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

우리는 완벽해

🎶 by A

The Neighborhood - Pretty Boy

토도로키는 오늘 만나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다. 이 자리가 초면이 될 예정이다. 이름과 사진만을 미리 메일로 받았다. 그마저도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엔데버가 멋대로 보냈지만. 증명사진 속에는 단정해 보이는 호감형의 여자가 있었다. 얌전하게 안쪽으로 말아 넣은 펌 헤어, 베이비 핑크 립스틱.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 

레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지우려 노력하며 토도로키는 메일을 다시 열지 않을 보관함으로 치웠다. 엔데버는 토도로키가 직접 연락하며 상대와 친근해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토도로키는 엔데버를 건너서만 약속을 잡았다. 식당도 엔데버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단 시간만은 토요일 두 시로. 점심이라기엔 조금 늦었다. 식당이 마감할 시간쯤이면 구경꾼이 그래도 적을 터였다.

손목시계는 두 시 십오 분을 가리켰다. 아대가 딸린 코스튬 대신 시계와 정장 차림이 자못 어색했다. 최근에는 정장을 입을 일이 없었다. 히어로들은 결혼이 빠른 편이라 동료와 친구들의 결혼식이 잦던 이십 대 초반에나 많이 입었지, 스물여섯인 지금에 와서는 코스튬이 아닐 때가 적었다. 

웨이터가 초조해하며 라스트 오더 시간을 상기시키러 왔다. 토도로키는 허브티를 한 잔 더 청해 홀짝홀짝 마셨다. 투명하고 붉은 히비스커스 꽃차였다. 첫만남부터 지각이라니. 예의가 없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크게 상관도 없었다. 엔데버를 닥치게 할 수 있으면 일단은 족했다. 엔데버가 정말 원하는 건 며느리가 아니라 삼대에 걸쳐 히어로가 될 손주겠지만, 형식적으로나마 토도로키가 다른 가정으로 분리되고 나면 엔데버도 열렬한 간섭까진 할 수 없어진다.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여자나 토도로키 둘 중 하나가 불임이라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일까. 그게 가장 편리할 것이다. 결혼 전까지 연애를 서너 달쯤은 하게 될 텐데, 여자가 아이를 못 가진다고 망설이며 고백하면 괜찮다고 붙잡아야지. 내가 원하는 건 아이가 아니라 너라고⋯⋯. 식장이며 신혼여행이며 다 맞춰 줄 것이다. 여행 따위야 가지 않아도 그만이고.

간다면 오쿠토 섬만 아니면 돼. 찻물을 응시하며 토도로키는 되뇌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많은 휴양지였다. 함께 첫발을 내딛는 한 쌍의 단골 여행지. 토도로키는 이미 그곳에 누군가와 다녀왔다. 섬 전체가 그 사람의 기억으로 점철되었다. 오쿠토 섬뿐이랴. 학창시절이 통째로 한 사람의 색으로 칠해지고 말았다. 때로는 투명하고 붉은 것만 보아도⋯⋯. 그를 떠올리면 찻잔 속의 소용돌이를 떠돌다 천천히 내려앉는, 찻잎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의 상대는 히어로 사무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엔데버가 말하길 히어로를 노상 곁에서 살피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서 잘 이해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하지만 히어로는 아닌 민간인은 사무소의 일반 직원들밖에 없단다. 그런 사람이 히어로의 짝으로는 제격이라고 했다. 히어로의 외로움을 덜어 주기 때문이라나. 어느 사무소인지 토도로키는 묻지 않았다.

모르겠다. 엔데버의 말을 생전 귀담아듣지 않던 토도로키는 이제 와 곱씹고 있었다. 유리컵에 담긴 찻물에 잠길 것처럼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일반인을 만나면 더 외로울 것 같은데. 같은 히어로가 아니고서야⋯⋯. 토도로키는 꽃잎 가루가 가라앉은 컵을 흔들었다. 굴곡진 액체 건너편에 사람의 상이 비쳤다. 누군가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유리 곡면을 따라 일그러져 잘 알아볼 수 없었다.

토도로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대를 맞이할 시간이었다. 외출 준비를 하며 거울에 대고 연습한 기계적인 미소를 장착하고서 눈을 마주쳤다. 상대는 보폭이 넓고 바람 같은 걸음걸이로 가까워져 왔다. 숨막히는 일 초가 흐르고, 그들은 서로의 거울상처럼 똑같은 각도로 시선을 피했다. 같은 생각이 뇌리에 흘렀다.

‘쟤가 여기? 쟤가 왜? 하필 쟤가?’

바쿠고는 그대로 박차고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식당 바깥의 거리에 멈춰 서더니 핸드폰을 거칠게 꺼냈다. 바쿠고의 엄지가 액정을 부술 것처럼 눌러 댔다. 무슨 약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를 변경하려나 보지. 토도로키와 한 지붕 아래 식사하고 싶을 리는 없다. 이제 와서.

그런데 바쿠고는 잠시 후에 와서 토도로키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토도로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히어로에서 사무직으로 전업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뭐 어쨌거나. 토도로키는 부적절하고 우스꽝스러운 생각부터 해 버렸다. 바쿠고라면 애 생길 걱정 하나는 확실히 덜 텐데. 대신 수천 개의 다른 걱정이 더해지겠지만⋯⋯.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토도로키는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렸다. 숨막히는 정적을 깨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물론 실수였는데,

“내 말 뭐 했냐?”

앙칼진 일갈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응. 생각으로지만. 이것저것, 아주 많이 했어⋯⋯. 토도로키는 남은 차를 들이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컵 뒤에서 평정을 찾을 시간을 벌 겸. 토도로키는 의구심을 담아 눈썹을 끌어올렸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바쿠고의 표정이 한꺼풀 더 험악해졌다. 이건 토도로키가 너무 잘 아는 얼굴. 바보 같은 말을 듣고서 황당해하는 반응이다.

“나야말로 스즈키 씨 선자리가 네놈이라니 금시초문이다.”

“스즈키?”

그게 성이었던가. 맞선 상대의 이름에 무관심한 토도로키를 보고 바쿠고는 하나에서 열을 읽었다. 명민한 두뇌가 회전하는 소리가 테이블을 건너 들렸다. 이것도 너무나 잘 알고, 특별하게 좋아하던 얼굴이다. 토도로키와 나란히 싸우며 적을 파악할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짓고는 했었다.

