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서신 전달

복수가 끝난 뒤의 이야기

*아래는 쓰면서 들은 음악 링크

https://youtu.be/AsKETdR9UZ4?si=3g5waLqj52fwRk1X


나견은 지금 동대륙의 한 작은 마을에 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벚꽃나무가 만개하여 절경이었다. 밤이 어둑해졌지만 마을은 조명 축제가 한창이었다. 동대륙 풍의 등 안에 촛불을 키면 그 빛이 주변을 밝히며 아른거렸다. 가지마다 매달린 등불 외피의 색이 은은하게 퍼지며 주변 벚꽃잎들의 색을 물들였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등불에 각자의 소원을 쓰기도 하고, 가족이나 연인이 밤참을 들고 나와 서로 먹여주기도 했다. 근처에서는 동대륙의 전통악기를 들고나와 연주를 하는 이도 있어 사람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며 가만히 음악을 듣기도 했다.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에 나견은 사색에 잠긴다.


나견은 원래 죽을 작정이었다. 나진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복수를 이룬 후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정말로.
죽고자 하여 스스로를 해하려 했을 때, 라우준이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다. 어느 틈에 다가온건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참 그대로구나. 라우준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에 매달린 두 다리를 놓칠세라 붙잡아주고 있는 와중에 그런 시덥잖은 생각이 들었었다.
"...죽지말아줘, 견아."
소란을 듣고 뛰어온 다른 견습들도 당황한 기색으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참으로 우스웠다. 당황해서 아무 말이라도 던져보는 그들이 우스운게 아니었다. 복수를 끝마치면 죽으려고 한 주제에, 나진의 곁으로 가려고 한 주제에, 주변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들에 마음이 흔들려 버리는 자신이. 결국 나견은 두손두발을 다 들었다. 지금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무작정 살아달라고 하는 그들의 눈빛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진, 나 정말 이상하지. 아무래도 바로 만나러는 못 가겠어.
그 날 이후,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여지껏 살아있는거지. 이제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하지. 나견은 폐인이라도 된 양 며칠을 방에 누워있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 다들 그가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다며 걱정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나견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담청색 기린, 지우스에게 상담을 청했다. 생각이나 심정이 까발려지는 것을 꺼려서 비밀 보장을 해주는 조건까지 걸었다. 특별히 지우스를 고른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항상 당신이 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묻는 것뿐. 무언가 임무라도 내려주면 기계처럼 일할 심산이었다.
  지우스는 나견에 대해 그나마 잘 알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거기에다가 첫 상담을 비롯한 몇 번의 상담을 통해 나견의 속사정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지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견에게 책 한 권과 수첩, 펜 몇 자루를 쥐어주었다. 책 안에는 지도가 그러져 있었다. 꽤 오래 전에 쓰여졌는지 낡은 티가 났다. 기린은 나견에게 특별 임무를 내렸다.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서신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고속 이동을 할 수 없는 그에게 이는 아주 오랜 여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내린 임무였다. 당시 나견은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었다.
기린 왈, 잠시 타지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고 했다. 이전 작전들을 수행하기 위해 중앙대륙의 수도나 동대륙을 가보긴 했지만 그 때는 한가하게 즐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시간을 들여, 서신을 전하고 돌아오면서 천천히 둘러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견은 제 손에 들린 책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주는 일이라면 뭐라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견은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우디온에서만 살았던 나견은 줄곧 넓은 세상을 동경해왔다. 책과 잡지에서 읽은 세계의 명소들...나진이 견습기사가 되고 우디온을 뜨면 나견은 더이상 우디온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마을을 벗어나, 이 숲을 벗어나, 사람들의 얼굴색을 살필 필요가 없는 곳으로. 탁 트인 대자연의 경관을 마주하며 아무 생각 없이 느끼기만 해도 되는...오롯이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은 무참히도 박살났었지만.
하지만 이건 응당한 벌이었을거야. 나진이 저지른 그 일을 알고도, 그가 변해버린 것을 알고도 결국 눈을 감아버린 것에 대한...


