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

To Perish Twice

🎶 by A

* 제목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Fire and Ice에서 인용했습니다.


한겨울이었다. 세코토 언덕은 몹시 적막했다. 흙바닥과 나뭇가지마다 눈이 덮였거나 성에가 앉아 있었다. 생명이 사라진 듯한 살풍경이었다.

쇼토는 흥분으로 마비되어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발이 미끄러지는 것도 모르고서 쇼토는 언덕을 올랐다. 그 자신의 거친 숨소리, 발 아래 눈이 뽀득거리거나 돌조각이 채이는 것밖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쇼토는 외투도 입지 않고 흰 셔츠와 푸른 면바지에 단화를 신고 나왔는데, 동산 정상에 닿아 땀이 식으니 그제서야 뼈가 시렸다. 

언덕 꼭대기는 공터였다. 괴괴하고 캄캄한 숲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둘러치고 있었다. 쇼토는 거의 빛이 없는 밤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토우야가 죽은 정확한 위치를 줄곧 찾고 싶었다. 아무 단서도 없었지만 공터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이곳이라는 직감이 왔다. 탁 트인 시야로 보나, 높은 고도로 보나. 언덕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는 상상은 얼마나 단침이 고이게 했던가. 오늘은 쇼토의 생일이었다. 토우야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었다. 

이곳에 오르려고 쇼토는 열셋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꼭 그 나이의 토우야가 아버지를 어떻게 망쳤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망가져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마 토우야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하지만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단 한 가지였다. 제 손으로 제 아이를 사지에 보낸 악마가 되게 하기. 그보다 더한 징벌은 없을 것이다. 쇼토가 그 사실을 깨친 건 지난 겨울이었다. 토우야의 기일에도, 어쩌면 토우야의 기일이라서, 쇼토의 훈련은 여느 날처럼 이루어졌다. 단 자정을 넘길 예정이었던 훈련이 그날만은 삼 분 단축되었다. 엔데버가 제단에 향을 피우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급히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형한테 고작 삼 분이라니. 미안해. 쇼토는 불을 끈 훈련장에 홀로 앉아서 생각했다. 형보다 내 죽음을 더 슬퍼할 거라는 것도 미안해. 바꿀 수 있다면 바꿔 주고 싶었다. 토우야보다는 쇼토가 엔데버한테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힘을 지녔다. 쇼토가 태어날 때부터 변함없이, 진절머리가 나도록 그래 왔다. 엔데버는 누구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그 누구의 저주도 엔데버에겐 효력이 없었다. 그를 좌지우지할 가망이라도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쇼토뿐이었다. 

적어도 쇼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막상 쇼토가 앞으로 나서서 엔데버를 말릴 수 있었던 적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는 것이다.

쇼토는 밤하늘의 엷은 빛과 눈밭의 반사광에 의존해 잔가지를 주웠다. 연료 없이도 쇼토의 불은 타올랐지만 실수로라도 꺼지지 않도록 확실히 해 둔다는 주의였다. 맨손이 시린 줄도 몰랐다. 쇼토는 얼기설기 얽은 장작에 왼손을 얹었다. 역시 불이어야 했다. 토우야와 완전히 똑같은 방법이어야 의미가 있었다. 얼음으로 숨구멍을 막는다거나 얼음칼로 짧게 끝낸다거나, 오른쪽 개성이 좀더 자비로웠지만 어머니의 선물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엔지와 쇼토 사이의 일이었다.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고 없었다. 흰색 토끼 한 마리가 그루터기에 웅크리고 있어 숲으로 쫓아보냈다.

공터에 살아 있는 것이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 쇼토는 심호흡을 했다. 춤추는 불씨를 올려보내는 장작불의 주홍색 심지를 바라보다가 주저 없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평범한 모닥불이었고, 쇼토의 몸이 너끈히 따라잡을 정도로만 뜨거웠다. 

쇼토는 온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훈련에서 아버지가 밀어붙였던 한계에 다다랐다. 지금까지의 최고 온도를 재현하는 것만도 결코 편안한 길은 아니었다.

어린 토우야는 들떠서 외치고는 했다. “이것 봐! 마음이 끓어오를수록 불꽃도 굉장해진다니까! 왜 그런 걸까, 아빠?” 형의 말대로라면 쇼토는 감정이 격렬하지 않아서 불도 그만그만한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쇼토의 마음에는 오래 진물을 흘리고 딱지가 앉은 슬픔과 분노가 자리잡았지만 통제를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차갑게 작열하는 불이 아니라 그저 뜨겁고 붉었다. 조금 더 밀어야 했다. 

