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로 물을 끓이지 마세요

토도로키 가족 + 쇼토 & 바쿠고 + 호크스

※ 약 6천 5백자


1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한 동안 집안의 누구도 주전자에 물을 끓여 마시지 않았다.


2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토도로키 쇼토는 하루에 스물세 시간 가까이 깨어 있었다. 남은 한 시간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잤던 쪽잠이 전부였다. 타고나길 몸이 건강하고 걸음마를 떼던 날부터 개성을 단련했기에 체력이 좋아서 쉬이 지치지는 않았지만 평화롭지 않은 세상의 히어로는 피곤해 하곤 했다. 오늘도 새벽부터 점심시간 전까지 세 건의 빌런 검거. 방금 전에는 어린이TV 채널의 <오늘의 히어로-쇼토편2>의 인터뷰 점검까지 마치고서야 쇼토는 잠시 베스트 지니스트 히어로 사무소에 들렸다.

오늘 저녁에는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와의 팀업이 있다. 나르시즘이 강한 빌런이 베스트 지니스트에게 규모가 큰 테러범죄예고장을 보내왔다. 현재 경찰과 다른 히어로들이 발맞춰 빌런을 찾기 위해 도시를 뒤지고 있지만 빌런의 행방은 묘연했다. 빌런의 개성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장거리 공격형의 히어로는 필수 배치다. 합을 여러 번 맞춰본 동기들끼리 팀을 맺어주는 건 유에이 고교 출신 프로 히어로들에겐 관습처럼 행해졌다.

모두가 긴장된 상태에서 순찰을 돌고 있다. 쇼토가 이틀 동안 빈 속이라는 걸 알아챈 건 대기하고 있던 카츠키가 먼저였다. 야 토도로키. 너 식사 안 했냐? 카츠키의 물음에 쇼토는 커다란 눈만 큼지막하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걸어들어오는데 무릎 탁 치면 푹 쓰러질 것처럼 후들후들하더라니. 카츠키는 쇼토에게 사무실에 비치된 정수기에서 미지근한 물을 떠다줬다. 눈앞에 있으면 성질 뻗치니까 이거 마시고 아래층의 휴게실에나 가라. 거기 간단하게 먹을 것도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음 알아서 처먹어.

건물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흐렸던가. 하늘이 온통 잿가루 흩뿌린듯 회색빛이다. 

쇼토는 찬장 속에 듬성듬성 채워진 인스턴트 식품과 냉장고에 들어있는 편의점 주먹밥을 보았다. 기획사 내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히어로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냉장고엔 특히 마시다 만 음료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포스트잇으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을 마실까. 궁금했는데 남은 음료 중에 카츠키의 것은 없었다.

찬장을 빤히 바라보던 쇼토는 뜨거운 물에 불렸다가 차갑게 헹궈서 먹는 인스턴트 소바를 집어들었다. 마침 싱크대도 간단하게 놓여 있어서 설거지도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쇼토는 짧은 손톱을 세워 비닐포장을 뜯고, 얇은 뚜껑을 열었다. 힘 조절에 실패해서 뚜껑 끝이 찍 찢어지고 말았지만 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물을 끓이기 위해 빈 전기포트를 들고 저벅저벅 정수기에 다가간다. 물을 받았다. 찬물 뜨거운 구분 없이 정수만 나오는 제품이었다. 조르륵 소리가 무심하게 공간을 메우다 툭 사라진다. 쇼토는 적당히 채워진 물을 내려다 보며  전기포트 버튼을 꾹 눌렀다. 기다리는 동안 휴게실의 소파에 엉덩이를 대어본다. 앉자마자 꽃잎에 감싸 안기는 느낌이 들어 쇼토는 깜짝 놀랐지만 금방 표정이 풀어졌다. 파이버 개성 소유자의 기획사 최대 복지는 소파로구나. 진심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며 쇼토는 거칠한 손바닥으로 소파를 쓸어본다. 손끝에 닿는 천이 녹아내릴 듯 보드랍고 쿠션의 솜은 솜사탕처럼 흐물어진다. 담요를 덮으면 어쩐지 잠들 것만 같아 일단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임무에서 돌아온 카츠키도 이곳에서 잠든 적 있을까. 잠깐 딴생각을 한다. 쇼토는 분명 손으로 소파를 슥슥 쓰다듬으며 물이 끓길 기다렸는데 어느 새 눈이 감겼다.

