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Falling Down 7 (끝)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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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라고 해봤자 말리에 시티에서 사준 옷가지가 다였다. 나누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한데 모아 외근용으로 쓰는 가죽 가방에 차례로 넣었다. 순무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나누가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누는 일부러 그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저 아이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청년이 쓸 생필품을 찾아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나, 사실 이미 마음은 약해져있었다. 그래서 그를 감추려는 것이지만 나누는 애써 눈을 돌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피했다.

얼추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나누는 순무에게 다가가서 이제 가자고 말했다. 예상대로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순무는 얌전히 소파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섰다. 왜 도망쳐야하는지, 왜 본부로 가면 안 되는지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아서 나누도 말을 삼갔다.

피신은 나누가 생각하던 최후의 수단이었다. 본부 쪽엔 뭐라고 둘러댈지, 그것은 사정을 아는 동료들에게 착오가 있었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할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보고가 늦었습니다. 저희팀이 잘못 알았습니다. 단순히 길을 잃은 타지방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의심할 일이 없어보였다. 굳어버린 머리통은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내는 데에도 힘겨웠기에 자연스러워 보일지 자신은 없었다.

청년을 보내기엔 아직 이르다고 마음 속으로 반복하며 순무와 파출소를 나섰다.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한 걸음씩 억지로 내딛는다. 슬쩍 뒤를 돌아보면 따라오는 중인 순무는 흙바닥만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둘은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낮이라 그런지 선착장 주변에는 온 사람과 떠날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는 나누에게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일간신문의 기사를 모두들 봤을까? 지금 나누는 영락없이 소문의 친척을 배웅하러 가는 모습이었다. 표를 두장 끊은 후 시간표를 보니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선착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로 한다.

나누는 꾸물거리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순무에게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해 흡연부스가 설치된 곳으로 이동했다. 멜레멜레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바로 갈 테니 어디 가지말고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역시나 놀란 말들이 튀어나왔다. 귀가 따가울 만큼 큰 목소리에 나누는 잠깐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청년을 숨겨달라는 조심스러운 말에 핸섬은 전화를 들고 당장 옆방에 묵는 리라에게까지 찾아갔다. 그 말소리들이 나누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리라는 침착하게 핸섬의 휴대전화를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누가 들을라 자세히 대답할 수 없어서 나누는 잠시동안 할 말을 찾아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잠깐이야, 잠깐. 가서 설명할게."

어쩐지 체념한듯한 핸섬의 대답에 나누는 그가 또 무슨말을 하기 전에 이만 끊는다,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심정으로 담배를 계속 피다가 그것을 재떨이에 비벼껐다.

흡연부스에서 나온 뒤,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순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연출신이라 알로라인들과 체격이 다른 그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 등이 작아보였다. 청년이 무엇을 가슴에 담고 무엇을 등에 짊고 있는지 헤아려본다. 나누에 대한 지고지순하고 솔직한 감정들,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부담감… 아마 그런 것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천천히 그 뒤로 다가간 나누는 곧 배를 탈 텐데 괜찮은지를 물었다. 목소리에 고개를 나누 쪽으로 돌린 순무는 묻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대답한 뒤 다시 거멓게 흐린 하늘을 비추고 있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누는 아까와 다르게 아무 표정이라곤 없던 순무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졌다.

한동안 말없이 서서 물타입 포켓몬들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던 둘은 탑승 시간에 맞춰 선착장 내부로 들어갔다. 표를 건네주고 지정된 번호를 더듬어 자리에 앉은 뒤 배가 멜레멜레섬으로 이동하는동안 순무는 배멀미에 약간 괴로워하면서도 배를 따라 옆에서 나는 갈모매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누는 그런 순무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 속에서 짙어지고 있는 슬픔과 비통함이 옅어졌기를 바래본다.

