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걷히기 전에

프롤로그 1-아이비

오두막 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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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나무 문틈 사이로 어두운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리웠다. 그는 그대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선 이불 속에 온몸을 파묻었다.

아이비는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눈을 떴다. 꼴을 보니 거처에 오자마자 뻗은 것이 분명했다. 목에서 뻑적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익혀진 습관은 썩 좋지 않은 몸의 상태를 가뿐히 무시했고 그녀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잔뜩 구겨진 채로 방치된 탓에 짙은 남색의 로브에는 주름이 몇 겹 잡혀 있었다. 거기에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신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비는 옅은 한숨을 뱉고서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주위로 동그란 불빛들이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옷과 신발에 달라붙어 있던 먼지와 흙이 이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는 만족한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로브의 끝에서 현란한 무늬를 그리는 금빛 자수가 휘날렸다. 그러던 중 아이비는 퍼뜩 창문을 돌아보았다. 아직 어스름이 다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이곳의 숲에는 새벽 공기 속에 잠에서 갓 깨어난 신선한 식물들이 많다. 특히나 오늘처럼 전날에 비가 왕창 쏟아졌다면 더더욱. 이런 식물들은 대개 몇 시간만 지나도 그 약효가 빨리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두 새벽에 채취를 마쳐야 했다. 아이비는 잠시 몇 년 전 늦잠을 자고 낮이 되어서야 숲에 갔었던 경험을 떠올릴 뻔하다 즉시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문으로 걸어간 아이비는 그대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문 바로 옆 벽에 고정돼있는 나무 받침대에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랜턴이 있었다. 아이비는 랜턴의 뚜껑을 열고 안으로 입김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다 꺼져가던 빛이 랜턴을 꽉 채우곤 밖으로 환히 빠져나왔다. 이젠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무 문이 삐걱대며 열리고 아이비는 조용히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숲에는 어제의 비로 인한 물기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지나쳐 간 모든 식물의 잎에는 이슬이 풍성히 맺혀 있었고, 비 냄새가 스며든 짙은 안개가 만연히 깔려 있어 앞을 보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태풍에 가까웠던 비 탓에 촉촉해진 지면은 질퍽거리는 느낌과 함께 깨끗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신발을 다시 갈색으로 물들였다.

새벽녘의 안개는 그 속을 거니는 사람이 몽롱함을 느끼게 했지만 아이비는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이 원하는 식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몇 걸음 더 가다 걸음을 멈췄다. 발밑에서 달콤한 향이 미약하게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몸을 구부려 땅을 바라보자 고작 20센티미터에 달하는 조그마한 식물들이 보라색 빛을 내며 화려히 모습을 드러냈다.

식물의 이름은 퀴나시아. 섭취하면 불안감을 덜어주는 데다 적당히 단맛이 나서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꽃이었다.

아이비는 먼저 끝부분이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린 잎을 들어올려 열매의 상태를 확인했다. 선명한 자주색을 띠는 걸 보아하니 때를 잘 맞춰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열매를 하나 따서 입 안에 넣고 씹자 달달한 향이 감돌았다. 더 먹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이 더 중요했다. 아이비는 부지런히 열매를 채취해 가방 속 투명한 병에 담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어느덧 하늘이 점점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아이비는 가방을 열어 오늘의 수확물을 살펴보았다. 가방 안을 꽉 채운 자그만 유리병들에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의 열매와 꽃잎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아이비는 그 사이를 헤쳐나가 한 커다란 나무를 찾아냈다. 가히 장엄하다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나무에는 묵직해 보이는 가지들이 여러 개 뻗쳐 있었고 그 끝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이파리가 맺혀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이비가 말했다. 마치 답을 하듯 나무의 가지가 흔들려 잎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녀는 잠시 옅은 미소를 짓곤 시선을 다시 몸통으로 돌려 조심히 자신의 머리를 그것에 댔다. 작은 소리로 빠르게 뭔가를 말하자 나무의 몸통이 얕게 떨리더니 가운데 부분이 양옆으로 갈라져 좁은 굴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 안에는 네모난 천과 그 위에서 말라가는 식물, 가방 속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약병이 있었다. 몇 개월 만에 찾은 아지트는 여전히 아늑하고 따뜻했다. 여기서 부족한 잠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아이비는 로브를 벗곤 구석에 놓인 갈색 담요를 끌어와 덮었다. 포근하고 어두운 담요 속 공간에서 그녀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미세하게 들썩이는 어깨 외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나무 안과 달리 밖에서는 나무가 종종 산들바람에 맞춰 가지를 흔들어 댔다. 어느덧 정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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