둘은 잠깐 서로를 말없이 훑어보았다. 펼쳐진 장면 속의 모든 게 어긋나 있다고 토도로키는 느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예약해 달라고 했는데 구석까지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에 그런 자리는 없었다. 바쿠고의 머리 위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토도로키의 얼음처럼 날카롭고 투명한 수정들이 육중하게 매달린 샹들리에가 당장이라도 바쿠고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바쿠고의 옷차림마저도 자리에 맞지 않았다. 별이 두 갠가라던 레스토랑의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와 다르게 격식이라곤 없었다. 소라색 스웻셔츠, 색 바랜 데미지 진. 히어로의 오프 데이라고 외치는 듯한 복장이었다.

그 청바지도 토도로키는 알고 있었다. 같이 가서 골랐다. 유에이 이 학년의 가을에도 바쿠고는 지니스트의 인턴을 했고, 몇 주만에 자기만의 데님 취향이랄 게 생겼다. 토도로키랑 쇼핑을 가서 바쿠고가 냉큼 집어든 연청은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와일드하게 찢어져 있었다. 지니스트랑 대판 싸우겠다⋯⋯. 토도로키는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지. 바쿠고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야리냐?”

순간 ‘말버릇은 여전하네’하고 응수할 수도 있었지만 토도로키는 ”좋아 보이네"에 머물렀다. 바쿠고는 코웃음만 쳤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였다. 스즈키 씨가 일한다는 히어로 사무소는 지니스트네였다. 대외 홍보를 담당하는 스즈키 씨의 업무량은 바쿠고가 사이드킥으로 들어오고서 배로 늘어났다. 언론이 바쿠고와 접촉할 때마다 쫓아다니며 수습하고 멘트를 다듬느라고. 바쿠고는 ‘어쩌다 보니 그 사람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 정도로 표현했지만, 스즈키 씨의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언행 논란으로 차트아웃은 기본에다 안티팬까지 한 부대는 생겼을 거라는 뜻으로 토도로키는 알아들었다.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갔다. 바쿠고는 염치가 아주 없는 사람은 또 못 되었다. 스즈키 씨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급하게 내려가 봐야 한다잖아.”

그래서 오프에도 사무소에 나와 어슬렁거리던 유일한 직원인 바쿠고가 즉석에서 대타로 당첨되었다고.

“그래도 네놈인 줄 알았으면 안 나왔을 거야.”

“알아.”

간단히 대꾸했다. 토도로키가 드디어 마음을 알아 줬건만, 바쿠고는 기뻐하는 기색을 띠지 않았다. 그게 바쿠고의 가장 큰 불만이 아니었던가? 결정적일 때마다 바쿠고와 동상이몽으로 빗나간다는 점. 토도로키가 바쿠고를 제대로 이해한 적은 아주 드문데. 또 토도로키가 틀렸나 보다.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이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판 두 개를 건넸다. 바쿠고는 자기 것을 펼치지도 않고 밀쳐내 반납했다. 바쿠고가 테이블 위로 몸을 쑥 내밀어 토도로키에게 속삭였다. 너무 가까이에서 으르렁거리며. 위협이나 선전포고, 뭐 그런 것처럼 들렸다.

“그 아저씨한테는 일 엔이라도 빚은 안 져.”

아. 엔데버 카드로 긁을까봐 그러는구나. 오해할 법도 했다. 토도로키는 독립한 지 꽤 되었지만 바쿠고가 그런 최근의 사정까지 알 턱이 없다. 토도로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낼게. 엔데버 카드는 들고 다니지도 않으니까 걱정은 넣어 둬.”

걱정은 누가 걱정. 바쿠고의 입꼬리가 비죽이며 올라갔다. 토도로키는 오늘의 파스타에 스테이크 한 토막이 나온다는, 적당히 구색이 맞는 코스를 주문했다. 파스타는 까르보나라라고 하길래 피클을 많이 달라고 했다. 바쿠고는 피클 없이는 크림소스를 못 먹는다는 걸 아니까. 그게 또 바쿠고의 심기를 건드렸다. 토도로키가 그의 식성을 안다는 것 자체가 언짢은지, 안다는 티를 낸 게 언짢은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뭘 얼마나 먹든 네놈이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

“그래도 기왕 먹는 밥인데 잘 먹으면 좋잖아.”

“순진한 척하지 마. 네놈 면상만 봐도 얹힐 것 같으니까.”

“그런 거 안 했어.”

둘은 익숙하게 입씨름을 주고받았다. 괜히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바쿠고와 티격태격하는 것도 일종의 루틴이었다. 예전 관계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토도로키는 문득 빠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도 생겼다. 이를테면 바쿠고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 약지는 아니었다. 검지 첫마디에 꼭 맞도록 직경이 작은 반지였다. 개성 부스터 같은 히어로 도구거나, 어쩌면 팬의 선물일지도. 

팬 선물을 착용하고 다니는 거라면 바쿠고는 정말로 꽤 많이 변했다. 토도로키가 바쿠고에 대해 아는 것들이 이제는 다 틀렸을지도 모른다. 피클을 시켜 준 게 맞았나? 토도로키는 갑자기 확신을 잃어버렸다. 이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자리는 토도로키가 아까 느꼈던 것보다도 더 본질적인 층위에서 글러먹었는지도.

사귀던 당시에 한번은 토도로키가 제안했었다. 삼 학년 때, 토도로키의 기숙사 방에 누운 바쿠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다 충동적으로. 우리 피어싱이나 귀걸이 같은 거 맞출까. 졸업 기념으로 말야. 토도로키는 기본적으로 소유욕이 강한 타입은 아니다. 그럼에도 바쿠고와는 무언가 동질적인 것을 새겨 넣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가 하나의 연결 고리로 통했다는 증표를 물리적으로 확보하면 안심할 것 같아서. 

그 결과로 왕창 혼났다. 바쿠고는 의외로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데가 있어서, 몸에 시답잖은 이유도 없이 구멍을 뚫는다는 발상 자체로 질색했다. 헤어진 뒤라고 토도로키 혼자서 피어싱이든 귀 뚫기든 하게 되지는 않았다.

“반지에 빵꾸 나겠네. 자세히 보고 싶으면 말로나 하든지.”

바쿠고가 투덜거리며 반지를 빼서 토도로키 앞으로 밀었다. 가느다란 금가락지에 옥색 보석이 하나 박힌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광택은 투박하지만 표면이 잘 연마된 보석. 터키석인가 그런 이름이었나. 