실로 오랜만에 온 멜레멜레섬의 공기는 울라울라섬과 다르게 따스했다. 뒤따라오는 순무는 이제 기운을 차리고 낯선 곳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지내오던 파출소나 겨우 몇번 방문한 말리에 시티와 다른 분위기에 마치 순무와 놀러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노란색 꽃들로 엮어만든 목걸이를 관광객들에게 나눠주는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척척 나아간다.

"배고프진 않고?"

뒤돌아서서 물으면 순무는 아직 속이 울렁거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누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당장 2번 도로로 향하기로 했다. 멜레멜레의 선착장을 나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울라울라섬과 달리 이곳은 언제나 날씨가 화창하다. 때문에 저녁에 보는 노을빛이 기가 막히기도 했다.

나누는 그 어떤 것도 둘러보지 않고 길을 따라 앞으로만 걸어갔다. 이미 알로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누와 달리 순무는 살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묵직한 가방을 들고 나누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한두걸음이라도 늦으면 이 낯선 곳에서 나누를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우올리를 벗어나 주욱 이어진 길을 걸으면 2번도로가 나타났다. 그동안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번도로에 도착하니 나누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이 주변에는 '그 녀석'의 본가가 있었지.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웃을 낯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누는 곧장 동료들이 머물고 있는 2번도로의 모텔로 향했다.

이미 동료들은 밖에 나와 팔짱을 끼고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누는 머쓱한 기분으로 손을 들어보이며 인사했다.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료들을 따라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자료가 널려있고 옷걸이에 걸린 촌스런 색상의 겉옷을 보면 이 방은 핸섬이 머무는 방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본부에는 착오가 있었다고 말해줘."

"…뭐?"

빈틈없이 바로 대답을 내뱉은 나누는 황당해하는 핸섬을 쳐다보고 근심어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미끼가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그렇게 말하면 동료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린다. 특히나 핸섬, 그는 과거에 그가 저지른 실수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아는 장본인이었다. 미끼의 중상, 임무 실패, 징계, 연금, 좌천, 분노와 후회. 결의를 다지며 잘 해보겠다 하던 것은 결국 쓰라린 결말만 낳고 말았다.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애야. 본부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잠깐만 돌봐줘. 부탁할게."

십년넘게 봐왔지만 둘은 이렇게 간청하는 나누의 모습이 처음이라 그의 태도가 약간 낯설었다. 나이를 먹어서 부성애가 생긴 것일까? 그런 판단이 앞선 동료들은 잠깐만 의논하겠다고 한 뒤에 방을 나갔다.

동료들이 방문을 닫고 사라지자 나누는 내내 구석에 서서 눈치만 보던 순무에게 침대에 앉아있으라고 말했다. 순무는 쭈뼛거리면서 조심스런 몸짓으로 침대에 앉은 후 들고있던 나누의 가죽가방을 발치에 내려두었다.

나누는 떨쳐버릴 수 없는 걱정을 안은 채 순무를 쳐다보았다. 순무도 나누를 올려다보았다. 원망이나 슬픔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고 그 앳된 얼굴이 애처롭게만 보였다.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 아무말이나 해보려고 하는 순간, 출입문이 열리며 동료들이 다시 돌아왔다.

"너, 우리에게 빚진 거야! 난 상관없지만 보스에게…."

"그만하세요."

리라는 손짓까지 하며 씩씩거리는 핸섬을 진정시킨다. 둘을 보아하니 어쨌든 나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나누는 꽉 조이던 가슴 속이 한결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리라는 팀의 리더로서 본부에 순무를 넘겨주고 그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임무이지만 보류하기로 결정했다며 다음은 없다고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나누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으로 고맙다고 대답했다. 리라의 뒤에 서있는 핸섬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누를 보았다. 나누는 핸섬을 볼 면목이 없었기에 순무에게로 고개를 돌려서 따가운 그 시선을 피했다.

"소년, 미안하다."

"소년?"

