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Days

BETTER DAYS 11

료켄유사♀

쓈's Universe by 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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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요약 - 신혼

이틀

료켄은 지옥같은 연구실을 오가면서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밀폐된 작은 방에 담겨 절망과 고통에 상처받던 육체와 영혼에게 주어진 휴식의 시간. 담요 한 장을 덮고 몸을 웅크리며 쓰디 쓴 잠을 청하는 그 모습들. 특히 '아는 아이'가 그렇게 자는 모습은, 꿈 속에서조차 해방되지 못해 몸을 벌벌 떠는 모습은 조용한 비명이 되어 료켄을 찢어놓았다.

그 '아는 아이'가 지금, 료켄의 품 안에서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된 그 아이가 옆에서…… 두 번째 보는 모습이지만 료켄에게는 꿈만 같은 모습이다. 먼저 일어난 료켄이 유사쿠가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빼고 잘 자는 유사쿠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 몸을 떼면서 벌어진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갔는지 유사쿠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추워……' 말하고는 이불을 볼까지 끌어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료켄의 뇌리에 어린 유사쿠가 자는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유사쿠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유사쿠에게 '깨워서 미안하다' 말하기도 전에 유사쿠가 미소지었다. 료켄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 너……"

"!!"

유사쿠가 웅크렸던 몸을 펴고 료켄의 품에 뛰어들듯 그를 껴안았다. 머리를 가슴에 기대고 있지만 쿵쾅쿵쾅 뛰는 심장소리는 다시 잠들어버린 유사쿠에겐 들리지 않는 듯 하다. 다행이다. 유사쿠의 숨결이 옷 너머 피부로도 느껴진다. 쓰라린 마음이 한켠에서 찌릿찌릿하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커다란 유사쿠를 사랑하는 마음이 료켄을 어찌 할 줄 모르게 했다. 그런 와중 유사쿠의 숨결이 자신의 무언가를 자극한다는 것도 느꼈다. 속으로 별 일 아니니 이렇게까지 두근거릴 필요 없다고 계속 되뇌였지만 그러기엔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사랑한다. 그런 스스로를 어쩌겠나. 유사쿠가 료켄을 안고 잠들어버려 일어날 수도 없으니 료켄은 유사쿠를 품에 꼬옥 안았다. 유사쿠가 자는 동안 계속.

덕분에 하루를 시작한 시간이 늦어 브런치를 먹게 되었다. 작은 오믈렛을 오물오물 먹는 유사쿠는 잠을 푹 잘 잔 듯 눈빛이 또렷하다. 정확히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료켄도 그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유사쿠가 료켄을 안고 편안하게 자던 모습도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품에서 잘 자는 모습과, 깨었을 때 바로 정신을 차린 건 아니었지만 줄곧 껴안고 잤다는 걸 알고서 미안해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좋았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다시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행복이 지금 마시는 라떼처럼 부드럽고 향기롭다. 료켄이 미소를 짓고 유사쿠를 바라보자 유사쿠가 먹는 것을 멈추었다.

"왜? 뭐 묻었어?"

"아니. 네가 기분 좋아 보여서."

"맞아, 꿈에 네가 나와서 기분이 좋아."

"호오, 그래? 어떤 꿈이었지?"

유사쿠는 꿈을 떠올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주 꾸는 꿈이야. 그때…… 그때의 네가 일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말을 거는 꿈."

"……'그때',인가……"

"료켄,"

그때의 그 모습이 료켄을 스쳤다. 료켄이 어두운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유사쿠와 눈을 마주치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 식사가 반쯤 남은 그릇을 치웠다. 부엌에서 떨리는 손으로 식은 라떼를 마시려고 했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때'. 머릿속에서 어린 유사쿠가 바들바들 떨며 잠들던 모습과 아까 추워서 잠결에 떨던 유사쿠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연달아 괴로워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료켄이 귀를 막았다. 료켄이 놓친 컵이 싱크대에 요란스럽게 떨어졌다. 와장창, 큰 소리에 료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사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료켄! 무슨 일이야?"

"유사쿠……"

어두워진 료켄과 그가 행여 깨진 그릇 조각에 어딜 다쳤을지도 몰라 걱정된 유사쿠가 부엌으로 달려왔다. 부엌에는 햇볕이 깊게 들어와 밝았지만 료켄의 표정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료켄이 걱정스러운 표정의 유사쿠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떨렸다. 유사쿠가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다행히 파편이 싱크대 안에만 튀었고 다른 그릇도 깨지지 않았다. 유사쿠가 대신 치우려 했지만 료켄이 막고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집어 손에 올렸다. 잘그락잘그락 날카로운 파편이 료켄에게 쌓인다. 컵에 가라앉았던 진한 커피가 검게 흘러 배수구로 흘러들어간다.

"가서 마저 먹어."

"괜찮아?"

"아아. 손이 미끄러졌을 뿐이야."

