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냇맘멜] Eyes of lion

멜리나 보스토코프가 기억하는 졸업식은 늘 겨울이었다. 혹한으로 유명한 나라의 겨울은 늘 뼈가 시리도록 추웠지만, 그와는 달리 처음으로 졸업을 맞이하는 아이를 마주할 때 척추를 타고 흐르는 오한은 겨울이 주는 달콤한 마비와는 달랐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과 약간의 자부심은 잘 정돈된 무표정 아래 숨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쩍 귀띔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멜리나는 ‘폐기’를 바랐지, 네 번째 졸업식을 맞이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바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그에게 떨어진 첫 임무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어느 민간인의 암살이었다. 첫 졸업식을 함께 치르고 한창 전선을 누비는 위도우들은 두 번이나 재활용된 폐물에게 잘 어울리는 임무라며 조롱하기도 했지만, 멜리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루, 빠르면 반나절 만에도 해치울 수 있는 임무에 일주일이나 되는 유예기간이 따라온 게 그 이유라면 이유였다. 느긋하게 정찰을 가장한 휴식을 하고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핑계로 하루나 이틀 즈음 전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가 방아쇠를 한 번 당기기만 하면 될 터였다.

본부를 나서 아무 모텔에나 들어가 이틀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멜리나는 그제야 담황색 마닐라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에는 별다른 지시사항 따위 없이 깜부기 불같은 머리칼과 녹안을 가진 여자의 사진뿐이었다. 얼굴 이곳저곳이 상한 채로 카메라를 곧게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꽤 단단해 보였다. 멜리나는 아는 사람의 사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뺨이며 눈가를 어루만져보다 금세 흥미를 잃고 침대에 대충 사진을 던져두었다. 늦장을 부릴 대로 부렸으니 이제는 표적의 위치를 파악해두어야 했다.

멜리나가 여자를 다시 마주한 건 놀랍게도 레드룸 본부-평범한 정부 기관으로 위장한-앞이었다. 이미 이곳이 익숙한 것처럼 문 앞의 경비와 몇 번 실랑이하고 계단참에 앉은 여자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사자 같은 눈이었는데. 작게 중얼거린 멜리나는 몇 블록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여자를 관찰했다. 여자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가 누군가 드나들 때만 고개를 들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한기가 드는지 몇 발자국을 걸으며 제 팔을 연신 쓸어대기도 했고, 종내에는 추위에 곱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등을 돌렸다. 여자는 그제야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멜리나는 스코프 너머로 그 단단한 녹안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어진 정보대로 그 여자가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하다면 그가 보일 리 없었음에도, 헛웃음을 흘린 멜리나는 빠르게 저격용 라이플을 분해해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었다.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를 유지했던 관절은 뻣뻣했으나, 민간인에게 위치를 발각당해서야 위도우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치안이 좋지 않기로 가장 유명한 골목에서 멜리나는 표적과 마주쳤다.

“여긴 아가씨가 다니기에는 위험한 길인데.”

멜리나 보스토코프는 임무를 완수하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를 지킬 수단 하나 없이 강도가 들끓는 골목을 지나가던 여자 하나가 총에 맞아 죽는다고 해서 두 번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멜리나는 코트 주머니 속 권총을 만지작거리다가 삐딱하게 응수했다.

“그러는 네가 더 위험해 보이는데.”

세 번이나 훈련과정을 거친 정예 요원과 민간인. 설령 그보다 덩치가 배로 큰 남자라고 해도 당해낼 바가 아니었다. 대화가 오가는 짧은 순간에도 맨손으로 여자를 죽일 방법 너덧 가지는 떠올랐다. 멜리나는 주머니 속에서 권총의 안전장치를 채우고 팔짱을 꼈다.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이대로 돌아가는 게 좋아.”

이건 다 모처럼 주어진 휴일을 일찍 끝내고 싶지 않아서라고 자신을 속이며 멜리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눈싸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대치가 이어져도 여자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 저 좋으라고 하는 말인 것도 모르고 버티고 선 여자에게 짜증이 치밀어 오른 멜리나는 총으로 겁을 주어 쫓아낼 요량으로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왜인지 저 여자는 총을 보고도 빙글거리며 웃을 것 같았지만, 그 가설을 확인해보기 전에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누가 내 걱정을 하는 건 오래간만이라서. 보기랑은 다르게 다정한 아이구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코웃음을 치는 거로는 모자랐다. 화가 나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가, 상한 음식을 먹은 것 같기도 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이제 와서 죽을병에 걸리는 것도 재미있겠네. 멜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돌아가라니까.”