토도로키가 광석의 이름을 아는 연유 또한 바쿠고와 얽혀 있었다. 함께 보석 박물관에도 들렀다. 둘 다 사치품에 대한 취미도 흥미도 없었지만, 삼 학년 여름에 순찰조로 파견을 나간 휴양지에서 산책하던 길에 마침 박물관의 문이 열려 있었다. 중앙 전시장의 조명은 은은했지만 수십 캐럿에 달한다는 루비의 영롱한 붉은빛으로 방 전체가 대낮처럼 밝았다. 루비는 ‘보석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는 설명판이 붙어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전시품은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끌었지만, 토도로키가 아는 진짜 보석에 비하면 부족했다. 바쿠고의 붉은 눈동자는 저 안쪽에서부터 묵직한 광채가 뿜어져나오는 빅토리 레드였다. 광석은 바깥에서 쏘아 주는 빛을 반사할 뿐이었다. 그래도 개중에 바쿠고를 가장 많이 닮은 보석이 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제법 알맞다고 느껴졌다. 

토도로키는 무심코 반지를 자기 손에 껴 볼 뻔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려 보는 것으로 간신히 그만둘 수 있었다. 이제 그렇게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세간에서 보기에는 네 것과 내 것을 갈라 마땅한 사이.

반지를 돌려줄 때쯤 서빙이 시작되었다. 둘은 대체로 과묵하게 식사했다. 토도로키는 자기 몫의 대부분을 먹어치웠다. 지금의 바쿠고가 편안한 식사 상대는 결코 아니었지만, 토도로키는 딱히 심리 상태에 식욕이 휘둘리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사치를 부려도 되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탓이다. 반면에 바쿠고는 모든 음식에 입만 겨우 댔다. 토도로키가 아는 그의 식사량보다도 아주 적었다. 

똑같이 불편한 자리라도 두 사람의 행동이 극명하게 갈린다는 데 토도로키는 놀라지 않았다. 원래도 바쿠고가 그보다 훨씬 예민하고 섬세했다. 때로는 토도로키보다 훨씬 더 요령이 없었다. 바쿠고는 이기고 지는 상황이 아닌 걸 견디지 못했다. 그런 서투름을 좋아했다. 바쿠고의 아이 같은 구석이 영영 변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바쿠고만은 계속 이기기만 했으면 좋겠다고도 바랐다. 토도로키가 그래야 했던 것처럼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지는 않도록. 세상이 아무리 히어로에게 잔혹할지언정, 해내야 할 일을 우선하느라 속으로 삭이는 대신 분에 못 이겨 길길이 날뛸 시간이 충분하기를. 그럴 수 있게 자신이 지켜줄 거라고 결심도 가끔 했던 것 같다. 그건 결국 토도로키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해 버린 것 같기도. 헤어지던 날에는⋯⋯.

식초가 눈에 튀겨서 토도로키는 몽상에서 깨어났다. 바쿠고의 포크가 애꿎은 피클을 꾹꾹 찔러대고 있었다. 바쿠고는 체포한 빌런 감시하듯이 피클을 곰곰이 예의주시했다. 토도로키만 아니라면 뭐든지 집중해서 주의를 두려는 것 같았다. 그 날카로운 집중력도 전투 중에 자주 보여주던 것이다. 헤어지고 몇 달 후쯤부터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팬 컴필레이션 영상들을 자주 보았다. 불꽃을 일으키고 날아다니는 다이너마이트의 눈부신 활약상.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어떤 부상을 당했었는지 알았다. 말 그대로 심장이 멈췄었다는 것을. 하지만 자유롭게 비상하는 바쿠고는 금 하나 간 적 없는 것처럼 온전했다. 빛이 꺼진 적 없는 태양 같았다. 보고 있노라면 토도로키의 왼쪽 가슴까지 아려 오며 쿡쿡 쑤셨다.

토도로키 본인의 영상이 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없지야 않겠지. 히어로 순위도 꽤 높고 팬층이 두터운 쪽에 속한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았다. 바쿠고도 가끔 검색창에 ‘쇼토’라고 적어넣고서 흐르는 시간을 잊어버리는 날이 있었을까. 잠이 안 오는 밤에 그랬을까. 비가 오는 날에 그랬을까. 유난히 맑아서 누구라도 데리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면 그랬을까⋯⋯. 토도로키는 알고 싶어졌다.

바쿠고는 어쨌든 구겨진 낯으로도 계속해서 맞은편을 지켰다. 토도로키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 물어봐도 된다는 신호인가? 너도 날 떠올렸냐고? 하지만 바쿠고를 그 정도로 모르지는 않았다. 여기서 물으면 분명히 자리를 떠 버릴 테고, 그럼 다시 만나기란 더 어려워질 거란 말이지⋯⋯.

그게 어때서? 다시 못 보면 왜 안 되는데?

아니, 사과해야 해. 바쿠고에게 상처를 줬잖아. 그것만은 확실하지. 나 자신도 그래서 여태껏 앉아 있는 거 아냐? 바쿠고에게 사과할 기회를 잡으려고. 또다른 토도로키가 말했다.

토도로키의 머릿속에서만 여러 목소리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바쿠고가 대화해 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통에 아무것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쿠고는 감정을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꺼내 보인다는, 굉장히 알기 쉽다는 인상을 누구에게나 주었지만 실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토도로키는 알지 못했다. 폭발의 기제를. 바쿠고는 토도로키에게 늘 신비로웠다.

마지막 코스가 나와서 토도로키는 실망하는 동시에 안도했다. 졸인 사과를 켜켜이 쌓은 크럼블 케이크였다. 바쿠고는 접시에 손도 대지 않고 돌려보냈다. 예전이었다면 토도로키가 두 접시 먹으라고 주었을 텐데. 바쿠고는 토도로키 쪽에 눈길을 주는 걸 애써 피하며 창밖만 응시했다. 유리창에 새빨갛게 익은 두 개의 홍옥이 비쳤다. 보통 눈을 맞추지 않는 건 토도로키 쪽이었는데. 바쿠고를 앞에 두고도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얼마나 자주 혼자 남겨두었던가?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미안해야 할 것이 또 하나 늘어났다.

웨이터가 커피와 홍차 중에 무엇을 마실지 물었다. 우거지상을 한 바쿠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빈 물잔만 내밀었다. 그리고 레이저처럼 강렬한 시선으로 토도로키를 노려보았다. 치워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안광의 힘만으로 토도로키가 사라지지 않자, 바쿠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약봉지가 나타났다. 토도로키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온 세상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빙결을 쓸 때도 그러지는 않았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바쿠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멀쩡하니까 그렇게 보지 마. 다음달에 끊기로 했어.”

