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2023.1.29 / 기린닭

. by 달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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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카의 말을 듣고 상황을 보러 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둥글게 모여 벽을 이룬 기사들 너머로 희미하게 와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도 보이는 특징적인 붉은 망토와 금발의 포니테일이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와론의 느긋한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너희는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잖아? 수습하기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불쾌한 웅성거림을 지나 가장 앞열에 다다르니 상상보다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피웅덩이에 빠진 한 구의 시신을 와론이 한 발로 밟은 채 고개를 조금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직 피가 조금 배어나오고 있으니 아마 시간적으로는 그다지 오래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가 밟고 있는 시신은 상처로 봐서 론누에 당한 것이겠지. 시신의 상태를 살피다 문득 올라오는 섬뜩함에 조금 시선을 올리니 와론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눈으로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명이 나랑 대련이라도 하는 건 어떤가?"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명예'를 걸고. 비웃음마저 조금 섞인 듯한 말투에 기사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명예를 저버린 기사에게 그런 걸 허락할 거라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외침에 기사들이 모두 각자의 무기를 고쳐쥐었다. 와론은 왼손으로 가만히 초록빛 목걸이를 바라보며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론누를 바닥에 꽂듯이 세웠다. 그래 그래, 해명을 했다지만 너희가 참고 있을 뿐이라는 건 알아. 그런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워서, 대련보다 덜한 희생으로 끝낼 자신은 있다는 건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흩뿌려지는 살기에 기사들이 모두 긴장했다. 흘끔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상황을 원하는 건지 알아챘다. 그리고 그 상황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훨씬 나은 판이라는 것까지.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삼킨 채 몇 걸음 더 내딛어 텅 빈 중앙으로 나아갔다. 와론의 옆에 서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의문과 당황이 환히 보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면 그대로 두었을 때 어떤 결과가 펼쳐질 지 너무나도 확연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련."

경직된 정적 속에 녹아내린 말은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을 잠시 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와론과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던 것이 순백색 코끼리와 검붉은 하마인 만큼, 전환점이 있지 않는 이상 충돌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한 말이었지만,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 와론이 멍청한 이도 아니고, 양쪽에 이득이 될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대화할 만큼의 틈은 없으나 그정도의 신뢰는 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투구 너머 보이는 눈동자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 이후의 일들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일주일 후, 10월 31일. 수도에 있는 한 대련장. 심판은 달잔님. 사실 심판이라고 해도 끝나는 조건은 명확했다. 둘 중 한 명이 전투불능 상태까지 이르는 것. 적을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 평소에도 충분히 성가신 기어스였지만, 이럴 때일 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절벽 끝에 앉아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았다. 고요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내 힘은 와론에게 종속된 상태. 사상지평을 사용하지 않고 와론과 싸운다면 정말 개죽음과 다를 게 없겠지. 손에 잡히는 작은 돌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귓가에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말없이 물어오는 와론의 제안에 승낙한 이유는 단순했다.

"담청색 기린."

예상했던 이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와론이 나무에 기대어 서있었다. 여전히 투구 때문에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부르고도 그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행동은 어느정도 예상 가능하다고 해도 그게 곧 목적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의중을 살피며 어두컴컴한 투구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힘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물어봤었지.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유난히 낯설다.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이번 대련에서 써라.”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있었으나, 그는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 몸을 돌렸다. 그는 그저 나와 싸우기 위해 맹세를 받아낸 것인가?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물어본다 한들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겠지. 평판과 세간의 소문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나, 특수 2기를 이끌며 봐온 모습에서 보기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굳이 이렇게 판을 만들어서까지 공개적으로 하려는 이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늘어서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짧게 뱉어낸 숨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여전히 의중도 결과도 알지 못하는 채 날짜가 다가왔다. 이전에 싸웠을 때도, 함께 적을 두고 싸웠을 때에도 그가 전력을 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 전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이르게 나와 천천히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를 톡톡 차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그가 전력으로 임할 것인가? 애당초 그가 나와 싸워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 있는가? 정 본인을 합리화시키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을 골라도 됐을 텐데. 모르는 척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경치를 그저 눈에 담았다.

대련장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새까만 닭이 나오는 데다 명예를 건 싸움이니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위치가 지정되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와 보니 새삼 껄끄러웠다. 나와 새까만 닭이 처음으로 싸웠던 대련장. 신이라는 작자가 있다면 지독한 악취미이리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깔끔하게 깔린 타일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5년 전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그 때에 비해 힘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눈앞에 있는 그에 대해서도 약간 알게 되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와론을 살폈다. 그는 론누를 어깨에 걸쳐 든 채 손끝으로 창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싸움을 싫어하지만,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는 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할지 수많은 가정을 하고 만다. 어차피 결말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바닥에 깔린 타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하다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였다. 투구 건너편으로 보이는 눈매가 조금 휘었다. 아. 무심코 표정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거북이님의 시작 신호가 울리고, 웅성웅성 들리던 말소리가 멎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어느새 뒤로 이동한 와론이 창을 횡으로 길게 휘두른 것이었다. 바로 몸을 숙여 피할 수 있었으나, 조금만 늦었어도 시작부터 상당히 깊게 베였을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것이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양손을 돌렸다.

