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

굉가특제소바 무한리필사건

🎶 by A

토도로키 쇼토와의 교제는 바쿠고 카츠키를 개빡돌게 한다. 이유는 백만 개쯤 있는데 열 개만 말해 보겠다.

1. 토도로키는 살아 움직이는 트라우마 집합소요 걸어다니는 정신의학과 사례집이다. 그건 아마 그 토도로키가 쇼토든 후유미든 기타 잔챙이든 공통으로 적용되는 사실이지 싶다. 1억 2천 일본 인구 중에 어쩌자고 꼴랑 여섯 명 있는 토도로키 중에 하나를 좋아해 버리고 걔도 카츠키를 좋아하게 돼 버렸냐고. 정말이지 탄식만 나온다. ‘일본 열도에서 가장 얽히고 싶지 않은 가정’ 투표를 한다면(그런 투표가 왜 있냐고 물어도 ‘숨겨둔 빌런 남자친구가 있을 것 같은 히어로’ 따위의 앙케이트가 잡지에 실리는 세상이므로 소용이 없다. 참고로 1위는 호크스, 작은 차이로 2위는 올마이트였다) 토도로키 가는 압도적인 우승을 거둘 것이다. 바쿠고 미츠키 아줌마의 성질머리만으로도 카츠키의 일생에 드라마는 충분하고 넘치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어쩌다가 막장드라마 대본을 짜 오래도 저렇게는 안 짤 것 같은 집안의 대들보와 단단히 얽혀 버린 걸까?

뭐 사람이 좀 지뢰밭일 수도 있지. 그 점에 대해서 카츠키가 불만을 품은 대상은 엄밀히 말하자면 토도로키가 아니라 엔데버다. 지뢰를 심은 새끼가 잘못이지 봉변당한 밭이 잘못이냐? 그러니까 엔데버야말로 진정으로 카츠키를 개빡돌게 하는 존재라고 해야 맞겠지만, 어쨌든 카츠키가 매일같이 상대해야 하는 건 엔데버가 아니라 토도로키니까. 이 반반 지뢰밭의 문제는 어디에 지뢰가 있을지 예측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뢰에 대한 토도로키 본인의 대처법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1학년 체육대회 첫 관문 막판에서 토도로키는 신중하게 피해서 가려다가 그래서는 패배할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밭 전체를 얼려서 지뢰가 없는 셈 쳐 버렸었다. 그러고는 지뢰가 있건 말건 자신에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태도로 얼음 위를 저벅저벅 뛰어갔다.

문제는 카츠키에겐 그런 얼음이 없으며 갖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카츠키가 거대 지뢰를 대차게 밟아 버린 사건으로는 이를테면⋯⋯.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우동 대참사’. 이름을 붙이자면 대충 그렇다. 구체적으로 기억하기 시작하면 암담해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2학년 겨울의 주말에 일대일로 훈련을 한 날이었다. 여름방학 중에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 가장 자주 한 데이트가 그거였다. 정규연습이라면 정해진 교시 안에 끝이 나지만, 사적인 훈련에는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어 주지 않는다. 둘 다 지칠 대로 지쳤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져 깜깜했었다. 카츠키는 메뉴야 뭐가 됐든 뱃속에 뭐라도 얼른 넣는 게 급선무라는 효율적인 판단을 내렸고, 가까운 길에서 가장 음식이 빨리 나올 만한 식당은 우동집이었다. 그 얼마나 이성적인 귀결이었냐?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네. 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얼얼하다는 마라우동 신메뉴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토도로키의 손을 잡아끈 것만이 아니다. 입김이 엉기도록 추운 날이어서 허기진 속에 따끈한 국물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단 말이다. 늦은 겨울밤의 우동이란 얼마나 몸을 흐뭇하게 덥혀 주는가? 몸의 절반이 냉소바로 이루어진 토도로키라도 잘 먹을 만한 맵지 않고 달달한 우동 종류도 많았고. 아주 적절한 메뉴 선택이었다. 그리고 토도로키는,

2. 그러자고 했다. 아주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이 깨지지 않은 표정으로. 이게 야마가 돌아 버리는 점이다. 왜 제때 말을 안 하지? 토도로키는 로보트처럼 기계적으로 젓가락과 입을 왕복운동시켜 순식간에 우동을 끝장냈다. 카츠키도 그릇에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허기를 면하기 바빠 뭔가 문제가 있다는 낌새를 하나도 못 챘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토도로키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긴장해 있었다. 카츠키가 훈련을 복기하자고 해도 묘하게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올려진 주먹을 이유 없이 쥐었다 풀었다 했는데. 그래서 그랬나⋯⋯ 싶었을 때는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 방 배정을 새로 받아 카츠키와 토도로키는 같은 층이 되었다. 그래서 층마다 있는 공용 샤워실 겸 화장실도 함께 썼는데 사실상 둘만의 욕실이 되었다. 둘의 연애가 무르익어 갈수록 역시 같은 층인 세로와 오지로가 슬금슬금 아래층을 이용했기 때문인데, 반땡 자식은 타고나길 바보라서 의아해하는 것 같지만 카츠키는 한치의 불만도 없다. 잔챙이 모브들도 가끔은 기특하게 눈치가 빠르다.