토도로키가 망연하게 바라보는 앞에서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여 알약을 넘겼다. 가짓수는 줄었다. 박동 조절제부터 소염제까지 매일 식후마다 삼키던 여섯 알, 그중에 절반만 남았다. 이 학년 여름에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그 여섯 알을 삼키는 걸 매일매일 지켜보았다. 풍파가 지나간 다음해에 바쿠고의 건강은 바람 잘 날 없었다. 바쿠고는 심장이 멀쩡해졌다고 우기며 봄학기를 어떻게든 마쳤지만, 엉뚱하게도 심장 대신 꿰뚫렸던 복부 상처 쪽이 덧나서 다시 입원해야 했다.

그해가 바쿠고와 사귀기 시작한 해였다. 체육대회 직후부터였다. 가끔씩 바쿠고의 부모님을 대신해 토도로키가 보호자를 자처했다. 사월의 벚꽃과 오월의 신록을 지나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낮의 열기가 식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들던 병실의 창, 여름밤의 어둠. 토도로키가 깎다가 껍질과 함께 과육 절반을 날려먹은 참외가 창턱에 놓여 있었다. 매미와 귀뚜라미 소리가 잔잔히 밀려왔다. 토도로키는 작은 등을 켜놓고 바쿠고의 흰 환자복을 걷었다. 꾸준히 드레싱을 갈아 주어야 했다. 유에이에서 응급구조술의 일부로 환부 처치를 배운 토도로키의 솜씨는 제법 능숙했다. 새 거즈를 꺼내고, 벌어진 상처에 깨끗한 손끝으로 연고를 펴 발랐다. 토도로키의 왼손바닥이 바쿠고의 흉곽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체온으로 약이 깊이 배어들도록.

위아래로 상처가 아문 흉터가 도드라져 빛났다. 왼쪽 가슴부터 윗배까지 길게 이어지며. 마치 킨츠기를 연상케 했다. 엔데버의 저택에는 그런 작품 하나에 목화 가지가 꽂혀 장식장에 놓여 있었다. 도자기가 깨진 이음새에 녹인 금을 부어서 원래보다 더 단단하게 재탄생한 꽃병. 상처투성이 길은 단지 바쿠고가 거쳐온 지도가 될 따름이었다. 그때 토도로키는 다시없을 확신을 느꼈다. 바쿠고는 절대로 깨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떤 흠집을 입혀도 바쿠고는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올포원이나 시가라키라 해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들조차 바쿠고를 그 어떻게도 훼손할 수 없었다. 바쿠고의 오른뺨을 수놓은 흉터 앞에서 말이 흘러넘쳤다.

“너만 있으면 난 두려운 게 없어.”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마음 얼만큼을 알아 주었을까. 그 말은 정말로 기탄없는 진심이었다. 더도 덜도 아니라 그때의 토도로키가 가진 전부였다. 바쿠고는 웃었던 것 같다. 실소였는지, 토도로키를 사랑스러워하는 웃음이었는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좀 두려워도 하고 살지 그래? 겁도 없는 반땡아.”

네가 할 소리냐고 받아치며 놀리는 대신 토도로키는 미소지었다. 바쿠고의 모든 것이 좋았다.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입에 삐뚤빼뚤 자른 참외 조각을 넣어 주었다. 달고 향긋한 내음이 퍼졌다. 바쿠고가 검사를 잘 마칠 때마다 간호사는 레몬 사탕을 주곤 했는데, 아이 취급이 싫다며 먹지 않은 것을 토도로키가 대신 먹었다. 입술에서 입술로, 여러 과일 맛이 나던 입맞춤. 여름밤의 향내⋯⋯.

어떤 말들은 위력을 발휘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린다. 오래오래 끌고서야 진의를 수면 위로 올려보내는 말들이 왜 존재하는 걸까. 그들은 어린 줄도 모르고 어렸다. 토도로키는 열여섯, 바쿠고가 열일곱이던 그 밤은 너무 오래 전이었다. 스물여섯의 토도로키는 두려운 게 많아졌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두려웠다. 그중에 바쿠고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토도로키가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곤 토도로키를 꽤나 잘 보아 넘기고 있지 않나?

한 박자 늦게 의문이 떠올랐다. 계산까지 다 치르고 식당을 나와서였다. 공기가 쌀쌀해진 거리를 둘은 아주 느리게 걸었다. 상대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지만 그렇다고 먼저 자리를 뜨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로. 쏜살같이 돌격하며 뛰쳐나가지 않는 바쿠고라니 드문 모습이었다. 토도로키가 아는 바쿠고와 비슷한 듯 달랐다. 그 괴리를 지적하기 위해 토도로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맛있게 먹었어, 바쿠고?”

“그딴 건 왜 물어?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맛있는 밥 한 끼 먹이고 혼자 후련해지겠다 뭐 그런 거냐?”

모욕당했다는 듯한 반응이 당최 앞뒤가 안 맞게 느껴졌다.

“첫째로는 맛 더럽게 없었고 둘째로는 네놈 얼굴만 봐도 체하기 직전이니까.”

“그럼 이해가 안 돼.”

“네놈 대가리가 이해하는 게 있을 리가.”

“말 좀 곱게 할 수 없어, 바쿠고?”

토도로키는 걸음을 멈추고 냉랭한 시선을 던졌다. 바쿠고의 폭언이 진짜로 토도로키를 모독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꼭 바쿠고의 말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이 토도로키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초조한 열감이 끓어올라 토도로키는 바쿠고에게 한 발 내딛었다. 바쿠고는 표면적으로 물러서지는 않았지만, 토도로키의 전매특허 같은 얼음벽이 느껴졌다. 토도로키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신중했다. 말 한 마디마다 토도로키와의 거리를 재는 투였다.

“내가 왜 말을 곱게 해야 하지?”

“화 안 났으니까.”

“화내기도 아깝다고 하자. 됐어?”

“정말 화났으면 나랑 같이 밥 먹지 않았을 거잖아.”

“뭐?”

“그런데도. 맛 없었고 체할 것 같은데도 끝까지 앉아 있었어.”

“내가 등신이다, 내가 등신이야.”

“왜 그랬어?”

