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화 - 거래 (4)
노아의 손이 뻣뻣한 목깃 위에서 멈췄다.
“왜 입니까?”
“당신이 더 다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요. 아니, 거절하세요.”
“싫다면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시내까지 쫓아온겁니까?”
그 말에 노아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는 게 어떤건지 알 수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이게 뭐 하는 건지.- 침대 한 구석에 뭉쳐놓은 이불을 털며 노아는 그의 말을 흘려보냈다.
“레인,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것 같은데 그건 그냥 우연이었던거고, 수락한적도 없습니다. 할지 말지는 내 의지로 내가 정합니다. 당신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습니다.”
“아직 시작도 않았다면 더더욱 잘 되었군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킵니다. 그러니까 나서지 마세요, 당신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상관이 없다고요?”
‘쿵!’ 큰 소리와 함께 사물함이 흔들렸다. 등허리에 느껴지는 얼얼함도 잠시, 레인은 제 멱살을 쥔 손과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아는 지금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멋대로 단정짓는 건 연구원들 특성입니까? 뭘 안다고,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서 레인은 그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 말마따나 서로 알지도 못 했던 사이 아닙니까!”
한 차례 소란이 잦아든 병실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얽혔다. 레인의 목깃을 움켜쥐고 있던 노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제야 실밥을 푼 상처가 아려왔다.
한 쪽 벽에 몸을 기대고 섰음에도 레인을 바라보는 노아의 눈빛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중앙이 자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로 했네..’
“내가 필요합니다. 명분,명예,살아오며 내게 쌓인 굴욕을 지울 수단이 필요해서지, 사사로운 감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노아, 당신은 중앙을 믿습니까?”
제 손으로 목을 감싼 레인이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노아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부드러운 재질이어도 억센 손아귀에서 뭉치면 천의 모서리는 칼날같이 목을 파고들었다. 그 상흔이 당장 나타나지 않을뿐, 잊을 즈음엔 옥죄였던 자리가 서서히 부어올라 그 때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곧 가라앉는다. 그래서 잊어버린다.
추위와 바람을 막아주는 그것이 제 목을 옥죄였다는 그 사실을 잊고야 마는 것이다.
“믿을 이유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믿지는 않지만, 중앙의 인정은 필요했다. 그래야-.
“중앙은··· 내게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머무를 수 있었으니까.
필요하다는 말은 지극히 계산적인 관계를 엮는 말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단을 포함한 중앙에 섭섭하다는 감정이 들 정도의 일이 있어도 그쪽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도 철저히 당신들을 이용하는 관계라는- 그 용도를 위해 필요라는 말을 덧씌워 왔다.
그건, 노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이 필사적으로 짜낸 갑옷이었다.
“중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눈에는 눈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비추지 않는데. 되려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임에도, 슬픔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마법사가 한 말 잊으신겁니까? 당신은 그저 수단일뿐이라고 하지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 뜻을 따르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니까, 쓰겠다는겁니다.”
그 말에 레인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여민 단추를 풀고 그 안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냈다.
‘차르륵-’
은빛 체인이 쏟아지듯 늘어지고, 그 가운데에 마찬가지로 은테를 두른 마름모 형태의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펜던트 가운데에는 짙은 녹색으로 빛나는 투박한 보석이 박혀있었다.
“이건?”
“다이오보스로 만든 호출용 샬레인입니다. 이건 당신과 나, 둘만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테니 갖고 계세요.”
레인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를 바라보던 노아가 손바닥을 펼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손목에 체인을 감고 소매 깊숙이 넣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서야 노아는 레인의 귓가에 빛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가는 햇빛을 보석이 반사하자, 가느다란 빛이 노아의 새끼손가락에 닿았다.
“나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일이 있어도-”
레인이 입술을 짓씹었다.
“죽지마세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럴일 없을겁니다. 저는 다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퍽이나.”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레인이 뚜껑을 열었다 닫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서둘러 돌아가려는 그를, 노아가 나지막이 불러 세웠다.
“레인, 나는 당신까지 이용할겁니다, 당신이 만든 모든것들도. 그러니까 감정같은건 없습니다. 이건 ‘나’의 거래니, 당신은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할겁니다.”
