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A

그라운드 알파

🎶 by A

*애니 3기까지 봤고 원작은 안 읽었음 천천히 계속 보는 중입니다

그라운드 베타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속으로만 쌓아왔던 앙금이 마침내 풀렸다고는 하지만 카츠키의 피에 한번 치솟은 열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올마이트의 품에 안겼을 때는 그간의 고민이 일단락된 것만 같았는데 돌아나오니 변한 것은 없었다. 아직도 사지에는 그때의 체온이며 카츠키를 밧줄처럼 단단히 동여매던 강한 팔힘이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이해받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석연찮은 기분은 날이 갈수록 테트리스 블럭이 내려오듯이 쌓이며 크기를 부풀려 갔다. 

늦여름 냄새가 사방에 가득한 탓인가? 매캐한 가을 향기에 마지막 저항을 하는 녹색 내음만이 아니었다. 기숙사에 들어온 후로는 여기저기서 웃고 떠들지를 않나, 틈만 나면 시끄럽게 구는 놈들투성이라 좀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카츠키는 볼펜을 딸각거리다가 일어나 창문을 힘껏 걸어잠갔다. 쾅 소리와 함께 유리가 몸을 떨었다. 방 바닥에는 새 슈트의 모델이 구겨져 담긴 박스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카츠키는 괜히 상자 옆에 놓인 아령을 슬쩍 걷어찼다. 옆방에서 항의차 약하게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바쿠고.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토도로키였다. 재수 없고 속을 모를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으나 토도로키가 먼저 카츠키를 찾은 것은 처음이라서인지 뜻밖에도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토도로키가 혼자 있는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숙사에 들어온 후로는 카츠키보다도 사교적으로 굴곤 했다. 일층에서 또 무슨 잡다한 일을 벌이는지 끊이지 않던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제는 잦아들어 있었다. 토도로키도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있다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듯했다.

“네놈이 웬일로? 용건이 뭐냐?”

“얼마 전에 미도리야와 격투를 벌였다고 들었다.”

“뭐야. 데쿠가 고자질하고 다닌 거냐?”

“고자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카츠키의 마음에서 미도리야에 관한 부분은 최근 잠잠해져 있었는데, 한켠이 실망감으로 새롭게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물어본 거다. 그라운드 베타 청소당번을 맡고 보니 난간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너는 아느냐고 미도리야에게 물었지. 그리고 미도리야가 거짓말을 잘 못 했을 뿐이야.”

“데쿠 자식 말고 나한테 먼저 물으라고! 망할 놈이.”

이놈도 저놈도 미도리야 타령 뿐이야. 카츠키의 투덜거림에 토도로키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알겠다. 앞으로는. 너는 대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생각했어서.”

“그건 네 자기소개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미도리야를 이겼다면서?”

얼마 전까지의 카츠키라면 “당연한 걸 뭘 묻는 거냐? 데쿠 자식 따위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고”하는 대답을 반사적으로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도리야를 비난하는 것이 곧 올마이트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껴지며 카츠키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었으므로, 카츠키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래!” 하고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 말투가 마치 영구치가 나는 자리가 아픈 어린애처럼 어찌나 칭얼거리는 것으로 들렸던지, 카츠키는 짧은 대답을 도로 주워담고 싶어졌다. 문가에 선 토도로키는 고개를 미세하게 벽 쪽으로 기울였다.

“역시 이상하군.”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미도리야가 쉽게 당할 리가 없어.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야겠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 망할 놈이. 복장 긁으려고 왔냐?”

체육대회에서 힘도 못 써보고 준우승한 주제에 으스댄다고 토도로키를 몰아세울 수 있고 싶었으나, 카츠키 자신의 우승이라고 자랑스러운 일화도 아니었다. 그 시합은 카츠키에게 분통 터지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토도로키는 카츠키 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말 그대로야. 결투 과정을 알고 싶어. 미도리야의 개성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보통 힘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고... 너도 알고 있겠지. 그 힘에 대해서 무엇이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반에 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카츠키는 그 말을 곱씹으며 발가락 끝으로 아령을 빙글빙글 돌렸다. 올마이트와 맺은 약속을 깨지 않고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쨌거나 토도로키가 강해지는 것은 카츠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전력을 다하는 토도로키와 내년 체육대회 때 다시 맞붙어서 반드시 정당한 우승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우승에 가치가 있으려면 토도로키가 강하면 강할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카츠키는 툴툴거리며 토도로키를 방 안으로 초대했다.

“들어와.”

