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一擧火 三昧之火
비도 바람도 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완벽하게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건 너 때문이지. 다비를 낳은 이름을 첫 번째로 배울 것은 토도로키 엔지였는데, 네가 그 특권을 가로챘지. 토도로키도 못 되는 너부터 귀띔을 받은 걸 설마 우발적인 사고로 치부해 버릴 건 아니지? 어디까지나 널 좋아해서야. 네 일그러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동료를 잃은 사람답게 굴지 않는다고 넌 다그쳤던가?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눈물샘이 타버린 자리에는 납이 고여 있어. 푸른 불길이 일어날 때마다 서서히 녹아내려 밑으로 흘러가지. 두툼하게 고이는 무게가 눈길을 발밑으로 함께 잡아끌고는 한다. 내 구두창에 볼썽사납게 짓이겨지는 네게 눈이 붙박여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연보라빛으로 번지는 피멍보다도 아연함이 네 낯을 파리하게 하더군. 그 잠깐의 창백함은 더 결연하게 되돌아와 네 기운은 매섭게 형형해졌지. 혹자는 그때의 네게서 서슬 퍼런 창염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치는 단상에서 무슨 비밀스러운 의미를 끄집어내려 들 만큼 너와 내가 어수룩하지는 못하지. 우리는 첫 단추부터 글러먹은 과거 말고는 닮지 않았다. 넌 내게는 없는 엔데버의 일부다. 토도로키도 아닌 네가 주제도 모르고 나선 덕분으로 우리는 엔데버를 겹치지 않는 절반씩 나누어 계승해 왔지. 난 파괴하는 불을 물려받고, 넌 굴하지 않는 빛을 길어오고.
네가 우리와 한 몸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명백했다.
의연한 체하는 네 분투가 참 시시하더라. 너 또한 처음부터 다 꿰뚫어보았던 척, 신중한 무표정과 나른한 웃음을 놓고 빠르게 저울질하는 노력이. 한심하게도 너는 너무 알기 쉬웠어. 너는 펼쳐 놓은 책이야. 히어로들은 다 그렇지. 절망적이라니까.
이제야 선량하게 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는 엔데버는 그 천치들 무리에서도 눈에 띄게 아둔하지. 죗값은 치를 수 있는 게 아냐. 불을 꺼뜨리면 탄 자국이 사라진다는 이치는 아무데도 없다. 방화범들은 우리에게 이름을 낙인으로 남겼다. 나만 네게 찍힌 낙인을 알고 넌 내 이름을 오래도록 모르더군. 가르쳐 준 것은 그게 공평하고 순리에 맞아서만이 아니라니까. 그 정도로 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내가 네 말을 한 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은 것과 반대로 넌 내 말이라면 대체로 어리숙하게 신뢰했다. 그래도 널 좋아했다는 말만은 믿지 않았겠지.
내 첫 춤도 엔데버가 아니라 네가 가져갔지. 그 밤의 높은 바람이 날카롭게 목놓아 부르던 노래를 기억한다. 우리는 손깍지를 끼고, 품을 단단히 맞붙이고 도시의 창공을 헤엄쳤다. 바닥에는 무수한 가로등이 별이 되어 바다가 넘실거리고 우리는 어둠 속만을 누볐지. 자유로웠고 추웠다.
난 항상 겨울이 좋았어. 내겐 추위가 다소간 필요해. 애석하게도 내 몸은 달아오르면 돌이킬 수 없는 체질이니까. 불꽃의 기세가 등등해지는 건조함도 좋고, 불을 멀리 퍼뜨리는 사나운 바람도 좋아.
날개를 달고 태어난 너도 바람을 기꺼워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더군. 넌 정적인 것을 즐거워하더군. 오래 전 중국의 지혜로운 현인들처럼. 깎아지른 바위산에 숨겨진 몽유도원에서 신선처럼 찻잔을 기울이고 싶어하더군. 턱을 따라 즙이 뚝뚝 흐르도록 방자하게 과실을 따먹고 싶어하더군. 속세를 어지럽히던 돌풍을 너와 네 영웅들이 멈춰세웠고, 그래서 고요한 낙원과 속세가 같아졌다는 헛꿈에 흠뻑 취하고 싶어하더군.
너를 불에 사르는 게 내 유일한 호작질이었단 건 몰랐지? 세코토에 오르기 전 내가 받은 마지막 학교 수업은 과학이었다. 금속의 불꽃 반응, 수은은 늘 붉고 구리는 물망초 같고 소금은 노랗게 빛나느니라. 무슨 빛깔을 나타낼지 뻔히 알고도 우리는 램프의 심지에다 고운 가루를 던지길 되풀이했다. 아무리 거듭해도 기대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었던 건지, 놀이터에서 줄줄이 기어가는 개미의 목을 자르는 놀이처럼 질리지 않더라고.