"……"

잠깐 료켄이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 유사쿠는 말없이 식탁으로 가 식사를 계속했다. 입맛이 없어져 맛도 안 나는 음식을 억지로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다 먹고 그릇을 치우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료켄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료켄에게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다. 역시 '그때'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거라고 유사쿠는 생각했다. '그때', '그 사건'은 유사쿠에겐 평생을 괴롭게 할 아픔이고 료켄에게는 평생 짊어질 짐이다. 료켄이 '고발을 해 사건을 종결시킨 일'을 후회한다 한들 그에겐 여전히 무거운 짐이다. 그래도 오늘따라 유난히 아프게 반응한다. 유사쿠가 그릇을 소리없이 싱크대 옆에 두고 다가가 료켄을 뒤에서 껴안았다. 헛, 료켄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등에 귀를 대자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료켄의 온기가 느껴졌다. 유사쿠의 손에 얹은 료켄의 손이 따뜻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료켄, 괜찮아."

"그건…… 어떨런지……"

"첫째, 그 꿈은…… 맞아, 힘든 그때지. 그렇지만 네가 나에게 말을 걸었어.

둘째, 그리고 네가 다가와 나를 일으켜주었어.

셋째, 지금 내 앞에 네가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해. 지금 네가 여기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그 상처보다는 너의 존재가 훨씬 중요하니까 나는 그 꿈이 아프다기 보다는 기분 좋았어. 괜찮아. 괜찮아……"

유사쿠가 손을 빼 료켄의 손을 토닥였다.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유사쿠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료켄이 허리에서 유사쿠의 손을 풀고 마주안았다.

"그건…… 으음, 아냐. 알았어. 자, 그릇은 내가 닦을 테니 넌 나갈 준비를 해. 시간이 벌써 이렇군."

앞머리를 걷어 유사쿠의 부드러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어두운 료켄의 얼굴과 그가 걱정되는 유사쿠의 얼굴이 씁쓸하다. 곧 정오다. 퍼블릭 뷰잉 광장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아슬아슬하다. 유사쿠는 료켄을 한 번 돌아보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갔다.

"너무 신경쓰지 마, 유사쿠. 그건 너희가 어떻게 해서 될 게 아니니까."

쿠사나기가 손님이 없는 사이에 유사쿠에게 레몬차를 타주었다. 광장의 커다란 스크린에 블루엔젤의 화려한 듀얼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이 화면을 보며 블루엔젤을 연호하고 있다. 광장 뒤쪽의 푸드 트럭에서는 유사쿠가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레몬차를 홀짝였다. 새콤달콤한 맛이 좋지만 기분을 업 시켜주진 못했다. 쿠사나기는 계속 표정이 좋지 않은 유사쿠가 안쓰러웠다. 신혼 이틀째-사흘째 아니냐고 묻자 이틀째라고 유사쿠가 단호히 대답했다. 둘만의 기준이 있는 듯 했다.-인데 코가미 료켄이 낮에 계속 바빠 집에 혼자 있기 보단 나와 일을 도와주는 것도 그렇고 둘의 '운명의 지나친 장난'같은 관계와 과거에 순수하게 사랑을 즐기지 못하는 것도 안쓰럽다. 아이가 듀얼디스크에서 농을 던졌다.

"유사쿠쨩~, 녀석의 대우가 영 시원찮다면 집으로 얼릉 돌아와."

"요녀석아. 지금 유사쿠에게 농담 던지지 마."

"에에… 아이쨩, 지금 분위기 못 읽은거? 시무룩……"

레몬 껍질이라도 씹었는지 유사쿠가 미간을 찡그렸다. 쿠사나기가 유사쿠의 옆자리에 앉았다. 철판 앞에 오래 있었던 탓에 추운 날에도 그의 커피엔 얼음이 동동 떠있다.

"내가 료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글쎄. 복잡한 문제라 쉽사리 풀 수 없겠는걸. 그리고 료켄도 너를 걱정하고 있을거야. 여차하면 네가 그때 기억이 떠올라 힘들어 할까봐."

"그런가. 나는 괜찮은데."

쿠사나기는 알고 있다. 유사쿠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 정도의 사건은, 인간이 극복하기 힘들다. 유사쿠는 그저 료켄이 더 중요할 뿐이지 근본적으로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쿠사나기는 그 점을 상기시키지 않았다. 유사쿠가 턱에 손을 대고 아까 입에 들어간 건더기를 계속 씹고 있다. 료켄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 하다. 쿠사나기도 동참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사실 그가 힘들어 하는 걸 덜어줄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다. 소중한 동생을 그렇게 만든 주모자의 아들인데다-물론, 이런 연좌는 부당한 것이 맞다- 실험에 동참한 부하들이 여전히 그의 휘하에 있으니 그는 죄가 없다 한들 증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벗어 날 수 있었던 은인일지라도! 깊숙한 곳의 미움이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한다. 그저 유사쿠의 둘도 없는 운명이라 대우를 해주는 것 뿐이지.

"원래 그럴때 위로해주잖아. 서로 위로해봐."

"그게…… 위로해서 될 일일까?"

아이의 제안은 단순했다. 만약 유사쿠가 관련인이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피해자만 아니었다면 위로가 료켄에게 힘이 되어줄테지만 여차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둘 다 고통의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다. 모처럼 행복하게 지내려는 건데. 정말 둘의 운명은 가시덩쿨로 얽혀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한 송이의 장미를 위해 유사쿠가 힘내고 있다. 쿠사나기도 생각했다.

