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어린 로그들

태초의 도시 메리 ★ 크리스마스!

20201226

에르아는 루예나를 죽이고 싶었다.

모든 일의 원흉 되시는 분이 쳐웃으며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저 꼬라지는 당연스럽게도 기가 막히도록 얄미웠다. 

"으하, 으하, 으하하하!!! 으하하하하!!!!!"

우렁찬 웃음 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매우다 못해 신전 건물을 왕왕 울렸다. 지금 어지간히도 웃긴 모양이지, 이게?

"이게??? 웃어???? 너는 지금 웃기냐, 이게?????"

루예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모를 정보인, 카나트가 체렌에게 두통약을 선물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내내 저 상태였다. 누가 말했겠어, 수족이겠지. 에르아의 말도 안 들리는지 이제는 소리없이 숨 넘어가도록 끅끅대고 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에르아는 한대 쥐어박으려다 참기로 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잘 생각해보면, 모든 원흉은 하이레인이라는 놈 아니겠는가.

"에르아, 루예나 죽었어?"

아리아테가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묻는다. 루예나의 웃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걱정된 모양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에르아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아리아테를 데리고 나갔다. 으하하하, 뒤에서 웃음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요! 미리 메리 크리!"

되먹지 않은 줄임말 쓰지 마라. 에르아가 윤수민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입만 잠깐 열고 쥐어박힌 윤수민은 많이 억울했는지 뭐라고 했으나,

"윤수민! 장식 끝난 거야? 어디 장식했어? 어디어디? 어디? 어디?"

아리아테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쩔쩔 매더니, 이내 아리아테가 꾸민 걸 보고 싶다며 질질 끌려 사라졌다. 아, 이대로 크리스마스도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예수라는 애는 왜 태어난 거냐.

다계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가끔 날씨와 관련된 누군가가 변덕을 부리면 좀 영향을 받기만 할 뿐, 늘 똑같은 날들이었다. 그리고 만다라는 우주가 시작될 적부터 진리와 만물, 그리고 신과 차원의 창조주다. 그들의 탄생일은 기억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인 즉슨, 다계는 한 번도 누군가의 탄신일로 이렇게나 크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다같이 신 나부랭이 생일을 챙겨야 하냐고?"

왜? 어째서? 와이? 웨이션머? 에르아는 오스카 옆에서 징징거리고 있었다. 오늘 날에 와서야, 예수 생일은 뒷전이 되어버리다시피 했으나 만다라는 그런거 몰랐다. 급조된 성가대를 맡게 된 오스카도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에르아처럼 무작정 싫은 모양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해… 지구 쪽은 돈 버는 날이라고."

"그건 우리가 직접 준비 안 할 때나 좋은거고."

"난 회사에서 한 달 전부터 기획한 지구 할로윈 끝나자마자 바로 크리스마스 기획 들어갔는데……"

이 가엾은 막내 동생이 3백년-마법의 지구와 우주는 시간의 흐름이 많이 달랐고 만다라에게 있어 1백년 정도는 반나절과도 같았다-동안 고통 받았던 걸 기억해낸 에르아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들 중에서 제일 업무가 많은건 늘 오스카였으니.

"아무튼, 이걸 왜 우리가 해?"

"에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봐! 우리 사업도 시즈널 상품 같은거 내면 잘 팔릴걸?"

성가대 의상 문제가 끝났는지 밝은 표정의 조혜린이 둘에게로 왔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잔잔한 분노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저런 애가 화났을 때 제일 무섭던데.

"그걸 뭐하러 해? 제품 하나만 해도 머리털 빠지게 생각해내는 건데, 시즈널 제품을 또 머리 뽑히게 생각하라고?"

끝내준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겠네. 에르아가 궁시렁거리자 조혜린은 아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원래 돈 버는 일은 쉬운게 아닌데."

에르아는 진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달의 신전 식당의 한 쪽 벽면은 조리하는 모습이 다 보이게 창을 뚫어둔 뷔페 식당 구조였다. 식사 때가 아니었지만 주방은 바빴고 그중에서도 민재윤이 제일 바빠보였다.