여하간 그래서 훈련의 노곤함을 안고 기분 좋게 샤워하러 들어갔는데 구역질 소리로 산통을 와장창 깰 만한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가슴이 선득해지며 피가 싹 식었다. 걸어잠긴 문과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모른다. 문짝을 폭파한다고 협박하면서 셋 둘 하나를 세고서야 토도로키는 열어 주었다. 변기에 머리통을 처박은 토도로키에게선 이상한 점 두 개가 단박에 눈에 띄었다. 둔해빠진 멍청이들, 대표적으로 토도로키 본인이라면 눈치를 못 채고 단순한 소화불량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카츠키의 예리한 눈썰미를 피하지는 못한다. 하나는 토도로키가 아주 침착했다는 것. 이마가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맺힐지언정 놀란 기색이라곤 없이 되려 이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듯한 게 어찌나 불길한지 카츠키의 목 뒤 솜털이 쭈뼛 곤두서고 말았다. 둘째는 토도로키의 몸이 우동가락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불결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반발하는 방식. 다 뱉어내고도 토도로키의 위장은 꺽꺽대며 끝의 끝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카츠키는 꼬박 한 시간을 쭈그리고 등을 두들겨 주어야 했다.

그리고 취조 시간이 도래했다. 네놈 밀가루 알레르기라도 있는 거냐, 그래서 그렇게 메밀 소바만 찾아댔냐? 훈련에서 카츠키한테 어디를 잘못 맞았나? 설마 무슨 큰 병에 걸렸는데 지금껏 숨겨 왔냐? 바른 대로 불지 않으면 리커버리 걸과 아이자와 앞으로 즉각 연행한다. 토도로키가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어깨를 붙잡고 따져 물으니 토도로키는 카츠키가 물러설 기미가 없는 걸 보고서 그제야 알려 주는 것이다. 

“우동은 원래 이래.” 그리고 더 설명할 의지를 잃어서 카츠키가 “아앙?!”을 스무 번은 내지르게 만드는 번거로운 자식. 결국은 알아냈다. 극도로 뜨거운 음식을 그대로 삼키면 열 내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엔데버가 늘상 펄펄 끓는 음식, 그리고 본인이 만들 줄 아는 음식을 먹였다고. 그 교집합이란 자주 인스턴트 우동이었다. 쑤셔넣고 나면 곧장 출력 훈련에 돌입시켰다. 너네 아버지라는 작자는 소화가 되기도 전에 몸을 혹사해서 게워낼 정도로 애를 몰아붙인 거냐고 카츠키가 다그쳤더니 토도로키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귓가를 긁적였던 것 같다. 그럴 때도 있었고, 아니면 아버지가 던진 물건에 배를 맞아서. 가끔은 물건이 아니라⋯⋯. 그 다음은 카츠키의 귓가에 새하얗게 피가 끓고 있어서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쯤에서 토도로키가 먼저 말을 멈췄던 것 같기는 하다.

이 머저리. 멍청한 놈. 어떻게 이런 말을 이제야 하지? 그런 걸 내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냐? 따지니 토도로키는, “너 때문이 아니니까?” 그러기나 했다. 별로 힘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토도로키가 겪어야 했던 일들에 비하면 구토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저절로 마른세수가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얼굴을 감싼 손바닥 안에서 카츠키는 퍼뜩 두려워졌다. 계속 떠들게 놔두면 다음은 보나마나 카츠키에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등골에 소름이 팍 돋았다. 그래서 토도로키를 질질 끌고 나가 입을 헹구게 시켜서 일차로 말을 못하게 한 다음 촉촉해진 주둥이를 꽉 잡아 버렸다. 

그래, 반땡 넌 좀 미안해도 싸다. 천 번을 미안해도 모자라지. 반쪽짜리 멍청이라서 미안함의 포인트를 잘못 짚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안 알려 주냐고. 알았으면 “난 토우야 형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걸”에 카츠키가 “보나마나 펄펄 끓는 우동일 거야” 같은 대답을 했겠냐고! 하아⋯⋯. 사람을 스무스하게도 개새끼로 만드는 자식. 토도로키의 입술을 틀어쥔 채로 카츠키는 남은 손으로 또 얼굴만 의미 없이 쓸었다. 그런데 잠깐만. 그럼 거기다 대고 토도로키는 “같이 먹어 줘야지” 했던 건가? 와⋯⋯. 이거 또라이였네⋯⋯. 내 남자친구가 또라이라니⋯⋯. 

