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냇] You are my savior.
“I told you, Boss. I’d die for you.”
“Don’t be dramatic!”
페기는 그가 덧붙인, 레드룸에서 그렇게 극적으로 구는 걸 가르치기라도 하느냐는 말에 나타샤 로마노프의 표정이 굳은 건 보지 못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목숨을 버리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블랙 위도우는 다중작업에 능했고, 페기와 나타샤는 모두 멀쩡하다면 멀쩡하게 본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보통 때라면 끝나고 같이 식사를 하자든가 임무 후 브리핑은 귀찮기 짝이 없다든가 라는 말을 쫑알거릴 나타샤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페기는 그런 날도 있는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타샤에게 필요 이상으로 시선을 던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타샤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어깨보다 가슴께가 아려오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페기 카터’마저도 저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건, 기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라도 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이었고, 사람의 상상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아주 작은 조각만으로 전혀 다른 사람을 투영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나타샤 로마노프는 늘 누군가에게만은 그 자신으로 존재할 기회를 바라왔고, 이제는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져버렸다.
명치에 자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아픈 이유가, 그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겨서인지, 그 마지막 기회가 하필 페기 카터였기 때문인지 결정하기 전에 퀸젯은 본부에 도착했다. 나타샤는 해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퀸젯에서 내렸다. 페기는 나타샤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그를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앞에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간단한 브리핑을 마치고 페기는 나타샤를 찾았다. 호출 명령에도 불응하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심사가 비틀린 모양이었다. 페기는 가만히 앉아 나타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페기 카터는 슈퍼 솔져 혈청의 피험자로 선택된 이후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그중 누구도 나타샤 로마노프와 같지는 않았다. 그의 배경이 페기로 하여금 오랜 친구를 잠시 떠올리게 했지만, 그건 사라지지 않는 흉터가 새삼스럽게 아픈 것에 가까웠다.
페기는 문득 나타샤 로마노프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블랙 위도우를 무력화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들어선 건물에서 만난 건 페기가 상상한 모든 경우의 수에서 벗어난 작은 아이였다. 그와 함께 임무에 투입된 요원은 모두 아이라는 평가에 고개를 저었겠지만, 페기에게 나타샤 로마노프는 무자비한 여성 암살자가 아니었다. 페기는 아직도 그를 마주친 순간 나타샤의 눈에 깃든 안도감을 잊지 못했다. 더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과 뒤섞인 안도는 그 작은 아이가 지켜온 본성의 증거였다.
사념에 잠겨 발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페기는 예상보다 일찍 나타샤의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오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문을 열어젖히자 담요를 뒤집어쓴 나타샤 로마노프가 그를 반겼다.
“왜 그렇게 있는지 얘기해 줄 거니?”
나타샤는 대답하는 대신 담요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한숨을 푹 내쉰 페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페기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좋을 대로 하라며 침대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나타샤는 제 곁을 차지한 온기에서 멀어지려 몸을 더 웅크렸다. 페기의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를 제외하면 방 안은 완벽하게 조용했다. 나타샤는 길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하고, 불쑥 지겹도록 읊은 문장을 내뱉었다.
“당신은 제 구원자예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저 네가 지킨 널 알아본 것밖에 없어. 널 구원한 건 너 자신이야.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또 그 소리.”
담요를 내리고 페기를 돌아본 나타샤는 빤히 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적은 빛으로도 페기의 확장된 동공을 그려낼 수 있었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저를 영입한 거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네가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필요하니?”
“…구하지 못했던 사람의 대신일 수도 있죠.”
“Oh, darling….”
나타샤는 페기가 부디 붉어진 제 얼굴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이런 것도 참지 못해서 어떡하려고. 멍청한 대답을 했다는 생각에 나타샤가 도망치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앉은 페기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붙잡아왔다.
“나타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누군가의 대신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너와 내 과거의 인연이 닮은 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너에게서 그를 봤기 때문에 널 영입한 건 아니야.”
나타샤 로마노프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페기와 눈을 맞추고 제 안에 울렁이는 감정을 그가 전부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