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엔란 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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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즈노미야 란의 인생은 글과 함께했다. 그에게 있어 글이란 일종의 자기표현수단이었다.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을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었다. 실제가 아닌 것처럼, 자신이 아닌 것처럼 몇 겹씩 포장하여 가공한 결과물이 온전히 드러날 때는 희미한 기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글을 멈춘 적이 없고, 그것은 단순히 자기만족일 뿐 대중에 드러낼 마음은 특별히 없었다. 와타누키 류우. 어둡고, 질척하고, 기괴한 글로 유명한 작가.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 가끔 신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언제나 마감을 잘 맞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매번 마감에 늦는 편이었다. 광기를 대중에게 내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다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해야할 것은 배설이 아닌 창작이니까. 특히나 마감이 다가올 수록 그는 몇 번이나 전체를 뒤집어 엎고는 했다.

정해진 시간에 대한 압박감과 소설의 내용에 푹 젖어있는 정신에 호즈노미야 란은 이 맘때쯤 극한에 몰린 상태였다.

자판을 손톱으로 툭툭 두드린다. 마감까지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마무리를 하던 도중 문득 종장의 방향을 비틀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짧게 고민했다. 이쯤에서 타협하고 파일을 보내면 이번 마감은 여유였다. 하지만 고치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탁한 담배연기가 폐를 공격하는 느낌이 들면 머리가 맑아졌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감각을 느끼며 그는 지금껏 쓰고 있던 글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계속 전화벨소리가 들려온다. 호즈노미야 란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무시하다가 하다가 결국 할 수 없게 된 순간에 그는 손을 뻗어 전화를 받고는 휴대폰을 어깨에 올리고 턱으로 눌렀다. 성의없이 여보세요, 를 말하면서도 두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와타누키 선생님? 안도입니다.'

출판사의 담당자였다. 네에... 대답은 하고 있지만 란은 상대의 말을 들을 마음이 그다지 없어보였다. 원고 진행은 어떠신가요? 쩔쩔매며 말하는 그가 안쓰러울법도 하건만 란은 건성이었다. 그럭저럭... 마감은 괜찮으신가요... 그럭저럭... 분명 사흘 전에 여유롭게 되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럭저럭...

'지금 제 말 안듣고 계신거죠?!'

아, 오타났다. 글자를 지우며 란은 팍 하고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느꼈다. 어깨에 걸쳐뒀던 휴대폰을 한 손으로 잡아 채고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눌러 비볐다.

"지금 쓰는 중이에요. 제가 다 썼는데 일부러 미루겠어요? 아니, 예정이 좀 바뀌어서... 지금 이럴 시간에 두 줄은 쓰겠네. 빨리 쓰길 바라는거예요, 방해하고 싶은거예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어물어물 대답하는 담당자는 최근에 새로 입사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심약한 데가 있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뭐든 그러려니 하는 작가가 마감날 쯔음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는건 흔한 일이기에 선배들도 그다지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더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다짐하며 담당자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간다. 두 시간 뒤에 자택으로 원고를 받으러가기로 결정이 나자 별다른 인삿말도 없이 툭 전화가 끊겼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잠시 후에 끼익, 하고 문이 열리더니 이엔이 빼꼼 고개를 안으로 내밀었다. 또 담배 피고 있네. 이엔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당장은 별 말이 없었다. 곧 들고 들어온 것은 커피였다. 달칵, 하고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란은 힐끗 옆을 본다.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표정은 다정했다.

"이엔."

"전 신경쓰지 말고 계속 쓰세요."

"잘 마실게. 아, 좀 있다가 담당자 올거야. 나 그때도 바쁘면 문 열어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할게요."

"응. 고마워.."

사르륵 웃고는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엔은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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