이 언덕에 오르던 동갑의 토우야와, 그러고서도 엔데버가 뉘우치지 않은 지난 팔 년을 떠올리고서야 쇼토의 살갗을 핥는 불이 서서히 서늘해졌다. 불의 반경에 있는 눈은 전부 녹았을 텐데 눈앞이 눈밭처럼 하얗게 빛났다. 토우야의 불은 푸르렀는데 쇼토의 불은 얼음처럼 희고 투명했다. 그게 쇼토의 방식인지도 몰랐다. 토우야와는 다른. 정말 그런지 아무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쇼토는 조금씩 꾸준히 나아갔다.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짓이라 해도 그 과정은 암벽을 한 손씩 차근차근 짚어 오르는 것과 비슷했다. 서늘함을 넘어간 불이 마침내 얼어붙었다. 심장에 대고 고드름을 문지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 불이 쇼토의 몸을 도자기 깨듯 쨍그랑 깨뜨릴 때까지 아주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시하며 견디던 통증도 눈보라가 되어 몰아쳤다. 좋은 전조였다. 몸의 모든 구석이 고통에 타들어갔다. 피부 위로, 피부 바로 아래로, 거의 동시에 뼛속으로 불이 기어가는 고통. 불을 끌어올리는 왼쪽 심장께가 가장 통렬하게 아팠다. 동맥의 피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작은 방울로 증발했다. 증발이 곧 허파로 번졌다. 피가 사라지듯이 숨도 사라졌다. 들숨 한 번을 들이쉴 수조차 없었다. 호흡기가 재로 뒤덮인 것 같았다.

드디어 불길 가장자리가 파랗고 난폭하게 날름거렸다. 토우야의 불처럼. 화염 속에서 쇼토는 앞으로 쓰러졌다. 검은 아지랑이가 벌레 떼처럼 날아다니더니 곧 눈을 도려낸 듯이 아무것도 안 보였다. 거의 다 왔다는 뜻이야. 그것밖에 쇼토는 생각을 할 수 없어졌다.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 누군가 폐가 터져나가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음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이상으로 격분해 있었다. 목소리는 곧바로 귓가를 찌릉찌릉 때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환청이겠지. 쇼토는 그렇게 믿었다.

사방에서 펑펑 하고 폭발음이 난무했다. 로켓이 쏘아올려지듯이 쇼토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화염이 난동을 부리는 통에 공기가 가벼워져 물건을 띄워 올리는구나. 불의 물리학을 잘은 모르지만 쇼토는 혼란한 머리로 그렇게 넘겨짚었다. 불이 아니라 사람의 짓이라는 걸 안 건 오른손 때문이었다. 쇼토의 오른손이 또 하나의 오른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역광 속에 머리카락과 팔다리의 선만 검게 보였다. 

쇼토는 경악했다. 그만 불을 유지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쇼토에게 처음 든 생각은 아버지에게 들켰다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만큼 건장한 체구가 아니었다. 그 반이나 될까 한 소년이 쇼토를 공터 구석에 내려놓았다.

“야! 정신 차려!”

소년이 쇼토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욕설을 주워섬기며 자기 손바닥을 매만졌다. 물집이 돋아오르고 있었다. 화상이 소년의 손에서 손목을 타고 점점 넓은 범위를 뒤덮었다. 발아래 언덕을 따라서도 불이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창백한 자작나무들이 하나씩 차례차례 타들어갔다.

“야! 어이! 들려? 내 말 들려? 움직일 수 있겠어? 언덕 입구에 내려 줄 테니까 소방관부터 불러! 내가 일단 끄고 있을 테니까.”

쇼토의 얼떨떨한 무반응에 소년은 거침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물집이 잡힌 손바닥으로. 땅에 머리를 세게 박고서야 쇼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쇼토의 오른쪽 발치부터 얼음이 땅을 타고 퍼져나갔다. 숲에 옮겨붙은 불을 향해서 술래잡기를 하듯이. 얼음 기둥 하나는 소년의 손으로 올라갔다. 물집이 번지는 것만은 막았지만 이미 살결이 온통 부르텄다. 불에 뛰어들던 소년이 어찌나 빨랐는지 찰나간 손만 담갔기에 그만큼만 다치고 끝났다. 반의반 초만 더 머물렀어도 몸 전체가 괴사했을 것이다. 