“그럼 네놈 면상에 물이라도 엎어 주고 뛰쳐나왔으면 더 좋았겠냐? 잘해 줘도 지랄이네.”

토도로키가 용감하게 벌렸던 틈이 빠르게 좁아졌다. 바쿠고가 이렇게 나온다는 건 대화의 물꼬가 막힌다는 뜻이었다. 토도로키의 머릿속에서는 물음표의 바다가 막 넘실거리는데도. 궁금증이 와르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예를 들면, 스즈키 씨한테는 뭐라고 할 건지.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지금도 봐. 돌아서는 대신 나란히 느릿느릿 걷고 있잖아. 식당 입구에서 연결되는 한산한 돌담길을 따라서. 토도로키는 다시 연애하는 것 같다고 착각해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참 많이 걸었다. 유에이 담장을 돌아서.

느슨한 오렌지색 목도리 밑으로 바쿠고의 맨살이 드러났다. 토도로키는 손을 내밀어 고쳐 매 주고 싶어졌다. 손끝이 훨씬 야무진 쪽은 바쿠고니까, 토도로키가 애쓴들 예쁘게는 안 되겠지만.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했다. 엷게 그을린 피부에는 여름이 스쳐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토도로키는 거기다 머리를 파묻는 촉감을 알았다. 바쿠고의 땀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도. 바쿠고는 땀냄새마저 근사했다. 불에 담금질한 흑설탕처럼 반짝이는 냄새였다. 폭파가 수반하는 모든 것이 다 값졌다. 근거 있는 당돌함부터 주저 없고 찬란한 불꽃놀이까지. 애쓰지 않아도 멋지게 빛나는 사람을 토도로키는 딱 두 명 알았다. 하나는 그 자신의 친형이었고 또 하나가 바쿠고였다. 내추럴 본  락스타나 지상의 별똥별 같은 수식어가 바쿠고에게는 아깝지 않았다. 토도로키는 그 별을 매일밤 품에 담고 뒹굴었다. 기숙사를 통틀어 자신의 방에만 깔린 다다미 위에서.

그래서 일본식 가옥의 이미지, 즉 토도로키에게 집이 갖는 이미지와 바쿠고가 서서히 결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나간 계절들 탓에 엔데버의 집을 떠올려도 바쿠고가 같이 생각이 났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정작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 생각하면.

반보 앞서 걷던 바쿠고가 돌아보았다. 햇살이 금발에 아롱거렸다. 토도로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추워 보여.”

“참견하지 마.”

목덜미가 목도리 안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손으로 고쳐 맨 바쿠고는 따뜻해질 것이다. 토도로키는 그럼 된 거겠거니 놓아 버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인적 드문 겨울 거리의 정경은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평온하다고 착각할 정도의 침묵만이 자리했다. 지나치게 예전 같았다⋯⋯. 모든 게 거짓말이자 기나긴 꿈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둘 다 알면서도.

바쿠고가 나지막히 말했다. 피로가 배어나고, 그답지 않게 조용한데다 무언가 숨겨진 것이 더 있었는데 토도로키는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말마디가 공중에 하얀 입김으로 엉기는 것 같았다.

“난 최선을 다했어, 토도로키.”

“응. 그랬지.”

토도로키는 최선을 다해 긍정했다. 그 말은 진실이었으니까. 바쿠고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토도로키를 위해서 매사에 혼신을 바쳤다. 헤어질 때까지도 그랬다. 남들이 들으면 좋게 헤어졌다고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둘 중 누구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바쿠고의 괄괄한 성미나 사귀는 동안 얼마나 많이 투닥댔는지와 비교해 보면 기적이라 할 만했다. 아니면 안 좋게 헤어진 건가? 평소와 다르게 싸우지조차 않았으면. 그게 괜찮은 결별일 리가.

장소는 또 토도로키의 방이었다. 삼 학년 끝자락, 졸업식 전날에. 바쿠고는 학생 대표로 스피치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면서도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둘 다 발가벗은 채로, 전기가 번쩍거리던 흥분의 여파를 느꼈다.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몸이 후들거렸다. 그건 기분 좋은 피로였다. 바쿠고의 눈꺼풀이 자잘하게 떨렸다. 뺨을 따끔하게 찌르는 바쿠고의 머리칼. 바쿠고의 눈동자 속에 든 토도로키의 모습. 그대로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세상이 거기서 끝나도 토도로키는 불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바쿠고가 솜이불 속에서 토도로키의 허리춤에 손바닥을 얹었다. 토도로키는 오른손으로 맞잡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바쿠고의 손을 식혀 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같이 열기 속에서 꿈꾸는 쪽을 선택했다.

“이제 자야 하는 거 아냐?”

눈을 감으면 오색찬란한 별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쿠고의 빛깔이었다. 즐거운 목소리가 대답하면 별빛이 한층 더 반짝거렸다.

“다 깨워 놓고는 자랜다. 잠이 오겠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모브들 따위. 내가 할 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어.”

“넘버 원 되겠다고?”

“당연하지.”

번득이는 미소가 예리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바쿠고에게라면 찔려도 좋을 것 같았다⋯⋯.

“네 개인 사무소 차리고 싶지 않아?”

“금방 차릴 거야. 지니스트 옆에 머물러 있는 건 당분간만이지.”

바쿠고는 졸업과 동시에 베스트 지니스트의 사이드킥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토도로키는 사무소 없이 공안 산하의 히어로 정예 부대에 소속될 예정이었다 호크스를 직속으로 보조하며. 아마 호크스의 불타 없어진 날개 격으로 일하다가, 언젠가는 나와서 자기만의 사무소를 차리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히어로 쇼토 사무소라니. 아직은 너무 멀었다.

“집은? 너희 집에서 지니스트 사무소 멀잖아.”

“자취 알아보고 있어.”

원엘디케이로 하고 싶어. 토도로키는 주방에서 요리하는 바쿠고의 모습을 떠올렸다. 상상 속에서 토도로키는 식탁에 앉아 바쿠고의 등 뒤에 묶인 앞치마 리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도로키가 요리를 거들려 해도 바쿠고는 못하게 말리겠지만, 대신 누구보다 맛있게 먹어 줄 자신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 테다. 바쿠고의 요리는 다 맛있으니까. 바쿠고의 검지가 토도로키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뜻 모를 상형문자를 그렸다.

“원엘디케이면 아주 넓겠네.”

“드디어 살맛 나겠지. 이 닭장도 이제야 탈출하는 거야.”