하나뿐인 의자에 카츠키는 딱히 앉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손님이라고 양보하여 자기만 어색하게 서 있는 그림도 싫어서, 거기 앉으라는 뜻으로 아령을 침대에 던졌다. 토도로키는 순순히 따랐다. 소등 시간이 가까워지는 기숙사에는 달빛이 비스듬히 비쳐들어 토도로키의 상처 입지 않은 쪽 얼굴이 밝았다. 카츠키는 기억나는 대로 전투 과정을 읊었다. 데쿠 자식은 손끝으로 공격하고 보는 경향이 있잖아. 다리 두 짝은 뒀다 뭐하는 거야, 참 나! 결국은 슛 스타일을 쓰기 시작했지. 그것보다도 작전을 짤 시간을 주지 않는 게 중요했어. 그놈은 잔머리를 엄청나게 굴리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숨겨두었던 완력을 해방하는 것처럼 보였고... 다 듣고 난 토도로키는 말없이 무언가를 심사숙고했다. 아마 자신이라면 어떻게 싸웠을지 미도리야와 가상의 결투를 벌이는 중일 터였다. 그게 또다시 자신이 아니라 데쿠라는 사실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모두가 미도리야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다! 수석 입학은 분명히 바쿠고 카츠키였다는 걸 모두 잊었다! 카츠키는 팔꿈치로 책상을 탕 하고 내리쳐 토도로키의 공상을 무자비하게 깼다.

“근데 왜 알고 싶었냐?”

“동료 히어로가 될 클래스메이트의 능력을 파악해 놓는 건 당연한 거다.”

“웃기지 마! 네놈이라면 그 상황에서 화염을 썼을까 상상한 거잖아.”

“미도리야를 상대로 화염을 쓰지 않을 수는 없지. 그게 궁금했던 게 아니야.”

토도로키의 침착한 대답에 카츠키는 열불이 하늘 끝까지 치받쳤다.

“그럼 꿍꿍이가 뭐지? 데쿠를 추앙하고 나는 못났다고 욕하려고? 그래서 이 밤에 친히 들르신 거냐? 엉?”

그 추궁에 토도로키는 놀란 기색이었다.

“음, 아니. 네 실력은 알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긍정에 괜히 주춤하며 카츠키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뭔데, 그럼!”

심술을 그러모아서 발치에 남은 아령 하나도 발등이 얼얼하도록 걷어찼다. 아령이 데구르르 굴러가 토도로키의 발목을 건드렸다. 토도로키가 폭 내쉰 한숨이 달빛과 섞여 흩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군. 일단은 비밀로 해 주길 부탁한다, 바쿠고.”

“들어 보고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미도리야의 힘이 올마이트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은 너도 잘 알겠지.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층 확실해졌어.”

“뭐?”

이렇게 빨리 올바른 방향으로 갈 줄은 몰랐는데. 미도리야의 갑작스럽고 폭발적인 성장에 대해 이리저리 연구해 온 것은 카츠키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토도로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카츠키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 정말인가 보군. 올마이트가 미도리야에게 직접 개성을 전수해 준 거였어.”

“뭐, 뭐야!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거냐?”

“소문은 없었어. 미도리야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있지만 격하게 부정하더군.”

“...”

“개성이 옮겨지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너도 알고 있지. 바쿠고,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음성이 잠시간 싸늘하고 슬프게 들렸다. 이유를 조금만 고심했더라면 우연히 엿들었던 토도로키의 가정사에 생각이 닿았겠으나 카츠키의 머릿속은 빙결에 당한 듯이 얼어붙어 있었다. 이미 올마이트를 한 번 무릎 꿇린 죄를 지었는데, 이러다간 먼저 손가락을 내걸었던 맹세조차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토도로키 이 자식은 대체 뭐지? 언제 붙어도 진심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결코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올마이트의 숨겨진 아들인 게 분명하다.”

“뭐?”

토도로키의 목소리와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카츠키는 자신이 맞게 들었나 싶었지만, 굳세게 고개를 끄덕이는 토도로키를 보면 볼수록 본인의 가설을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미도리야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얼굴에 반짝이는 달빛이 흘러넘쳤다. 카츠키가 슬금슬금 실소를 흘리다가 급기야 배를 잡고 폭소하자 토도로키는 조금 불쾌한 듯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럼 어떻게...”

“내가 확실히 알아. 나는 데쿠를 기억도 안 날 만큼 어렸을 때부터 봤다고. 매일같이. 데쿠네 어머니도 알고, 언제 어디서 뭘 했는지 전부 알고 있어. 완전히 틀렸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지. 희한한 걸 혼자 확신하고 있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 바보였냐, 너?”

바보 소리를 들어도 토도로키는 타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하더니 얕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온순한 반응이 전부였다.

“소꿉친구의 말이니까 맞겠지.”

