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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아카 조각글들

🎶 by A

트위터에 올렸던 단문 2개 백업합니다. (서너개는 쌓아서 올려놓고 싶었지만 한동안은 이 정도 토막글을 안 쓸 듯한 느낌이 오다)

프로히어로 바쿠토도 희망편 (2024.9.30)

하늘에 바람이 시냇물처럼 흘러가며 구름을 한쪽으로 내몰았다. 눈부시던 새파란 빛이 잔잔해져 말 그대로 물빛이었다. 쇼토는 언제부터 구름 구경을 좋아했던가? 카츠키와 나란히 돌아오는 길마다 하늘이 아름답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바람의 머리에는 연회색의 용맹한 구름이 하나 서 있었다. 흡사 의젓한 목양견 같았다. 구름 가장자리가 송곳니처럼 뾰족거리는 게 완전히 카츠키였다. 앞에서 작고 폭신폭신한 양들이 하늘의 절반을 뒤덮으며 쫓겨 갔다. 양들도 생김새가 딱 카츠키였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것 같은 머리카락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뿌리가 곱슬거리니까. 아침잠 없는 카츠키가 식탁에서 조는 쇼토에게 매일 내려 주는 커피에 우유를 부으면 바로 저 양들처럼 몽글해지곤 했다.

이내 노을이 냇물을 깊은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하늘 가득히 색 진한 벚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옆에서 걷는 카츠키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관할 지역이 넓게 겹치는 덕에 순찰을 자주 함께할 수 있었다. 긴 하루가 지나갔고, 다리도 머리도 기분 좋게 피곤했다. 카츠키라면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의 사전에 ‘피곤‘처럼 나약한 단어는 없으므로 방금 깨어난 것처럼 쌩쌩하다고 펄쩍 뛰겠지만 실상은 딱 쇼토만큼 노곤해져 있을 것이다. 쇼토는 자신이 카츠키의 상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는 게 내심 즐거웠다. 카츠키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아마도 단순한 소바와 다디단 잠이 기다린다는 것도. 카츠키는 아직도 바지를 좀 헐렁하게 입었는데, 사실은 쇼토 바지라는 건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찻길 쪽으로 걷기를 고집하던 카츠키는 딴청을 부리는 척 쇼토의 왼쪽으로 이동했다. 핑크빛 하늘을 한 번 보고, 쇼토의 왼뺨을 한 번 보았다.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쇼토는 쇼토 나름대로 바빴으므로 카츠키가 마음껏 바라보게 내버려 두었다. 한번 구름을 의식하고 나니 모든 게 카츠키를 닮아 보여서 쇼토는 허둥지둥 두리번거렸다. 다리를 건널 때는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이 카츠키의 폭파에 따라다니는 찬연한 빛 알갱이 같았고, 횡단보도에서는 유치원생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데 마치 빌런을 멋지게 퇴치한 카츠키의 득의양양한 웃음소리 같았다. 길가 카페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 시원한 밤의 드라이브에서 카츠키가 틀어 주었던 곡이었다. 카츠키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해서인가? 쇼토도 들을수록 좋아하게 되었다.

언제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카츠키였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그 안에 들어가나?

카츠키는 쇼토의 왼뺨에 뜻 모를 기호를 그리듯 손끝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쇼토는 카츠키의 팔을 붙잡고 도로반사경 앞에 멈춰세웠다. 볼록거울에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비쳤다. 날카로운 눈매, 피로에 짙어진 쌍꺼풀, 단련된 어깨.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오랜 시간 서로 바라본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비슷한 표정.

“혼자 뭘 깨우쳤다는 표정이야, 반땡.”

“우리 원래 닮았어?”