“커다란 소파를 살래? 바쿠고.”

“내 가구에 훈수 두는 거냐, 반땡?”

“거기서 안고 있고 싶어.”

“이래라저래라 안 해도 살 거거든. 매장에서 제일 큰 놈으로.”

토도로키를 만족스럽게 하는 대답이었다. 역시 다 뜻이 있구나, 바쿠고는. 바쿠고의 손이 희고 붉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손바닥엔 땀샘마다 굳은살이 박였지만 손가락은 보드랍고 살결이 약한 데가 남아 있었다. 손끝이 뜨거웠다.

“소파 말고는?”

네가 바라는 건 그게 다야? 바쿠고의 눈이 넌지시 묻고 있었다. 그게 무슨 질문인지 토도로키는 잘 몰랐다. 그 이상의 뭘 바랄 수 있지? 가구를 사러 갈 때는 아마 따라가겠지. 그것까지는 바쿠고가 허락해 줄 것 같았다. 식탁부터 침대까지 전부 바쿠고의 안목으로만 고르더라도. 바쿠고네 집에 자주 들르고 싶었다. 같이 소바나 마파두부를 해 먹고, 넉넉한 소파를 누리고. 그밖에 뭐가 가능하다는 거지?

“그럼?”

“⋯⋯같이 살든지.”

바쿠고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래 공들였는지 알았으면 토도로키도 조금쯤은 다르게 대답했을 것이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대신. 바쿠고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토도로키가 웃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그려 놓은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채.

“그런 말 하지 마, 바쿠고.”

“왜?”

“정말 그러고 싶어지잖아.”

새집은 토도로키가 출근할 공안 본부까지도 멀지 않았다. 일부러 둘의 중간점으로 고른 거였고, 일부러 넓은 집이었다. 바쿠고가 전부 다 밝혔을 때 토도로키는 순간 진짜로 흔들렸다. 하마터면 바쿠고 쪽으로 휘청 넘어갈 뻔했다. 바쿠고는 낮고 작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토도로키를 시험하듯이.

“정말 그러면 되잖아?”

“나는 내 집으로 가야지.”

“⋯⋯네 집?”

“응.”

“집 구했냐? 말 한 마디 없이?”

“나야 정해져 있지.”

토도로키는 쉽게 대답했다. 바쿠고는 불가해한 난제를 보듯이 토도로키를 쳐다보았다. 바쿠고에게 어려운 게 있을 리 없는데도 그러는 게 이상했다. 토도로키야말로 어리석어지는 기분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토도로키의 상황도, 바쿠고가 어떤 사람인지도 그대로였는데 단지 흐르던 공기만이 멈춰서 있었다.

“뭐가 정해져 있는데?”

“엔데버한테 가야지.”

“은퇴했잖아. 설마 그 몸으로 복귀하겠대? 제정신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몸인데. 도와 줘야 할 거 아냐. 혼자서 어떻게 살아.”

“어머니가 같이 계시다며.”

“감당 안 되실 거야. 거의 거동을 못 하는데 그 덩치를 어머니 혼자 지금까지 건사하신 게 기적이지.”

“그래서 이제부턴 네가 수발을 들겠다고?”

“지난 이 년 동안 너무 고생하셨으니까.”

“너네 형이랑 누나는 뒀다 국 끓여 먹냐?”

“바쿠고.”

“뭐. 내 말이 틀려?”

“둘 다 자기 가정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

“그게 뭐?”

바쿠고는 그러더니 한껏 빈정거렸다. 핑키의 산처럼 닿는 것마다 헐리고 녹이는 적개심이 말마디마다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았지만, 말끝을 떨리게 하는 감정은 어쩐지 절실한 슬픔에 가까웠다.

“너는 뭐, 영원히 네 가정은 없으려고 작정했냐?”

토도로키는 침묵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도 특별하고 안온한 밤에 둘러싸여만 있었는데, 바쿠고와 그 사이에 투명한 천천빙벽이 살금살금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한 뼘을 채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아직도 바쿠고의 숨결이 미풍처럼 불어와 닿았다. 개성 따위는 쓰고 있지도 않으니 얼음이 생겨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뜻이야?”

“⋯⋯.”

“그런 뜻이냐고.”

“⋯⋯.”

“대답해. 토도로키.”

“⋯⋯바쿠고,”

“⋯⋯.”

“그렇게 말하지 마.”

바쿠고는 기가 차다는 듯 허, 실없는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응수하려던 건 아니었다. 토도로키는 입술을 축였다. 다시 대답을 시도하면서 담담해지려고 애썼다. 적당히 건조한 투로, 사실을 적시하는 데 지나지 않아야 했다. 그런 건 능숙하니까.

“내가 해야지.”

“왜?”

“왜냐니, 그야.”

“나 아니면 누가 하냐고?”

낙담한 음성이 또박또박 토도로키의 말을 완성했다. 공기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끝났다. 그들 사이에 있던 어떤 것이 얼어붙었다. 바쿠고의 손길이 어느새 거두어져 있었다. 바쿠고에게 떠오른 고통스러운 표정을 토도로키가 초래한 건 확실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미지로 머물렀다. 바쿠고의 비웃음이 한숨 같았다. 아주 성녀 나셨어. 힘없는 목소리. 

뭐랄까, 차라리 바쿠고가 불같이 격분했더라면 편했을 터였다. 쉽고 익숙했을 것이다. 바쿠고는 화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아주 조용하고 차가워졌다. 무겁게 침잠하는 공기를 울리던 똑똑한 음성. 정말 화가 난 바쿠고의 목소리가 어떤지를 그때 배웠다.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또 무슨 말을⋯⋯.”

“미안하다고라도 하지?”

“지금?”

“내가 뭐, 어려운 부탁 하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 원래는 네 잘못도 아닌 걸로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사는 놈이잖아.”

“그런 적은 없어.”

“아. 나한텐 미안하지도 않은가 보지?”

토도로키의 입술은 가볍게 벌어진 채로 얼어붙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본래도 토도로키는 풍성한 언어의 곳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나마도 눈보라가 불어들어 전부 휩쓸고 훔쳐간 것 같았다. 몹시 심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토도로키는 체온 조절에 능숙해 어떤 혹한에도 그렇게 추워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지내 본 적 없는 계절에 속했고, 마셔 본 적 없는 공기만 감돌았다. 일 년에 속하지 않는 열세 번째 달 같은 기묘하고 푸르른 서글픔이 방을 적셨다. 그 순간을 바쿠고도 같이 겪고 있다는 게, 다름아닌 토도로키가 바쿠고를 그 적막에 밀어넣었다는 것이 가장 끔찍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한테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바쿠고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못 하겠다.”