아니, 상식적으로 우동을 조심해야 할 거라고 누가 생각해. 우동은 전국민이 사랑하는 무해한 음식 아냐? 토도로키는 그냥 무난하게 멀쩡한 놈 같다가도 꼭 한번씩 카츠키가 살얼음 위를 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이곳은 오직 카츠키에게만 살얼음판이라서 진실로 황당하다. 정작 본인은 시몬스 침대의 안정감(에이스 침대가 아닌 이유: 에이스는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로 유일무이하니까)을 터득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올라섰다. 카츠키가 알고도 치부를 찌르면 아마 토도로키도 평정을 잃겠지만 그런 적은 없어서 모르겠다. 몰라서 악의 없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토도로키는 화를 내지 않는다. 카츠키를 참아 주는 게 아니다. 정말로 토도로키의 내면에서는 그 정도의 일로 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카츠키는 참질 못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절망적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3. 당연히 초장부터 틀려먹었지. 엔데버가 쟤를 어떻게 키웠을지 불 보듯⋯⋯. 제길, 불 보듯 같은 말도 쓰지 말아야 할 것 같잖아! 하여튼 안 봐도 뻔하다고. 깨어 있는 시간은 거의 개성 단련에 꼬라박았을 테니 토도로키의 문화적 경험이 일천한 것도 당연하다. 훈련 말고는 뭘 하긴 했냐고 본인에게 물으면, “음⋯⋯. 집 근처에 길고양이가 산 지 꽤 됐거든. 두 마리. 누나랑 내가 돌아가며 츄르를 준다. 아, 지난 주말에는 나츠 형이랑 낚시 했어.” 자못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니까 남들 다 뻔질나게 드나드는 영화관(키오스크에서 예매하는 게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토도로키는 카츠키의 어깨에 턱을 얹고 휙휙 넘어가는 화면을 구경했다. 레몬 소다도 마시고 팝콘은 세 가지 맛 콤보로 골랐다. 토도로키가 카라멜 팝콘에 반해 버릴 줄 알긴 했는데 진짜 그랬다. 어떻게 건치를 유지하는 거지? 처음 같이 본 영화는 히어로 액션이었다. 무난하게 둘 다 좋아할 장르로 카츠키가 골랐다. 그다음 영화관 데이트에선 공포영화를 봤는데 점프 스케어마다 토도로키가 “오”하고 움찔해서 카츠키가 키득거리는 바람에 관람객 전체의 원성을 샀다. 그럼 반땡이가 저러는데 안 웃고 배기냐? 웃어야 할 때만 더럽게 엄숙한 잔챙이들⋯⋯. 그다음엔 토도로키가 로맨스인 줄 모르고 골라 온 로맨스였다. 보고 나온 직후에는 어쩐지 토도로키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는데, 그날 밤에는 둘이서 카츠키의 방에 누워 열심히 영화 흉내를 냈다.)도 놀이공원도(토도로키는 입장 대기줄부터 “이거 좀 두근거리는데.” 그랬다. 네놈의 정신연령은 에리 정도일 거라고 카츠키가 툴툴거리자 토도로키는 “에리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해” 따위 진지한 대답이나 했다. 손목에 입장권 종이 팔찌를 끼고 제일 먼저 타러 간 건 범퍼카였다. 반땡이는 이상한 부분에서 평화주의자라, 기세 좋게 추격해서 들이박는 기구라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갸우뚱거렸다. “바쿠고 너를 들이박고 싶지는 않아.” 규칙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카츠키는 봐 주지 않았다. 세 번을 내리 박혀서 차에서 튕겨져 나올 뻔하고서야 토도로키는 깨닫고 복수극을 시작했다. 대체로 카츠키처럼 현란한 코너링 재간은 없었지만 힘을 휘두르는 난폭운전으로 몇 번은 정말 얼얼할 만큼 충격이 왔다. 둘 다 호승심이 평균 수준은 아닌지라 역시나 과열되어 데이트 분위기가 초반부터 망할 뻔했는데, 계피가루를 뿌린 츄러스에 밀크쉐이크를 먹으며 화해했다. 간식 부스 옆에서 미니마우스 머리띠를 사서 서로 너 쓰라고 옥신각신하다가 토도로키가 졌다. 대신 카츠키는 커다란 구피 인형탈과 셋이서 사진에 찍히는 굴욕을 맛봤다. 절대로 그런 바보짓이 좋아서가 아니다. 반땡이가 어머니한테 보여드리고 싶다고 순박한 눈망울로 가불기를 쓰는데 올포원 할아버지가 와도 그건 거절 못할 걸? 롤러코스터는 네 개가 있었다. 낙차가 나이아가라 폭포급이라는 유명한 거하고 탈수기처럼 빙빙 돌리는 걸 탔다.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질주하는 개성을 가진 카츠키 쪽이 전반적으로 멀미가 없어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토도로키는 내려서도 빙빙 원을 그리며 걷는 게 웃겼다. “하우저 임팩트 쓸 때랑 방금이랑 비슷한 느낌이냐”고 묻길래 어딜 얕보냐고, 하우저 임팩트가 넘볼 수도 없게 빠르고 강력하다고 알려 주었다. 사실 조금은 비슷했지만. 그 다음엔 뭐였냐고? 석양과 관람차와 첫 입맞춤.)도 토도로키는 전부 카츠키에게 와서야 처음 겪은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들여 가며 즐거워하는 거 같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는 제대로 모르겠다. 토도로키를 표현이 강렬한 사람이라고 하긴 힘드니까. 

