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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ner's High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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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령반전 주의

Runner's High

장시간의 달리기나 운동 후 느껴지는 도취감

생필품을 사들고 돌아가는 길에, 순무는 만나고 싶지 않던 무리와 맞닥뜨렸다. 각자의 주거지인 이 엔진시티의 길거리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들을 보고 흠칫 놀란 것을 감추기 위해 순무는 발길을 돌리고 다른 길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무리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순무에게 다가오려 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해코지라도 할까봐 긴장이 된 순무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무리는 야유를 닮은 소리를 내며 한바탕 웃었다.

가라르에 온 지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순무는 고향땅과 더불어 이곳에서도 기대를 한껏 받는 몸이었지만 현지의 트레이너들 중 일부는 이방인인 그를 무시하고 조롱해댔다. 특히나 호연 지방과 같이 동양권 출신들은 대부분 체구도 작고 힘에서도 밀렸기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기 일쑤였다. 때문에 순무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할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러나 젊음의 혈기는 사회의 냉정함을 따라 식어가는 중이었고 혼자인 몸을 지키기 위해 놀려대는 이들에게 대항하지 않고서 도망치기만 했다. 불같은 성격인 그도 결국 속에 쌓이는 분노들을 삭이며 약자의 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꽤나 쌀쌀한 겨울 날씨임에도 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긴장한 순무는 멀찍이 걸어간 후에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까 마주친 이들은 같은 엔진 스타디움에 소속된 트레이너들이다. 실력도 있고 꾸준히 호평을 받고 있으나 어디선가 날아온 낯선 순무가 관심을 꿰차기 시작하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그런 질투와 선민의식에 휩싸여 있는 상태에서, 순무와의 배틀에서 매번 패배하자 그들의 마음 속에선 증오가 자라났다. 자신들의 선수 생활에 타격입지 않을 정도로만 건드리거나 조롱했고 순무도 괜히 큰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들을 무시하고 피하고만 있다. 언제쯤이면 인정해주고 차별없이 받아들여줄까? 그것은 아련한 꿈같은 희망이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길을 돌아가기로 한 순무가 겨울이 주는 냉기에 마음 속까지 얼어붙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언뜻 보기엔 꽤 덩치가 있음직했기에 순무는 아 또,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누가 어떤 소리로 자존심을 깎아내릴지 다시 피하려고 하는데 눈앞의 남성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순무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순무보다 훨씬 나이 많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밝고 화려한 계통의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색과 어울려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순무는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음을 깨닫고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내려 했다.

"왜 맞서지 않는 거냐."

뜬금없는 첫마디에 순무는 눈을 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지켜봐온 걸까. 어떻게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순무는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큰 소동 일으키고 싶지 않고 혼자 참으면 되는 일이라며 어느분이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볼 용기는 없었다.

찬바람을 더욱 오래 맞으며 숙소로 돌아온 순무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은 후 작디 작은 아파트의 불을 켰다. 식탁 위에 사온 것들을 올려놓고 그대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현재 마이너 리그에 머무르고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 이름을 알리고 있었기에 이런 꼴사나운 속사정까지 외부에 퍼져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친분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망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순무의 입에선 탄식을 닮은 한숨이 나왔다.

내리막뿐인 그의 길에는 맞서 싸울 용기, 부정한 것을 부정할 외침, 비슷한 처지들을 품고 함께 나아갈 아량 등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시 그를 마주친 것은 어느 카페에서였다. 스타디움에서 특훈을 끝내자 출출해져온 배를 채울 요량으로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고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순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깜짝 놀란 순무는 얼떨결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고 그는 예상과 다른 순무의 반응에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주 예의바른 친구야. 마음에 들어."

순무는 눈을 찡그리고는 무채색 눈동자로 남성을 노려보았다. 그는 털실로 짜여진 모자를 벗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순무는 남성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채 자기자신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지를 물었다.

"아니 그냥, 걱정되잖아? 타지에서 온 젊은 친구가 괴롭힘에 당하…."

순무는 누가 들을까 재빠른 동작으로 그에게 쉿, 하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고 순무는 새로운 유형의 괴롭힘인가 싶어 계속해서 낯선이를 경계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뜨끈한 차를 한 입 머금고 목구멍으로 넘긴 후 뱃속 제일 밑바닥부터 뜨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자 경계심이 그 열기에 녹아갔다. 한입거리로 썰어먹을 수 있도록 원목 손잡이로 된 식기가 쟁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있었으나 순무는 빵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신사의 지방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구먼."