카츠키의 체리사탕 같은 눈동자가 투명한 빛을 발했다. 핥아먹으면 혀가 아리도록 달 것 같았다. 아귀 힘이 들어간 손에 어깨를 잡힌 쇼토는 이끌리는 대로 순응했다. 도로반사경 뒤의 벽돌담을 돌아 들어가니 정겨운 느낌의 골목이 나왔다. 초저녁 그림자가 두 히어로를 호기심 많은 시선들로부터 숨겨 주었다. 이토록 비좁고 아늑한 곳에서만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시작되지, 쇼토는 생각했다. 스테인과의 조우, 합숙 후에 카츠키를 구출하려고 숨어들었을 때, 인턴십 중에 빌런을 추격해 들어갔던 골목들. 유에이 시절부터 대로변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었다. 카츠키는 한 손으로 쇼토를 벽에 밀어붙이고, 쇼토가 만만찮은 완력으로 역전하기 전에 키스했다. 속도에서만은 쇼토는 아직도 카츠키를 따라갈 방도가 없었다. 오늘의 키스는 기나긴 고단함을 잊고 꿈결에 떠밀려가게 하는 맛이었다. 거칠지도 그저 부드럽지도 않은 얼얼함이 노을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카츠키의 한 조각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시름이 녹아 사라졌다. 자신에게서도 똑같은 맛이 나리라는 것을 깨달으며 쇼토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금빛 속눈썹이 귀한 선물을 장식하듯 카츠키의 두 눈을 감싸고 있었다. 카츠키의 눈동자에 심홍색이 깃드는 것은 완연해지는 황혼이 부리는 마법이기도 했지만, 쇼토는 그 빛이 자신의 불이라는 걸 알았다.

쇼토 기저귀 가는 엔데버 (2024.10.3) *안 즐거움...

눈앞에 빽빽 우는 아기가 있었다. 코를 저절로 막게 되는 냄새를 풍기며. 순한 아기인 쇼토가 이렇게 울어젖히는 건 엔지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순한 아기가 아닌 건가? 레이가 지금까지 잘 돌봐서 그랬나? 아침부터 레이와 싸우지 말았어야 했다. 레이는 손가방 하나 없이 집을 뛰쳐나갔다. 엔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엔지의 불이 그녀를 태우고 있는 듯이... 오늘은 엔지의 비번이었다. 취미도 없고 친구 관계도 빈약한 그는 집이 아니면 별달리 갈 곳이 없었다.

쇼토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후유미한테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후유미는 이미 토우야와 함께 등교했다. 나츠오도 유치원에 가 있었다. 가정부가 올 때까지는 쇼토와 엔지 단둘 뿐이었다.

아기 울음소리는 아주 시끄러운 모기처럼 거슬렸다. 벽장을 한참 뒤져서야 새 기저귀를 찾을 수 있었다. 엔지는 훈련장 말고는 집안 수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쇼토의 기저귀를 열어 보니 무른 변이 흠뻑 묻어 있었다. 게다가 연두색이었다. 사람이 연두색 변을 볼 수 있나? 혹시 쇼토만이 가진 특출한 개성의 영향인가 싶어 엔지는 가슴이 뛰었다가, 신생아였던 토우야가 깜짝 놀랐을 때 비슷한 변을 보던 걸 떠올리고 흥분이 가라앉았다. 엔지가 가사와 육아에 관여하던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새 기저귀를 찬 쇼토는 눈물 젖은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맘맘 하는 소리를 내며. 배고프다는 뜻인가? 엔지는 토우야를 돌보던 신혼 시절을 되짚어 분유 먹이는 법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허둥지둥 싱크대에 든 젖병을 뜨거운 물에 헹구어서 눈대중으로 분유를 탔다. 고무 꼭지가 다가오는 걸 본 쇼토는 기대에 차서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한 모금을 먹이자마자 뱉어냈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울면서. 너무 뜨거웠나? 아니면 차가운가? 쇼토가 성공작이 맞다면 온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너무 걸쭉했나? 분유의 온도와 농도를 그런대로 맞출 때까지 대여섯 번을 새로 타느라 분유통의 절반은 의미 없이 버려졌다. 엔지는 얌전히 젖병을 빨아먹는 쇼토를 주방 바닥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자유로워진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노라니 길고 깊은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장차 넘버 원 히어로가 될 아이가 겨우 분유 하나에 이 난리를 치다니... 처음으로 쇼토의 자질이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상황을 모면하는 게 먼저였다.

