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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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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님 주최로 참여했던 트라이건×혈계전선 게스트북 원고를 웹공개합니다. 좋은 기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자!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귀중한 게스트다! 소개하지. 이명 휴머노이드 타이푼, 현상금 총액 무려 600억 더블 달러! 하룻밤만에 도시 줄라이를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달에도 구멍을 뚫어버린 시한폭탄 같은 남자라고? 그 이름하야 밧슈 더 스탬피드!

하하하, 세계를 넘을 자신이 있다면 현상금을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디보자... 그래, 지금으로부터 72시간 후에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해 놓았으니, 그럼. 그동안 잘 살아남아 보시게나, 인류 제군!

 

사상 최악의 범죄자가 HL 위로 추락했다.

도시의 온갖 전광판에서 일제히 한 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빌딩 사이를 타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는 경박하기가 짝이 없었지만,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 저 목소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온갖 합성 마수니 뭐니 하는 걸 도시에 풀어 놓고 웃어 대는 행태는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그런데 오늘의 선물은 무려 외계산 범죄자란다. 친절하게 구멍 뚫린 달의 자료화면까지 띄워 주는 행태에 스티븐은 피워본 적도 없는 담배가 그리워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온 도시를 휩쓰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스티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서 있는 크라우스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을 가로막고 선 의사는 좀처럼 물러설 기색이 없다.

그래, 그들로서는 짐작도 하기 어려운 존재가 떨어진 건 맞았다.

"아직 아무 일 안 일어났습니다."

"…."

"그는 환자고요."

그 위치가 블러드베리 중앙병원 부지 안이었던 데다, 추락 과정에서 그가 큰 부상을 입어서 문제지. 말을 마친 루시아나 에스테베스가 동요 없는 얼굴로 남자의 부상을 읊었다. 어깨에 총상, 추락으로 인한 손목과 다리 골절, 전신 타박상…. 많이도 다쳤네. 뒤늦게 껄렁껄렁 다가온 재프가 투덜거리다가, 루시아나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휘파람을 불며 모른 체 했다.

결연한 얼굴의 의사를 라이브라는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은 말할 것도 없었다. 레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번에도 잠입 감시, 관찰…, 아무튼 그렇게 하실 거죠?"

"그래, 아무리 72시간이라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끔찍한 격무에 시달리며 철야 중이었던 스티븐이 머리를 짚었다. 이거야 원, 앞으로 사흘은 꼼짝도 못 하겠는데. 스티븐, 우선 오늘은 쉬는 게 좋아 보이는군.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타깝게도 그 날 라이브라는 외계인 범죄자를 연행하는 대신 온 도시를 뛰어다니며 거대 식인 딱정벌레 퇴치에 열을 올려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파악한 타락왕이 지루한 전개에 격분하며 거대 식인 딱정벌레를 도시에 풀어 놓은 까닭이었다.

 

헬사렘즈 로트 위로 추락하던 밧슈 더 스탬피드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병원 육 층에서 막 진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오던 루시아나 에스테베스의 열일곱 번째 분신이었다. 해당 분신은 안개 낀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형체를 발견한 즉시 오늘 오후의 일정을 떠올렸다. 오후 세 시 반부터 소아 환자들의 정원 산책. 급하게 돌아간 시선이 시계에 가 닿았다. 세 시 삼십 칠 분.

의사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의학 지식을 동원할 필요조차 없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추락하는 성인 남성과 어린아이가 부딪혔을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는 자명했다. 볼펜을 떨어뜨린 루시아나가 다급하게 창문에 달라붙고, 동시에 일 층의 루시아나가 병원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을 때였다.

한 차례의 총성이 벼락처럼 허공을 찢어발겼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였다. 루시아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달렸다. 그가 정원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다급히 분열한 의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상처는 없는지 살폈다. 총성에 놀란 아이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지만… 기적적이게도 다친 건 아무도 없었다. 피를 흘리는 건 한 명 뿐이다.

추락 지점에 아이가 있음을 알아차리자마자 격발의 반동으로 몸을 비튼 자. 타락왕이 떠들어대기를 600억의 흉악범 휴머노이드 타이푼.

가쁜 숨을 헐떡이는 남자의 피가 연못처럼 고였다. 붉은 코트가 더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바닥을 짚은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가느다란 숨을 뱉었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뒤이어 병원에서 뛰쳐나온 외래 접수 요원들이 신속하게 남자를 들어 날랐다. 뒤에 남은 루시아나는 여전히 바닥에 고인 피를 내려다보다가, 막 병원 앞으로 들이닥치는 라이브라를 막아섰다. 저 자가 정말 흉악범이건 아니건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살리고, 치료해서 돌려보내는 것.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수술은 늘 그렇듯이 신속하고 완벽하게 끝났다. 마취부터 절개와 봉합까지. 의학에는 문외한인 밧슈가 보기에도 감탄할 만한 기술이었다. 고통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했던 게 꿈인가 싶을 정도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밧슈가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의사가 두꺼운 안경을 고쳐 썼다.

