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야

은하

사람을 죽이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은 사랑에 죽고 못 산다지만, 그건 한 때의 열렬함을 이기지 못 한 이들의 치기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랬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르면 사라질 것들을 붙들고 그게 불변하는 가치인 줄로만 아는 이들이나 감정 따위에 무모하게 목숨을 걸었다. 영원한 감정은 존재할 수 없는 상상 속이나 오래 된 소설 속의 고루한 개념에 불과하다. 기억은 풍화되고, 감정은 그보다 더 빨리 소모된다. 영원한 게 어디에 있겠니……. 그는 눈을 감고 아주 오래 전의 대화를 떠올린다.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랑과 낭만이야. 너는 인생을 그렇게 팍팍하게 살아서 어떡하려고…….

사랑이나 낭만이 수명 연장에 도움을 주진 않지. 그리고 버릇없이 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

온통 흰소리로 이루어진 대화를 잠시 곱씹다보면 기억은 아주 쉽게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기억 속에서는 언제든 사랑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다. 감상에 빠지는 건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아주 긴 시간을 타인의 의지로 살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그 안에는 언제나 내가 없었다. 시작이 타의 욕망과 맞닿아 있었으니, 여태 그게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고 살게 되었다. 생사만큼 욕망과 동떨어진 것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렇게 오랜 계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삶은 어느새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뭘 하고 싶었더라. 분명 아주 먼 옛날에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누구와 함께 살고 싶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그런 것들을 잊고 산 지 아주 오래 되었다. 내 것이 아닌 삶에 의미를 부여해봤자 미련과 후회가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애시당초 사람을 사랑하고 연민하라고 만들어졌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개인을 사랑하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야 조금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과 부딪히며 살다 보면 가끔 괜한 감정이 싹트는 법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혹은 날씨가 나쁘기 때문에. 꽃이 피었기 때문에, 혹은 꽃이 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보다 더 가끔 눈이 오기 때문에, 혹은 눈이 그쳤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사람을 연민하기 위해 만들어졌듯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감정에 이유를 붙이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도 또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게 되면 관계에도 자연히 이름이 붙게 된다. 관계에 이름이 붙게 되면 더 이상 감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나도 내 마음에 책임을 져야 되겠지…….

감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불쾌하다. 나는 순간의 감정 때문에 줄곧 내 삶을 온전히 내 것이라 부르지 못 했다. 타인의 의지로 연명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신들은 내 앞에서 늘 사랑을 입에 담는다. 그 덕분에 나는 한평생을 당신들이 떠나고 난 뒤의 빈 자리를 쓸어보며 살게 됐다. 하지만 당신들이 나를 사랑한 게,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이 당신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갈 길 잃은 원망은 언제나 자신을 향한다.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 섣불리 관계에 이름을 붙였다간 거기에 평생 매여살게 될 것이다.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시간에 평생을 걸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들에 당신 이름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흔적을 그리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아무래도 그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지나치게 오래 기억에 남은 탓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 때 나누었던 대화를 오래 기억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산책로를 기억하고, 그 날 들었던 미묘하게 능숙한 고백을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들, 정확히 기억하고 싶어지는 것들의 근원은 늘 사랑이다. 사람을 죽이는 사랑은 없으나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이 없을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졌고, 사랑 없이는 무엇도 살 수 없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늘 그런 삶이었다. 타인의 의지로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기억으로, 사랑 받았던 기억으로 주어진 시간을 겪어내는 것. 그것이 제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이 감정과 관계에 이름을 붙인다. 마음에 책임을 지는 일은 그렇게까지 끔찍하고 불쾌한 일이 아님을 인정하기로 한다. 사람을 죽이는 사랑은 없으나 사람을 살리는 사랑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여보세요, 저예요. 용건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보고 싶어서……."

이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분명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일테니까. 그리하여 아주 오래 미루고 있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로, 사랑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늘 상상했던 것만큼 나쁜 기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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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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