리라가 되묻자 나누는 뒤통수를 긁으며 순무는 청년이 맞으며 이 호칭이 입에 붙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셋을 번갈아보던 순무는 여전히 애처로움과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표정으로 나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곧바로 눈물방울이 또르륵 떨어질 것 같았다. 울라울라 선착장에서 보인 무표정한 얼굴과 대비되어 나누는 다시 가슴 속이 꽉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어도 짧은 이별에 속내가 올라온 것이다.

나누는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 있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순무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고개를 숙였다. 축 처진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진 나누는 동료들을 향해 연락할게, 하고 그곳을 떠났다.

떠나기가 힘들었지만 자기자신을 몰아세우며 겨우 발걸음을 옮겨 파출소로 돌아왔다. 울라울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은 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배고픈 나옹들의 칭얼거림말고는 나섰을 때와 다른 점은 없었다. 나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기다려, 하고 말한 뒤 파출소 내부로 들어갔다.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파티션을 밀고 욕실로 향해 비에 젖은 몸부터 닦을 요량이었으나 나옹들이 자꾸만 시끄럽게 굴자 신경질이 난 나누는 오른손에 수건을 든 채 욕실에서 나왔다. 왼손으로 파티션을 힘차게 쑤욱 밀고 밥달라며 난리인 나옹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잖아! 하고 고함을 쳤다. 순식간에 파출소 안이 조용해지자 나누는 방금 자기가 무슨짓을 했는지 깨닫고서 동작을 멈췄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이해되지 않는 상태로 몸을 돌려 취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느릿한 몸짓으로 찬장에서 사료봉지를 꺼내 팔에 안은 나누는 파티션이 열려있어도 장난꾸러기 나옹들이 침범하지 않자 녀석들에게 미안해졌다. 소리칠 일이 아니었는데 여러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괜히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추했다.

"미안, 미안하다. 미안해."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는 동안에도 나옹들은 가만히 눈을 굴리며 나누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누는 살아오면서 사적인 일때문에 이렇게 한심한 적이 없었는데, 라고 생각한다. 사사로운 감정들과 함께 추락하고 추락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바닥이 갈라지며 또 그 사이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추락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떨어지는동안 들려오는 세찬 바람소리는 마치 자가당착에 빠진 자의 단말마와도 같았다.

약간 멍한 머리로 욕실에서 몸을 씻어도 자멸감은 빗물과 함께 씻겨내려가지 않았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침착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여 돌파구를 찾아야하는데 이렇게 계속해서 감정에 휘둘리면 청년과의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이다. 경험을 통해 이미 숱하게 배운 일이지 않은가. 새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오면 나옹들이 깜짝 놀라며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저녁을 대충 차려먹은 뒤, 소파에 앉아 업무를 재개하기로 하지만 집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순무는 무얼하고 있을까, 저녁밥은 한입이라도 먹긴 먹었을까, 하는 걱정에 무심코 휴대전화로 손이 갔으나 손을 거두었다. 동료들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지 않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어쩌면 순무가 나누의 연락을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료들을 번거롭게 할까봐 다시 마음을 접는다.

깍지낀 손을 뒤통수로 돌리고 편한 자세를 취하자 닫힌 창문을 통해 빗소리가 들려왔다. 멜레멜레는 울라울라와 다르게 항상 날씨가 화창하니 산책이라도 했길 바란다. 저녁 노을이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남기지 않은 게 후회된다. 나누는 아쉬움이 가득찬 한숨을 내뱉었다. 잠깐만 버티면 해결될 일인데 청년에게 옮은 것마냥 계속해서 마음 속에는 불안함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아이는 늘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버틴 거지? 순무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속이 답답해져오자 나누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아저씨, 아저씨. 꿈 속의 순무는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조심스럽게 속삭이면서도 재촉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은 새까맣지만 부르는 목소리는 선명하다. 나누는 어떠한 감각에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작은 창문을 통해 아직 밤이고 비가 오는 것을 인지했다.

"아저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누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면 어렴풋이 사람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나누는 일어나서 침실의 전등을 켰다. 갑작스런 밝은 빛에 눈을 끔뻑이면 눈앞에는 순무가 서있었다. 순간적으로 두팔을 벌려 껴안으려던 나누는 흠칫하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순무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해요, 한마디를 내뱉었다.