아니면 설마? 표현의 폭이 작다는 문제가 아닌 건가? 정말로 내면에서 좋음이 세밀하게 분화되지를 않은 거 아냐? 모든 게 그냥 소바 좋은 정도에서 잔잔히 왔다갔다 하는 거면 어떡해. 이건 뭐 카츠키가 아무리 용을 써 본들 ‘좀 특별한 소바’, ‘꽤 괜찮은 소바’, ‘하지만 소바는 다 괜찮으니까 결국 그냥 소바’ 수준인 거 아니냐고. 따졌더니 토도로키는 공상에 빠졌다. 

“⋯⋯바쿠고맛 소바.”

그윽한 목소리가 울렸다. “⋯⋯좋은걸.” 그러면서 토도로키는 혼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얼간이같이 미소나 짓는 거다. 카츠키를 단번에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웃음이었다. 이건 승부조작이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자식! 비열해! 비열한 토도로키 쇼토!

4. 런치러시 카페테리아에 별미가 끝도 없이 있는데 그저 차가운 소바만 매일매일, 점심에도, 저녁에도, 가끔은 아침에도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토도로키와 사귀기 전부터도 간파했던 특징이다. 이 자식은 단조로움이라는 걸 모른다. 지겹다는 개념을 아예 이해를 못 한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지도. 뭐 하나가 좀 흡족하다 싶으면 질리지도 않고 그것만 찾는다. 연애한 후로 그건 카츠키가 토도로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유념해야 한다는 걸 뜻했다. 시간을 돌린대도 여전히 입술을 연인의 얼굴에 갖다 대는 법을 알려 주었을까? 우동 참사 날의 늦은 밤이었다. 눈밑이 퀭해진 토도로키를 카츠키의 방으로 끌고 왔고, 자정이 넘도록 대화를 했지만 다시는 우동은 없으리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합의에 이르지 못해 답답했고. 아무리 뉘어 놔도 잠들지를 못하는 꼴을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이마에다 입을 맞췄는데.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지 토도로키가 떨면서 바쿠고의 손등에 입맞춤을 돌려주던 순간의 마법은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지만, 그래서 그게 무슨 마법이었는지는 다소 후회해 봄직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토도로키를 뽀뽀귀신으로 만드는 마법이었다. 이거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다음날 아침에 토도로키는 카츠키가 한 것처럼 이마에 입술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그날 저녁엔 민소매 옆으로 드러난 어깨 삼각근에, 별로 안 조심스럽게. 그 길로 토도로키는 호시탐탐 카츠키의 맨살이 주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가끔은 입맛까지 다시길래 잘못 본 줄 알았다. 키 차이를 남용해 정수리에다 뽀뽀할 때는 어쭈 싶었지만 간지럼을 잘 타는 목덜미에다 보복해 주면 되는 일이다. 토도로키가 한 번 뽀뽀할 때 카츠키가 세 번 하면 어쨌든 카츠키가 이기는 거고. 둘이 벌이는 일이란 승부의 양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러다, 아직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데, 토도로키가 응용력을 발휘해 버리고 만다. 얼음에 더해서 불이 깨어나듯이 토도로키의 공격은 새로운 국면으로 개화한다. 입술은 살포시 얹는 것이 아니라 빨아먹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걸, 그 안쪽에는 치아도 있다는 걸⋯⋯. 아니, 이마에 젠틀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쳤지 언제 귓불을 핥아먹다가 깨물라고 가르쳤냐? 카츠키는 “혹시 미쳤냐”는 말을 추임새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자주 묻게 된다. 마주앉아 식사할 때마다 카츠키를 유난히 지그시 본다 했더니 교복 셔츠 목깃이 어디까지 가리는지를 가늠하는 거였다. 도대체 간댕이가 얼마나 부은 것인지? 쇄골 반 뼘 아래 영역표시를 당할 때마다 카츠키는 고뇌한다. 엔데버도 후유미도 나츠오도, 얼핏 본 토도로키 레이조차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이놈의 스릴 추구는 또 어디서 온 거냐? 아. 아⋯⋯. 젠장할. 토우야 그 새끼는 대체 왜 토도로키여 가지고.

내로라하는 명문 유에이에서 영 덜떨어진 놈을 뽑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아주 개탄스럽다. 어떻게 된 애가 분명 바보가 맞는데 또 맘만 먹으면 그렇게 지능적일 수가 없다. 토도로키는 신사적이고 쿨하다는 평판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착각하는 놈들은 단체로 뇌를 상실한 것이다. 입이 뚫렸으면 말 좀 해 보시라, 여름에는 “방학이라 다 집에 갔으니까 조금 더 할래”와 겨울에는 “목도리 할 거니까 조금 더 할래”의 어디가 신사적이고 쿨한 것인지? 이 전대미문의 해괴한 우롱에 대하여 카츠키가 어떤 앙갚음을 해 줬는지는 노코멘트하겠다.