몸이 아주 피곤하면 꿈을 꾼다. 그것도 아주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마주한다. 꿈에서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모른다는 게 문제,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싸그리 사라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문제의 꿈은 바뀌지도 않고 쇼토를 부엌으로 내몰았다. 쇼토는 부엌을 넘어들어가는 문지방을 밟고 서 있다. 양말을 신은 채다. 발바닥 아래에서 시원한 다다미의 질감이 느껴진다. 집이다. 쇼토가 어릴 때부터 줄곧 살아온 일본식 가옥의 부엌 앞. 부엌 안쪽에 사람 한 명이 서 있으며 그 앞에 놓인 주전자의 물이 바글바글 끓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꿈이었다. 문안쪽의 사람을 보고 싶은데 잘 볼 수가 없다. 주전자 속 물이 펄펄 끓어서, 저걸 꺼야 할 것만 같은데. 쇼토는 부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부엌 안에 서 있는 사람의 전화 받는 목소리는 신경질적이다. 뭐? A지구에 물대포를 쏘는 거대빌런? 젠장! 뭔 놈의 땅덩어리에 빌런이 이렇게나 많아?! 아주 다 박살을 내주마! 목소리가 아주 뚜렷한 꿈이다. 물이 끓는 소리는 조금도 조용해지지 않는데, 왜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이지 않는 걸까. 부엌 안쪽의 사람은 어딘가를 가버린다. 저 주전자는 그럼 어떡하고. 다이나마. 쇼토는? 누군가 조용히 묻고, 처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마! 라고 부엌의 사람은 대답한다. 쇼토는 여전히 문지방을 밟고 서 있다. 부엌과 문 사이로 틈이 있는데. 이 틈을 열고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주전자가 시끄럽게 휘파람을 불고 물이 퍼덕퍼덕 넘쳐 흐른다. 주전자는 살아있는 존재처럼 비명을 지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냐.

나를 깨워줘.

나도 데려가.

쇼토가 번쩍 눈을 떴다. 연인의 품안에서 벗어나 듯 헐레벌떡 휴게실을 나선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카츠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저 멀리 성큼성큼 달려가는 중이었다. 쇼토는 단숨에 카츠키를 따라잡았다. 잠 든 거 아니었냐? 비웃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쇼토가 조용히 대답했다. 깨어 있었어.

전기포트는 일정 온도로 물이 덥혀지면 자동적으로 멈췄고, 인스턴트 소바는 뚜껑이 열린 채다.

긴 시간 비가 내렸다. 빌런이 쏟아내는 물에 일반 시민들이 휩쓸렸다. 강물이 범람하여 도시가 마비 되었다. 히어로 대폭살신 다이너마이트와 쇼토가 나서서 빌런을 검거했다. 개성이 물과 상성이 좋지 않음에도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사건을 해결한다. 사람들을 대피소로 옮겼다. 온몸이 비에 젖었다. 눈을 감으면 뒤로 쓰러지거나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아 옆에 나란히 선 히어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졸리냐? 처 자고 있었으면 내가 혼자 해결했을 텐데 뭣하러 따라 나와? 카츠키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3

붕대에 감긴 쇼토의 왼쪽 얼굴을 슬쩍 보던 토우야가 나츠오에게 물었다. 시력은 문제 없대? 나츠오가 어금니를 악물며 대답한다. 응.

그래? 아쉽네.

뭐?