쇼토는 절반 정도 먹더니 갑자기 손에서 젖병을 놓쳤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울어제낀 소리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크게 꺼이꺼이 통곡했다. 도대체 뭐가 문젠지 엔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일이 마음대로 안 될 때면 늘 그렇듯 익숙한 분노가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엔지는 울음을 썩 그치라는 호통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쇼토를 안아올렸다. 대화를 시도하는 건 헛수고였다. 아직 말을 배우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했다. 품안의 아기는 난로에 올려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엔지는 영아의 체온이 어때야 하는지를 모르고 쇼토를 안아 본 것은 태어난 직후에 한두 번이 다였지만, 심상치 않은 열이 오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패닉한 상태로 엔지는 집안을 뛰어다녔다. 품안에서 아기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기저귀 팩은 찾았지만 체온계처럼 작은 물건을 찾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쇼토는 엔지를 힘껏 뿌리쳤다. 하마터면 어깨 높이에서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쇼토는 몸을 뒤집고 어디론가 기어가려 했다. 아직 잘 기지는 못했지만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서야 엔지는 자신이 쇼토에게 낯선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집에 있을 때도 쇼토는 전적으로 레이가 돌보고 있었고, 엔지는 가끔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쇼토의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며 뿌듯해하는 게 전부였다. 지금까지 쇼토는 얼음 개성만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엔지가 개성을 봐 줄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엔지는 쇼토를 다시 안아들고 가능한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아빠다.”

쇼토는 안간힘을 쓰며 엔지의 턱을 밀쳐냈다.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잇몸이 손을 물었다. 반드시 교정해야 할 행동이었다. 엔지가 엄하게 바라보자 파란 눈동자가 마주보았다. 엔지가 모르는 감정과 뼛속까지 잘 아는 기운이 어지럽게 뒤엉키며 넘실넘실 차오르고 있었다. 엔지가 그 기운의 이름을 깨닫는 것과 거의 동시에 쇼토의 눈동자에서 불티가 화악 일어났다. 엔지가 바라마지않던 열기였다. 십수 년을 고대하던 순간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손바닥만한 불길이 쇼토의 왼쪽 얼굴을 뒤덮어 푸른 눈을 가리더니 서서히 허공으로 날아가 잦아들었다. 언젠가 불 개성을 나타낼 것은 확신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백일을 갓 넘겼을 뿐인데,

“쇼토...! 자랑스러운 내 진짜 아들아!”

진짜 아들뿐이겠는가? 이제부터는 쇼토가 진짜 엔데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엔지는 감격해 쇼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지만 쇼토는 엔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양쪽 눈에 초점이 없는 채로 쇼토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몸에 불이 붙는 걸 보고 제풀에 놀란 모양이었다. 쇼토는 딸꾹질을 하며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쇼토가 당장이라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아 엔지는 퍼뜩 놀라서 얼어붙었다. 심장이 빙벽에 갇힌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소아과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망설이는 긴 사이에 쇼토는 기운 없이 잠들고 말았다. 연령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지쳐 보였다. 쇼토는 잠들면 얼음장 같은 콧물을 흘리곤 했는데, 얼굴에 눈물자국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안쪽에서 불이 얼음을 녹이고 있는 것으로 엔지는 추측했다.

쇼토는 동그랗게 웅크리고는 얼굴을 찡그리고 으- 으- 신음했다. 거실 한복판에 우뚝 선 엔지는 품속에서 악몽을 꾸는 듯한 아기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침실로 가서 요에 내려놓았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엔지는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레이가 신발을 벗느라 벽을 짚고 몸을 숙이고 있었다.

“쇼토가 아픈 것 같아.”

엔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잠시 눈을 마주쳤다. 비어 있는 눈빛이었다. 레이는 말없이 그를 비껴 지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쇼토가 있는 침실로 사라졌다.

엔지는 오후의 나머지를 훈련장에서 보냈다. 어느 순간 노크와 함께 “식사하세요” 하는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바닥에 펄펄 끓는 우동이 놓인 쟁반이 있었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엔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엔지는 혼자 우동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정원에 나갔다. 용담꽃이 몇 송이 남아 있지 않았다. 꺾인 것도 있었고, 대부분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시들었다. 엔지는 정원사를 불러서 꽃을 더 심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근무 일정을 조정해야겠다고도 다짐했다. 쇼토의 불 훈련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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