또 미도리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말이었다. 내가 데쿠의 소꿉친구라면, 데쿠가 내 소꿉친구기도 하다고는 어째서 생각하지 않는 거냐고. 고집을 밀어붙이는 카츠키의 목소리에 확연히 신경질이 배어들었다.

“온 김에 나도 물어보지, 토도로키.”

“그래.”

“어째서 데쿠에게는 불을 썼으면서 나한테는 안 썼지?”

“체육대회 때?”

“내가 데쿠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나?”

“그건 아니야.”

“그럼 왜 날 무시했는데?”

“무시하지 않았어.”

“그럼 어째서!”

토도로키는 길게 침묵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카츠키는 재촉하는 의미에서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도로키는 달빛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오랫동안 굳어 있다가 약한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엉뚱하게 단언할 때와는 정반대로,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말을 아주 조심스럽고 나직하게 했다. 그거야말로 카츠키의 털끝 하나까지 거스르는 말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생각났을 뿐이야.”

카츠키는 그런 종류의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토도로키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미도리야를 보면서 올마이트를 생각했고, 엔데버는 토도로키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 모조리, 싹, 터무니없이 틀렸다. 토도로키 쇼토는 토도로키 쇼토일 뿐이었다. 바쿠고 카츠키는 제 2의 올마이트가 아니라 제 1의 바쿠고가 될 예정이었다. 카츠키는 토도로키의 모든 것에 대고 불보다 새빨간 빗금을 죽죽 그어 주고 싶어졌다. 그의 속에 잘못 연결된 회선을 죄다 뜯어서 다시 꽂아 놓고 싶었다. 토도로키의 단정한 모습을 해체해서 불을 꺼내 버리고 싶어졌다. 알면서 그러는지 모르고도 그러는지 토도로키는 노상 불의 암시를 하면서도 결코 보여주지 않았고 그게 카츠키를 더는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훗날 어른이 되던 무렵의 카츠키는 이 밤을 두고두고 돌아보며 자신이 도대체 왜 그랬는지 짐작하려 애쓰게 된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가? 굳이 앞뒤가 맞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뿐일 것이다. 그 시절의 카츠키한텐 데쿠는 되는데 바쿠고는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어야 했다는 것. 그것만이 문제인 줄 알았다. 정확히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되는 건 훨씬 나중에서였다. 그 밤에는 그냥 자신의 침대에 그려넣은 듯이 앉아 있는 토도로키의 모습만 보아도 복장이 뒤집어졌다. 이놈은 히어로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저런 놈이 카츠키도 쥐지 못한 추천입학생의 자리를 따냈고 어쩌면 일학년에서 최강일지도 모른다니 세상은 한참 잘못됐다. 토도로키의 양손은 얼굴과 좌우가 반대로 되어 있었다. 자잘한 동상 흉터가 남아 유에이의 모범생다운 오른손에 비해 왼손은 화상 자국 따위 없이 무척 깨끗했다. 무기를 다룬 적 없는 왼손... 거기서 불길을 끌어낼 수 있는 건 다름아닌 바쿠고 카츠키여야만 했다!

다급한 갈증을 느끼며 카츠키는 토도로키의 양 어깨를 붙들고 세게 흔들었다. 토도로키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반항하지는 않았다. 살짝 인상을 썼을 뿐 곱상한 도련님 그대로인 얼굴에 카츠키의 심기가 더 비딱해졌다. 지가 더 세다는 건가?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나? 내 행동은 천하의 토도로키 쇼토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야? 카츠키는 그게 착각이라는 걸 단단히 새겨 주기로 했다. 바쿠고 카츠키야말로 그 누구보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예정이니까. 카츠키는 잘생긴 얼굴을 뺨부터 잡아 늘렸다. 

“이봐...” 

얼굴이 모찌떡처럼 늘어난 토도로키가 얼떨떨하게 한 마디라도 더 뱉기 전에 카츠키는 입술을 박았다. 형편없이 풋풋하고 마음만 앞서는 키스였다. 키스라기보다도 혀로 목구멍을 꿰뚫는 게 목표인 듯한, 뭇 로마 병사에게 모범이 되었을 동작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토도로키의 휘둥그레진 눈에는 꼭 그 눈만큼이나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이 비치고 있었다. 꼬집혔던 뺨은 발개졌다. 그게 카츠키에게 또다른 불을 당겼다. 치밀어오르는 이상한 감정과 원래의 울화통을 구분할 수 없었다. 카츠키는 숨이 가빠 왔다. 토도로키가 아무튼 카츠키의 마음대로만 되었으면 좋겠으면서도 끝까지 카츠키에게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바로 그런 토도로키의 도도한 콧대를 꺾어 주고 싶었고, 또...