쇼토 본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불 개성을 피워올리는 심부에 내상을 입은 건 분명했다. 아직도 뱃속은 차가운 불이 든 양 쓰라렸고, 놀란 심장은 불규칙한 박자로 뛰었다. 눈에 띄지 않는 종류의 부상이었다. 소년이 보는 쇼토의 겉모습은 멀쩡할 것이다.

소년은 쇼토를 관찰하며 천천히 자세를 고쳐 섰다. 쇼토를 채근하는 말투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얼음⋯⋯. 설마 개성이 두 개냐? 다시 해 봐. 자세히 좀 보게.”

“너도 타 버리기 전에 사라져.”

쇼토는 차갑게 내뱉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속이 아파서인지, 다시 추위를 느껴서인지는 분별할 수 없었다.

“이런 데서 뭐하는 거야?”

“하? 누가 할 소릴? 난 연습하기 좋은 곳을 찾은 게 다야. 어딜 가나 사람이 드글드글해서 폭파를 쓸 수가 없다고. 이 언덕은 내 거야. 너야말로 왜 열 내성에다가 얼음까지 있는데? 그건 또 뭔 잡종이냐?”

쇼토는 함부로 말을 뱉는 소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하는 건가? 마음이 어지러이 소용돌이쳤다. 순간적으로나마 엔데버 다음으로 소년을 증오하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쇼토는 현기증을 참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소년은 지지 않고 마주보았다. 쇼토의 냉랭한 침묵에 소년은 이를 갈며 자존심을 세웠다.

“뭐, 이유 따위 몰라도 된다. 안 중요해. 나한테 중요한 건 딱 하나야. 재미를 좀 봐야겠다. 반땡이 개성은 처음 봤거든.”

쇼토한테 기대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소년이 원하는 대로 놀잇감이 되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세코토는 남을 만족시키려고 오르는 언덕이 아니었다.

“나와 싸워라.”

소년은 주먹을 쥐고 발을 앞뒤로 짚으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쇼토가 공격하길 기다렸다. 쇼토가 다가오지 않자 소년은 성급하게 재촉했다. 성마르고 뻔뻔한 말투에 쇼토는 다시 혐오를 느꼈다.

“개성이 두 개든 백 개든 뼈도 못 추리게 해 주마!”

그래도 쇼토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선제공격이 날아들었다. 소년은 손에서 폭죽 같은 빛을 튀기며 날아올라 쇼토에게 돌격했다. 상상 이상으로 빠른 소년이었다. 대응할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마지막 순간에 얼음으로 막아낼 틈새가 보였지만 쇼토는 반격할 의사를 꺾어 버렸다. 공격은 그대로 명중했다. 소년의 머리가 쇼토의 윗배를 강타하는 순간 눈앞이 뒤집어졌다. 

쇼토의 몸이 바닥을 거칠게 굴러 눈밭에 낙하했다. 쇼토는 위장을 쏟아낼 듯한 기침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고서 간신히 맨정신을 되찾았지만, 자세를 고쳐앉을 새도 없었다. 소년은 바로 목을 겨냥해 왔다. 적당히 할 작정이 아니구나.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자각이 그제야 들었다.

탄도 미사일처럼 가까워지는 소년은 손을 통해 추진하고 있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어둠 속에 궤적을 남겼다. 한밤중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후미등이 남기는 빛의 꼬리처럼. 손에서 어떤 물질을 방출하는 개성으로 보였다. 그러니 손만 무력화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얼음벽이 우뚝 솟아났다. 소년은 피해서 돌아가려 했지만 얼음의 폭이 너무 넓었다. 어깨가 얼음에 맞아 경로가 틀어졌다. 소년은 곡예사처럼 유연하게 방향을 재조정하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하지만 쇼토는 소년의 손이 시야에 들어오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쇼토의 손부터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얼음 광선에 소년의 손이 얼어붙었다. 소년은 한 손을 얼음에 붙들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발밑 땅에서부터 새로운 얼음을 만들까? 다리까지 얼려서 아예 고정시켜 버릴까. 쇼토는 한 걸음 더 나서려다가 망설였다. 민간인을 도 이상으로 제압하는 것은 히어로 행동강령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수칙도 엔데버가 들볶아 가며 가르쳤다. ‘넌 최고의 히어로가 될 거니까 행동강령도 전부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엔데버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놓고 그 강령을 어기지 않았던가? 어머니에게?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어딜 얕봐? 한 손만 막으면 다냐, 아앙? 난 이제 시작이니까! 얼빼지 마!”

