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연기담

5. 파면당할 위기일 거야, 아마...


요괴와 인간은 함께할 수 없다. 그것은 저 옛날 고려 시대부터 통용되던 말이었다.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율 역시 그렇게 배워왔고, 비단 원연화가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요괴를 접한 인간들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요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신경 쓰지도 않으며, 함께할 수도 없다. 둘은 필연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야만 했다.

“최근에 귀연산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은열은 사랑채에 들어가기 직전, 율을 따로 불러세워 그렇게 말했다. 현은 미리 안에 들어가서 떠들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현과 아는 사이인 것을 보면 요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요괴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일이 아주 잦아졌지. …율, 너는 성혜처럼 서울에서 살고 있지?”

의외로 한양이라고 하지 않아서, 율은 놀랐다. 그렇지만 그걸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우리 요괴들 사이에서 규칙이랄 것은 없지만, 그래도 현덕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로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어. 그런데 그 약속이 최근에 깨지고 만 거야.”

“무슨 이유로요?”

“글쎄. 요괴들은 각자 생각이 달라서 통제하기 어렵기도 해서 자세히는 몰라. 다만 우리는 인간에 대한 반발심이 커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우리는’? 무슨 요괴 자경단 같은 게 있는 거기라도 한 건가? 율은 이 은열이라는 요괴를 점점 더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요괴인 주제에 인간에게 호의적이라니. 혼란스러웠다.

“안에 있는 요괴들도 널 싫어하지 않을 거야. 현은 조금 널 경계하는 것 같지만…. 내가 잘 말려볼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있어.”

“네.”

“그럼 가자.”

은열은 문을 열었다.

실내에는 몇 명의 요괴가 있었다. 아까 보았던 표독한 여우 요괴 ‘현’이 가장 끝에 앉아 있었다. 주황색 머리카락, 머리 위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 복실한 꼬리. 여우 요괴처럼 보였다. 구미호인가? 싶다가도, 꼬리가 하나뿐이었다. 한복 저고리에다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티가 더해진 모양이었다.

‘패션 한 번 트렌디한 요괴네….’

“뭘 봐!”

율이 빤히 쳐다보자, 현은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황급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그래도 힐끔힐끔 쳐다보기는 했다. 현은, 인간과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이, 삐딱하게 앉은채로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토끼…처럼 보이는 생물이 있었다.

“앗, 오셨구만요! 옆에 계신 분은….”

그 토끼는 말을 하고 있었고,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율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먼저 놀랐다.

“흐악?!”

“으, 으, 으, 은열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귀, 귀연산에 인간 손님을 들이시다니요!”

“…뭘 새삼스럽게. 청영, 너는 성혜랑도 직접 인사한 적 있잖아.”

“그거랑 새로운 인간이 들어온 건 다른 일인뎁쇼!!”

그러다가 문득, 그 ‘청영’이라고 하는 토끼와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떠한 몸짓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 안녕하심까….”

“아, 네…. 안녕하세요….”

토끼에게 인사하기는 처음인데. 그것도 이렇게 구수한 존댓말을 쓰는 토끼에게는. 주변에 있는 요괴들이 그 요상한 광경을 보았다. 아무도 웃지 않아서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저, 저는 청영이라고 합니다, 예…. 그, 귀연산에 살고요, 은열 형님에게는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야, 인간.”

말투는 현과 비슷했지만 남자의 목소리였다. 청영 옆에 있던, 문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었다. 율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ㅇ, 예?”

“오, 이쪽을 봤다. 진짜 인간이냐, 너? 요기는 안 느껴지는 거 보니까 진짜인 것 같은데.”

그는 호랑이를 닮은 인간이었다. 율은 그런 형태를 띄고 있는 사람이 인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털 위에 동그란 동물 귀가 달려 있었고, 그 뒤에는 긴 꼬리가 있었다. 호랑이 무늬라고 부르는, 바로 그 줄무늬였다. 특이한 점은 주황색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줄무늬는 흰색이었다. 마치 하얀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뭐냐?”

태호는 대뜸 율의 옷에 달린 장식들을 살피며 말했다. 율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생긴 스킨십이라, 화들짝 놀랐다.

“ㅇ, 예?!”

“아, 그냥 장식이구나. 난, 또. 퇴마 도구인 줄 알았지.”

율은 은열이 그새 자신의 소문을 요괴들 사이에 퍼뜨렸을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 요괴들이 자신이 퇴마사라는 걸 다 알고 있다면….

“나는 태호. 은열이의 동무 되는 요괴이올시다. 잘 부탁해.”

어라?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네? 율은 태호를 바라보는 게 부끄럽고 긴장되어서, 땅만 보고 있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얼굴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경계하기보다는 놀려먹는 얼굴에 가까웠다. 그것 역시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지만, 이쪽도 경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예스러운 말투랑 요즘 말투랑 섞여서 기분이 이상해….’

태호는 인간처럼 악수를 청했다. 한 손은 율 쪽으로 내밀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율은 그가 골초이구나 싶었다.

“퇴마사 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찍었는데 맞췄구만.”