"설마… 거기서 여기까지 혼자 온 거야?"

그렇게 물으면 순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치고는 보송보송해보여서 비가 오지 않냐 물으면 도착하자마자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고 대답한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문단속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늘 하는 짓이라 했다고 생각하고 잠든 모양이었다. 나누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시 순무를 만나게 된 것은 기뻤지만, 만나기엔 아직 일렀다. 나누는 물러터진 자신의 마음과 순무를 위해 얼굴에서 손을 내린 뒤 눈을 가늘게 뜨고 혼내는 말투로 말한다.

"잠깐만 거기 있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데 왜 다시 온 거야?"

"그게……."

순무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포켓몬을 빌려줄 테니 어서 돌아가."

그 말에 순무는 고개를 들었다. 싫다는 말이 금방이라도 나올 듯한 표정이었다. 나누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힘겹게 배를 타고 와서는 잘 모르는 길, 게다가 비까지 내려서 어두운 길을 나누때문에 겨우 걸어왔을 터인데 쫓아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면 더욱 모진 말을 할 결심을 단단히 먹은 나누는 순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순무는 살짝 연 입술을 덜덜 떨어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말을 꺼내진 못했고, 점점 더 얼굴을 찡그리다가 울어버렸다.

나누는 곧바로 순무를 품에 안았다. 뜨끈한 체온을 느낄 수 있자 마음 속에 있던 불안이 날아가버려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나누를 찾아헤매고 애정을 바라며 피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청년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이제는 터질듯한 충만감을 품은 나누는 순무의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주었다.

울기를 그친 순무는 훌쩍이며 나누의 어깨에 뺨을 댄 채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꼈다. 나누는 몸을 떼고 순무의 얼굴을 보며 괜찮은지를 물었다. 순무는 벌개진 눈가를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순무가 가련해보인 나누는 입을 맞추었다. 순무는 다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에는 문단속을 확인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나누는 아침에 일어난 핸섬이 놀랄 것이 분명하니 미리 메세지를 보내놓았다. 둘은 나란히 누워서 어둠에 잠긴 채 빗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은 먹었는지, 노을도 구경했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물어보았다. 저녁은 먹었고, 노을은 창문을 통해 보았고, 핸섬이 깊이 잠들자 몰래 빠져나왔다고 했다. 나누는 순무가 차근차근 대답할 동안 정든 손짓으로 머리칼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오전 시간, 잠에서 깨면 핸섬에게서 연락이 들어와있었다. 나누를 질책하는 말들이 가득해서 화가 식을 때까지 답장하지 않기로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순무는 없었다. 어젯밤 일이 꿈인가 싶어 침실을 나가면 파출소에 얌전히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순무는 나누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지만 나누는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와 같이 나누는 접시 하나에 아침밥을 차려주었고 그것을 먹으며 신문을 읽었다. 다 먹은 후에 순무가 취사실에서 설거지를 할 동안 읽다만 신문을 마저 보고 있을 때였다. 파출소의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나누는 깜짝 놀라며 흐트러져있던 자세를 바로 잡고 민중의 지팡이 역할에 충실해지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라는 한마디를 내뱉을 준비를 했다.

방문객은 젊은층 남성 두명이었다. 무슨 일로 온 걸까, 하고 헤아리던 나누는 그들이 국제경찰임을 눈치챘다. 체격과 이목구비는 알로라 사람이 아니라 동향사람이었고 검은 정장을 갖춰입은 데다가 요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가장한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았다.

"다 아실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들은 정장에 묻은 빗방울을 툭툭 털고 우산을 접어서 우산꽂이에 꽂아두었다. 그리고는 나누의 앞에 서서 상의의 안주머니에서 경찰수첩을 꺼내보였다.