소년의 일갈이 쇼토를 백일몽에서 깨웠다. 다른 주먹으로 얼음을 깨부순 소년이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마구 비볐다. 도망칠 시간은 아주 적었다. 쫓고 쫓기는 사냥 놀이가 금방 재개될 것이다. 소년은 곧바로 재돌격해 왔고 쇼토는 등을 돌려 뛰었다. 이따금 돌아보며 얼음을 발사했지만 소년은 잽싸게 손에서 예의 물질을 쏘아 깨부쉈다. 요란하게 터지는 굉음과 섬광으로 미루어 보아 화약 비슷한 물질이었다. 

쇼토는 공터 가장자리까지 금방 밀려났다. 짙은 어둠이 도사리는 숲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서 맞아 주었다. 수림이 시야를 가리기 직전이었다. 지물이 많고 좁을수록 쇼토의 개성은 불리해졌다. 불은 그나마 부피라도 없었지만 얼음은 그렇지 못했다. 얼음이 자라날 공간을 확보하려면 탁 트인 곳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소년의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지는 듯이 가까워졌을 때, 쇼토는 얼음탑을 딛고 하늘로 도약했다. 소년은 곧장 솟아올라 쫓아왔다. 끝내 둘은 공중에서 다시 만났다. 쇼토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불에 뛰어들었어?”

“뭐?”

“왜 쫓아왔냐고!”

“네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잖아! 불 속에서! 누가 듣고 구해달란 것 아니야?”

쇼토는 자기가 비명을 지르는 줄도 몰랐다. 그랬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쇼토는 확신했다. 소년은 쇼토를 속이려는 것이다. 설마 아버지가 보낸 놈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물리쳐야 했다.

“아니야! 착각하지 마.”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힘없고 절박하게 들렸다. 쇼토는 왼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년이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던졌다.

“뭐 아무튼, 제대로 싸워라!”

“너한테 관심 없어.”

소년은 칫 하고 입꼬리를 삐죽였다. 소년이 팔을 힘차게 휘두르자 공중에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빛나더니, 잠시 후 지연된 폭발이 창공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쇼토는 얼른 얼음벽을 끌어올렸다. 이번 폭발은 위력이 강했고, 불규칙한 타이밍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얼음을 점점 두껍게 만들어야 했다. 반대편에서 지면을 뒤흔드는 쿵쿵 소리가 울렸다. 험악한 낯의 소년이 벽을 무너뜨리고 어느새 코앞에 와 있었다. 쇼토는 훌쩍 물러나 다시 얼음을 쏘아올렸다.

소년도 제법 잘했다. 쇼토가 본 또래라 봐야 나츠오나 같은 중학교 학생들 정도였지만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이 하나가 나았다. 하지만 개성을 다루는 노련함은 쇼토가 확연히 위였다. 엔데버의 훈련이 유감없이 효과를 발휘한 덕에 얼음만으로도 쇼토는 소년과 호각을 이루고 남았다. 

둘은 몇 번이고 비슷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얼음은 생겨나기 무섭게 소년에게 폭파를 당했다. 거리를 좁혀 오지 못하게 쇼토는 얼음을 고드름 형태로 뾰족하게 쏘아 보냈다. 장창을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격을 방출한 즉시 쇼토는 멈칫하며 후회했다. 민간인에게 무기를 겨누다니, 이래서는 그 작자나 똑같잖아. 얼음으로도 대처하지 말아야겠다. 신경이 너무 곤두서서 잘못을 저질렀다. 쇼토는 입안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소년은 제때 물러나서 찔리지 않았다. 쇼토의 얼음창들이 폭발해 불꽃놀이를 일으킨 후 눈이 되어 내렸다. 그래도 위험한 기술은 꺼내지 말아야지. 자칫하면 저애가 다칠 수도 있었어. 쇼토는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다짐했다. 

