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글 연성

이름과 역할

그 몫만큼 살아간다. 그래야만 하기에.

삶의 아주 오랜, 어떤 것이 먼저인지도 모를 기억들. 그 뿌리부터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어디든 갔고, 무엇이든 함께 했다. 배고프면 산에 올라 식물의 뿌리를 캐 먹다가 물가를 찾아 목을 축였다. 날이 추워지면 땔감을 찾아 불을 피웠고, 심심하면 나무 사이를 쏘다니며 서로를 쫓아서 놀았다. 넓은 산중을 뛰놀면서도 가는 발걸음이 같아 마치 길이 하나만 있는 것 같았다.

 오직 나와 너, 너와 나뿐이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네가 한 일이었으므로 우리에겐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했다, 같은 구별은 필요하지 않았다. 네가 한 일은 내가 한 일과 같았으므로. 네가 넘어져서 울면 나도 울었고, 내가 즐거워서 웃으면 너도 웃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우리에게 함께 살 집이 생겼던 날. 정말 운 좋게도 주인 없는 집을 찾았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 눌러살게 되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을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곳이 우디온이었다. 연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형제에게 사람들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하지만 동네의 또래 아이들과 곧잘 어울리는 형제의 모습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적응했다. 나무를 베어 마을에 땔감을 팔기 시작했을 무렵, 어떤 살가운 어른이 물었다.

"정말 똑같이 생겼구나. 너희 이름이 뭐니?"

 이름이 없다고 했을 때 조금 당황해하던 그 표정을 아직 기억한다.


 그곳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이름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사회에서 사람이 서로를 구분하고 부르는 수단. 보통은 부모가 자식에게 의미가 담긴 이름을 붙여준다고 한다. 어떠한 사람, 또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름 붙여줄 부모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다. 누가 손위 형제인지도, 언제가 생일인지도, 심지어 정확한 나이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작 이름 하나 없는 것이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에 우리 둘뿐이었을 때처럼 여전히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까 그건 누구였어? 어제 내가 만난 건 어느 쪽이었지? 하나같이 우리 둘을 구분하려고 애썼다. 이런 질문을 하루에 여럿 받아보기를 이레째가 되었을 때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제안했다.

"우리, 이름 지을까?"

 이유를 설명하자 그 애는 납득했다. 안타깝게도 바로 좋은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는 이름이라고는 동네 또래들의 이름 뿐이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 지어야 하는지부터 헤매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름을 물었던 어른에게 찾아갔다.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조금 고민하더니 책을 하나 건네주었다.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르랬었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글을 깨우치지 못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글부터 배웠다. 글자를 띄엄띄엄 읽는 것부터 시작해,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 제대로 이름을 짓게 되었다.


나견과 나진.

나는 나견, 너는 나진.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었다. 차츰 익숙해졌을 때부터 신기하게도 나는 우리 형제를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했다. 항상 같은 음식만 먹지 않았고, 종일 붙어 다니지 않는 날이 늘었다. 계절이 바뀌자 서로 다른 옷을 장만하여 입었고, 각각 다른 친구를 사귀었다. 무난하게 비슷했던 성격도 차츰 달라졌다. 네가 모르는 친구를 소개해줬을 때면 너는 유독 냉랭하게 굴었지. 무엇이 그리 불만이었는지, 토라진 너를 달래려고 만지작대던 네 머리를 하나로 모아 고무줄로 묶었던 기억이 난다.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넌 그 이후로도 머리를 종매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재미 삼아 내가 먼저 이름을 짓게 되어 형을 하기로 했던게 떠오른다. 그러자 동화책에서는 동생이 형에게 이러더라, 하면서 장난스럽게 안겨 왔던 네 따뜻한 온기도.

 이름이 주어진 순간, 나는 나로서 존재했다. 그리고 너는 너로서 존재했다. 이름에는 한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내가 나의 이름 몫을 할 때마다 역할은 새롭게 생겨났다. 나에게 가장 처음 주어진 역할은, 네 형이자 보호자였다. 그렇게 하나로만 뻗어있던 길에 갈림길이 생겼다. 그럼에도 나는 두 길이 나란히 이어져, 설령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도 다름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네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애가 아니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네가 그 길 위에 서 있지 않았다. 이름과 역할이 주어진 순간, 우리에겐 길을 벗어날 힘과 의지가 생겼다. 나에겐 감히 그럴 용기가 없었다. 지금까지 같은 곳을 보고 걸어온 "우리"가 아니게 되는 첫걸음이 될까 봐 두려웠다. 이미 그 첫걸음이 떼어진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한 번 틀어져 버린 것은 절대 영원하지 못했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너의 이름을 빌리게 된 순간, 네가 만들어낸 새로운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어린 시절, 서로를 쫓아 뛰놀던 두 발걸음이 하나인 것 같았을 때처럼.

 네 이름과 역할의 발자국을 이어 나간다. 그것이 이 어리석은 몸에 유일하게 남겨진 몫이 되었으니까.

 나진, 나진... 너만이 남은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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