태호는 그렇게 말한 다음,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며 은열을 바라 보았다.

“이번에는 사고 좀 치고 싶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다 알면서~.”

“그러기만 해봐! 진짜로 그때는 이 녀석 죽여버릴 테니까!”

마지막으로 말한 사람은 현이었다. 율은, 은열이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했고 현과 은열은 또 무슨 관계이며, 이 호랑이 요괴는 대체 뭐길래 은열에게 이렇게 능글거리나 싶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저 요괴들 말은 무시하고…. 일단 앉을까. 이야기해야 할 게 아주 많으니.”

율은 자리에 앉았다. 한옥 바닥은 익숙하였기 때문에, 마치 집에 온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인간이 없는 한옥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익숙한듯 낯설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랐다. 율은 은열 옆에 앉았고, 은열은 모두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둥글게 앉아서 어차피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긴 했다.

익숙한 한옥의 마룻바닥에 앉았는데도 낯설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율은 점차 정신이 몸을 탈출하는 걸 느꼈다.

“자, 우선…. 청영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아까 율에게는 대략적으로 설명을 다 했으니까, 청영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게 다 이해 될 거야.”

…하지만 멍 때리고 있다간 코도 베이고 심장도 베이리라. 율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자신이 요괴의 일을 받게 되리라는 것 뿐이었다.

“이 녀석이 매번 좋은 이야기를 물어다 주거든.”

태호는 청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마구 쓰다듬었다.

“제,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못들었는데!!”

청영은 키가 120c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토끼라기에는 굉장히 커다랬지만, 확실히 사람과 비교하면 작았다. 아담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율은 청영을 보면서, 그가 요괴임을 확실했기 때문에 귀엽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아마 매우 어려울 것이다.

요괴들을 보는 게 신기하기는 했지만, 우선 중요한 건 자신을 왜 이곳까지 들였냐이다.

“요괴들의 의뢰가 무슨 소리죠? 이 요괴들이 의뢰를 하는 건가요?”

은열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범위가 넓어.”

그는 청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듯한 눈빛. 청영은, 그러기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은열의 눈빛을 받으니 입이 절로 열리는 듯했다.

“그, 은열 님께 제가 급하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산 아래로 요괴들이 내려간 것 같다고요.”

“산 아래로?”

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은열이 손을 들어, 쉬잇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으라는 건가.

“여느 때처럼 산에서 나물을 캐고, 다른 요괴님들이랑 이것저것 물물교환도 하고, ‘아,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던 찰나였습니다. 은열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산 아래까지 곧잘 내려가곤 한다는 걸 말입니다.”

율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 숨겨진 몇 개의 맥락을 찾으려고 했다. 하나, 요괴들은 산 아래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했다. 귀연산 아래는 등산로로 개척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만나기가 너무 쉽다.

“그런데…. 보통 만나지 않던 요괴가 산 아래로 잽싸게 내려가는 걸 봤습니다. ‘어딜 가는 거지? 귀연 산 아래로 내려가는 건 사실상 금기인데, 저 요괴가 미쳤나?’ 그렇게 생각했습죠.”

“알고 있던 녀석인가?”

은열은 신중하게 질문했다. 청영은 고개를 저었다.

“귀연산에서 그런 놈은 난생 처음 봤습니다!”

“요즘은 도깨비들 잘 안 내려가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였다. 현이 ‘이런 걸 대체 왜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라고 반응하는 반면, 그는 그래도 이야기에 참여하기는 했다. 방관자 같은 태도긴 했어도. 태호의 말을 반박한 것은 역시 은열이었다.

“인간으로 위장하면 모를까, 귀연산에서 본 모습을 드러내고 내려가는 경우는 없지.”

도깨비가 만약에 변장이 가능하다면, 청영이 이렇게 난리를 치며 은열에게 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어느새부터인가, 율 역시 그 요괴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후보군에 드는 요괴는 많지 않다. 적어도 그가 집안에서 배운 요괴들은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은열은 계속해서,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질문했다.

“어떻게 생겼는데?”

“네 발 짐승 같았습니다. 개인가, 싶어서 쳐다봤는데… 삵인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인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커다랬고, 검은색에 붉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의 특징은?”

“따, 딱히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끙, 도움이 전혀 못 되고 있는 것 같은데유….”

“이 정도면 됐어.”

그는 율을 바라 보았다.

확실하게 바라 보고 있었다.

어라? 지금 날 볼 타이밍인가? 다른 요괴들도 율을 일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ㅇ, 왜요? 제가 왜요?”

“아직도 모르겠어?”

태호가 율을 놀리듯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얘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기 귀찮으니까 너보고 가란다.”

“그런 거 아냐.”

“뭐가 아니긴 아냐! 은열, 둔갑할 줄 알잖아. 그러니까 네가 잡고 싶으면 가서 후딱 잡고 오면 되는 거 아냐? 아니면 날 시키던지. 그깟 요괴 정도는 물어 죽여줄 수 있으니까.”