그렇게 말한 그는 킬킬대며 웃었다. 생각해보면 가라르는 오래 전부터 '매너가 좋은 지방'이라는 표현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그 말도 옛말인 것인지 막상 살아보니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순무는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서 자신의 방식대로 음식물을 먹어치웠다. 그동안 남성은 앉아서 스마트로토무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전 이제 돌아갑니다."

허겁지겁 배를 채운 순무는 딱딱한 말투로 말하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가자 남성도 털실 모자를 손에 쥐고서 순무의 뒤를 따라나왔다. 카페의 문을 닫고 나오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우뚝 서서는 순무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당황한 순무는 무슨 일때문인지 의아해하다가 그 시선들이 자신의 옆에 서있는 남성에게 쏠려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껏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순무를 쳐다보았고 아까 벗었던 털실 모자를 머리에 썼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에게 손을 한 번 들어보자 환호성이 들려왔다. 순무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누군가 다가와서 남성에게 사인을 요청하거나 함께 사진 찍기를 부탁해왔다. 순무는 몇발짝 떨어져서는 그가 신명나게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참 후, 그는 일이 바쁘다며 사람들을 달랜 뒤 몸을 돌려 순무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순무는 약간 의심을 품은 얼굴로 실례지만 뭐하는 분인지를 물었다. 남성은 눈썹을 올렸다 내린 뒤에 호쾌하게 웃었다.

"너, 저어기 너클시티에 가본 적이 없구나? 금랑이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

그리고 재주있게 매끄러운 눈짓으로 윙크를 하고는 다시 웃었다. 순무는 그 이름을 듣고서 왜 그가 낯익었던 건지를 깨달았다. 눈 앞에서 싱긋싱긋 웃고 있는 이 아저씨, 아니 이 분은 너클시티의 금랑 관장! 순무는 재빨리 그동안 실례를 범했다며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금랑은 양손을 저으며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아니, 그래도…!"

"괜찮다니까."

순무에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품게 해준 것이 금랑이라는 존재였다. 너클시티의 관장으로 있으면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우수한 실력을 유지 중이었고 가라르에 끼치는 영향력도 굉장했다. 그가 입거나 손에 드는 것은 모두 유행할 정도다.

지금은 풋내나는 순무가 훗날 농익은 금랑처럼 된다면 순무 그리고 순무와 같은 사람들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차별과 편견없이 모든이가 순수하게 실력을 겨루고 동지애를 나누는 그런 꿈을 꾸는 순무에게 그의 존재는 롤 모델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 존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서 다가와준 것은 크나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제 순무는 들뜬 마음으로 금랑과 이야기를 하며 엔진시티의 길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을 걷게 되자 속마음을 꺼내 늘어뜨려보았다. 금랑은 순무가 가진 고민과 걱정거리에 대해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의 벽과 마주한 개인이 그 벽을 깨부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미 알고도 남을 나이였기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 내가 끼어든다고 금새 바뀔 일도 아니고."

순무의 추위에 벌개진 귀는 당혹스러움으로 인하여 더욱 벌개져갔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되짚어보면 맞는 말이다. 금랑 또한 그 벽과 마주해온 개인이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었을 터이고 고민과 희망 또한 여전히 그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순무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괜한 이야길 한 것 같았으나 한편으로는 속을 비워내어 개운하기도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죽도록 노력하라는 것밖에 없겠지만, 정말 죽을 만큼 노력해서 네 손짓 하나에 세상이 들썩이도록 만들어보려무나."

그리고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순무의 어깨를 탁탁 쳤다. 순무는 다정한 그의 태도에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고 다시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 말을 해줄 인물이 주변에 없었기에 다시 한 번 금랑의 말을 되새기며 꼭 그래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 날, 금랑과 함께 있던 신인 트레이너 순무에 대해서 남들의 입에 오르내려도 출신이 다르고 힘도 없다며 조롱당하는 일은 그쳐지지 않았다. 금랑 관장님은 원래 모두에게 친절하셔, 너같이 보잘 것 없는 녀석에게도 말이지. 그 말을 듣자 순무는 기대고 있던 것이 조금씩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받았다. 순무가 기대고 있는 것이 희망이라면 언젠간 완전히 기울어져 쓰러져버리지 않을까.