“최선이라…”
문앞에 다가선 레인이 손잡이를 잡고 밀어젖혔다.
“최후까지 최선일 필요는 없습니다.”
적막속에서 남겨진 마지막 말은 끝내 노아에게 닿지 못했다.
*
마법동 분관에 위치한 국립 도서관은 나우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다. 시중에 출간된 도서는 물론, 샬레의 샘플도 전시되어 있었고, 지하 보존 서고에는 개인이 제작한 책부터 국가 단위의 기밀 사항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당연히 국가 자원으로 진행된 연구나 사업도 그 기록이 남아 영구적으로 보관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입구 바로 옆에 놓인 데스크에 앉아있던 사서기 조용히 고개를 까딱였다. 정숙을 요하는 장소답게 인사마저 고요했다. 안으로 이동하자, 양쪽 벽의 계단을 이어 만든 테라스와 벽면 책꽂이에 가득 꽂힌 책이 보였다. 그 아래로, 움푹 들어간 입구가 있었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사람과 책수레 하나만 겨우 이동할 정도로 좁은 복도였다.
복도 앞에 놓인 출입 확인 샬레인에 마법사 등록증을 대자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노아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마침내 도착한 그 안에는 희고 매끄러운 둥근 기둥만이 놓여있었다. 좀전까지 책으로 가득했던 벽은 어둠과 공허만이 있을뿐이었다. 노아가 기둥 앞으로 다가가자 바닥에서 마법식이 빛나더니, 허공에서 푸른 빛을 머금은 깃펜이 나타났다.
깃펜을 든 노아가 잠시 망설이더니 손을 움직였다.
[레인]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푸른 글씨가 새겨지더니, 다시 마법식이 빛났다. 얼마지나지 않아 [레인]과 관련된 자료들이 마법식 주변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레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부터, 레인과 관계된 실험, 기사들, 논문.. 심지어 교과서의 한 부분까지도 쉬지 않고 떠올랐다. 그와 관련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순간 노아 자신이 장벽을 쌓는 마법을 쓴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뭐 이렇게 많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노아의 눈앞에 문장 하나가 띄워졌다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방대한 자료에 노아는 마른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
전혀 관계없는 자료들은 걸렀음에도 여백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노아가 손을 뻗어 레인의 모습이 담긴 기사들을 끌어왔다. 홀로그램 화면이 노아의 앞으로 다가와 크게 펼쳐졌다.
기사의 발행 연도를 확인하자, 2018년이라는 작은 숫자가 보였다. 정확히 36년 전에 써진 기사였다. 화면의 정중앙에는 레인을 포함한 연구원 4명과 젊은 시절의 아르크가 시험관에 담긴 광물을 들고 앞을 보며 발표하는 모습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대마법관님도 여기 있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 놀람과 동시에 이 중에 이번에 실종된 연구원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노아의 시선이 기사의 제목으로 향했다.
[정령과 기술, 무한한 마력의 가능성 발견·· 레인,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열다]
“인류의 새로운 문명..”
노아의 손끝이 해당 기사가 띄워진 화면을 건드리자, 화면이 커지며 노아의 눈앞에 끌려왔다.
‘···고대 정령 운디네에서 비롯된 이 실험으로 소수의 정령사만 가능했던 마법 사용이 보편화될 가능성을 이루었다. 실험의 중추이자 수석 연구원 ‘레인’은 2008년에 마력의 원자를 발견 및 연구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마도 공학 학술지 MGA(Magitek Academic)에 게재된 그의 논문에 따르면 정령의 마력 원자와 유사한 원자 구조를 가진 광물에 마력을 이식하여 인공적인 정령을 배양할 수 있다..’
‘...중앙 마법사단은 인공 정령에 관한 연구를 국가적인 사업으로써 지지하겠다는 의의를 표명하였다··· 일각에서는 정령과 정령사의 존재 의의가 흐려질 것을 우려···’
또 다른 기사가 노아의 앞에 띄워졌다. 먼저 본 기사가 쓰이고 두 달 후에 게시된 기사였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그 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