뭘?

“그만하자.”

바쿠고가 휘어지느니 꺾인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미도리야가 말했었다. 거지 같은 데쿠의 힘을 빌릴 바엔 차라리 지는 게 나아, 캇짱이 그랬어. 일 학년 기말고사를 보다 말고. 캇짱의 말이 너무 화가 났어. 물불도 못 가리고 그만 주먹을 날렸지 뭐야. 쑥스러워하던 미도리야의 볼에 홍조가 돌았다.

얼마나 낯부끄러워져도 상관 없으니, 토도로키도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먹질로 갈무리할 만한 일이었다면.

꺾이는 바쿠고를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토도로키가 이기지도 않았다. 승자도 없이 승리의 화신을 지게 만든 것뿐이었다. 개성사회를 파경에 이르게 할 뻔한 올포원도, 바쿠고를 두 번이나 빈사에 몰아넣었던 시가라키도 하지 못한 걸 토도로키가 해내고 말았다. 바쿠고는 일어나 옷을 주워 걸쳤고 토도로키는 말릴 수 없었다. 바쿠고의 인기척이 사라지고서 밤새도록 누워 있었지만 한숨도 잠들지 못할 만큼 비참했다. 토도로키의 다사다난한 스물여섯 해 생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불행한 밤이었다.

바쿠고가 멈추어 섰다. 차분한 낯으로, 젖은 낙엽을 밟으며 토도로키를 돌아보았다.

“너는?”

“나?”

“너는 최선을 다했냐고.”

모르겠어⋯⋯. 토도로키는 생의 한 순간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토도로키의 최선이 바쿠고에 비해서 너무 부족했는지도 모르지. 때늦은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바쿠고.”

바쿠고는 허탈하게 쓴웃음했다. 지친 기색의 바쿠고에게로 토도로키는 한 발짝 내디뎠다. 바쿠고의 코끝과 귓가가 발갰다.

“이제 와서?”

“미안해.”

“토도로키, 내가 너한테 듣고 싶었던 말은 미안해가 아니었어. 그거였던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바쿠고는 야단치듯 속삭였다. 그 밤의 음성과 똑같았다. 그제서야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제대로 뜯어볼 용기가 생겼다. 너무 깊게 마주하면 실례일 것 같아 식당에서부터 걷는 내내까지 열없는 시선으로 회피해 왔다. 바쿠고에게도 확실히 원숙하고 어른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앳되기보다는 잘 벼려진 턱선과 콧날에, 살이 내린 얼굴이 조금 해쓱해 보이면서도 훤칠했다. 볼에 난 흉터도 옅어져 반짝반짝 빛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색없는 스물일곱 청년이었다. 동시에 토도로키의 눈에는 영락없이 열일곱 소년이었다. 아마도 영원히. 토도로키는 흉터에 머뭇머뭇 손을 가져다 댔다. 바쿠고는 뿌리치지 않았다.

“잘 지낸 거지?”

“빨리도 물어본다.”

토도로키는 그 다음을 고대하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지만 바쿠고의 대꾸는 거기서 끊겼다. 미디어와 예의 영상들을 통해 대강은 이미 알았다.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히어로 쇼토가 지샜던 불면의 밤들. SNS에 다이나마를 검색하면 우수수 등장하던 목격담들. 마트에서 소바를 집었다 놓았다더라, 토도로키의 눈앞에 나타난 지금처럼 편한 옷차림으로. 축의금만 보내고 말았던 겹치는 지인의 결혼 사진이 올라왔을 때 토도로키의 시선은 누구부터 좇았는지. 유에이 교복을 닮은 딥 그린 수트와 구두 차림의 바쿠고를 얼마나 오래도록 바라보았는지.

안부를 묻는 질문이 분위기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토도로키의 노력이 가상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에게 질문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묻게 하는 수고를 들이는 것이 더 실례였다. 토도로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간의 소식을 조잘조잘 전하기 시작했다. 호크스가 맡겼던 임무들 중에 무사히 마무리한 몇 가지. 코스튬을 일부 바꾼 이야기. 휴일이면 운동 아니면 봉사활동을 자주 나가는 것. 일정이 없으면 영화라도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 최근에는 어느 구역의 관할이 되었는지. 삶의 편린을 떠오르는 대로 꺼냈다. 말이 좋아 삶이지, 대부분 히어로 활동에 국한된 얘기였다. 그게 그들의 일상 전부일 뿐 아니라 정체성이고 공통분모기도 하니까. 하지만 사실 정말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다. 토도로키는 마른침을 넘겼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살고 있어.”

“⋯⋯그 집에서?”

“아니. 맨션으로 나왔어.”

“⋯⋯어느 동넨데?”

“공안 본부에서 걸어서 금방이야. 주상복합이고 일층에는 편의점이 있어서 편하더라.”

“편의점? 일부러 그랬지. 인스턴트 소바만 먹고 살려고.”

바쿠고는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바쿠고가 참견할 영역도 아니어서 훈계를 늘어놓지도 못했다. 토도로키도 꼭 알리려던 것을 알리고 난 다음까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화가 잠시간 끊겼다. 바쿠고와 헤어진 다음에 서너 번의 연애를 했다는 것을 말해야 할까. 대부분은 토도로키의 팬이었고 울며불며 매달리길래 적당히 대해 주었다. 그쪽에서 떠나가기도 했고 토도로키가 이별을 고하기도 했다. 바쿠고만큼 토도로키가 깊이 아프게 한 이별은 없었다. 아무도 바쿠고처럼 두고두고 사무치게 하지 않았다.

“스즈키 씨를 만나려던 거. 내 잘못이야.”

“잘못? 또 뭐 했냐?”

“만나고 싶지 않은데 거절하기 번거로웠던 것뿐이야.”

“나쁜 자식이네. 스즈키 씨한테 나쁜 자식이었다고 전할게. 스즈키 씨의 짝이 아니라서 천운이라고.”

“죄송하다고 해 줘.”

“스즈키 씨도 별로 아쉽지 않을걸. 꼭 히어로와 결혼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그렇잖아. 근무 시간도 불규칙하고, 항상 일이 우선이고. 먼 미래를 기약하기도 힘들고.”