"국제경찰기구 칼로스본부 이상현상조사팀 소속입니다. 울트라비스트 전담팀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이상현상조사팀은 나누가 현역으로 있을 때에도 존재하던 팀이었다. 현재 리라와 핸섬의 팀은 이상현상조사팀의 산하에 있었다. 나누는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그동안 꾸며온 거짓말들을 조합했다. 우선 차라도 내어드리죠, 라고 일어서자 한명이 괜찮다고 대답한다. 나누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의자라도 내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것도 거절했다.

"저희가 바빠서 말이죠. 필요한 질문만 하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한 나누는 취사실에 숨어있을 순무가 신경쓰였다. 가능한 한 티내지 않으며 뭐든 물어보라고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그 아이, 어딨나요?"

순무를 가리키는 말에 나누는 관광온 타지방 아이였다고 대답했다.

"전담팀에 말해두었는데 바빠서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이미 한참 전에 그 아이는 가족들과 함께 알로라를 떠났을 겁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누는 그가 말을 한 번 끊자 긴장이 되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 찾았다. 얼마 전에 이상한 소문이 있으셨더군요."

그는 말리에 정원을 산책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나누는 해명기사의 내용대로 고향지방에서 친척아이가 와서 같이 돌아다닌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누가 막힘없이 바로바로 대답하자 그들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횡설수설하면 틈을 파고들 것처럼 느껴져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담팀이 정말 실수로 보고를 잊어먹은 걸까요? 팀장인 요원은 옛날에 나누님의 직속후배였고, 836요원도 과거에 같이 팀을 이루셨던 걸로 아는데……."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뭘 저리 잘 아는지, 라고 생각한 나누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자꾸 돌아가려 하지 마시고요… 쉽게쉽게 갑시다."

그렇게 말한 뒤에 허리춤에 찬 몬스터볼 하나를 손에 들었다. 명색이 섬의 왕이었기에 배틀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의 포켓몬은 렌트라였다. 나누는 악비아르를 내보내야 하나? 파출소가 엉망이 될 테니 밖으로 유인해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여기 없는 사람을 찾아줘."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자마자 렌트라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쪽으로 달려가서는 날렵하게 높이 뛰어서 파티션을 넘어가버렸다. 워낙 짧은 순간동안 일어난 일이라 나누는 방어하지 못했다. 파티션 너머에서는 렌트라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망했다. 렌트라는 투시능력을 가진 포켓몬이었다.

"그러니까 왜 자꾸 질질 끄십니까, 바쁜데."

나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근본적인 잘못은 나누가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순무의 목소리에 돌아보면 순무는 렌트라에게 겁을 먹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누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가서 파티션을 자기쪽으로 당겼다. 순무와 렌트라가 나오면 그것을 밀어서 다시 원상태로 되돌렸다.

"전담팀에서 보고한 폴 되시는 분은 저희가 본부로 이송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가 성큼성큼 걸어 순무에게 다가간 것을 본 나누는 마지막 발악으로 페르시온을 내보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누를 보았다.

"여기선 위험하니 따라나와."

어깨를 으쓱한 그는 다른 요원에게 잘 잡고 있으라고 말한 뒤에 우산을 손에 들고 앞장서서 파출소 밖으로 나갔다. 서로 멀찍이 떨어지자마자 렌트라가 페르시온을 공격했다. 기술은 스파크였다. 전력을 두른 돌진을 정통으로 맞은 페르시온은 비틀거렸다. 하필 비가 오는 중이라 전기타입기술은 잘 먹혀들었다. 페르시온이 비틀거리나 싶더니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마비 상태에 걸린 것이다. 나누가 당황해하자 그는 우산 아래서 피식 웃었다.

"선배님이 놀아달래서 놀아드린 겁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도 없나?"

"국제경찰은 선배님이 어떻게 퇴출됐는지 다 알고 있죠. 아무리 옛날 일이라 해도 그렇게 중대한 일은 전해져 내려오는 법이니까요."

그는 렌트라를 다시 몬스터볼로 되돌려놓고 나누 앞으로 걸어왔다. 나누와 핸섬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후대에서 후대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임무 실패의 선례로서 말이다.