"유사쿠, 네가 정말 괜찮다면…… 료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어때?"

"응, 들어줄거야. 그렇지만 나에게 이야기를 할런지……"

"하기야 척 봐도 혼자 짊어질 타입인게 보이지."

"그럼 유사쿠쨩, 네가 꼬~옥 안아줘! 인간들이 하도 안길래 찾아봤더니 포옹은 릴랙스 효과가 있대나? 엄청 좋대!"

"매일 안고 있는데."

"그~러니까요~ 더 꼬오옥 안아주는 거야. 이렇게!"

아이가 몸집을 늘려 유사쿠를 꽈악 안았다. 유사쿠는 피하려다 아이의 진한 포옹을 받아들였다. 아까도 료켄을 뒤에서 껴안았는데 효과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안겨있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료켄도 사실 아까 그랬을 지도 몰라. 유사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껴안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스크린에서 듀얼을 끝낸 블루엔젤이 '모두, 오늘 하루 화이팅하는거야-!' 응원을 했다.

오늘로 자료정리는 끝났다. 추리고 추렸는데도 상당히 방대한 양이다. 자이젠 아키라도 조금 지쳤는지 끝났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리'는 말이야."

"……"

리볼버도 어깨를 으쓱하며 고소했다. 며칠간 최종정리를 하던 두사람에게 한 망설임이 생겼다. 그것에 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계속 토론을 했지만 둘이서만 내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아마 많은 것을 끌고 진흙탕에 빠질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벌을 받는다, 심플하게 그랬으면 좋겠건만 현실은 무겁다. 자수하는 것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수 하는 날 그 이후의 많은 변화에 대해서 굳게 각오하고 있다. 다만 연관된 사람들이…… 당장 내일 자수하는 것도 아니니 시간을 두고 이야기해본 뒤 결정하기로 했다.

"우선 네가 후지키군에게 말하는 것이 어떤가? 둘이 오래 논의하는 것이 좋을거 같군."

"유사쿠에게 먼저? …반응을 먼저 보겠다는 건가. 아무리 유사쿠라도 둘이 내릴 결정은 아니니 언젠가 모였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혼생활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다는 건 이해하지만, 아니, 둘의 관계는 이해하지만 그녀와 대화하면 너도 가닥이 잡히겠지."

"……나의 가닥이 중요할까."

리볼버가 미간을 찡그렸다. 유사쿠가 미소짓는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유사쿠가 맑게 미소짓는 모습이. 오늘 아침 침대에서 미소 지었던 모습이. 참으로 슬프게도, 그 미소들을 망가뜨린 시발점이 스스로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리볼버의 가슴에 격통이 느껴지는 듯 하다. 결정권을 무르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던 자이젠 아키라가 제안했다.

"그래, 그럼 모두 모이게 하고 말하는 것이 좋겠어."

"'모두'말인가."

"세명을 제외한 네명에게 말한 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야."

"흠."

리볼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내일이라도 날을 잡아서"

"내일은 내가 안된다."

"…그렇군. 시간이 그렇게 오래 남은 건 아니니 이삼일 뒤에 내가 자리를 마련하지."

"좋다."

"스기사키양에게는 아오이를 통해 말할테니 넌 후지키군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 ……그러는 김에 후지키군과 잘 이야기 해봐."

"뒤는 괜한 참견이다."

그래도 생각해서 한 조언이라는 걸 알았다. 리볼버는 그대로 로그아웃했다. 마침 유사쿠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현관으로 나가자 유사쿠가 들어오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 키스'를 기다린 것이겠지. 그대로 다가가 쪽 키스를 했다. 푸드트럭 일을 도우고 와서 그런지 맛있는 핫도그 냄새가 났다. 그대로 유사쿠를 데리고 방으로 가려니 유사쿠가 기다리라고 한 뒤 겉옷 안에서 두툼한 핫도그 봉투를 꺼냈다.

"이거, 핫도그."

"호오, 어째 품이 이상하다 했더니…… 난 고양이라도 데려 온 줄 알았는데."

"농담이지?"

"농담이지."

료켄이 식탁에 놓여진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 토핑이 더 얹어진 핫도그가 두 개 들어있었다. 머스터드가 뿌려진 것과 아닌 것.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유사쿠가 도착하기 전에 식을까봐 품고 왔으니 당연하다. 맛있는 냄새.

"저녁으로 먹자고 가져왔어. 내가 만든거야."

"고마워라. 맛있을 것 같군. 커피는 내가 내릴게 손 씻고 와."

따끈따끈한 커플세트는 독특한 맛이 났다. 이거 특이하군, 료켄이 웃었다. 유사쿠는 료켄의 반응에 맛이 없나 싶어 얼른 한 입 베어 물었다. 료켄이 특이하다고 말할 맛이었다. 유사쿠도 따라 웃었다. 핫도그는 걱정한 것 보다 훨씬 맛있어서 함께 맛있게 먹었다.