그러나 금랑은 순무의 울적한 마음을 알 리가 없었고 시간이 나면 자주 엔진시티로 와서 순무를 찾아다녔다. 또 괴롭힘 당하고 있진 않는지 일종의 보호를 겸한 감시같은 것이었다. 그가 순무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쓰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순무가 가진 열정이 자꾸 꺼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렇게 세상이 발전해가고 의식이 높아져가도 변하지 않는 유구한 사실이 있다. 바로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못된 마음을 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순진하게 스카웃되어 날아온 순무에게 겪어보지 못한 현실을 주는 시정잡배들이 탐탁치 않게 여겨졌다. 그와 동시에 이 불편한 사회구성원들은 어찌보면 순무가 딛고 일어서야할 시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편견과 냉철한 시선을 이겨내고 그만의 열로 모든 것을 따스하게 품어주도록 성장하길 바라는 중인 것이다.

순무가 삐뚤어진 길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금랑은 홀로 다니는 순무에게 자꾸 관심을 주며 귀찮을 정도의 농담과 장난을 걸었다. 순무는 '모두에게' 친절한 금랑의 배려가 점차 부담스러워지고 싫어졌다. 다 이해하는 척 하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라고 오해해버린 것이다.

어느날은 순무가 대체 자신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 물었고, 금랑은 왜 그럴까? 하고 능청스레 넘겼다. 언제나 금랑은 순무의 쌀쌀함에 능글맞게 대처했다. 아, 어른의 관록이란. 유야무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무는 금랑의 태도가 여전히 싫었지만 거기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마음에 들지 않으나 정작 없으면 허전하고 미안해지는,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처럼 순무의 마음은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그래도 인생의 길잡이인 금랑을 향한 존경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조언대로 아무리 노력해봐도 순무를 싫어하는 무리의 괴롭힘은 정도가 심해져갔다. 그 어느날은 순무가 스타디움에서 진행한 모의 배틀에서 최종우승을 한 날이었다. 기쁜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를 으쓱한 골목에 밀어넣고, 호연출신주제에 너무 나대지 말라며 으르렁대었다. 연관성이라곤 없는 저질스러운 위협 수준에 순무는 유치함을 느끼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역시나 큰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아 별다른 대항을 할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무시하고 넘기려는 순무에게 더욱 화가 난 자가 순무의 멱살을 잡았고, 순간적으로 놀란 순무는 이대로 있다간 처맞겠다 싶어서 결국 그들을 상대하기로 했다. 방식은 포켓몬 배틀이 아니라 육탄전이었다. 작지만 그만큼 잽싸고 가벼운 몸은 비록 근력이 부족할지라도 급소를 가격하기엔 용이하다. 순무는 힘겹게 난투를 벌이다가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골목 입구 쪽에서 금랑이 나타나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치자 싸움이 멈춰졌고 모두들 금랑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리는 언제 그랬냐는듯 꼬리를 내리고 살랑거리며 금랑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금랑은 엄숙한 목소리로 협회의 규칙을 어겼으니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거라 답하고 그들의 리그카드를 촬영했다.

가 봐, 라는 한 마디에 무리는 엉거주춤거리며 골목에서 모습을 감췄다. 순무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결국엔 꼼짝없이 주먹과 발길질에 당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방금 전과 달리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다친 곳은 없니? 하고 묻는 금랑에게 괜찮다고 대답한 순무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처럼 느껴졌다. 먼저 골목을 나서는 금랑의 뒤를 따라가는 것에 약간 망설여졌지만 끝내 밝은 곳으로 나아갔다.

순무가 거주하는 아파트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길을 걷던 금랑은 잠깐 한숨 돌리자며 길가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겨울의 낮은 짧기에 이미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금랑의 푸른 눈동자는 주홍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순무는 그 옆에 앉으며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금랑은 선수 간의 다툼은 기록이 남기에 좋지 않으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면 수월하게 처리될 거라고 말했다. 심한 경우에는 접근 금지도 내릴 수 있고 증거만 잘 모아두면 선수자격을 박탈시킬 수도 있다고도 한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순무는 많이 참다가 오늘만 그런 거라며 삐죽거렸다. 그러자 금랑은 갑자기 거친 말투로 욕설을 섞어가며 말한다.