불로 공격한다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아까 한 번 화상을 입었으니까. 하지만 또 데이게 할 수는 없는데⋯⋯. 양쪽 개성을 모두 틀어막으니 쇼토는 할 수 있는 게 남지 않았다. 소년의 손바닥이 쇼토가 딛고 선 얼음탑의 허리를 노렸다. 일순간에 발밑이 무너졌다. 

쇼토는 저항하지 않고 그냥 추락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소년이 와서 구해 냈다. 쇼토의 어깨를 한 팔로 붙들고서 소년이 다그쳤다.

“야, 장난하냐? 얼음을 다시 쏴야지! 왜 그냥 떨어져? 뒤지고 싶어?”

쇼토는 대답하지 않았고, 소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눈동자에 타오르던 기운이 시시각각 변했다. 호전적인 혈기에서, 놀라움으로, 그리고 깊이 침잠하며.

“그럼 아까 불도 네놈이⋯⋯.

소년의 요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변했다. 쇼토는 다시 멱살을 잡혔다.

“그렇게 불을 질러댈 줄 알면서 이젠 안 쓰는 거냐? 결투가 우스워? 이 반땡이 자식이, 진지하게 해라! 당장 불을 피워!”

쇼토가 무시하자 소년의 눈썹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얼굴에 울분이 더해 갔다. 소년의 불만족이 쇼토의 머릿속에 깨달음의 등불을 서서히 밝혔다. 불을 지르는 것만큼이나 지르지 않는 것도 파괴적이었다. 상대가 갈망하는 기쁨 따위 절대로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잔인한 만족감이 쇼토를 휩쓸었다.

갑자기 바닥이 다가와 둘을 덮쳤다. 고도가 낮아지는 걸 둘 다 몰랐던 것이다. 몸이 포개어진 채로 그들은 몇 바퀴나 굴렀다. 팔다리가 누구 것인지 알기 힘들 지경으로 마구 겹치고 엉켰다. 마침내 낙엽 더미 위에 멈추었을 때, 소년은 쇼토의 귓가에 신음을 흘렸다. 갈비뼈 부근을 쥐고 움츠리며. 쇼토는 그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다치게 만들었나? 이길 결심은 하지 않았다. 다치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아니었다. 이 전투의 결말이 어때야겠다는 구상조차 없이 쇼토는 기계적으로 방어하고 회피했을 뿐이었다.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웅크렸던 소년이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리고는 멈춰세울 수 없는 집념으로 다시 쇼토에게로 왔다. 이번에는 면전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대신 입술을 떼었는데 쇼토는 듣지 않았다. 드디어 쇼토에게도 이 싸움의 목표가 심어졌다. 빨리 끝내는 것, 그게 다였다. 이 소년을 떼어놓고 도망치는 것. 이 소년은 방해물이었다. 빨리 훼방꾼을 치워 버려야 했다. 빨리 치우고 — 하려던 일을, 본래의 목적을 — 뭐였지? — 빨리 —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소년이 절뚝절뚝 쫓아왔다. 쇼토는 달렸다. 손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속도를 높이길래 쇼토도 얼음으로 길을 냈다. 한참 빙판길을 달렸더니 간신히 따돌린 것 같았다. 어두워서 알기는 힘들었지만. 숨소리와 발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환청일지도 몰랐다. 쇼토 자신의 숨소리인지도. 마른 수풀과 덤불이 코앞에 우거져 있었다. 공터를 멀리 벗어나 길이 아닌 산중에 와 있었다. 사방에서 나뭇가지가 때리고 찌르는 바람에 쇼토는 팔로 막으면서 치울 수 있는 장애물은 집어 내던졌다. 날카로운 가지에 베여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생채기 같은 건 문제조차 아니었다. 소년이 또다시 쫓아와서 쇼토를 막지 못하게 숨어야 했다. 그래, 숨자. 도망쳐야 해. 그것만이 중요해 — 쇼토는 자기만의 얼음집을 짓고 다시 불을 지피려 했다. 물론 사리 분별을 잃은 판단이었다. 당연히 불이 얼음집을 녹여 버렸다. 다시 시도하기도 전에 쇼토는 소년에게 왼손을 붙잡혔다. 

소년이 말없이 쇼토를 들여다보았다. 붉디붉은 눈이 이글거렸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년은 한 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낱말마다 굳은 다짐이 뚝뚝 떨어졌다.