이제 일과는 자는 것 밖에 남지 않았는데 유사쿠는 료켄을 껴안고 위로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저녁 식사때 료켄의 기분이 나아보였고 그 이후로는 다시 료켄이 깊게 고민하느라 유사쿠의 주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료켄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리빙 룸으로 데려갔다. 리빙 룸에는 허브의 향기가 가득했다. 허브차가 테이블에 있었다. 잔은 나란히가 아닌 마주보고 있었다. 유사쿠가 잔 앞에 앉았다.

"기분을 차분하게 해주는 차다."

료켄이 운을 띄웠다. 차는 향에 비해 맛이 강하지 않았다. 이 차를 선택한 걸로 추측하건데 료켄이 썩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지 않다. '차분함'이 필요할 사람이 료켄인지, 유사쿠인지, 둘 다 인지.

"첫째. 나는 내일 새벽 일찍 나갈거다.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

심란함을 숨기지 못한다. 유사쿠가 알았다고 넘겼다.

"나 신경쓰지 말고 자고있어. 둘째, 흠…… 자수건에 대해 말인데."

"음."

"……말하기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선택할 것이 있다."

"선택? 너의 자수에 대해?"

"너희는 그 다음이 어떨지 생각해봤나?"

"아니. 료켄, 솔직히 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

료켄이 이야기가 길어질거 같다며 시계를 보았다. 잘 시간까지 여유가 있다. 료켄의 찻잔은 벌써 비워져 있다. 다시 한 잔 따라서 목을 축였다.

"우선 우리가 하노이의 기사 활동에 대해 자수를 한다. 그럼 우리는 활동의 이유에 대해서도 공표를 하겠지."

"이유. ……이그니스…!"

"그리고 이그니스가 태어난 '로스트 사건', 그 연구의 의뢰자인 솔 테크놀로지를 동시에 고발한다. 솔 테크놀로지는 자이젠 아키라가 책임을 지고 관련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너희들의 문제는, 문제는……."

"로스트 사건이 공표된다는 거…야?"

유사쿠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로서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책임자가 벌을 받길 원했지만 그 일이 이렇게 이루어 질 줄은 몰랐다. 그렇다기보단 그동안 그 사건에 관해 마음 한켠으로 밀어놨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 사건이 드디어……!

"너희는…… 증인으로 설 가능성이 커. 그리고 사회는 사냥감을 발견한 승냥이마냥 너희에게 달려들겠지……"

"……!!"

"그때와는 다른 괴로운 시간이 될거다…… 그 점이 걱정돼. 쉽게 말해 우리가 로스트 사건에 관해 공표할지 어떨지 너희가 결정해줘."

"나는, 잘, 모르……겠어…"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니야. 내일 쿠사나기 쇼이치와 호무라 타케루와 함께 논의해. 빠른 시간 내로 다같이 모일 예정이다."

"……"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무겁다. 유사쿠는 식은 차를 벌컥 마셨다. 목이 계속 탔다.

"셋째."

세번째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유사쿠의 몸이 떨렸다.

"아까 말했지만, 이그니스에 관해서도 발표될거야."

"그럼, 아이도……"

"가장 위험한 문제야. 이그니스의 존재 발표는."

유사쿠는 왜 가장 위험한 문제인지 알아챘다. 아이가 마지막 듀얼에서 말했던 '비극'……

"이그니스, 아이에 관해서도 고민해야해. 물론 두 문제 전부 우리가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래도 대책이 사회에 어디까지 통할지, 사회가 사건의 어디까지 들이밀지는 우리도 계산할 수 없어. 그래서 너희의 의견이 필요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이해하긴 했지만 두 가닥의 사슬이 가슴을 꿰뚫은 것 같다.

"……미안하다…… 너희에게, 너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무거운 선택을 짊어지게 해서…"

료켄의 미안한 목소리가 면목없이 스러져갔다.

이야기가 너무 무거웠던 탓에 차의 진정효과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신혼부부는 어두운 얼굴로 침대에 들어가 전날처럼 껴안았지만 불편했다. 그래도 떨어지면 정말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될 것 같아 그대로 안고있었다. 둘은 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흘

알람에 맞춰 유사쿠가 눈을 떴다. 옆에 료켄이 없는 것을 보고 그의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햇빛이 쓸쓸히 유사쿠를 비추었다. 잠을 잘 못 자 머리가 아팠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구정리를 하고 나가자 쪽지가 있었다. [아침 조금이라도 꼭 챙겨먹어. 사랑해.] 부엌을 보아하니 료켄도 아침을 먹지 않은 듯 했지만. 그래도 료켄의 쪽지에서 사랑과 걱정을 느끼고 기운이 조금 나 우유를 한 잔 따끈하게 데워 그가 좋아하는 잼을 바른 빵과 먹었다. 넓은 집에 햇살이 차고 있지만 료켄이 없는 집 안 의 공기는 시렸다. 유사쿠는 약지의 반지를 매만지며 시린 옆자리를 달랬다.

료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으련지.

역시 오늘도 유사쿠가 집을 나오자마자 아이가 듀얼디스크에 들어왔다. 유사쿠가 먼저 '안녕' 인사하자 아이는 깜짝 놀랐다. 웬일로 네가 먼저 인사를 하냐 놀리기 전에 유사쿠는 아이의 인사도 듣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오늘, 모여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거야. 생각하게 도착할 때 까지 조용히 있어줘."