"가보겠습니다."

그래도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예를 표했다. 뒤에서 다른 요원과 순무가 나왔다. 순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누를 쳐다보았다. 나누는 눈앞에서 이끌려가는 순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반격하면 본부에 대항하는 꼴이 될 터였고, 대항한 계기는 터무니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나누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능함에 포효했다.

비에 젖은 채 울부짖는 나누를 위로한 것은 마비 상태에 걸린 페르시온이었다. 겨우 몸을 끌고서 나누의 뺨을 핥아주자 나누는 정신이 들었다. 우선은 지저분한 상태 그대로 파출소에서 약을 찾아 페르시온의 마비 상태부터 풀어주었다. 미안하다, 한 마디를 하고 페르시온을 몬스터볼로 돌려보냈다. 파출소는 나누의 슬리퍼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그것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옷을 벗고 수건으로 물기만 닦은 나누는 담배를 입에 물고 동료들 쪽에 연락을 했다. 얘기를 들은 동료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말 다음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메세지로는 그렇게 화를 내던 핸섬조차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리라는 나누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통화를 끝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나누의 가슴 속을 채우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아직도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악타입 전문 경찰관으로 시작된 모순은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데 하고 싶지 않다는 모순으로 끝내 파장을 맞았다. 순무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한심하게 늙은이를 보고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겠느냔 말이다.

멍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있자 한참 후 동료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본부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둘이 있다면 순무도 안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을 통해서 근황같은 것도 전해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나누는 약간 기운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잘 돌봐줘, 제발. 우선은 급히 떠나야하니 알겠다는 대답만을 받았다.

나누는 아무도 없는 포 마을에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밤늦도록, 나옹들은 순무를 찾는지 나누에게 매달려서 울어대거나 순무가 늘 앉던-나누의 옆-자리에 엎드려있기도 했다. 그럴 때는 무거운 마음으로 나옹들의 머리털을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는 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들리는 건 기분탓일까. 늘 혼자만 앉아서 한쪽만 꺼진 소파의 옆자리도 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탓일까. 세탁했을 것이 분명한 너의 옷에서 네 냄새가 날 것 같은 것은 왜일까. 나누는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때문에 항상 나누가 잠들 때까지 참다가 잠들었던 순무가 생각나자 가슴이 미어졌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다. 이별은 만남의 시작이다. 추락에도 마침내 끝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나누의 추락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나누도 안정을 되찾아갔다. 동료들에게서 순무의 소식을 가끔씩 전해듣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전해받은 것은 기밀사항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그 뒤로 팀이 해체되고 각자 다른 임무에 배당되어 흩어져버렸다. 처음에는 눈물까지 나왔지만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누는 바빠졌다. 알로라 리그 1주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주년을 기념하여 나누를 비롯한 섬의 왕과 여왕들은 각 지방의 네임드 트레이너들과 친선전을 가지게 되었다. 소수의 대표인원을 초청하여 배틀을 벌이고 앞으로도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회의를 위해 가라르에서 온 순무를 처음 봤을 때, 나누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제대로 나이를 먹어 나누 또래가 되어버린 순무는 다시 돌아온 탓에 나누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을 하며 귀염성있게 웃을 뿐이었다. 나누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마도 섬의 왕 노릇을 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디선가 보셨겠죠. 잡지나, 텔레비전이라든가…. 그렇게 말해보면 순무는 그렇겠네요, 라고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가녀리게 떨며 자주 울던 청년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이 대견했다. 어떻게 원래 살던 시절로 돌아갔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차근차근 알아가기로 한다. 나누는 또래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순무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러면 문득 순무가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본부에서는 어떤 짓까지 하길래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온 사람을 다시 과거로 돌려보낼 수 있었을까….

나누는 생각했다. 낯선 땅에 추락한 것은 불안 가득한 청년이었지만 낯선 땅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에 곧 추락할 것은 자기자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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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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