"형은 여기서 혼자 뭐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 하나가 입에 꼬치를 물고 다가왔다. 무엇이 그리도 맛있는지 입가에는 설탕으로 보이는 알갱이들이 잔뜩 묻어있었다.
"...축제를 구경하고 있어."
"안 내려가?"
"난 여기 사람이 아니거든. 혼자고..."
아이는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혼자야?"
"음..."
어떻게 설명해야 알기 쉬울까. 고민하던 찰나,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불렀다. 아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또래였다. 응, 갈게, 하며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그 또래에게 뛰어갔다. 잘 보니 둘은 빼닮은 것이 형제인 모양이다. 우애가 참 좋아보였다.
나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뛰어간 곳을 따라 이동했다.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보는 동대륙의 현악기는 어딘가 구슬픈 선율을 노래했다. 재잘거리던 형제도 어느새 조용히 음악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나견은 그들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았다. 벚꽃잎이 눈꽃처럼 날리는 밤하늘을 올려보노라니, 네 생각을 어찌 안 하겠어.

"여행자이시오?"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나견의 곁에 다가왔다. 아까 아이들에게 떡을 하나씩 나누어주던 그 사람이다, 나견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생각했다. 경계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이곳을 거쳐가던 중입니다. 그런데 밤이 어두워져서 여기서 묵었다 가려고요."
노인은 환영한다는 의미라며 떡을 하나 건네주었다. 팥소가 가득찬 흰 떡이었다. 나견은 사양하려던 것을 관두고 떡을 받아 먹었다. 너무 달지도 밋밋하지도 않아 맛있었다.
"직접 만드신건가요?"
"후후, 그렇소. 우리 안사람이 좋아하던겁니다."
노인의 얼굴에 잠시 그리움이 엿보였다.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나견은 묵념했다.
"이런 변방의 작은 마을까지 다 찾아오시고, 여행을 좋아하나 보오?"
"아...네.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은 서신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라느니, 이런저런 일이 있어 휴가를 받은 셈이라느니, 그런 긴 말은 접어두었다. 노인은 수염을 가다듬었다. 대화가 애매하게 끊겨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보통이라면 그냥 자지를 떴겠지만, 딱히 숙소로 돌아가 잘만큼 졸리지도 않았다. 결국 나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볼 일이시라도..."
"아까 하늘을 올려다볼 때, 참으로 쓸쓸해보였어."

"내가 아주 잘 알지, 그 표정."
이제와서 표정을 숨길 일이 별로 없게 되다보니, 얼굴에 다 드러난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세월의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자네나 나같은 사람은 뭘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지. 이렇게 달이 아름다운 밤에는."
날이 맑아 보름달이 환하게 빛났다. 달을 빤히 보던 나견은 문득, 이 노인에게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곧 떠날거니, 한 번 만나고 말 사이라면 말이다. 예전처럼 누군가를 과하게 경계할 필요도 없다. 이 마을은 외부와의 교류도 적으니 어딘가로 이야기가 새어나갈 걱정도 없다.