5. 군말 없이 우동을 삼키기로 정했으면 끝까지 완벽하게나 삼키든지. 할 거면 티 내지나 말고 하든지. 못하겠으면 때려치우고 내 앞에서 무너지든지! 꾸지람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어느 기분 안 좋은 날에 실수로 그대로 뱉을까 봐 카츠키도 스스로가 못 미덥다. 토도로키가 들키는 것은 어설프게 속을 까발려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이유다. 집안 사정에 정신을 파느라 다른 곳에서 에너지를 절감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1학년 A반 교실에서 처음 마주치던 날부터 그런 녀석이었다. 눈에 안 띄는 맨 뒷자리를 골라 앉아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냉담하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누가 말 한 마디 거는 것조차 미리 차단해 놓겠다는 태도였다. 이제 카츠키는 안다. 그때의 토도로키에게는 대답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거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봉화를 돌볼 수는 없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긴 것도, 표정과 말수가 적은 것도 비슷한 연유였을 것이다. 그게 전부 토도로키의 타고난 성정은 아니다. 어쩌면 메뉴 고민을 하지 않고 소바만 먹는 것도 그런 걸지도⋯⋯. 한번 그런 생각까지 들기 시작하면 견딜 수가 없다. 이 반땡이 자식이, 똑바로 안 해? 계속 그러면 기껏 히어로명에서 토도로키를 뺀 보람이 없잖아. 

한때는 그런 생각이 극심해져서 훈련에 임하는 토도로키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던 적도 있다. 얼음으로 성채를 올리거나 불의 구체를 가지런히 빚는 토도로키는 가끔 무감각한 인형처럼 보였다. 엔데버가 원했던 대로 개성에 바쳐진 인형. 토도로키가 기예를 갈고닦는 데 몰두하는 건 그게 삶으로부터 가장 멀리 유리된 활동이라서가 아닐까? 얼음과 불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기 때문에? 카츠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것이 카츠키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비웃음이자 도전장으로 느껴지며 가장 생생한 삶을 마구 선물하고 싶어진다. 가면허 강습 때 아이들의 맑은 웃음과 문화제의 왁자지껄한 함성과 사월 벚꽃의 향기부터 관람차 차창으로 스며들던 아찔한 노을까지 토도로키의 방향으로 전속력을 실어 내던지고 싶다. 그래서 반땡도 자신의 삶은 공허하지 않았노라고,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들을 받아 보니 좋았더라고, 언젠가 눈을 감을 때⋯⋯ 하? 반땡이 죽을 수도 있는 세상? 미쳤냐? 그런 건 없다. 당장 뇌 외과나 예약하길.

6. 그 문제에 있어서 카츠키는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단언하는데 반땡은 어디 가서 처맞고 뒤지기나 할 놈이 아니다. 이유야 간단하지. 어디 가서 처맞는 실력이 아니니까. 가끔은 카츠키마저도 감탄이 잇새로 새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생각하니까 개빡치려고 하네. 목에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오브 스매시가 들어와도 저놈이 나만큼은 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진 못하겠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하는 수 없나. 이 자리에서 딱 한 번 말하고 끝내겠다. 토도로키는 잘났다. 그게 안 보인다면 눈깔이 삔 거다. 안타깝지만 카츠키의 눈깔은 멀쩡하다. 

세 번의 체육대회 모두 토도로키를 결승 상대로 만났다. 2학년 체육대회는 토도로키가 손쉽게 우승했다. 카츠키가 재활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고 해서 형편없었던 경기 내용의 핑계가 되지는 않는다. “정말 괜찮겠나, 바쿠고?”하고 갸웃거리길래 이보다 더 괜찮았던 적이 없으니까 일 학년 때처럼 대충 할 꿈도 꾸지 말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더니만, 토도로키는 진짜 대충 안 했다. 카운트다운이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뻗어나온 얼음이 카츠키의 손바닥에 막을 씌웠다. 통 말을 안 듣게 된 왼손을 예열하느라 애를 먹는 사이 까마득한 천천빙벽이 솟아났다. 토도로키의 얼음은 일 년 새 부쩍 섬세해져서 벽의 어느 지점은 거울을 만드는 유리판처럼 얇고 또 어디는 어지간한 장정의 키만큼 두꺼웠다. 카츠키가 무작정 벽에 탄환을 쏘아 깨뜨리면 파편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헹, 그 정도는 대번에 꿰뚫어보는 다이너마이트 님이시다! 카츠키는 가장 약한 곳을 노려 폭속 터보로 단숨에 뚫고 들어갔다. 근접전이 가능한 거리에 도달하자마자 카츠키는 땀방울의 크기를 미세 입자 수준으로 줄였다. 불로 증발시키는 것이 얼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도록. 얼음과 불을 같이 쓰게 만들어야 했다. 도깨비불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최고였다. 토도로키가 지닌 기술의 약점은 대부분 체력 소모에 있으니 장기전으로 끌고 갈 심산이었다. 