어느 초저녁 골목에서. 사창가 업소의 폐기물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이 악취를 풍겼는데, 살 타는 냄새에 가려서 넌 아마 맡지 못했겠지. 아니면 빌런을 자처하는 내가 어째서 편의점에 기웃거리는 복면 강도를 봐 넘기지 않고 막다른 길에 몰아붙였는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네 혼란을 몸소 정리하는 수고를 들였잖아. ‘이 물체는 사람의 형상을 한 폐기물이야.’ 권총을 든 손목을 태우면서 내가 친절히 규정해 줬잖아, 오직 너를 위해서. 그리고 네가 쓰레기를 마저 내버리도록 넘겨 주었지. 네가 마음 깊이로부터는 히어로가 아니라는 증명을 할 수 있게.
너는 발치에 굴러온 권총을 끝까지 줍지 않았다. 재고 따지는 눈치로, 내켜하지 않으며, 신음을 흘리는 목을 솜털로 틀어막는 시늉을 했지. 오물 덩어리가 빈사에 빠지기 무섭게 물러서면서. 난 누구든 때때로 총보다 칼에 끌릴 수 있다고 너그러이 인정하는 아량도 베풀었다. 내가 네 기다란 꽁지깃을 뽑아 갈 때는 따가웠나? 네 손에 쥐여 주었을 때는? 단검 삼아 마지막으로 휘두르라고 아무리 종용해도 넌 거짓말로만 은혜를 갚았지. ‘곧 숨이 끊어질 거야. 경찰이 따라붙기 전에 도망치자고.’
그리고 넌 나만을 주시하면서 발작을 일으키는 몸뚱이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후의 네 동선은 보지 않고도 그려졌다. 내 눈을 피할 기회를 노려 돌아와서, 치명적인 출혈도 어쩌면 돌이켜지지 않을까 부질없이 애썼겠지. 과즙이 아니라 인간 말종의 피나 온몸에 묻혀 가며. 넌 시험마다 번번이 한심스럽게도 떨어졌다.
설령 통과했더라도 알았을 거야. 너도 겨울이 좋다고 말했으니까. 찬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라, 밤이 길어서.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고 그때 알았지.
편의점에서 산 형광펜으로 너는 리 디스트로의 책에 밑줄을 쳤다. 해방전선 집회가 끝나고 인근 허름한 모텔에서였다. 끽끽대는 엘리베이터는 언제 추락해도 별일이 아닐 것 같았고 방문 앞 러그에는 수상한 얼룩이 가득했다. 침실 천장에는 아무리 스위치를 당겨도 날개가 돌아가지 않는 실링팬이 붙어 있었고. 침대 하나짜리 이인실만 갖춘 숙소가 네게 적과의 동침을 강요했는데, 그거야말로 네가 떠맡은 사명이었으니 숙박료가 데트네랏 사의 금고가 아니라 공안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해도 믿을 법하지.
자본가의 불쏘시개에 네가 동조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자정이 넘도록 모범생처럼 열중하길래, 학교를 제대로 못 마쳐서 학생다운 것에 선망이 남았냐고 물어보았지. 너는 가짜로 명랑한 웃음 속에서 대답했다. ‘이런 명저를 모르는 놈들이 있는 것도 억울한 노릇이야. 돌아가면 히어로들에게도 한 권씩 나눠 주겠어.’ 엔데버에게도? 물어도 네 웃음은 흔들리지 않았지.
엔데버에게 빚을 질 때마다 내 불꽃은 기쁨으로 일렁거려. 강철 날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어깻죽지 깊은 곳에서 타, 카, 미, 세 글자를 굴착해 낸 것도 그 남자의 일대기 속에서였지. 엔데버가 네게 유다른 사람이라는 낌새를 한번 채고 나니 그렇게 된 연원을 찾기란 무척 간단했다. 엔데버의 발자취를 따라 밟는 일에 있어서는 너조차도 날 따라올 수 없었을 거야.
그 남자가 개입한 사건의 숫자는 번식하는 병균 같이 불어나 왔지. 어떻게든 늘리려고 악을 쓰는 게 구제불능 히어로들의 본능인가? 네가 죽인 트와이스도 히어로를 닮은 빌런이었다. 네 깃털처럼 다글거리는 분신들 말이야. 불을 이길 수 없는, 무용하고 부서지는 생명들. 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침대맡 서랍에는 미끌거리는 액체와 휴지가 건드려 주기를 기대하며 들어 있었다. 무한히 생산하고 삶을 늘려 나가라는 무언의 강요를 내뿜으며.