“난 왜 안 되는데? 데쿠 자식처럼 손가락을 분지르지 않아서 안 된다는 거야?”

카츠키는 토도로키의 입에서 혀를 빼낸 자리에 검지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축축한 혀를 휘저으며 들어가 이빨을 꼭꼭 눌렀다. 왠지 이빨도 잘생긴 것 같았다. 송곳니는 적당히 날카로웠고 어금니의 촉감이 몹시 네모반듯했다. 더 분통이 치밀어올랐다.

“그게 불만이면 네가 직접 물어서 부러뜨려!”

토도로키가 멈춘 것은 아주 잠깐이 전부였다. 카츠키의 앞뒤 안 맞는 억지에도 토도로키는 진짜로 손가락을 물기 시작했다. 그것도 눈물이 핑 돌 만큼 꽤 매섭고 세게. 호승심인지 뭔지 알 수는 없어도 이 왕자님은 정말 좀 이상한 데가 있어서 카츠키는 속으로 기함했다. 그러나 바쿠고 카츠키는 세계제일이 될 것이므로 토도로키 쇼토 따위에게 절대로 질 수 없기에, 손가락 틈새로 혀를 비집고 넣어 기꺼이 응전을 받았다. 토도로키의 입에서는 옅은 레몬홍차 맛이 났다. 저녁식사 후에 가져가라고 기숙사 식당에 자판기와 종이컵이 놓여 있는 그것이었다.

카츠키의 양손 중 물리지 않은 쪽은 머리가 따로 달린 것처럼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토도로키의 흰 티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가 판판한 배를 움켜쥐며 위쪽으로 올라가 살갗을 드문드문 꼬집었다. 토도로키는 티가 나게 움찔거렸다. 카츠키는 토도로키의 입안 왼쪽이 뜨거워지는 걸 분명히 느꼈다. 절반의 특이체질에 의한 반응이었다. 승리감과 열패감이 동시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카츠키가 토도로키에게서 이끌어내려던 불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맞기도 했다.

떨어져 각자 호흡을 고르고 있으려니 카츠키는 분한 심정이 들어 더 크게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데쿠에 대한 건 이미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더 잘했어야 한다는 후회만이 남아 카츠키를 감쌌다. 미진한 기분이 토도로키와의 결승전을 치르고 난 직후와 똑같았다. 첫키스를 고작 이딴 식으로 날려 버리다니... 키스를 더 잘 할 줄 알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놈들과 연습해서 실력을 키워놨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그건 또 싫었다. 토도로키는 카츠키가 첫키스일 텐데 그러면 카츠키도 토도로키가 첫키스여야만 공정하지 않은가? 카츠키의 마음은 혼란스러운 소년의 그것답게 갈팡질팡 내달리며 마구 뛰어갔다. 지금 폭파를 쓴다면 달나라까지도, 태양의 흑점 속까지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츠키는 턱에 흐른 침 한 방울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며 선포했다. 어쨌든 일 등을 하겠다고 선포하는 건 카츠키의 특기였다. 대체로는 이루어 내기도 하는 편이었다.

“방금 건 취소다, 토도로키. 올마이트를 능가하는 히어로가 돼서 제대로 갚아 줄 테니까!”

그것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어서 카츠키는 얼굴이 대번에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도 떼는 걸음마다 수렁에 푹푹 빠질 수 있었다. 토도로키는 얕게 헐떡이면서도 어떤 생각에 잠겼다.

“...이제 반쪽짜리라고는 부르지 않는군.”

똑같은 일을 겪고도 토도로키의 목소리가 카츠키의 것보다 의젓해서 불만스러웠다. 카츠키는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말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성질을 못 이기고 왕왕거리는 고함이 나올 뿐이었다.

“바쿠고, 그렇다면.”

“뭐, 이 자식아!”

“나한테도 캇쨩이라고 불리고 싶은 거냐?”

“뭐라는 거야, 멍청이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썩 떨어져!”

토도로키를 내팽개치고 쿵쾅거리며 뛰쳐나가서 생각해 보니 그 방이 자기 방이었다. 카츠키는 다시 들어와 토도로키의 옷자락을 붙잡고 복도에 메다꽂듯이 내쫓았다. 문을 쾅 닫고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말았다. 토도로키가 옷을 툭툭 터는 소리며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가는 발소리의 정직함을 들으니 머릿속 술렁임이 가라앉기는커녕 배로 난동을 부렸다. 카츠키는 베개를 벽에 힘껏 던졌다. 부드러운 천이 경쾌한 팡 소리와 함께 터지며 깃털비가 내려 달빛으로 눈부신 방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카츠키가 거세게 기침을 하자 옆방에서 다시 벽에다 항의를 해 왔다. 이번엔 좀더 거친 발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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