다만 덜 회복된 카츠키의 몸이 먼저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다. 토도로키에게 초소형 폭파 탄환들로 된 클러스터를 난사하고 난 다음의 기억이 없다. 시상대에서 카츠키는 또 한번 말뚝에 쇠사슬로 묶였는데, 게다가 일 등도 아니라니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올마이트가 토도로키의 목에 걸어 주는 금메달을 노려보며 카츠키는 이를 악물었다. 무려 일 년이나 설욕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사귀게 되었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마지막 대회는 다시 카츠키가 이겼다. 하지만 쌓아온 기대가 시원하게 충족되는 기쁨까지는 아니었다. 애인에게 영광을 양보하고 싶다느니 하는 나약한 이유였냐고? 그럴 리가 있냐? 역시 압승과는 거리가 먼 아슬아슬한 승리였기 때문이다. 일 년간 카츠키만 재활에 피땀을 갈아넣은 게 아니고 토도로키도 성실히 훈련해 왔기 때문에 길고 치열한 접전이었다. 반땡 녀석은 데쿠에 비하면 전술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카츠키나 호네누키처럼 돌발에 유연하게 대응하지도 못했었는데, 그걸 다 개선해서 거의 파훼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만하면 프로가 되어 전장에 뛰어들 때 카츠키가 그럭저럭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 점 하나는 내심 기꺼웠다. 가장 통쾌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날 토도로키는 불을 먼저 꺼냈다. 카츠키를 상대로는 처음이었다. 

득의양양해진 카츠키는 정문으로 뛰어나가 ‘(경)바쿠고 카츠키, 토도로키 쇼토를 정복하다(축)’ 플래카드라도 내걸고 싶었지만 일어나 앉으려고 해도 팽랭열파에 얻어맞은 허리가 쑤셔서 뒤척이며 신음하는 게 고작이었다. 리커버리 걸이 혀를 끌끌 찼다.

“너희들은 정말 곱게 싸우는 적이 없구나. 언제쯤 얌전해질 거니?”

“들었지, 바쿠고? 얌전해져라.”

토도로키가 커튼을 걷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본인도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리는 절뚝거리는 주제에.

“뭘 이래라 저래라야? 반땡 너나 얌전히 누워 있어.”

“기분 좋아 보이네. 그렇다면 됐다.”

“아앙? 그건 뭔 말인데? 봐 줬다는 투잖아.”

토도로키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어. 그러니까 네가 이겼지.”

카츠키가 대뜸 “네놈이 허접이니까 털린 거지, 어디서 입만 열면 개소리를? 이의 있으면 당장 그라운드 베타로 따라와라! 재시합은 얼마든지 받아 주지!” 역정을 내도 토도로키의 즐거운 웃음기는 가실 줄 몰랐다. 어쩌다 이런 놈에게 코가 꿰였지? 토도로키 쇼토 최고의 재주는 과연 반랭반열인지 아니면 카츠키의 복장 뒤집기인지를 놓고 카츠키는 온종일 고민했다.

7. 토도로키가 잘났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히어로로서의 능력 한정이다. 다른 영역에선 백치가 따로 없어서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간다. 대표적으로 요리 실력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다. 뭐, 토도로키를 먹여 살릴 각오야 되어 있다. 똑같이 손 놓고 있었다간 카츠키가 먼저 굶어죽을 테니까. 아무튼 부추 (못) 썰기는 새발의 피였다. 또 뭐가 있냐 하면, 박자감각도 궤멸적인 수준이다. 문화제 때 무대 뒤에서 연출 일만 하느라 카츠키의 드럼 솜씨를 제대로 못 봤다고 아쉬워하기에 음악실로 슬쩍 데려가 주었다. 그럼 이제 “잘하는구나, 바쿠고”에서 자연스레 “나도 해 볼까”로 이어졌다. 카츠키가 목이 쉴 때까지 메트로놈처럼 타! 타! 타! 타! 입박자를 맞추며 맹연습을 시켰는데도 토도로키는 강 약 중강 약을 균등한 사박자로 치는 데나 겨우 성공했다. 부러진 스틱 네 개는 덤이다. 도대체 카츠키를 열받게 하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지? 이게 연애냐? 다마고치지. 

심지어 자전거도 타본 적 없다고 했다. 그럼 널찍한 호수공원에 데려가야지 뭘 어떡해. 그래도 체육만은 만능인 반땡이라 한번 뒤에서 밀어 주니까 바로 감을 잡고 페달을 밟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빡이 쳤다. 카츠키는 홧김에 토도로키의 자전거를 반납하고 이인용 자전거를 빌렸다.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 님이 선두에서 달리겠다고 하니 토도로키는 순순히 뒤에 탔다. 땀이 흐를 때까지 분수 주변을 빙빙 돌고 나팔꽃 만발한 산책로를 누볐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꼭 자기를 닮은 딸기랑 바닐라 회오리를 무념무상 할짝이는 모습이 웃겨서 잔뜩 연사한 사진이 아직도 갤러리에 즐겨찾기로 되어 있다. 어쩌면 그렇게 어린애 같은지 모르겠다. 그냥, 정말로 안쓰럽게 덜 큰 데가 있는 놈이다. 기숙사를 뺄 날이 슬슬 다가와서 카츠키는 졸업하고 들어가기로 한 지니스트 사무소 근처로 자취방을 구했는데 쇼토는 집주인만큼이나 자주 그곳에서 굴러다녔다. 목욕하러 들어가 놓고 감감무소식이길래 문을 반틈만 열어보면 욕조 속의 쇼토는 입술을 수면에 대고 부- 부- 불어대는 놀이에 열중해 있다. 보글보글 유치한 거품이 물 위에 흩어진다.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어 쇼토의 눈과 흉터를 뒤덮고 있는 걸 보노라면 카츠키의 가슴 속에서도 정체불명의 물결이 포말을 보글거리며 뒤섞인 다음 쓸려나간다. 그 자리에 남는 건 어떤 오기 그리고 치기다. 오오냐. 네가 어린시절을 빼앗겨서 뒤늦게 어린애 짓을 해야겠나 본데 내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바쿠고 카츠키의 사전에는 곤란함도 어려움도 없으니. 빼앗아간 게 그 누구(☜1번으로 돌아가시오)라 한들, 심지어 올마이트나 올포원이었다 해도 그들 모두의 머리꼭대기에 군림하는 이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 님께는 티끌만큼의 문제도 못 되노라. 고무 오리도 사다 주고 놀이터에서 그네도 밀어 주고 엔데버가 못하게 한 공놀이도 맘껏 함께해 주마, 하는 말이 탄산 거품보다도 빠르게 수면으로 솟구쳤다. 물론 생각만 하고 끝난다.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좀 그런 말만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반반의 멍청이.