"자기!"

루예나가 바깥의 식당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 많은 요리사들 중 민재윤만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연결된 순간,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민재윤에게 인사한 루예나는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그는 누구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주방의 모든 이들도 방해받지 않길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루예나는 직원들이나 민재윤이 자길 봤다고 인사하는데 시간을 뺏기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서 맞이하는 걸 원치 않았다. 신전의 주인은 그런 식으로 일의 집중이 끊겨 효율이 저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예나가 만다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의 신전을 방문한 만다라들은 이를 매우 고깝게 여겼으나 이제는 루예나만의 방식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게 훨씬 더 좋다는 걸 이제서야 겨우 깨달은 어떤 고세대 만다라들은 자신의 신전에도 그런 문화를 도입시켰다. 복도를 지나가다도 만다라가 지나간다고 발을 멈추고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멈추는 건 정말 쓸데없는 예법이었으니까.

"나 끝났는데."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한참 타자를 두들기던 루예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와, 자기야~ 난 요즘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땡겨."

고개를 젖혀 제 머리 위로 보이는 민재윤을 애교스럽게 부른 루예나가 엄청 진지한 요구를 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목깃을 잡아 제게로 내리 끌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곤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까?"

재윤은 말없이 제 왼쪽 팔을 내밀었다.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낀 루예나가 다른 자유로운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먼저 걸어갔다. 언뜻 보면 민재윤이 질질 끌려가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아~ 분명 재밌을 거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만다라들이라니, 진짜 웃겨! 솔직히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는데… 끽 해봐야 2, 3세대랑 미드리아와 많이 친한 고세대 몇 명 정도?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역시 앞으로도 카나트를 좀 동원해야하나? 싶기도 하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루예나는 연신 종알거리며 발을 옮겼다. 신전의 복도는 붉은 리본으로 마무리 된 리스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고, 전등마다 반짝이는 전구줄이 곡선을 그리며 걸려 있었다. 알록달록, 붉고 푸른 빛깔을 중심으로 신전 안은 환하게 치창되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리아테와 윤수민, 내일 모레면 끝날 케이크, 어딘가에 있을 세 사람,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세 사람과 다른 만다라들, 그리고 또 친분이 있는 사람들… 

축제 외의 다른 것으로 도시가 들썩이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재밌을거라는 점이겠지, 루예나에게.


"와!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

달의 정찬실에는 아침부터 루예나의 인사와 아리아테의 외침이 뒤엉켰다. 그 뒤를 따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이곤 들어오는 하이레인이 보였다.

이로써 루예나가 초대한 사람은 전부 모였다. 뮬 셀레, 대표당파의 만다라들과 친하게 지내는 만다라들, 그리고 여러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이 종을 불문하고 다 함께였다. 이런 날에는 한 번의 식사 정도는 다같이 해야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주인공답게 끝내주는 초대였다.

"음, 음. 좋은 날이야! 좋은 날이고 말고!"

"좋은 거야?"

"아, 당연하지!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니까! 네가 말했던 노래 부르고 선물 주고받기, 맛있는 거 먹기, 아무 것도 안 하고 휴일을 즐기며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있기, 그거 다 하는 날이지!"

루예나의 말에 아리아테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더니 이내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래! 네가 불러온 날이니 즐겁게 놀아라, 짜샤!

"엣헴, 그럼… 나는 최대한 노력했으나! 테이블이 좀 나뉘긴 했지만? 에, 또… 그리고, 아침이니 음주도 안 되지만~"

루예나의 마지막 말에 몇몇이 와르르 웃었다.

"자, 모두 잔 들까요?"

루예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경쾌한 목소리로 정찬실의 모두에게 권했다. 컵과 잔들에 물이 담기고 제각기 다른 손들에 쥐여졌다.