아, 아니지. 쇼토가 한쪽 눈이 안 보이면 아빠가 더 신경을 쓸 테니까…….

나츠오가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토우야를 바라본다. 토우야는 식은땀을 흘리며 히죽 웃었다. 아니라니까, 나츠군. 말이 잘못 나온 거야. 실수야, 실수.

*

엄마를 대신해서 후유미가 매일 쇼토의 화상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쇼토는 한동안 세수를 하지 못했고 집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공기 중에 노출 된 화상 피부는 바람이 닿기만 해도 수백마리의 개미가 깨무는 듯 따가웠고 세숫물이라도 닿으면 끓는 물을 끼얹은 듯 뜨거워지는 피부에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왼쪽 눈가의 피부색이 거뭇하게 변했다. 쇼토의 화상 흉터를 보며 후유미가 안쓰러운 한숨을 내뱉을 때, 그것이 쇼토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흉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탓에 아빠에게 혼날 것이 무서워서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

함께 하교하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쇼토의 왼쪽 얼굴을 본 누군가 어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라도 하는 날엔 후유미는 방안에 틀어박혀 끙끙 앓았다. 가족 모두 미지근하고 차가운 물만 마셨다. 아, 이 아이가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요. 그게 후유미가 대신하는 거짓말이었다. 사고. 쇼토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어렸던 쇼토도 후유미가 시켜서 한동안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쇼토에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편지를 쓰다가 아빠에게 들키면 찢겨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한 번은 후유미가 찢긴 쇼토의 편지 조각을 꺼내어 맞춰준 적 있었다.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엄마 병원에서 언제 돌아오세요? 보고 싶어요. 앞으로 말도 잘 듣고 착한 쇼토가 될 게요. 후유미는 어린 쇼토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후유미의 안경에 투명한 물이 얼룩졌다. 쇼토. 앞으로 이런 편지 쓰지 마. 누나랑 약속해. 엄마에게 편지 보내지 않기로.

종종 쇼토는 엄마를 부르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못해 겨우 잠들었다. 엄마를 떠올리다가 한번도 제대로 섞여서 시간을 보내본 적 없던 형제들이 엄마의 부재로 인해 자주 얼굴을 맞대었다. 아무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고 아무도 히어로를 언급하지 않았다. 후유미가 애썼지만 곧 형제 중 누구도 의지를 갖고 대답할 만한 의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토우야와 쇼토 모두에게 히어로는 금지 단어였다.

아빠도,

히어로도,

올마이트도,

엔데버도.

식사가 끝난 후 토우야는 쇼토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갔다. 제 허리 쯤에 키가 닿는 쇼토의 색깔 다른 머리카락을 아프게 헝크러뜨린다. 쇼토는 토우야가 밉지 않았다. 토우야만이 쇼토의 왼쪽 눈을 아주 오래 들여다 보며 웃어준다. 아빠는 꼴보기 싫어하고 후유미 누나와 나츠형은 눈을 질끈 감는데. 토우야 형은 보석을 보는 듯 쇼토의 흉진 왼쪽 뺨을 봐주었다.

옷을 벗은 토우야의 드러나지 않는 가슴팍과 허벅지는 옅은 화상을 입었다. 받아놓은 목욕물이 닿으면 쓰라리는 고통과 숨을 한꺼번에 참았다. 쇼토는 그 아픔을 알아서 왼쪽 눈을 여러번 깜빡거렸다. 터질 뻔한 비명을 삼킨 토우야가 억눌리고 친절한 웃음을 짓는다. 푸르스름하게 질린 목소리로 쇼토에게 말했다. 쇼토. 올마이트를 뛰어넘는 건 나야. 너는 내가 혼자서 어떻게 훈련하고 있는지 모르잖아. 네가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나중에 형이 보여줄게. 나 여기저기 다친 거 보이지? 진짜 대단한 화염이거든. 어라, 표정이 왜 그래. 아빠한테 이르는 거 아니지, 쇼토? 