“내 히어로생에 오점을 남기지 마. 구조에 실패한 시민 카운트가 이렇게 일찍 올라간다고? 왜 개죽음에 미쳐 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어림도 없지.”

“개죽음? 이건 복수야.”

“뭐라는 거야? 전장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명예롭게 전사하는 것 말고는 다 개죽음이야.”

소년은 어떻게 죽음이 복수가 될 수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쇼토가 찬찬히 설명할 틈도 없이 소년은 경멸 어린 투로 조소했다.

“너, 중 이쯤 되냐? 하, 복도 많네. 중이병이 제때 오는 것도 복이라니까.”

그 말에 쇼토는 이해시키길 단념했다. 마음 가장자리부터 서리가 내렸다. 곧 내면 전체에 번지며 열을 식혔다. 쇼토는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했다. 이 사람과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엔데버가 쇼토에게 주입한 관념 그대로였다. ‘너는 남들과는 다른 세계의 인간이다.’ 

쇼토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소년의 깊은 곳을 자극하고 말았다. 소년의 형형한 눈동자 안쪽에서 굵은 밧줄 하나가 툭 끊어졌다. 소년이 나지막히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뒤지고 싶으면 내가 죽여 주지. 삼 년 후에 유에이로 와라.”

유에이? 아버지는 쇼토를 거기 수석으로 집어넣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설마 정말로 아버지의 끄나풀인가? 쇼토가 파악하는 데는 꽤 걸렸다. 전국에서 가장 빛나는 재능이 모여드는 곳이 유에이였다. 소년은 그런 일반적인 얘기를 한 것이다.

쇼토가 멍하니 곱씹느라 가만히 있자 소년도 잠시 방심했다. 소년은 쇼토의 손을 놓더니 거들먹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또 무슨 일장연설을 하려는지 부르튼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그 순간을 노려 쇼토는 얼음으로 소년의 손발목을 옭아매 놓았다. 수갑 정도 크기로 만들려 했는데, 체력 고갈로 손이 심하게 떨려 제대로 조정할 수가 없었다. 파바박 소리와 함께 두터운 빙결이 치솟았다. 쇼토는 왼손을 얼음에 덮어 적당한 크기로 줄였다. 곧 동이 틀 테니 햇빛이 나머지를 녹일 것이고, 그럼 동상을 입는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어디까지 다치면 어디까지 회복되는지 쇼토는 엔데버가 날마다 심어 놓은 경험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고 쇼토는 헐떡이며 소년에게서 멀어졌다.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몸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야! 야, 너 이름이 뭐야! 비겁한 새끼! 이 반쪼가리 새끼, 다시 만나면 내가 제대로 꺾어 줄 거다. 잊으면 죽인다!”

소년은 포박당한 채로 몸을 뒤틀며 포효했다. 쇼토는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누가 들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너울거리며 차올랐다. 쇼토는 언덕을 뛰어내려오다 넘어졌다. 덤불 속으로, 나무 사이와 골짜기로 굴렀다. 위아래의 구분을 잃어버리고 미끄러지며 쇼토는 돌부리에 어딘가를 찧었다. 그게 몸의 어디였는지도 모르는 채로 또 일어나 달리다 넘어지길 반복하다가,

중턱 어디선가 실신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언덕 어귀였다. 철조망이 웅크린 쇼토의 등을 찔렀다. 온몸에 눈이 묻어 있었다. 밤을 지나 새벽으로 파르스름히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서광을 기다리며 눈밭이 약하게 빛났다. 온 천지가 아주 고요했다. 공기를 찢는 폭발음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고막에 대고 고함치는 것 같던 목소리도 간데없었다.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 오직 쇼토의 귓가에만 아직도 생생한 목소리. 

쇼토의 둥근 두개골을 성당 천장의 돔 삼아 울리는 목소리. 내가 널 끝장낼 수 있게 유에이로 와라. 이름을 밝혀라. 내 오점이 되지 마. 쇼토는 떨며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이마에서 묽은 피가 배어나왔다. 품 안의 물건을 놓쳐 와르르 쏟듯이 쇼토는 현실감을 잃어버렸다. 전부 꿈만 같았다. 마치 전투는커녕 이 밤을 향해서 엄정하게 내려 온 결단조차 없었던 것만 같았다. 여전히 생명의 증거라곤 없이, 돌연한 목소리만이 남은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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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로운 딱다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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