아무것도 우리의 것은 아니었다. 사랑에 봉사하라고 올려놓아진 침대에서 우리 둘은 손끝만큼도 스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독서 삼매경인 널 보려니 컴프레스가 알려 왔던 소식이 퍼뜩 떠올라서 전해 주었다. ‘히어로가 무사히 줄어드는 태평성대구나. 네가 죽인 지니스트의 부재를 메꾸려고 사이드킥들이 무리하게 날뛰다가 어제도 두 명이 죽었다.’ 그때는 또 웃지를 못하더군. 네 낯빛이 네 의지를 배반하며 투명해지고 마는 방식은 가끔 아기자기할 정도였어. 나는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고 네가 든 책의 표지에 비벼 껐다. 너는 이불을 나누어 덮는 대신 네 털외투 속으로 푹 수그렸다.
아침이 오면 너는 몸을 오래 씻었지. 뭐든지 신속한 네가 길게 물을 맞는 소리. 수돗물 밑에 가만히 서 있는 소리. 빌런으로 변장하고 난 잔여물을 닦으려면 그런 시간이 필요했나? 우리 흉내를 내느라 칠갑한 피를 지우려면. 보람도 없는 시도를 하고, 그리고 나를 깨우지 않고 너는 반대편으로 돌아갔지. 긴 밤을 지나 따사로운 햇빛, 그 그림자 속으로.
베갯잇에 남은 네 머리카락. 작달막한 키. 윤기 없는 미소. 강철 날개를 갈고 닦느라 자기 깃털에 베인 흉터들. 날 떠날 때마다 실수로 흘린 척 놓아 두던 빨간 깃털 하나. 새빨간 거짓말들은 새빨간 날개에서 온 것일까? 난 빨강이라면 죄다 맹렬히 타오르는 마음으로 증오하는 법을 배웠어. 두 개의 과업을 짊어질 여력이 있었다면 네 날개 올올이 화인을 지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는 너를 미워했다.
널 이루던 것 하나만 눈앞에 가져와도 난 너를 손끝에서 발끝까지 생생히 그릴 수 있다. 네 심장에 허황된 꿈을 마지막 붓질로 칠하고는 너를 완성했노라고 선포한 조물주는 누구였을까? 히어로가 할 일이 없는 세상이 꿈이라니. 그토록 가여운 흰소리에는 반론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지. 나비를 좇는 고양이를 말리지 않는 것과 같달까. 그래도 엔데버의 가냘픈 미망 다음으로는 네 가련한 꿈이 즐거웠다.
내 진실을 완수한 다음은 없을 거야. 목숨을 내 업의 심지로 삼아 태우고 나면 나는 사라지고 싶다. 떠도는 혼백을 남겨서 무언가를 더 해내겠다는 바람은 없다. 전부를 바치고 나서도 또 바치게 할 정도로 세상 섭리가 그렇게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조각의 넋이 남는다면, 그걸로 내가 널 죽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네 곁을 영영 떠나지 않겠노라 맹세하겠다.
나는 다만 속삭여 일깨워 주겠다. 네가 엔데버의 절반이라니, 그거야말로 가당찮은 허풍선이지. 넌 그냥 타카미 케이고니까. 이봐, 그게 네 이름이야.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니까?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기 때문에 시간은 둥글게 이어져 간다는 걸 네가 비로소 배우는 날. 네 날갯짓이 멈추어도 이 별은 참혹한 회전을 멈추지 않는 날. 막 걸음마를 뗀 아이 같은 세계가 한때의 너보다도 빠르게 날아가려는 종착지에 파멸밖에는 없는 날. 누구보다 신속하던 너는 누구보다 성급하게 미련했고, 그래서 덧없는 환상, 헛된 이상, 순 내쳐야 할 것들만 향해서 쏜살같이 날았음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고 자책하는 날.
살아 있다는 슬픔이 널 꺾는 날을 기다린다.
희망을 버리고 내 수의 안으로 쓰러질 때까지.
네가 내가 되면. 우리가 하나가 되면. 나는 너와 함께 멈출 것이다. 눈물도 말라 버린 네 얼굴을 내 눈 속에 한 방울쯤 남은 피눈물로 적셔 주고서, 바람 불지 않는 작은 방으로 데려가겠다. 시간의 끝까지 네 곁에 머무를 것이다. 다한 생명을 손에 들고.
그때는 날 위한 비가 내리겠지. 시푸른 불을 식히는 비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