4

기자회견을 마친 호크스에게 쇼토가 찾아왔다. 호크스는 입술 끝이 간지러운 듯 손으로 마른 각질을 잡아 뜯었다. 피가 맺히진 않았지만 뜯긴 자리가 발갛게 변했다. 호크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생수병에 입을 대고 마신다. 엔데버 씨를 찾으러 왔냐는 둥, 많이 다쳤었는데 그래도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는 둥, 다친 곳은 많이 아물었냐는 둥 굳이 물을 필요 없는 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 무슨 일로 왔냐는 듯 날개 없이 가벼운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호크스의 질문이다. 꼿꼿하게 서 있던 쇼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에…… 저한테 멋지다고 말씀하신 거 말인데요.

응?

청염의 열기에 다친 성대가 채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아 걸걸한 목소리였다.

저희 가족이랑 베스트 지니스트와 함께 계셨던 그때요.

아, 쇼토 군의 왼쪽 얼굴 화상 흉터에 대해서 엔데버 씨한테 물어봤던 거 말하는 건가?

네.

응응. 그때 왜?

그때 저한테 넌 정말 멋지구나, 하고 말씀하셨잖아요.

음? 으응? 그랬었나.

솔직히 호크스는 그날의 일을 다 기억했다.

토우야 형이 송출했던 폭로 영상도 보았고, 오늘 기자회견에서 말씀하신 이야기도 다 들었어요.

응, 그런데?

쇼토는 숨을 짧게 멈추고 곧 내뱉는다. 주제 넘는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약에 호크스가 제 상황이었으면, 호크스도 저처럼 했을 거예요.

으응……?

저도 호크스의 상황이었다면 호크스처럼 했을 거고요.

어어…….

그러니까 이건 제 개인이 멋지고 못나고의 영역은 아닌 것 같아요.

음…….

그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건 저보다 호크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

그럼 전 이만.

호크스가 쇼토를 불러세운다. 쇼토 군.

위로하러 와 준거야?

그것보단…… 바쿠고의 말을 빌리자면 ‘희한한 자격지심이 있는’ 것 같아서.

우와. 이건 좀 상처.

대화에 의문점이 생겨서 바쿠고와 상의한 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아니아니. 그런 건 아냐. 그 친구 입이 걸은 거야, 뭐 체육대회 때부터 알던 거고.

호크스.

응?

……‘우리가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에요.’

음.

이것도 바쿠고가 ‘대화가 잘 안 풀리는 기분이 들면 말해보라’고 알려줬어요.

뭐? 너희 진짜 재미있다. 아하하.

쇼토는 짧게 목례를 하고 문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떼어낸다. 호크스도 자신보다 큰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어준다. 아, 쇼토 군. 정문에는 지금 기자들이 많으니까 뒷문으로 나가면 조금 더 수월할 거야. 긁는 목소리로 말해주자 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토는 뒤를 돌아보며 계속 꾸벅꾸벅 열심히 인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보이는 길로, 가야만 하는 곳으로 향한다. 의심 없이 걸음을 옮긴다. 호크스도 웃는 면상에 힘을 풀었다. 서서히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엔데버는 남아 있는 히어로 집합소에게, 몇 개월 간 신체활동을 이루지 못했던 베스트 지니스트는 3차 건강검진으로 바로 병원에 갔다. 쇼토의 말을 곰곰이 곱씹는다. 정말로 주제 넘는 발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애의 성격 상 그런 말을 하러 이곳까지 호크스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상황 앞에서, 쇼토의 선택은 주제 넘은 걸 떠나 참견에 가까웠고 그럼에도 따뜻하고 다정했다. 다정하고 단단하고 깨끗해서 역시나 저런 사람이 히어로구나, 하고 생각 들 만큼. 아이고.

제 형이랑 얼굴이 구석구석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하나도 안 닮았네. 

이때까지만 해도 쇼토와 호크스 모두 미도리야 이즈쿠의 단독 행동을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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