“현, 제발 진정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학당은 분명 귀연산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율이 원래 다녔어야 했을 현덕고등학교를 가리킨다. 그리고 요괴들은 귀연산을 내려갈 수 없다. 아예 둔갑해서 잠깐 다녀오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그 중간 매개체인, 요괴를 알고 있는 인간 - 퇴마사가 다녀온다.

“잠깐….”

율은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 일을 받았다간 가문에서 정말로 파면당할지도 모른다.

요괴를 도와주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퇴마이기도 하다.

논리는 간단했다.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는다면 어느 쪽이건 말이 되는 일이었다.

율은 은열을 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내용이 뭐에요. 내용이 없잖아요. 요괴를 퇴마시켜라? 아니면 생포해서 여러분 앞에 가져다 줘라? 어느 쪽인 건가요?”

“‘인간에게 허튼 짓 하지 않고 저지하기’.”

마치 선언하는 듯한, 강직한 말이었다. 율은 순간 입을 닫았다.

“너희들 인간이 요괴들에게 관심이 아주 많은 덕분에 귀연산의 분위기가 아주 흉흉해. 점차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없어지고 있는 와중에, 요괴 한 명이 인간들의 땅에서 허튼 짓을 했다간…. 우리도 위험해질 수 있거든.”

원연화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외의 서울 방방곳곳에 있는 퇴마사, 무당들이 집결할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일을 관리할 리는 없었지만, 민간의 퇴마사들이 요괴를 가만 둘리가 없었다. 그건 율이 제일 잘 알았다.

인간과 요괴는 함께 할 수 없고, 요괴가 인간을 해쳤다면 퇴마하는 것이 도리다.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달라는 이야기였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속적으로.”

은열은 율을 보았다.

언제 보아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이었다.

“하겠어?”

도망갈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요괴들에게서 죽기 살기로 도망쳐서 본가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의 땅으로, 요괴들을 해쳐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율은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은열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이 요괴들이 자신을 구해달라는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쯤 의무에 가깝게.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무엇인가.

…호기심이었다.

율은 그들이 궁금했고, 특히 이 은열이라는 자가 궁금했다. 무엇이기에 이렇게 인간에게 온건하고 호의적인가.

“이것도 결국 퇴마인 거잖아요, 그렇죠?”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해방감이었다.

“요괴랑 일하는 건 처음인데, 네, 기대 되네요.”

“믿을 수 없어!”

긍정적인 분위기를 깬 것은 현이었다. 모든 요괴와 인간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

“진짜로 인간이랑 손을 잡은 거야? 고작 요괴 하나 잡겠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인간이 요괴랑 어떻게 함께…!”

마치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걸까. 율은 이 여우 아가씨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건, 그녀가 바라볼 때에 살의와 악의가 가득하다는 것 뿐이었다.

율은 생존을 위해 눈을 아래로 깔았다.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창파관에서는 나가줬으면 좋겠어, 현.”

은열은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명백한, 경고였다.

“…좋아!”

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랑채 안을 뚜벅뚜벅 걸었다. 바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율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너 따위를 소중하게 생각한 게 잘못이지, 은열. 잘 있어! 다른 요괴들한테 다 소문 내줘야겠네. 그 푸른소매가 힘을 잃고 조용히 살더니 이제는 인간의 힘을 빌린다고!”

“말이 심하네, 현. 삼촌들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

태호가 그렇게 타이르려고 함과 동시에, ‘쾅!’ 하는 소리가 났다. 현이 미닫이문을 부실 기세로 옆으로 밀쳤기 때문이다. 율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멋대로 거둔 주제에 삼촌이라고 말하지 마. 진짜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여우 한 마리가 한옥 밖으로 나가, 담장을 타고 이내 사라졌다. 사랑채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걸 보고만 있었다.

“이를 어쩌면 좋답니까….”

“곧 돌아올 거야.”

은열은 확신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늘상 있는 일처럼 여겼다. 옆에 있던 율이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그것보다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네가 혼자 간다면 그 요괴를 어떻게 할 지 모르니 내가 같이 가는 거야.”

율은 은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으로 둔갑하셔야 할 거예요.”

“그건 이미 생각해뒀어. 너는 나에게 인간답게 행동하는 법만 알려주면 돼.”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은열이 얼마나 그걸 잘할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율은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세우고 있었다. 율은 청영을 바라 보았다.

“청영 씨라고 하셨었나요? 혹시 그 요괴가 간 방향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니까, 현덕의 그 인간 학당 쪽으로 내려갔는데….”

율은 청영의 말을 들으면서 밖을 보았다. 한낮이었다. 하지만 율은 이미 창파관에 오래 있을 마음으로 이곳에 왔고, 해가 진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태호는 뒤에서 신나게 구경하며 담배를 빨고 있었고, 율과 은열은 함께 붙어서 청영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청영은 어느새 한지와 붓을 들고, 그 요괴가 내려간 방향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원래부터 요괴와 일을 했던 것처럼. 율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죄를 짓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하지만, 그 기분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이 모임이 좋았다. 율은 어느새, 성혜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채로 그 요괴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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