"에. 알았어……"

아이는 유사쿠가 요청한 대로 도착할 때 까지 조용히 있었다. 한참 걸어서 도착한 트럭 안에는 타케루가 먼저 와 있었다. 쿠사나기도, 타케루도 무거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고 유사쿠도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잠깐 입을 열지 안았다. 그 답답한 분위기에 아이가 투정을 부렸다.

"뭐야뭐야~ 분위기 왜 이래."

"아이에게는 말 안 했어? 아이도 관련되어있잖아."

"응. 두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것 만으로도 지쳐서."

"에에~ 유사쿠쨩 너무해. 어떻게 최고의 파트너 아이쨩을 뒤로 미룰 수 있어? 우우!"

"미안. 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

"아…… ……알았어, 그래서 다들 표정이 왜 그런거야?"

유사쿠가 짧게 설명했다. 하노이의 기사가 자수를 하며 죄를 고할 때 로스트 사건에 대해서 발표를 하고 그럼 피해자들에게도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그니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아이는 뒷말을 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말없이 유사쿠의 손에 손을 얹었다. 아이의 슬픔과 공포가 느껴졌다. 쿠사나기가 아이들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저는…… 글쎄요, 하노이 측이 로스트 사건에 관해 숨기지 않고 발표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니까. 저희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 할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둘이 대책은 세웠다고 그랬어. 아직 그 이야기는 듣지 못 했고 그 대책도 어디까지 통할지 모르지만."

"이그니스들은, 아이, 미안, 이미 전부 소멸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일단은."

"난 사건을 발표하는 건 반대야."

타케루와 유사쿠는 얼추 의견이 맞은 듯 했으나 쿠사나기는 반대였다. 회의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말을 덧붙였다. 쓴 커피를 마시고 자신의 긴 생각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실험을 당한 당사자는 아니라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사실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녀석들이 자수하면 그 뒤는? 진은? 너희는? 자수. 맞아, 코가미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세 조수가 모든 사실을 발표하고 벌을 받는 것이 맞지. 그런데…… 그 다음은? 료켄 녀석도 너희의 명단을 대놓고 공개하진 않을거야. 그래도 재판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자료가 필요할 테고, 그들이 명단 없이 '우리가 했다.' 고백한다 한들 피해자가 누구고 진짜 있는지도 모르는데 과연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까?"

마치 술에 취해 혼잣말을 마구 하는 것 처럼 쿠사나기는 생각을 길게 읊조렸다. 모두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실험에 관한 자료와 실행자만 있으면 아마 솔 쪽에서는 '피해자가 없는데 말도 안된다'며 책임을 피하거나 사건을 덮으려고 할거야. 그럼 법원만 극비리에 너희에 대한 자료를 받고 증인으로 비공개 법정에 세우는 건 괜찮을까? 아니, 자료가 있는 이상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자료를 빼내 헤드라인에 올리고 싶어할테지. 10년전의 사건, 과연 그것은? 하면서. 그 자료가 과연 유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매스컴 뿐 만이 아니라 악의 가득한 호기심에 미친 사람들도 달려들테고 비리가 있을 수 있어. 나는 거기서 피해자의 정보는 국가 S급 보호 프로그램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걸 떠올렸어. 계속 보호받을 수 있을거야."

"그럼…… 괜찮은거 아닌가요?"

"잠깐만 생각을 바꾸어봤어. 왜 국가 S급 보호 프로그램이 걸려있을까?혹시 사건이 처벌이나 수사도 없이 금방 은폐된 것과 관계되지 않았을까? 너희도 알다시피 정말 아주 잠깐 반짝했을 뿐이었어. 6명이나 되는 납치된 아이들이 발견되었는데도."

"그건 결과물인 이그니스가 지나치게 터무니없어서겠지."

"그렇지. 그래도 사건에 비해 너무 순식간에 아무일도 없게 되었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극비 정보가 되었고. 나는 솔쪽에서 정부에 로비를 넣은 것이 아닐까 싶어. 정부도 아이 6명이 납치당하고 반년이나 찾지 못한 건 사회적 신뢰에 큰 손상이었을 테고, 결과물도 밝히고 싶지 않고, 어중간하게 숨기면 더 크게 되돌아 올거고. 어쩌면 이미 솔이 정부에 귀띔해서 유괴 당시 수사가 허술했을 수도 있을지도 몰라. 확실한건 정부는 앞으로도 숨기고싶어 할 거야. 솔은 자이젠이 어떻게 한다고 쳐도 숨기려는 정부와 하노이 측이 싸우겠지. 그럴수록 어리석은 민중들이 얼씨구나 덤벼들테고, 진과 너희는 말 그대로 사회에 둘러쌓이게 돼. 정체를 아무리 숨긴다 한들, 아무리 국가의 보호로 유출되지 않는다 한들 너희의 주변은 달라질거야. 결코 좋지 않은 방향으로."

"……"

"……"

"사회가 빨리 사건을 잊을지도 몰라. 그래도 싸움이 계속 될 수록 잊혀지는 건 나중 일이 되고 그럼 진도 사건에 대해 알게 될 가능성도 높아져. 난 그것이 가장 두려워."