"아까 봤어요. 덕분에 아이들이 안 다쳤더라구요. 감사합니다."

"아냐. 아무도 안 다쳤으면 좋은 거지. 다행이다."

"당신을 제외하고 '아무도'요. 다행인 건 맞지만, 수술을 방금 마친 환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밧슈는 대꾸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어쩐지 600억이니, 달에 구멍을 뚫었느니 하는 것들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루시아나는 추락과 총성, 그리고 고인 피에 대해 떠올렸다. 흉터로 빼곡한 상체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많았고, 위험한 자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병원을 방패막이 삼던 기계공작과 이 자는 경우가 달랐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낙하한 곳이 우연히도 병원이었을 뿐이다. 그가 진실로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면 원내에서 난동을 피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자가 환자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지만. 환자의 위험성을 판단하는 건 의사의 업무가 아니었다. 루시아나는 약간 시간을 들여 눈을 감았다 떴다. 복잡한 사견은 흩어져 사라지고 의사 한 명이 남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확실히 경이로운 회복력이긴 한데, 그래도 당신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경과를 봐야겠어요. 뼈가 어떻게 붙을지는 모르는 거니까요. 절대로, 움직일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세요.”

밧슈가 눈을 깜빡였다. 사뭇 당황한 얼굴이라 병실을 나가려던 루시아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아까 방송이 나왔으니까 들었을 거 아냐. 정말 괜찮은 거야? 쫓아내 달라는 말은 아니긴 한데.”

비관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곳은 그의 세계가 아니다. 도시에 갑자기 추락한 밧슈 더 스탬피드에 관한 정보는 조금 전의 방송으로 한정된다는 뜻이며,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변호해줄 사람조차 없음을 의미했다. 예상한 시나리오는 많았다. 가령 나가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던가, 치료는 해 줬으니 피해 끼치지 말고 돌아가 달라고 하던가. 그렇게 병원에서 나가면 겸사겸사 도시 구경도 하려던 내심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루시아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네요. 중요한 건, 여기가 병원이고 제가 의사이며 당신이 환자라는 거죠. 그뿐이에요.”

대수롭잖다는 태도였다.

이 병원에서 모든 환자는 평등하다. 환자에 대한 의사의 가치 판단은 필요치 않으며, 다친 몸을 이끌고 이 곳에 도착한다면 그게 누구건 기꺼이 그를 치료하리라. 환자가 병원 밖에서 누구냐는 사실은 그 다음 문제였다. 그것이야말로 의사의 의무이자 책임이면서, 자부심이었다.

밧슈는 어렵지 않게 그 편린을 엿봤다. 안경알 너머의 단단한 눈동자가 긍지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해받을 생각 없는 독선,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의지로. 그는 몇 번인가 입을 달싹이다가 그만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희미하게 웃기만 하는 밧슈 앞에서 루시아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 이유만 있던 건 아니고… 아까 그 애, 곧 퇴원하거든요. 아무튼 푹 쉬세요. 완전히 낫기 전에는 병원 밖으로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켁, 아직 퇴원하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의사의 직감이에요. 아니, 설마 정말 도망칠 생각이었어요? 그 상태로?"

“에이, 그냥 해본 말이지….”

밧슈는 괜히 말끝을 흐렸다. 루시아나가 머리를 짚었다.

 

그날 저녁에는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꽃다발을 든 붉은 머리 남자. 밧슈는 한 눈에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봤고, 그건 상대 또한 마찬가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밧슈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곧 고개를 돌려 루시아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의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만 꼈다.

"닥터 에스테베스."

"다시 오셨네요, 미스터 크라우스. 방해된다고 해도 안 나갈 거죠?"

"물론 이 병원의 방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을 부탁드린다니, 병원 입장에서는 부담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락왕이 외계로부터 소환한 미지의 인물인 만큼…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더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밧슈는 루시아나가 저 말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듣자하니 밧슈 이전에도 선례가 있었던 모양인 데다 신사적인 태도의 남자의 얼굴에서 악의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찰당하는 건 껄끄러웠지만, 완전히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라도 옆에 흉악범을 두고 발 뻗고 잘 수는 없을 테니까.

이쯤되니 얼굴도 본 적 없는 타락왕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예고도 없이 다른 세상으로 납치할 거면 조용히라도 해줄 것이지. 밧슈가 깊이 한숨을 내쉰다. 루시아나의 시선이 짧게 그에게 머물렀다가 곧 떨어졌다.

“…저번과는 다른 상황입니다, 미스터 크라우스. 그는 적대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병원이 신세를 진 입장이라서요.”