8. 그런 반반의 멍청이에게 줄 수 있는 건 다 주기로 했다. 천하의 바쿠고 카츠키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쇼토한테 좋기만 하다면야 쇼토는 카츠키가 져 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이 반땡이 자식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앙?! 뭐 그래 봤자 카츠키가 봐 주는 거고 사실은 이기는 거다. 하지만 사실⋯⋯. 지는 거래도 상관 없다.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었는데 다들 반대로 쇼토가 카츠키한테 져 주고 산다고 착각해서 참으로 엿 같다. 카츠키가 그들을 부르는 호칭은 장장 삼 년에 걸쳐 ‘모브들‘에서 ‘3-A’로 승격되었다. ‘플랑크톤들’로 재조정된 것은 졸업 파티 직후였다. 플랑크톤들 왈 모처럼 기분을 내야겠다나 뭐라나 기숙사 휴게실이 아니라 십시일반 모아서 섭외한 파티룸에 반땡과 둘이서 따로 조금 늦게 갔더니 절반은 그림 좋다고 환호하거나(키리시마) 글썽거리고(데쿠), 절반은 주스 맛 떨어진다고 야유했다(세로, 플랑크톤 S, 플랑크톤 M). 카미나리는 말하기를 “뭐 하느라 이제 와? 아니 됐어. 그냥 말하지 마.”

키리시마들과 할리갈리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에 어느 순간 플랑크톤 떼가 쇼토를 채가서 둘러쌌다. “저기, 토도로키 군. 바쿠고가 그래도 잘 해 주는 거 맞지? 맨날 싸우고 막 그러는 거는 아니지?” 곧 “가끔 싸우긴 하지만 괜찮아” 하는 쇼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 어이 어이! 전혀 안 괜찮게 들리잖냐! “토도로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라. 내 엔진으로 어디든 달려가겠다!”에 오긴 뭘 오냐고 영원히 꺼지라고 해야지, “고마워, 이이다”라고 하는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딨냐!

“그래도 어둠이 짙어진 것은 감지되지 않는군. 어둠이 걷히기 전 1학년 때의 너도 난 꽤나 보기 좋았다만.” “그래?” “다크 섀도우가 반에서 널 가장 친근하게 여겼었지. 반대로 바쿠고는 꺼려했고.” “아아.” 

아아는 얼어 죽을 아아.

“그러고 보면 가면허 강습 때도 카츠키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있었지. 벌써 이 년도 넘었구나.”

“너한테는 화 많이 안 내지?”

“화 낸다.”

“아이고야,”

플랑크톤들이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가여워했다.

“어떡하냐 토도로키⋯⋯.”

제일 뚜껑 열리게 하는 장본인은 다름아닌 반땡이었다. 거기다 대고 “난 괜찮다”라니 정정할 의지가 한 톨도 없잖냐! 참다 참다 들어 줄 수가 없어진 카츠키는 도끼눈을 뜨고 반땡의 테이블로 옮겼다. 팔을 휘휘 저어 플랑크톤들을 쫓아보냈다. 마신 거래 봐야 딸기 주스면서 반땡은 광대부터 목까지 발그레해져 있었다. 이 자식은 생일도 늦게 돌아오니까 카츠키보다 거의 한 해가 더 지나서야 술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느려터진 반쪽이 같으니. 

옆자리를 꿰차고 앉으니 쇼토는 카츠키의 어깨에 고개를 툭 떨구며 하품을 했다. 차마 큰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이 시국에 잠이 오냐? 그따구로 말하면 내가 네놈을 꽉 잡고 사는 걸로 착각하잖아!”하고 고함을 죽여서 속닥댔다. 그랬더니만 “잡고 사는 게 싫어? 그럼 잡혀 살아도 된다, 카츠키.” 이러면서 의기양양 웃기나 한다. 날마다 어이 없음이 갱신되네⋯⋯.