어렸을 적이 떠올랐다. '쟤가 걔야? 무슨 사건에 당한 애." "어우... 불쌍해라." "부모도 죽었다지?" "저 눈 좀 봐. 어쩜, 힘이 없네." "너랑은 놀지 말래." "쯧쯧, 저러고 어떻게 살아." "얘, 넌 왜 그렇게 애가 음침하니?" "선생님, 쟤 이상해요. 같이 안 놀아요." "너랑 노는 거 재미없어." 수군수군, 속닥속닥………

…………………

아이들도 눈치채고 있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던지 모르던지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다는 것을. 괜한 참견, 과한 동정, 상처가 있는 네가 이상하다는 시선, 우리 애는 저렇게 사회부적응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다는 시선 등등.

아이들은 고립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유사쿠와 타케루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차라리 사건에 관해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장 괴로울 너희에게 이런 말 해서 미안하다. 정부와 사회가 관심을 갖는건 대부분의 경우 긍정적이지 않아. 어떤 경우에도 진과 너희가 그 먹이가 되는건 안돼. 정부와 사회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돼."

"안돼애애!!"

아이가 소리쳤다. 모두 크게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분노로 가득찼다. 그러면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

"안돼, 안돼, 안돼!!! 모두 유사쿠를 노리는 일은 없어야해!!! 유사쿠가 다치고, 힘들어하고, 계속 싸우면 안돼! 죽으면 안돼…!"

"진정해, 아이.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다같이 의논하는 거야."

"유사쿠우……"

"네 마음, 잘 알았어. 나는…… 쿠사나기씨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어. 대책을 세운다고 해도 한정적일 테지. 다시 정부가 숨기면 삼기사가 처벌받는다 해도 제대로 된 마무리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고. '발표하지 않는다'로 의견을 바꾸겠어. 더 이상 사건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유사쿠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다. 타케루는 둘의 의견을 수긍했다. 돌아가신 부모님, 현 보호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플레임. 그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어떤 것이 맞을 지 고민했다. 발표 후, 부모님이라면? 플레임이라면? 부모님은 정부와 사회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사회적'으로 항의했을 것 같고 플레임은 이겨내라며, 주변의 시선과 관심이 어떻든 너는 너다, 며 격려해 줄 것 같았다. 그 쪽이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쿠사나기의 말도 맞았다. 더 고민하던 타케루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모르겠어. 저녁에 조부모님께 연락해서 같이 이야기할까 해."

"그래. 혼자 결정하긴 힘들거야."

"료켄도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그럼 다음은 이그니스에 관한 건가."

유사쿠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평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그니스는 나 밖에 안 남았으니까…… 이그니스들은 프로그램 찌꺼기만 겨우 남기고 사라졌다고 해. 인간들이 어쩌지 못하는 찌꺼기만 제출해서 분석하게 하면 인정할거야. 시대를 초월한 AI는 이제 없고 찌꺼기로 리빌딩도 못하니 포기할테지. 내 존재 의의는 유사쿠야, 결과적으로 유사쿠에게 피해가 된다면 존재를 부정해도 좋아. 숨어 살아도 좋아. 알았지, 유사쿠?"

"아이……"

"이건 플레임도 같은 생각일거야. 타케루 너에게 피해가 되느니 차라리 숨겠다고…… 뭐, 다른 녀석들은 나랑 라이트닝과는 달라서 문제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거짓으로 웃는다는 걸 모두 알 수 있었다. 다들 고통스런 생각으로 많이 지쳤다. 공기조차 쓰다. 이대로 계속 붙잡고 끙끙거리기 보다는 다른 일을 하며 잠시 잊기로 했다. 번화가에서 장사를 시작하자 손님이 많이 찾아와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가끔씩 '이 사람들이 그 이후로 나를 어떻게 볼까?' 생각했지만 떨쳐내고 사회의 한 부분으로 그곳에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료켄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다. 지쳤다. 마음이 지쳤다. 내색없이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집에 유사쿠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운이 빠지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왼손의 반지를 매만지며 유사쿠를 떠올렸지만 안개 너머에 유사쿠의 실루엣만 있는 것 처럼 생각이 진전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기운을 내려 했건만. 료켄의 안에 너무나 많은 생각과 아픔이 가득했다. 첫째, 둘째, 셋째, 모든 생각이 자연적으로 엮어지면서 유사쿠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료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아버지의 방. 료켄이 청소 말고 다른 일로, 그것도 목적 없이 들어온 것은 몇 년 만이었다. 리볼버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한 번 있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가능성이 0%에 한없이 가까우니 방을 완전히 치우고 아들이 사용하라고 당신이 했던 명령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해 거짓으로 보고 했었다. 리볼버는 당시 마음이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현실로 돌아오시길 바라는 마음은 지나치게 낮은 가능성에 사그라들고 있었어도 그는 그저 현실에서 아버지를 조금도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한 조각의 추억이라도 정리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아들의 거짓말을 눈치챈 박사는 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몇몇 물건들만 짚어서 버리라고 했다. 그 방에 아버지께서 멀리 여행을 떠나신 이후로 료켄이 처음 들어왔다. 무척 깔끔하지만 사람의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무의식적으로 책장에서 커다란 앨범을 꺼내 펼쳤다. 젊었던 그와 작은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하다. 그는 언제나 근엄하고 진중해 재치있는 사진은 없었지만 사진에서 아들을 향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어떤 페이지에서 료켄의 시선이 멈추었다. 어린 료켄이 배의 갑판에 앉아서 빙그레 웃고 있는 사진이다.

