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피테 (2)
다행히 아직 좀비가 되진 않았다.
나를 물려던 좀비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는 사람이 나타났거든. 아무런 주저 없이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게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내가 좀 이상한 거겠지.
부스스한 금발에, 웃는 눈꼬리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외국인인지 눈동자가 한국에서는 도통 볼 수 없는 선명한 하늘색의 눈이다. 운동을 했는지 덩치도 꽤 크다. 키도 나보단 큰 것 같고…. 힘이 엄청 강했지. 좀비가 날아가는 건 처음 봤다. 한때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나? 나야 뭐….
이 얘긴 그만할까.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이 꽤 지난 오후. 내가 아는 생존자는 2명이 됐다. 바로 나와 저놈. 생명의 은인에게 저놈이라니 배은망덕하다고? 지금 저놈이 음식 다 먹었는데?
마트는 이미 여러 번 털렸는지 비어 있는 매대가 많았다. 그렇다고 하지만 슈퍼도 편의점도 아닌 마트인데, 순식간에 텅 빌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 결론이 뭐냐면, 저놈은 미쳤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그게 얼마나 귀한데. 핫도그를 돌리더니 네 개를 한 번에 먹는 모습에서 잠시 생각을 멈췄다. 놈은 그렇게 정신없이 먹다가 잠시 소강상태가 됐다.
“있지. 너 이름이 뭐야?”
“그런 질문이 필요해?”
“에이, 날 세우지 마~ 서로 이름으로 불러야 좀 더 친해지고 그러지.”
놈이 해맑은 표정으로 넉살스레 얘기했다. 나는 굳이 친해질 생각도 없고, 음식 챙겨서 바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너랑 친해지고 싶어. 아까 봤겠지만 나 힘이 좋아. 운동선수거든,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훈련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너 한 명 정도는 지켜줄 수 있어. 같이 다니면 분명 좋을걸? 아까 같은 상황도 타파할 수 있고.”
아까 야구 배트를 휘두른 걸 보면 야구선수인가. 확실히 나에겐 이득이다. 혼자라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정신병과 외로움뿐이고, 지금 난 체력도 뭣도 없으니까. 근데 저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나,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어. 보니까 너는 막힘없이 이동하던데, 여기 지리 잘 알지? 그게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야. 힘센 녀석이랑 머리 좋은 녀석, 너랑 나랑 다니면 최고의 콤비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음, 정정하겠다. 저놈은 미친 게 아니라 만화를 잔뜩 본 낭만주의자다. 콤비는 무슨….
“에이, 표정이 또 왜 그래? 뭔가 내가 별로인 것 같은데?”
…얘는 독심술이라도 하나.
“독심술이냐고? 나 그런 말 많이 들어. 근데 너는 진짜 표정에 다 드러난다! 이렇게 알기 쉬운 사람 처음 봐!”
내가?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거 사기꾼 아냐? …사이비?
“어! 또 뭔가 의심받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내가 이렇게 재미있기까지 한 사람인데, 어때? 이제 이름 알려줄 생각 들어?”
“…아니.”
“아 왜애!”
그 뒤로도 그놈은 좀비랑 비교해도 안 질 만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승리한 건 나였다. 몸싸움이 아니라 말싸움이라면 자신 있거든.
낯선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줄까 보냐. 친한 사람을 잃는 건 이제 질렸어. 그러니 난 저놈과 친해지지 않을 거야.
저놈은 다시 먹기 시작해서 과자랑 생라면에, 사과는 손으로 쪼개 먹었다. 오래된 사과를 먹어도 되나 싶은데…. 저 정도 위장이면 끄떡없을 것 같았다. 음, 저 정도 양이면 밥만 먹어도 몸무게가 늘지 않을까? 어떻게 계속 들어가는 거지?
좀비도 그렇지만 생명이란 참 신비롭다. 계속 놀라워. 아직도 뭐가 들어가네.
놈이 나에게도 먹을 것을 권유했지만 사양했다. 여기서 더 들어갔다간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아.
이제 해는 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씩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뭔가 더 먹을까….”
