고를 것을 권했다. 작은 것으로 두 조각 골라 접시에 두었다. 하얀 속빵이 말랑하다. 유사쿠는 어떻게 먹을 지 잠시 고민하다 료켄처럼 빵을 여러 조각으로 찢어 수프에 넣고 수프와 함께 떠 먹었다. 달큰하고 깊은 맛이 났다. 양파만으로 이런 맛이 날 수 있는 건가? 푹 젖은 빵조각과 양파 조각이 부드럽게 씹히며 고소한 맛과 달큰함을 더했다. 몸 안쪽에서 따뜻함이 감돈다. 료켄이 양파를 오래 볶고 소고기 육수를 내야해서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스펙터가 수고를 했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정통 레시피와는 조금 다르지만요. 료켄님께서는 이걸 더 좋아하시죠."
"맛있어."
"고맙습니다."
유사쿠가 칭찬한 것을 그는 몸을 살짝 숙이며 자연스럽게 받았다. 료켄의 부하들은 모두 유사쿠를 보스의 아내로 깍듯이 대하고 있다. 그것이 유사쿠는 부담스러웠지만. 로봇삐가 유사쿠의 무릎에 떨어진 빵가루를 손으로 털어내고 우우웅- 빨아들였다. 식사 중에 청소는 실례라고 스펙터가 로봇삐에게 말했다. 로봇삐가 무해하고 말을 잘 듣는 덕인지 그는 예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작은 가사로봇으로만 대했다. 한편 아이는 유사쿠의 옆에 앉아 빈 그릇과 숟가락으로 달그락 달그락 먹는 시늉을 했다. 아이의 부탁에 억지로 식기를 준비해 준 스펙터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 뭐하는 거야?"
"그냥~. 다같이 먹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해서."
"어떤데."
"뭐 얼추 알거 같긴 해."
"같이 먹는 것……이라."
유사쿠는 지금까지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그다지 없었다. 쿠사나기, 타케루와 함께 핫도그를 먹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없는 수준을 넘었었다. 지금은 료켄과 자주 식사를 하지만 한 명, 두 명, 세 명이 함께 식사를 하는 건 확실히 달랐다. 시끄럽지 않다면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당분간은 료켄에게 집중하고.
"그러고보니 너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유사쿠. 그건 식사가 끝나고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아이가 대답하기 전 료켄이 선수를 쳤다. 유사쿠에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칫-, 하고 료켄이 끼어든 걸 불편하게 여겼다. 어차피 료켄도 유사쿠도 그릇을 거의 비웠다.
식후 커피는 료켄의 작업실에서 놓여졌다. 유사쿠는 낮에 이미 마셨기 때문에 연했고, 그만큼 료켄의 커피가 진했다. 커피는 입가심과 대화에 좋다. 료켄은 순서 상, 오늘 유사쿠가 동료들과 의논한 것에 대해 말할 것을 권했다. 유사쿠가 뜨거운 커피를 조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스기사키 미유와 만난 것, 타케루도, 스키사키 미유도 다른 이들을 생각해 사건을 공표하지 않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했다. 료켄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 사건에 관해 알리는 걸 포기한다는 건 수치스러운게 아냐. 그건 정말로 큰 용기가 필요하지. 제삼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용기가……"
"그래도 다들 내심 알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쿠사나기 씨만 빼고는. 사실 나도 정말 이것이 맞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쿠사나기 쇼이치는 쿠사나기 진의 새출발이 달려있으니 당연하지. 물론 가장 옳고 좋은 길은 로스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회가 거기에 옳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과 솔 테크놀러지가 합당한 죗값을 치루고 정부가 대책을 세우는 그런. 너희들 모두 그걸 바랄테지."
유사쿠가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는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해. 아아, 이렇게 말하니 마치 내가 유도하는 것 같군. 미안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너희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거야. 솔직히 나도 옳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 다만 내가 바라는 것과 현실이 다른 건 사실이니까, 어떤 선택을 하던 이해해.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
"심란하겠지만, 너희 넷이 그렇게 정했다면 내일이라도 자이젠 아키라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결정을 지체할 수록 더욱 흔들릴거다."
아이가 끼어들었다.
"잠깐, 넷이라고? 피험자는 6명이잖아?"
"후…… 스펙터는 우리쪽이니 결정과 상관없고, 다른 파트너는 말 했을텐데. 바람의 이그니스가 처리했다고. 그쪽은 자이젠 아키라가 조율하고 있다."
"살아있다면 의견을 낼 만큼의 상태는 아니라는 거네… 쩝."
"내일 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료켄은 바로 자이젠 아키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오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아이. 스기사키 미유가 널 만나고 싶어 해."