오늘, 료켄은 그 캐빈 크루저를 처분하러 외출한 것이었다.

'지금은 네가 많이 어리고 나도 시간이 없어 멀리 못 나가지만, 언젠가 네가 자라면 저 스타더스트 로드 너머의 바다로도 가보자꾸나. 아름다운 별빛 길을 따라가면서 말이다.'

"아버지……"

업자에게 넘기기 직전 처분을 포기했다. 내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텅 빈 캐빈 크루저가 여전히 저택 아래의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다. 깜깜한 선착장의 캐빈 크루저는 마치 상자에 넣은 장난감 배 같다. 더는 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추억이 가득해 차마 버리지 못하는.

괴로운 생각이 가득하다. 아버지에 관한 생각, 피해자들에 관한 생각, 유사쿠에 관한 생각. 괴로울수록 유사쿠에게 미안함만 가중되었다.

정문에서 마침 코가미 저택을 나서던 파우스트와 마주쳤다. 그는 유사쿠를 인식하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이며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를 했다. 보스의 아내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색한데다 내키지도 않았지만 유사쿠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말없이 슥 지나가려 했는데 파우스트의 눈이 유사쿠의 듀얼디스크에 고정되었다. 아이는 이미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싶었지만 유사쿠도 오늘은 마음이 뒤숭숭해 원인 중 하나인 그와 마주치기 싫었다. 불편함에 유사쿠의 시선처리가 어색하다.

"료켄님은 한 시간 전에 돌아오셨습니다."

"아, 으응."

"후지키님. 대단히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료켄님에게 안식을 주십시오."

"……?"

"그럼 이만."

파우스트는 유사쿠를 지나 길을 나섰다. 안식? 어둑어둑한 하늘에 맞춰 하얀 건물도 어둠에 물들여져 가고 있었다. 그 커다란 건물의 어느 창에도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자고 있을 지도 몰라. 일이 있어 새벽부터 나섰으니 료켄이 많이 피곤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저택 안은 과연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료켄을 부르지 않고 은은한 간접등에 의지해 조용히 료켄을 찾아 다녔다. 서재에도, 리빙 룸에도, 신혼방에도 없다. 넓은 저택을 거의 전부 돌아다녔는데 료켄이 없다. 방안의 옷장에 자켓을 정리한 흔적이 전부였다. 유사쿠는 고민하다 료켄이 출입을 막은 박사의 방으로 갔다. 문을 살짝 열어 안의 상황을 살폈다. 여기도 없다. 그래도 '료켄이 여기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방에 들릴 일이 있었나. 료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다락에서 내려온 료켄은 아래층 계단에서 기다리던 유사쿠를 발견했다. 예상치 못하게 고양이를 모퉁이에서 맞닥뜨린 것 처럼 조금 놀랐다. 료켄의 발소리에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유사쿠의 모습이 귀여운 것도 한몫했다.

"일찍 왔군."

"너야말로.

"그렇군. 내가 훨씬 일찍 온 것이지. 나는 라운지에 있을 테니 겉옷을 벗고 오지 그러나?"

유사쿠는 료켄을 찾느라 옷을 갈아입는 걸 깜빡했다. 핫도그 냄새가 나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라운지로 갔다. 클래식한 감색 하늘이 라운지 유리창에 작품처럼 펼쳐저있었다. 창 너머를 바라보는 료켄의 옆에 섰다. 별빛이 조금씩 박히기 시작했다. 쪽빛 바다는 움직임이 조용하다. 계절에 맞추어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금세 사라졌다. 희미한 자연광이 둘의 뒤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료켄이 물었다.

"생각은 해봤나?"

"아아."

낮의 토론에 대해 말해주었다. 료켄은 둘 다 맞는 생각이라며 다시 한번 그들이 벌이나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 아닌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줄지도 몰라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의 결정은 별 말 하지 않고 가능할거 같다고만 했다. 료켄은 다시 말없이 창 너머만 바라보았다. 유사쿠는 그런 료켄을 계속 바라보았다. 담담한 얼굴이지만 속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티가 많이 났다.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료켄이 마음을 숨겨도 숨겨도 흘러나오고 있다. 유사쿠의 눈동자에 어제 료켄의 어두웠던 표정이 떠올랐다. 료켄의 죄책감을 위로해주고 싶다. 평소에 거의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멋쩍었지만 한 번 멈칫하고 용기를 내어 료켄을 와락 껴안았다. 료켄은 아까나 어제보다도 훨씬 훨씬 깜짝 놀랐다. 헉, 놀란 숨소리가 유사쿠에게도 선명히 들렸다.

"유사쿠?"

"위로야."

"위로라니?"

"네가 너무 힘들어보여서."

"내가 힘든가, 네가 힘들지.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계속 사건을 자각시키고 있는데 내가 밉지 않아?"