위로 튀어올라 뒤로 멀리 빠졌다. 카각, 하며 바닥의 타일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바로 몸을 돌려 달려와 창을 내질렀다. 몸을 돌려 피하곤 다리로 차올려 무장해제를 노렸으나 그가 회수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불안정한 자세를 되돌리는 대신 그대로 허공에 뛰어올라 한 바퀴 돌아 착지했다. 그 사이 창은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나 후방에서 날아오고 있었고, 앞에서는 와론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공격을 흘려내며 틈을 노렸으나 노려볼만 하다 싶으면 론누가 날아와 방해했다.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돌려도 금방 되돌아와 흐름을 끊어버리니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처음 싸울 때에도 느꼈지만, 론누를 활용한 그의 싸움 방식은 상당히 성가셨다. 론누를 우선적으로 무력화해야 그나마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듯했다. 직선으로 뻗어오는 주먹을 피하려 뒤로 몸을 물리는데 옆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뛰어 그를 밀어내며 뒤로 멀리 빠졌다. 방금까지 있던 자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창에 섬짓했다. 이내 방향을 튼 창이 그의 손에 잡혔다. 가만히 서있는 그와 손에 들린 창을 보며 잠시 방법을 생각했다.

5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기에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다. 이를 꽉 물며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주먹을 내지름과 동시에 그가 창대로 막아냈다. 방어에 쓰인 창대를 잡은 채 중심을 옮기며 머리를 노렸다. 당연하게도 쉽게 공격이 성립하지는 않았다. 반대쪽 손으로 공격이 막히고 힘 겨루기와 비슷한 양상이 되었다. 예고 없이 창대를 놓아버리고 바닥을 짚으며 그가 잡고 있는 다리에 의지해 반대쪽 다리로 다시 한 번 머리를 노렸다.

그가 금방 피하기는 했으나 공격 자체는 꽤 성공적이었다. 와론은 조금 비틀거리다가도 금방 자세를 잡고 창을 던졌다. 몸을 비틀어 궤도에서 벗어났으나 금세 방향을 돌린 론누가 다시 한 번 날아왔다. 몇 번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하다가 눈앞에 날아온 론누를 다리로 내려 찍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기본 자세로 돌아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당연하지만 방심이라고는 없는 눈빛이었다.

몇 번인가 주먹을 주고받았으나 실질적인 타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양쪽 모두 서로의 공격은 피하거나 흘려내고 있었다.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가 몸을 뒤틀어 피했다. 손을 물리지 않고 조금 더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오금을 걷어차며 상체를 뒤로 밀어 쓰러트렸다.

그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건 싸우는 내내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특수 2기를 이끌던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입 안쪽 여린 살을 깨물며 그의 양 어깨를 무릎으로 억눌렀다. 뒤로 쓰러진 여파로 그의 투구가 조금 벗겨져 입가가 선명히 보였다. 그 뒤로 슬쩍 보이는 머리칼은 그의 기사명과 괴리된 밝은 회색이었다. 조금 숨을 고르곤 그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그가 입꼬리만 삐죽 올렸다. 그 의중을 굳이 헤아리지 않으며 손에 힘을 실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듯 저항 없이 쓰러져 누운 채 그가 눈을 감았다. 정적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가 내 목에 손을 올렸다. 힘은 실리지 않았으나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는 모습을 보곤 그저 눈을 감았다. 이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이내 힘 빠진 팔이 바닥에 떨어지고 힘을 싣던 손을 떼어냈다.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목에 난 자국이 선연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니 5분의 시간이 끝나 주위를 맴돌던 푸른 전기가 사그라들며 사라졌다. 잠시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거북이님이 승패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음에도 정적만이 맴돌았다. 새까만 닭이 이기리라 생각한 건지. 멍하니 관중석을 바라보다가 주위의 풍경이 멀어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바닥의 찬 기운에 그제야 저 자신이 쓰러졌다는 걸 알았다. 가물가물 뜨고 있던 눈마저 감아버렸다. 더는 눈을 뜨고 있고 싶지 않았다.

대련이 있고서 며칠인가 지났다. 별달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해야 하는 일을 하고, 특수 2기를 신경 쓸 뿐이었다. 새까만 닭은 특수 2기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련에서 맹세를 지켰으니 예상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어딘가 빈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수도에 가니 새까만 닭이 죽었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쉬이 상상이 가는 일은 아니라 지나가던 이를 잡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확실한 것은 없으나, 한 곳에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투구가 이곳저곳에 피가 묻은 채 놓여있었다는 듯하다. 주위에는 시체도 많았으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이 많아 묘비도 세워 두었다고 한다. 기사 사냥에 대한 것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며 아쉬워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 다운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투구만이 놓여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라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이미 맹세는 지켰다. 그와 이 이상 연관되어 좋은 일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의 목적을 이룬 것이겠지. 남겨진 투구는 그런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짧게 감사 인사를 하며 헤어지곤 그저 앞을 바라보며 애초 수도에 온 목적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후 회백발의 누군가를 보았다는 것은 구태여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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