"응, 너희가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그래 만나지 뭐. 아쿠아의 오리지널은 어떤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아.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안 들었어. 무슨 일이야?"
"내 시체를 만드는 걸 감수해달라고."
유사쿠의 눈 앞에 놓여진 노트북 화면에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코드들이 빠르게 입력되었다. 이그니스 알고리즘이다. 유사쿠는 료켄의 설명에 따라 그 코드를 익히고 있었다. 아주 일부인데도 이루 말 할 수 없이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당장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링크센스 덕분인지 료켄의 예상보다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한편 아이는 작업을 하는 간간히 료켄과 화면 너머의 판도르에게 검토를 받았다. 아이는 지금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찌꺼기를 만들고 있다.
"시체……?"
"물론 가짜 시체. 쉽게 말해 죽은 척. 난 사회기록적으로 말살될거야. 아주 자유롭게 되는 거지."
"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솔 테크놀로지 내부에는 이그니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다. 5년 동안 이 녀석을 추적하면서 투입된 인원들, 솔 테크놀로지에 오래 복무한 연구원들, 땅의 이그니스를 분해한 녀석들 등. 물론 솔테크놀로지가 어느정도 입막음을 했겠지만 폭로라도 되면 곤란해."
"그럼 유사쿠쨩도 예상했겠지만 정부나 세계가 간섭할거야. 그~러~니~까, 죽은 척을 해서 관심을 끊게 하는 거지."
"어제 이야기한 그거구나."
후우…… 유사쿠가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한참 코드를 살펴보다 잠깐 눈을 쉴 때 아까 시체라는 말에 덜컥 놀랐던 걸 떠올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 시체는 말이 심했어."
"그런가."
"둘 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도록. 유사쿠. 여기는……"
"앗 또 뺏어갔다."
아이가 뭐라 궁시렁 거리는 것이 유사쿠가 듣지 못하게 료켄은 가까이에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노이의 기사가 구속되면 이그니스와 관계된 사람은 너밖에 남지 않는다며 만일을 위해 이그니스 알고리즘을 익혀두는 걸 권했다. 물론 유사쿠가 짧은 시간안에 익히는 데는 한계가 있고 판도르도 있지만 여차할때 아이에게 접근 할 수 있는 건 유사쿠밖에 없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만일의 이야기지만 유사쿠도 아이도 인정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이그니스 알고리즘은 해커나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아름다울 정도였다. 광기에서 피어난 피의 꽃길. 아이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익히는 중이라 '이것이 그 실험에서 나온 결과……'라는 생각이 간간히 들었다.
그러나 유사쿠의 눈썹이 처진 것은 다른 이유였다. 하노이의 기사들이 구속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료켄과 헤어질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로스트 사건 피해자의 결정, 솔 테크놀로지와 하노이의 기사 사이의 조율. 단계를 밟아 나아갈 수록 료켄과 헤어질 날은 가까워진다. 당장 내일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아팠다. 헤어지기 싫어. 더 함께하고 싶어. 눈이 건조해졌다는 핑계로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새벽 3시를 넘어서야 오전부터 시작했던 아이의 작업은 끝이 났다. 유사쿠는 작업실 한켠의 소파에서 자고 있다. 료켄이 내일 학교를 가야하지 않냐며 자정이 지날 즈음 유사쿠를 방으로 보내려 했지만 유사쿠는 왠일로 함께 자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적어도 멀리 떨어진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며. 료켄은 유사쿠의 마음을 이해한 듯 별 말 없이 스펙터에게 간단한 침구를 가져올 것을 부탁했고 유사쿠를 작업실 소파에서 재우기로 했다. 따뜻하게 씻은 유사쿠는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팔베개를 하지 않는 만큼 료켄이 길고 긴 굿나잇 키스와 사랑의 속삭임으로 배웅을 해 주었다. 역시 피곤했었는지 곧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료켄은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럼~ 난 갈게. 리볼버 선생도 좀 자."
"네가 신경쓸 건 아니다."
"예예 그러시겠지요. 그럼 유사쿠에게 말해버릴까~. 내가 유사쿠를 마중가려고 했더니 자기 아내 마중을 왜 네가 나가냐며 짜증을 냈다고~. 꼼짝말고 있으라고 밖으로 급히 나가서 응~? 그 와중에 반지도 챙기고. 아이고~ 내가 유사쿠와 가깝게 있는게 그렇게 질투가 나셨어요~?"
"찌꺼기로 만들어주마."
"에잉 부끄러워하긴. 그건 유사쿠랑 똑같네."
아이는 능청스럽게 료켄을 놀리고 코가미 저택을 나섰다. 전원이 꺼진 로봇삐를 품에 안고 '유사쿠가 잘 지내는 걸 확인해서 좋구만.' 그렇게 생각하며 새벽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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