아, 료켄은 사랑과는 다르게 자꾸 괴롭게 만드는 걸 미안해하고 있었구나. 유사쿠 스스로도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썩 괜찮지 않다는 건 내심 알고 있었다. 그래도 료켄과 함께 있으니까 괜찮았다. 그럼 괜찮은 거다. 비약적인 사고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밉지 않아. 10년을 위로해준 너를 미워할 이유가 없어."

"나는 너를 괴롭게하는 원인 중 하나야. 너를 데려온 것은 나니까."

"너를 만났으니까 됐어."

"뭐가 됐어."

"너와 이어졌잖아. 나에겐 넌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라 행복이야."

"그렇다고 네가 겪은 아픔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나."

"……"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그 고통이 무슨 일이 있어도 괴로움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평생을 사건에 얽매여 살아갈 것이다.

안다. 료켄과 함께 있어 괜찮더라도 근본까지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안다. 처절하게. 그러나,

"사건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낮에 스스로 그렇게 말 했다. 완전히 아무일도 없던 것 처럼 극복할 수는 없더라도 나락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 그 자체가 극복이나 다름없다. 가만히 나락에 빠져들 수만은 없다. 그런데 료켄이 지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유사쿠는 결심했다. 사건의 껍질을 조금만 깨고 팔을 뻗어 그를 품자고. 그의 번뇌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료켄과 새로운 미래를 잡기 위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니까.

유사쿠가 다시 힘껏 껴안았다.

"료켄. 나에게 네 고통을 이야기해줘. 네가 그때 나에게 해 준 세가지의 말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살 수 있었어. 그때 네가 나에게 건너와줬으니까..."

료켄은 하노이의 탑 꼭대기에서 플레이메이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일어나 리볼버에게, 료켄에게 했던 말을. '너라면 나를 구할 수 있어, 나라면 너를 구할 수 있어.'

"나는 괴로워하는 널 그냥 둘 수 없어,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어디까지라도 함께하고 싶어. 그러니까 말해줘."

저녁 노을 아래에서 유사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괜찮아……! 너와 도망가도……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너의 곁에 있고 싶어…… 계속……' 얼마 전의 일이지만 어쩐지 먼 일 같은 그날……

"그럼 또다시 네가 괴로워져."

"나보다는 너 스스로를 생각해."

"너는 어떤 나라도 받아들인다는 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원흉의 아들인데다 그런 아버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 결혼한 주제에 결국 널 괴롭게 할 트리거가 되는 나를?"

"응. 기꺼이 받아들일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해도 네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너와 새로운 미래를 잡고 싶으니까."

결혼식의 맹세가 떠올랐다. 반지는 매일 끼고 있었으면서 바보같이 그걸 벌써 잊고 있었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랑이다.

"정말……"

료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비가 내려 깨끗해진 하늘에 별빛이 점차 반짝인다.

"정말 너는, 나에게 과분한 존재야……" 

유사쿠를 크게 껴안았다. 소중한 구원자, 상냥한 안식처. 자신보다 훨씬 몸집이 작지만 무엇보다 커다란 존재다.

"그런 너를 사랑해."

쓰디 쓴 눈물이 은하수처럼 쏟아졌다. 료켄은 어린 아이가 토로하듯 쌓여왔던 고통을 말했다. 피해자들에게 미안해하는 것 말고 달리 어찌할 수가 없는 미안함, 가족의 부재에 관한 고통, 철이 지나치게 일찍 들어버린 아이의 고통, 그럴수록 갑절로 커지는 어릴적 부터 품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오늘 크루저를 처분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것, 아버지가 그립고 소중한 만큼 유사쿠에게 미안했던 것 등등……

유사쿠는 그런 료켄을 오랫동안 다정하게 감싸고 위로했다. 자신을 믿고 기대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난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아!"

오늘은 유사쿠가 팔베개를 해준다고 하길래 료켄도 알았다고 했다가 자세 탓에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된다는 걸 깨닫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목에 팔을 감싸고 품에 안으려는 걸 목과 상체의 힘으로 굳건하게 버텼다. 오래가진 못했다. 그럴 순 없다!며 버티는 료켄에게 뭐가 그럴 순 없는데? 정말 몰라서 묻는 유사쿠에게 말하는 건 더욱 그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료켄이 스스로 품에 들어갔다.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너무나도 생경한 말랑함과 부드러움. 결혼했으니까 괜찮겠지,라고  다섯번을 되뇌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유사쿠는 료켄의 머리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유사쿠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따뜻한 온기와 더불어 료켄의 몸을 노곤하게 풀어준다. 잠에 서서히 빠져들며 자기도 모르게 유사쿠의 품에 더욱 밀착했다. 편안하다.

유사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네 머리, 정말 부드러워. 좋은 향기도 나고. 기분 좋아."

"너도 그래."

귀엽다. 사랑스럽다. 사랑한다. 그런 마음을 속삭이며 한결 가벼워진 머리로 잠들었다. 료켄이 금방 잠든 것을 보고 유사쿠는 안심했다. 위로의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료켄의 도움이 되어 무척 기뻤다. 잠들기 직전 사랑을 속삭인 목소리가 유사쿠의 귀를 간질였다. 유사쿠의 얼굴이 발개졌다.

"나도 정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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