…다음에도 챙길 수 있게 좀 숨겨놔야겠다. 저놈은 먹다가 하루가 다 가겠네.
가방에 음식도 챙겼겠다. 이제 슬슬 가야겠어. 밤이 되면 피하기 더 어려울 거야. 문을 열고 밖에 막 나가려던 찰나,
“으악! 다 먹었잖아!”
놈이 소리를 질렀다.
도움 안 되는 놈 같으니!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한두 개가 아닌 걸 보면 도망치기는 글렀어!
“앗!”
놈도 곧바로 상황을 눈치챘는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와서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뻔뻔한 것보다는 낫네! 자기가 다 먹어 놓고 음식 없다고 소리친 건 만회 못 하지만말야!
쟤는 진짜 좀비가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한 달은 버텼대?
아, 신체 능력으로 버텼군.
아까 조금은 네 근육을 부러워했지만, 그 대가가 지능이라면 난 지금에 만족하며 살련다!
“이런, 계속 몰려들잖아?”
어느새 문 앞은 달려든 좀비 떼로 막혔다. 놈이 같이 문 앞에서 막아섰지만, 역부족으로 보였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나는 얼른 옆에 있는 상자들을 끌어와 그 앞에 바리게이트를 쳤다. 못해도 몇분은 버티겠지.
입구가 좀비로 가득 찼다. 저쪽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야. 그럼 나갈 방법은….
아, 그래. 뒷문이 있어!
대피도를 볼 것도 없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으니까. 슬슬 손에서 힘을 풀고 달릴 준비를 했다.
그래, 셋 하면 그대로 저놈 따윈 신경 쓰지 말고 도망가는 거야. 자 하나…. 둘….
“어어? 잠깐!! 너 혼자 가려는 건 아니지?! 그건 진짜 너무한 거다. 그러는거 아니야.”
“야….”
“왜? 또 뭔가 마음에 안드시는 게 있나?”
“내가 신호하면, 윽. 바로 뒤돌아서 달리는 거다. 알았어?”
“뭐?”
“알아먹었냐고!”
“어, 응. 알았어.”
유리문에 금이 가는 게 보인다.
긴장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손에 힘을 풀고,
발 방향을 돌려,
…셋!
“지금이야!”
“어어?!”
젠장! 역시 난 사람을 버리고 갈만한 위인은 못되는가 보다!
손을 떼자마자 부서진 문 틈으로 좀비가 물밀듯 들어왔다.
순간 좀비의 손에, 내 머리카락이 스쳤다. 좀 전에 놈에게 말했듯 뒤도 보지 않고 나는 달렸다.
그만 놈을 놓쳤지만, 그 놈이라면 괜찮을 거야.
긴장과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심장박동은 쉴 틈이 없다. 바리케이트가 잠시나마 좀비를 붙잡아두는 동안 뒷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덜컥.
아, 이런.
“야!! 비켜!!!”
쨍그랑!
야구 배트를 들고 온 놈이 문을 부쉈다.
그래, 저 녀석 힘 하나는 좋았지.
멍하니 서있는 나를 이번엔 놈이 이끌었다.
“물리기 싫으면 빨리 달려!”
“소리나 그만 질러!”
달렸다.
계속,
좀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억…. 헉, 커헉….
켁. 하아…. 우웩.
젠장. 체력만 더럽게 많은 놈! 스탯을 체력에 몰빵했나.
분명 처음에는 내가 더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저놈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더니 그대로 나를 짐짝처럼 들쳐메고 달렸다. 윽, 속이 메스껍다. 놀이기구를 타면서도 멀미한 적은 없었는데…. 운동선수라는 게 거짓은 아닌지 어깨 너머로 좀비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확실히 빠르긴 빨라. …그 덕에 아까 막 멈췄을 땐 주저앉아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지금은 놈이 부축해 줘서 후들거리는 몸으로 겨우 서 있고.
조금 진정되고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씩 금이 간 도로와 드문드문 있는 가로수, 덩굴에 싸진 오래된 집 몇 채뿐이다.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져서 별빛만 조금씩 빛나고 있다.
그래서….
여기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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