진심으로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두꺼운 안경 너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한 치의 거짓 없는 말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크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마침내 밧슈를 향해 돌아섰다. 고개를 숙인 그가 작은 명함을 내민다. 밧슈는 얼결에 손을 들어 그걸 받았다. 비밀결사 라이브라.

“소개가 늦었습니다.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시 관찰하겠다는 것치고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였다.

 

밧슈가 눈을 뜬 건 야심한 새벽녘이었다. 꿈 속에서 제법 그리운 얼굴을 많이 본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감시 관찰이라고 하긴 했지만 달리 특이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밧슈에게 명함을 건넨 크라우스는 그대로 침대 옆의 작은 의자에 앉아 내내 키보드를 두드렸고, 밧슈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다. 참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였으니 피로가 쌓였어도 이상할 건 없긴 한데… 옆에 누가 있는데도 정신없이 잠들다니. 그래도 한숨 자고 났더니 남아 있던 상처도, 수술자국도 확연히 아문 게 보였다. 내일이면 무리없이 움직일 수 있으리라.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던 밧슈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곁의 의자에 앉은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노트북의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녹색 눈과 마주친 밧슈가 흠칫 놀랐다. 곧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아니, 그냥 몇 가지만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노맨즈랜드, 그러니까... 내가 살던 별은 사막으로 뒤덮인 곳이라 이렇게까지 큰 도시는 처음 보거든.”

크라우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밧슈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 머무는 동안 뭔가 저지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나도 이 병원의 신념은 존중하고 싶어.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밧슈는 습관적으로 눈가를 만지다가, 그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크라우스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루시아나가 설명한 사건의 경위와 파란 눈에 비친 감정,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 같은 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애초에 이번의 감시 관찰은 경찰의 의뢰가 아니었다. 오히려 라이브라 측에서 요청한 건이었다. 하룻밤 사이 도시 하나를 파괴한 자의 힘을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직접 본 밧슈 더 스탬피드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인물임을 크라우스는 확신했다. 루시아나의 말이 맞았다. 휴머노이드 타이푼이라던 자는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600억의 현상금, 사상 최악의 흉악범, 휴머노이드 타이푼이라는 이명.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크라우스는 밧슈 더 스탬피드에 대해 생각했다. 고개를 젓는 데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믿습니다, 미스터. 물론, 이 곳에 관한 설명도―”

다음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두 사람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감했다. 그들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창문 바깥에서 섬광이 일었다. 뒤이어 끔찍한 폭발음도. 꺼져 있던 방 안에 일제히 비상등이 들어왔다. 벼락이 치듯이 병실 문이 큰 소리로 열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의 루시아나였다. 뭐 해요, 당장 나와요! 소리친 루시아나가 다시 복도 너머로 달려 사라졌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병원을 뒤흔들었다.

두 사람은 지체할 것 없이 움직였다. 몸을 일으킨 크라우스와 밧슈가 창가에 가까이 다가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원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이 옮겨 붙어 노랗게 어른거렸다. 짙은 붉은색 연기가 떠올라 밤하늘에 문양을 새겼다. 최근 도시에서 산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테러 단체의 문양이다. 라이브라에겐 제법 익숙한 자들이었다. 이곳이 병원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꼬리를 잡았음에 기뻐할 수 있었으리라. 크라우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 얼굴을 흘긋 바라본 밧슈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다. 다행인지 그의 총과 붉은 외투는 병실의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깁스를 한 채 코트를 걸칠 수는 없어서, 대강 팔에 걸친 채 뛰쳐나가려는 밧슈를 크라우스가 붙잡았다.

“…다른 환자들은 병원 뒤편으로 대피했습니다. 아마 닥터도 그쪽으로 갔을 테니, 당신도 얼른 합류하는 게 좋겠습니다.”

“감시 관찰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놔주게?”

농담이었으나 크라우스는 웃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크라우스가 너클 낀 주먹을 쥐었다. 밧슈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 농담이었어. 도망 안 칠게. 저 사람들을 막으러 갈거지? 같이 가자. 나도 이 곳이 부서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아, 의사 선생님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게. 회복력이 정말 좋은 편인데다 훌륭한 수술이었거든. 이거 봐, 움직이는 데엔 문제없어. 굳이 무리하지도 않을 거고.”

크라우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이 미지의 남자에게 손을 벌리는 것과 대피하도록 하는 것 사이에서 고심했다. 이 야심한 시각 지원이 도착하기까지 걸릴 시간과… 그리고, 밧슈의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을 확률도. 그러나 불의 노랗고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밤, 파란 눈과 권총을 쥔 손은 결의로 단단하다. 크라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테러 단체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불사하는 만큼, 오늘 갑자기 이 곳에 들이닥쳤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 찾으러 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같이 가야 해. 내가 밖으로 나가면, 나를 찾겠다면서 병원의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예, 그렇기에 무례를 범하고 묻겠습니다. 이 병원의 신념을 존중한다던 그 말. 반드시 지키리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밧슈 더 스탬피드를 찾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머나먼 노맨즈랜드에도 나이브스의 뜻에 동조하던 인간들은 많았으므로, 마찬가지로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멸망을 바라는 자들이리라. 폐허처럼 남은 줄라이의 풍경이 뇌리를 스쳐지나가서, 밧슈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대답하는 데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다. 그가 확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부탁이야, 믿어줘.”