"마냥 참으니 어떻더냐? 저 망할 놈들이 가만히 있던? 오늘 일로 끝날 것 같아?"

덩달아 순무도 발끈하며 자기도 당하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고 큰소리를 냈다. 그 순간 금랑의 커다란 손이 올라왔기에 순무는 깜짝 놀랐으나, 금랑은 벤치에 앉은 채 그대로 순무를 껴안을 뿐이었다. 금랑의 너른 품에 안겨 좋은 향수냄새를 맡던 순무는 굳었다가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 그만 어깨에서 힘이 빠진 채 눈물이 고여버리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말에 금랑의 진심어린 걱정과 염려를 가벼이 여긴 것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타지에서 홀로 싸워오던 서러움은 지금만큼은 괜찮다며 모든 것을 풀어헤치게 만들었다.

"그래, 넌 그런 바보가 아니지…… 안다 알아.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파서 그래."

그리고는 순무를 놓고서 마주본 후 양손으로 작은 어깨를 잡고 말을 이어갔다.

"순무, 넌 누구보다 훌륭한 인재야. 네가 사소한 잡음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하게 앞만 보고 갔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금랑은 다정한 손짓으로 순무의 까만 머리칼을 쓸어올려주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훔쳐갔다. 순무의 눈에는 차가운 색의 눈동자가 지금은 너무나 따뜻해보였다. 울음을 그친 순무는 몸을 돌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원체 고집센 성격이라 가라르에 와서도 큰 도움없이 스스로 나아가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놔두질 않았다. 어딜가든 호연 출신, 작은 거다이인(가라르식 표현), 앳된 얼굴과 다른 강렬함 등등 순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많았다. 그래서 그 꼬리표를 떼내고 엔진의 유망주나 장래가 기대되는 트레이너 등 오로지 실력으로만 인정받은 꼬리표를 달고 싶었다. 출신과 외모에 대한 말들이 뒤로 밀려나기를, 그래서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순무가 금랑에게 느끼는 존경심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겉만 보고 속은 신경쓰지 않는 걸까요."

순무의 작은 한 마디에 금랑은 여기가 그만큼 혹독하다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성적과 결과만이 중요한 이 세계에서 너를 표현하려면 호연에서 온, 죽여주게 멋진(순무는 이 때 웃었다) 신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 그건 너도 이해해야 해."

순무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나도 너와 비슷하단다. 젊었을 적에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데뷔했지. 소원의 별처럼 나타난 대형 신인, 모래바람을 몰고 온 어쩌구저쩌구…. 그 때 쓰던 촌스런 표현들은 요새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그의 말에 순무는 큭큭대며 웃었다. 그리고는 예전에 생각했던 것이 떠올라서 곧바로 금랑에게 물었다. 세상의 벽, 즉 그 잘난 금랑에게도 고민거리가 있냐는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라이벌이라는 존재가 있지. 그 녀석이 바로 내게는 세상의 벽인 셈이야."

순무는 보랏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가라르의 챔피언을 떠올렸다. 금랑은 고개를 들고 저물어가는 겨울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까 말했듯이 트레이너들의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일등도 그 자릴 유지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잊혀질 수 있는 존재니까. 하물며 이등은 어떻겠느냐."

금랑은 미소를 짓고 순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주름이 잘 지어진 매력적인 얼굴에 순무는 그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노을이 걸쳐진 푸른 바다같은 눈동자는 자연의 품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알겠지? 엔진 관장에겐 내가 말해둘 테니 먹다 남은 카레만도 못한 녀석들은 신경쓰지 말거라. 너만의 길을 가야해. 그 길에 방해꾼이 있다면 내게 말해주려무나. 모래 폭풍으로 몰아내버릴 테니."

순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금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만 가볼까? 하고 먼저 일어섰다. 순무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느낌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해낼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감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순무."

"네?"

"지금 네 아파트에 놀러가도 되니?"

"좋아요. 차라도 대접해드릴게요."

"엥 뭐냐. 안 돼요! 라고 할 줄 알았더니 쉬운 남자네."

"…뭐에요."

땅거미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뒤로 한 그들은 이제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걸어갔다. 순무는 하늘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용 한 마리를 동경하며 그 용이 내뿜는 자랑스러운 불꽃이 되기를 결심했다.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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