반땡의 웃음과 눈물과 잠엔 전염력이 있어 새집으로 돌아와서는 카츠키가 먼저 잠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꿈에서도 반땡을 만났다. 거 정말 한 시도 쉬게 해 주질 않는다. 꿈에서 쇼토는 고양이가 되어 있었는데, 한쪽 귀와 눈가가 붉고 꼬리 끝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어 누구라도 쇼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카츠키에겐 그런 힌트조차도 필요 없었지만. 이제 와서 반땡을 못 알아보기엔 너무 길고 깊은 시간이 지났다. 쇼토가 했다던 것처럼 츄르를 먹여 주고 싶어져서 두리번거렸지만 카츠키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다. 노르스름한 빛이 따뜻한 공간에 카츠키와 쇼토 단둘이 있을 뿐. 쇼토는 다른 게 없어도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듯 우아하게 걸어오더니, 카츠키의 손끝을 까슬까슬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새침하게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떠나간 허전함이 너무나 커서 깨어 보면 쇼토는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옹송그리고 있어 꿈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몽환에 젖게 했다. 옆구리에다 살짝 손을 얹었더니 꿈속과 똑같이 멀어지며 침대 밖으로 데굴데굴 떨어지려 한다. 침대가 아니라 다다미에 요를 깔고 자던 녀석이라 동서남북을 모른다. 카츠키는 민첩하게 쇼토의 어깨를 끌어안아 잡아당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쇼토가 품에서 끙끙 잠투정을 앓았다.

반쪽이의 반쪽 됨으로 인해 카츠키는 설명하기 힘든 어지럼증을 느낀다. ‘침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반쪽이 끌어올리기’ 같은 활동은 카츠키가 야심차게 유에이 교문에 입성하면서 그리던 눈부신 미래의 청사진에는 없었다. 반 배정이 잘못된 거였다. 1학년 B반에 갔어야 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지. 데쿠랑 갈릴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가면 토도로키 쇼토라는 애가 있다는 말을 아무도 안 해 주다니? 완전히 입학 사기 아니냐? 안 되겠다. 유에이를 고소할 것이다. 카츠키는 머릿속에 고정해 둔 내일의 할일 목록 꼭대기에다 ‘경찰서가 열자마자 고소장을 일 등으로 접수’를 커다란 글자로 적었다가,

9. 반땡이가 카츠키의 목에다 꼼실꼼실 얼굴을 비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운다. 야오요로즈가 집들이 선물 겸 커플템으로 사 준 네이비 색 실크 잠옷에 포옥 안긴 반땡은 갓 구워진 빵처럼 따끈따끈했다. 골격이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데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깨어나는 기척에 스탠드를 켜 보니 카츠키를 담은 두 눈동자가 서로 다른 색으로 나른해한다. 카츠키는 엄청나게 말랑한 볼에다가 입술을 지분거려 본다. 피하지방의 절반은 뺨에 있는 것 같다.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묻지 마라, 잔챙이들.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만이 비밀리에 조물딱거려 볼 수 있다.) 

“카츠키.” 쇼토가 더 바짝 다가붙으며 웅얼거린다. 반쯤 잠긴 목소리에 카츠키의 등허리에는 낮은 불이 번득인다. 그런데도 올마이트 동상에 맹세코 볼뽀뽀에서 멈췄구만 카츠키가 뭘 울렸다고, 왜 늠름한 예비 프로 주제에 속눈썹에 청초하게 이슬이 맺히지? 

“왜 키스가 아냐? 카츠키.”

그럼 또 일찍이 유에이 진학을 결심했던 유치원생 바쿠고 카츠키가 기특해 죽을 지경이 된다. 이거 진짜 단단히도 잘못되어 가는 거다. ‘왜 키스가 아냐’라니 장난하냐, 반땡? 아앙? ‘위대하신 다이너마이트 님께 미천한 소인이 감히 키스를 부탁하여도 되겠사옵니까’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그런데도 예쁘다니. 카츠키의 살결이 닳아 반질해지도록 뽀뽀나 하고 하루종일 고무 오리를 뺙뺙거리며 물장구나 치고 앞으로 평생 삼시세끼를 소바만 먹겠다고 쇼토가 떼를 쓴대도 아이고 네 말이라면 다 예쁘다고 들어 주기 직전까지 카츠키는 핀치에 몰리고 만다. 반땡이가 아무리 터무니없는 반쪼가리 짓을 한대도 그저 피실피실 웃음만 새는 게 도대체 어딨냐고! 위험하다고! 대폭살신 님의 판단력이 자꾸만 궁지에 빠진다니까! 아아, 거지 같아! 빨리빨리, 맹랑한 반쪽이보다 다이너마이트 님께서 서둘러 입술을 공략해서 어서 이 열불을 풀지 않으면

10. 그런데 반땡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키스 실력이야말로 극한의 패러독스로서 그것은 언제나 카츠키를 태양보다 더 불타오르게 하는 것으로

(이 지점에서 지진파 기록계의 바늘이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태양열에 이성이 전부 휘발되어 바쿠고 군의 머릿속 기록소에서도 뇌세포들의 근무가 중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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