"...어르신, 전 제 형제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입니다."
"형제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형제가 저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그걸 들추는 순간,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결국 제 형제는 죽임 당했습니다. 제가 보지 않으려했던 그 진실에 의해..."
나견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노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나견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끝마치고 찾아온 정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괴념치 말게. 이런 변방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마음 편히 이야기하겠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 형제는 자네를 위해서, 자네는 그 형제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더라도 서로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야. 무작정 가족을 위해서 했던 일이 되려 둘 다에게 독이 되기도 하지."
"...그걸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겠죠."
"이미 지난 일을 어찌하겠는가. 삶이란 후회의 연속이지."
노인은 나견을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나견도 머리로는 이미 다 지난 과거라는 것도, 그 과거를 갚아주고자 목숨을 건 복수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전부 끝난 뒤부터 나견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무력함을 느꼈다. 더이상 바뀌는 건 없다. 돌아오는 것도 없다. 애초에 그 때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셈인가? 이 여정이 끝난 다음날, 그 모레는?"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원래는 죽을 생각이었으니까요."
"내가 자네에 대해 아는거라곤 방금 자네 입에서 나온 이야기 뿐이지만..."
"...?"
"자네는 자신을 챙길 줄 모르는 것 같아...또 잃을게 없다고 생각하는겐가? 너무 무모한 구석도 있군. 자네는 자네 생각보다..."
아아,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누구 씨의 따끔한 잔소리가 생각났다. 사돈남말하던.
"...이름이 나견이랬지? 나견. 좋은 이름이군."
노인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갈무리하듯 몇 번 되뇌였다.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노인이 입을 뗐다.
"자네는 결국 자네일세. 누군가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자신을 잃기 마련이지. 명예를 건 보호도, 목숨을 건 복수도. 자네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잖은가."
"...그 애는 제 무엇보다도 소중했으니까요."
"...그 마음 또한 잘 아네. 나 자신보다도 소중한 무언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 하지만 자신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주변도 제대로 챙길 수 없어. 살다보면 소중한 것을 잃기도, 새로 생기기도 하네. 내 경우엔 우리 안사람, 자식들, 그리고 이 마을..."
노인은 조용히 운을 떼다가 다시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자네는 누군가의 형으로서도 아닌, 온전히 자네로써 돌아온거야. 자신을 챙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온거다. 책의 첫 장이 끝나고, 두 번째 장이 시작된거지. 지금의 두 번째 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를 위해서 존재하는거네."
"...제가 그래도 되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직은 혼란스러울 수 있을게다. 정 첫 걸음이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시작하게.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꿈이라도 있나?"
"꿈..."
모험가. 과거의 꿈이었지만, 나진이 죽은 이후로는 뒷전이 되었었다. 복수가 끝난 후에는 삶의 의지를 잃었고. 자결을 관두고나서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을 때 다시 떠올린 선택지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런 생각이 선택지를 자꾸만 가로막았다. 기린이 서신을 멀리 전달하는 임무를 줬을 때에도, 책 속에 그간 가고 싶어했던 장소들이 써져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이제와서 제가 이래도 되는건지..."
"자네가 자네로서 살아가며 행복해지는 걸 가장 바라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
"......"
나견은 답을 알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이미 알고 있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지? 해도 되고 하면 안 되고의 자격은, 이제부터 만들어가도 되지 않은가. 아무도 자네를 막지 않아. 네 죽은 형제도 자네의 등을 밀어줄걸세. 하지만 명심하게.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 감사합니다, 어르신."
"뭘...음악이 멎었군. 축제도 거의 끝나가니 난 이만 들어감세."
노인을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음악가에게 박수치는 사람들 사이로 그 인영이 옅어졌다. 나견은 한참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을을 떠났다.




그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 건 2년하고 반년 후. 어딘가 어깨가 무거워보였던 과거와 달리 훨씬 여유롭고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대략 2년 전의 그 날, 나견은 마을을 떠나고 곧장 중앙대륙으로 돌아가 모험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나진이 아닌 나견 자신을 위한 미래를 살아가보겠다고. 그러기 위한 첫 단추였다.

돌아온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노인의 행방을 묻는 나견에게 마을 주민들은 그가 불과 얼마 전 병환으로 아내를 따라 세상을 떴다고 전했다. 아쉬운 내색을 비추며 발걸음을 돌린 나견은 다시 그 언덕 위로 올랐다. 대낮인지라 마을 전경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때처럼 벚꽃잎이 만개하였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올려다 본 화창한 하늘에는 벚꽃잎이 눈꽃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나 아직도 네 생각 많이 해. 하지만 이제 슬프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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