"아침 정찬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오늘은 늦잠을 자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근데 재윤이가 절 끌고 나왔어요. 주인 없이 진행될 뻔 했는데, 막아준 제 남편에게 영광을 돌리며 건배하겠습니다."

루예나의 말이 끝나자 네이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건배사! 네이가 추천할래!"

"오, 좋아. 뭔데?"

"오늘은! 놀고 먹는 날!"

다시 한 번 정찬실에 와, 하고 웃음이 돌았다. 루예나는 아리아테를 보았다. 괜, 찮, 아? 그가 모든 걸 시작하자고 한 발단에게 은밀히 동의를 구했다. 아리아테는 뭔지 못 알아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루예나가 물어보는 거면 괜찮은거 아냐?

"좋아, 오늘 건배사는 그걸로 합시다! 자! 오늘은!"

"놀고 먹는 날!"

짜앙, 컵들과 잔들이 맑게 부딪치는 소리로 정찬실을 울렸다. 소리는 사람들이 먹고 말하는 것들로 바뀌었다. 테이블과 테이블을 오가는 인사, 그리고 대화가 심심찮게 보였다. 루예나도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던 참이었다. 고맙게도 대부분은 루예나가 있는 쪽으로 와주었다. 그리고 아리아테가 루예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루예나. 왜 여긴 눈 안 내려?"

아하, 이게 어디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걸 듣고 온 모양이지? 루예나가 이르티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야, 눈이라는 건 말이다. 대~단히 치우기 귀찮은 쓰…"

에르아가 말하다 말고 이르티아를 슬쩍 보았다.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는 이르티아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에르아는 황급히 단어를 바꿨다.

"가, 아니고! 아무튼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든단 말이지. 그러니 내가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다 더 개쩌는걸 보여주지."

그렇게 말한 에르아가 루예나에게 눈짓했다. 아! 이 언니 참…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할 거 다 해준다니까? 에르아가 뭘 보여주려는지 깨달은 루예나는 정찬실의 방향을 생각했다. 문이 있는 방향은 서쪽이니까…… 내 오른쪽 벽이겠지.

루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다가갔다. 높고, 거대한 벽에 한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딱! 튕기자 벽이 사라졌다.

"자, 여러분! 오늘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더 특별하다!"

루예나는 멘트를 날리며 에르아를 힐긋 보았다. 구석에서 정신 없이 전화로 뭐라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시작해, 이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벽에 대충 유리창을 박은 루예나가 에르아에게 입을 뻥긋거렸다. 기. 다. 려. 에르아도 뻥긋거리며 손짓했다.

"와, 살면서 이런 크리스마스는 없다! 만다라가 챙기지! 다같이 밥도 먹지! 그리고…!"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우주에 빛이 한줄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별똥별이다."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별똥별이 하나 둘씩 더 내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이, 밀려오는 파도에 점점 적셔지듯이, 한두가닥으로 시작된 유성우가 검보랏빛 우주를 수놓기 시작했다. 장관이네, 누군가 말했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루예나는 아리아테를 보았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아이가 만족한다, 그거면 됐지.


After.

"그래서?"

"그래서라니? 어쩌라고?"

"이 언니가 미쳤나. 어쩌라고, 라니, 내 선물은??"

"또라이야, 너 같으면 시간 들여 준비 하겠냐?"

"뭔 개소리야, 내가 준 건 선물이 아니고 서류폭탄이냐?"

"야 너 같으면 이딴 일을 기획한 사람에게 주고 싶겠냐?!"

"아니, 미쳤어? 지는 좋다고 부하들이랑 별들이랑 온갖 사람들에게 선물 쳐삥뜯고? 왜 나한테만 이 지랄이지? 아리아 선물도 챙겨놓고는? 내껀 홀랑 처받아먹고!!"

"지? 야 이 새꺄, 내가 니 친구냐?"

"누나들, 싸워……?"

"아씨발깜짝아"

귀신처럼 조용히 뒤에서 나타난 오스카의 말에 두 사람은 싸운 적 없다는 것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항상 있는 패턴이었다.

그래, 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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