“아아. 그래서 그랬나, 엔데버도.”

“그 아재가 뭐랬는데?”

“일반인 만나랬어. 히어로한텐 그게 좋대.”

“그게 좋아서 본인은 그 짝이 났다냐⋯⋯. 아니야, 됐다.”

“너도 그런 거 같아, 바쿠고?”

“싫은데. 쳐다만 봐도 부서질 것 같이 약해빠진 새끼들을 뭘 믿고 만나.”

그럼 히어로들은 바쿠고의 성에 차나? 엔데버와는 반대로 히어로의 짝은 히어로여야 한다는 게 바쿠고의 지론인 걸까? 아니면 토도로키 이후에 다른 히어로들을 만났다는 뜻인가?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믿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느 하나 토도로키 스스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바쿠고는 토도로키를 헤매게 하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런데 어렵다고 포기할수 없는 것도 바쿠고 때문이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손길을 물리치거나 토도로키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꺾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특유의 과격한 움직임 대신 바쿠고는 처음으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비밀을 변칙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깨닫자마자 토도로키의 심장은 빠르게 달음질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오후는 저무는 쪽으로 접어들었다. 바쿠고는 그냥 토도로키를 따라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긍지를 굽히지 않았다. 으름장을 놓는 게 참 바쿠고다웠다.

“동네 꼬라지만 보고 갈 거야.”

곧 헤어진다는 의미가 토도로키의 걸음을 느리게 했다. 바쿠고도 따라 운동화를 늦췄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했는데도 고층 맨션은 야속할 만큼 빠르게 가까워졌다. 주차장을 지나 매끈한 유리문 앞에 선 토도로키는 바쿠고에게 들키는 걸 주저치 않고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찍었다. 바쿠고의 입술이 허, 하고 탄식 같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어느 햇수처럼 보였지만, 바쿠고와 토도로키의 생일 뒷자리를 결합한 숫자였다.

토도로키의 현관문 앞에 다다른 바쿠고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등을 돌렸다. 토도로키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이 문을 활짝 열지 않으면, 지난 십 년을 뛰어넘는 폭으로 열어젖히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걸 알았다. 아직 못한 게 너무 많았다. 바쿠고가 준 기회를 잃을 수 없었다.

“간다.” 

토도로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바쿠고의 어깨에 대고 외쳤다.

“나, 커다란 소파를 샀어.”

바쿠고는 더듬더듬 형편없이 이어가는 토도로키의 고백을 말없이 듣기만 했다. 원엘디케이야. 그만큼의 공간은 필요 없었어. 요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거실과 방이 따로 필요한 것도 아냐. 그렇지만⋯⋯. 다다미로 꾸미려고 하다가 그러지 못했어. 그만하기로 했었던 그 방과 너무 비슷하니까. 네가 네 공간을 어떻게 했을지 머릿속에 그려 보려고 노력하면서 비슷하게 채워 갔어. 바쿠고 넌 뭐든지 잘하니까. 이곳에 산 지 일 년이 넘었어. 아직 아무도 집들이를 오지 않았어. 아무도 부를 수 없었어. 첫 손님으로 너 아닌 누구도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집안 꼴은 구제불능일 것이다. 어떻게 해 놓고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때 걷지 않은 빨래가 넘치고, 구석에는 먼지가 풀썩이고, 인스턴트 소바 용기의 탑이 쌓여 있겠지. 그렇지만 도무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건 지금 우주에서 가장 사소한 문제였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는 행위가 또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남쪽으로 태평양을 질주해 나가면 닿는 초승달 모양의 섬에서였다. 열대의 무더위를 피해서 둘은 오쿠토 섬의 명물을 찾았다. 갱 오르카의 수족관은 벽 전체가 원통형으로 휘어진 유리수조였다. 물고기들의 너른 지느러미가 날갯짓할 때마다 수면이 울렁여 청명한 빛을 산란케 했다. 바쿠고의 온몸에 빛과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파도 무늬를 새기며. 토도로키에게도 같은 음영이 일렁이는 걸 하염없이 지켜보던 바쿠고의 눈빛.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가피한 기억을 피하려 했던 지난날의 토도로키는 믿을 수 없이 어리석었다. 

수족관을 나와서 레몬 탄산수를 나누어 마셨다. 맞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도 놓지 않았다. 맑은 청록이 아름답던 바다 위로 갈매기들이 높이 날아갔다. 구불구불 하얀 모래톱을 따라서 그들은 맨발로 걸었다. 수평선에서부터 노을이 밀려와 해안가를 백금빛으로 물들였다.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는 낙조 속에서 토도로키는 이미 알았던 것만 같다. 그 황홀한 저녁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를지. 

오후의 기나긴 빛이 시작되고 있었다. 침실과 주방이 딸린 너른 거실에 넘실거리는 오렌지빛. 그날의 일몰이 이 한낮으로 번져 오고 있었다. 토도로키는 결정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고.

“가지 마, 카츠키.”

첫 요비스테였다. 한번도 카츠키를 카츠키라 불러 보지 못할까 봐 내내 두려워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카츠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위로는 강렬한 붉은빛이 토도로키를 반겼다. 루비를 깎아 만든 소년만이 지닌 눈동자였다. 신기루 같았던 기억도 점점 보석처럼 단단해지며 춤추는 듯한 형상이 생겨났다. 어느새 또 하나의 잘 알고 사랑하는 얼굴을 마주했다. 오로지 승리만을 내다보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여름의 품으로 돌아갔다. 해변에서 카츠키는 이미 말하고 있었다.

반쪽이는 듣거라. 네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까. 우리는 누구나 심장에 한 사람 모양으로 도려낸 구멍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자리를 자세히 들여다 봐. 손끝의 지문으로 더듬고 귀를 기울여 봐. 작은 폭파들의 경쾌한 소리가 들려와. 너를 위해 샛별들이 부르는 노래야. 입안에는 간지러운 레몬 탄산이 느껴지겠지. 태양의 맛이 혀를 적시고 있으니까. 눈을 감아도 밝다고 놀라워하지 마. 태양이 다가올 때 저항하는 바보 같은 달은 없으니까. 그 빛을 받아도 돼. 흠뻑 잠겨도 괜찮아. 네게 꼭 맞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투항해. 속 터지도록 답답한 반땡이라도 이만하면 알아들었지? 그게 누군지.

그래, 나야. 카츠키의 웃음은 눈이 부셨다. 쇼토,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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