때론 말 한 마디로 전해지는 진심이 있다. 지금이 그랬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병실을 뛰쳐나갔다. 사이렌이 울리는 어두운 복도로.

 

메스를 든 루시아나가 정문으로 밀려드는 자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물을 쏟아냈지만,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폭발 모두를 진압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밧슈와 크라우스가 그 옆으로 가 섰다.

부서진 기둥과 벽의 잔해 사이로 조각난 신체가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본 밧슈는 희게 질렸다가, 그들 전부가 비명을 지를 뿐 살아있음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비슷하게 질린 건 루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감시하겠다더니 환자를 데려오면 어떡해요? 당장 대피해요!”

“내가 오겠다고 했어. 그리고 이제 환자 아니거든?”

“의사한테 거짓말 치다간 큰일 나거든요.”

밧슈가 불만스레 입을 앙다물었다.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잖은가. 그가 총을 들었다. 뒤이은 총성. 의사를 향해 총구를 고정하던 남자의 총이 휙 옆으로 틀어졌다. 궤도가 틀어진 총알이 그을린 벽에 틀어박히고, 격발한 침입자는 피 흐르는 손을 붙든 채 경악성을 토했다.

밧슈는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플랜트 소유권 분쟁으로 어수선하던 마을에서의 일을. 역시나 내겐 이 일이 더 버겁다, 이 먼 도시까지 와서도… 쓰게 웃은 밧슈가 총구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크라우스나 루시아나가 말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총성이 울렸다. 내가 바로 밧슈 더 스탬피드다!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밧슈에게 크라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밧슈는 고개를 들었다가, 손을 잡는 대신 어느 한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드러누운 남자의 환부를 살피는 루시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확인하고 있는 자는 이십 분 전까지 병원에 들이닥치던 침입자였으나, 자비롭기 그지없는 방침 덕분에 환자로 격상된 상태였다. 물론 치료가 끝난 다음 얼마나 많은 치료비가 청구될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실험체 신세만 면한 것으로도 천운이었다.

“상황도 끝났으니 일어나지 말고 앉아 있으래서.”

크라우스와 밧슈가 합류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핏빛 십자가가 문을 가로막았고, 틈으로 쏟아지는 공격이나 무기 따위는 세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틀어져 엉뚱한 곳에 틀어박히고는 했다. 밧슈는 무리하지 않겠다던 약속대로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은 채 빈 탄피만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곧 어정쩡한 마음으로 테러에 가담했던 자들이 먼저 겁에 질려 빠져나갔고, 이후 합류한 경찰의 도움으로 그들 사이에 껴있던 주동자까지 체포되었다.

그리고 밧슈 더 스탬피드는 정말로 본인의 말을 지켰다. 그의 사격술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으나 결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는 그 파괴적인 무기를 쥐고, 그것으로 남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 선택지라고는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날아드는 날붙이를 흘려내고 불 붙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를 끊고 심지어는 날아오는 총탄의 궤적을 비트는 것까지도 어렵지 않게 해냈으면서 미간이나 심장을 꿰뚫린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이 그 증거였다. 크라우스는 바로 곁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미간을 좁히고 손을 터는 밧슈 더 스탬피드를 내려다보던 크라우스가, 불현듯 고개를 숙였다. 기겁한 밧슈가 엑, 하고 묘한 소리를 냈다.

“라이브라의 리더로서, 협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상황이 더없이 신속하고 무사히 끝날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사격술이더군요.”

“뭘, 굳이 내가 없었어도 충분했겠던데. 대단하더라, 둘 다. …그리고 나도 고마워. 아까 믿어줘서.”

낯설다는 듯 웃는 얼굴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소란이 잦아든 새벽, 도시 위로 여명이 밝고 있었다. 헬사렘즈 로트를 뒤덮은 짙은 안개를 조금 몰아내고 환한 빛을 쏟아냈다. 밧슈는 그 광경을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내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등을 기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크라우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락왕의 소환은 진실로 완전히 실패했다. 도착 지점이 병원 위였던 것도, 소환해낸 것이 하필 밧슈 더 스탬피드였던 것도. 이 진실이 타락왕의 귀에 들어갔다간 식인 딱정벌레 사태 후편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크라우스는 기꺼이 입을 다물고, 잠든 남자를 위해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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