“너는 혼자 두고? 내가 혼자 걷는 게 위험하면 네가 혼자 걷는 것도 위험할 텐데. 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어느새 사진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설마 여기로 유인한 건가? 멍청하게 몰이를 당한 거고? 그러면 그렇지 이런 여자가 민간인일 리가 없지. 멜리나는 여자의 다음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몸을 긴장시켰고,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멜리나의 목에 주먹을 꽂아 넣는 대신 멜리나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우리 집까지 바래다줄래? 거기라면 안심하고 너를 혼자 보내도 괜찮을 곳이니까.”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고 멜리나는 저보다 한 뼘은 작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녹안을 빛내며 웃었다. 멜리나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여자가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참, 나는 레냐야. 사자라는 뜻이지. 어릴 때는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

잘 어울리네. 속으로 중얼거린 멜리나는 통성명을 시작으로 자기는 오늘 딸을 찾기 위해 다녀오는 길이라는 둥, 네가 길을 모르고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아 따라왔다는 둥-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이어지는 여자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거리를 따라 표적을 경호하고 있는 상황은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었지만, 멜리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은 겨울바람에 두 귀가 얼어 붉게 변했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안내대로 집 앞에 도착해 자그마한 온기가 떨어진 후에도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던 것 또한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유독 한쪽 옆구리가 시려 코트를 더욱 여미고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멜리나는 제가 여자에게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음에 알려주지 뭐. 멜리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여자가 겨울바람을 피하고자 한껏 달라붙었던 팔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다음은 없어. 그런 건 오지 않아. 한겨울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손끝이 차게 식었다.

멜리나 보스토코프가 여자를 다시 만난 건 사흘 후 저녁이었다. 여자는 새로 생긴 타박상을 달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여자를 본 멜리나는 치수가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억지로 폐를 부풀려야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 애는 또 만들면 되는 거 아냐?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멜리나가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팔을 거칠게 붙잡자 여자는 신음을 참으며 그의 코트 깃에 매달렸다. 멜리나는 입술을 깨물고 팔을 놓아주었고, 여자는 붙잡혔던 자리를 문지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 애의 세상은 내가 전부인데 내가 포기해 버리면 안 되잖아.”

내 세상은 돈 몇 푼에 포기하던데.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다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 마, 피 나. 입술에 피딱지를 얹고 있는 주제에 꾸짖어봤자 무섭지 않다며 툴툴거리면서도 멜리나는 하얗게 질릴 때까지 물고 있던 제 입술을 놓아주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자를 부축하자 거슬리는 신음이 잦아들었다.

“멜리나야.”

자박거리며 쌓인 눈이 신발 밑창에 짓눌리는 소리 사이로 불쑥 멜리나가 말했다.

“응?”

“멜리나라고, 내 이름.”

예쁜 이름이네. 지난번과는 달리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제 목적을 이룬 멜리나는 어색하게 더 말을 붙이는 대신 여자를 부축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였다.

느려진 걸음으로도 본부에서 여자의 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겠지. 지난번처럼 현관 앞에 도착한 여자는 곧바로 들어가는 대신 멜리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잠깐 들어왔다가 갈래?”

멜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굳은 손으로 몇 번 헛손질을 한 끝에 문을 연 여자는 편하게 있어도 좋다고 덧붙였다. 난로에 장작을 넣고, 눈에 젖은 코트와 목도리를 걸어두기 위해 여자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이 멜리나는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여자가 멜리나에게 주기 위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 한 잔을 들고 올 때까지도 그는 문가에 선 채였다. 편하게 있어도 된다니까. 쭈뼛거리는 그의 손에 잔을 들려주고 소파에 앉힌 여자는 온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새로 불을 붙인 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프고, 힘들지 않아?”

우유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가만 바라보며 멜리나가 물었다. 그의 턱 끝을 들어 올려 눈을 맞춘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 뿐이야, 멜리나.”

멜리나 보스토코프에게 고통은 가치 없는 것이었다. 임무에 지장을 주는 방해물 혹은 나태가 불러오는 체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멜리나는 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멍청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제가 만들어낸 파문의 크기도 모르고 해사하게 웃으며 멜리나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쓰다듬었다.

“내 딸은 너만큼 다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꿈치고는 너무 소박한 거 아니야?”

난 겁쟁이일 뿐이야. 멜리나는 적당히 식은 우유와 함께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을 삼켜냈다. 이번에도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멜리나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러면 너만큼 다정하고, 강하고, 용서할 용기가 있는 아이로 자라게 해달라고 빌까?”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은 지독하게 따스해서,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멜리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

 

멜리나 보스토코프는 다시 마주한 입학에든, 그 후의 어떤 임무에서든 습관처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그 여자처럼 굳건하게 살아남아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선물을 열어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는 붉은 머리의 꼬마 아이를 마주한 멜리나는 빛바랜 그리움에 목이 멨다. 흐려진 기억 속 이름은 이번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 이름이 떠오른다면, 너는 끝까지 지켜진 아이라고, 네 세상은 한 번도 너를 포기한 적이 없다고, 네 세상은 다정하고, 강한 사람이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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