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사냥꾼
테나베르 사귀는 이야기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잿더미 위에 반쯤 타버린 나의 몸. 다른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알아야 하는데,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렇게 모든 게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우주를 떠도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
차츰 사라져가는 것들 사이에서 겨우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여자에게 복수해야 해,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누가 속삭이는 건지,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목소리는 때론 커졌고, 때론 작아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전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쪽으로 가보기라도 했다.
그래, 그것이 내 삶의 최고의 선택이었겠지.
정원의 사냥꾼
Hunter in the Rose Garden
테나르미 X 제베르나
내가 자랑스러운 벨라로아드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라는 걸 떠올렸을 때도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네가 날 택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미련하게 버텼는지, 그때는 몰랐겠지만 지금은 알아. 그리고 너는 후회하거나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날 어떻게든 위로해주려고 했겠지.
너는 정말 착하고 따스하단 걸 알았을 때는 다시 시작한다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았을 때였어. 강하지 못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되더라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삶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 이 고통은 기꺼이 감수하며… 너에게 미칠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어.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좋았는데. 사실 예뻐지고 싶다고 달려왔을 때도 거절하고 싶었어. 너는 그 자체로 너인데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거로 예뻐지고 싶다니.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도, 네 앞에선……
그래.
네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웃는 게 좋아. 네가 울지 않고, 기뻐하고, 괴로운 일은 금방 끝나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어.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는 건 그냥 친구였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마음 가는 대로, 네가 힘들어할 때 더 잘해줬으면… 그랬으면 너는 나를 조금은 다르게 봐주지 않았을까. 그날 밤에도, 그때부터 쌍둥이들을 볼 때도, 감정이 왜 이렇게 일렁이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토할 것 같은지………
하지만 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쌍둥이들은 그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깐족거리는 새끼. 누구 자식한테 자꾸 깔짝깔짝…… 보지 않는 게 속에 좋았다. 누구와 누구와 누구, 그리고 누구… 생각할 때마다 속은 안 좋아지고, 토할 것 같고…
하지만 역시 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쌍둥이들은 타파티움을 더 따랐으니까.
망할 놈들, 전부 다 쓴 탄창만도 못한 쓰레기 자식들.
그날만큼은 가문의 원수가 그걸 말리러 온 것에 고마웠고, 늦게 도착한 것에 화가 치밀었다. 저쪽도 최대한 빨리 알고 온 거였겠지, 목적은 달랐겠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의 의식에만 관심이 있었겠지… 별별 말로 자신을 스스로 위안해봐도, 로제베르의 곁에 있어 줬어도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다면… 악의 손길을 잡자는 건 반대할 텐데. 그때의 선택을,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사고라고 부르는 것조차 역겨웠다. 바늘에 좀 찔린 것 가지고 흥분한 개새끼나, 그 일에 상처를 입는 연약한 몸덩이나…
애초에 혼돈의 아이라고 하지 않았나, 기본적인 전투 관련 능력치가 없는 족속들도 아닌데 무력하게 상처나 입었다는 게 말이나 됐던 건지. 그 박쥐 같은 놈을 만나려고 수작 부린 건 아니었을지. 그건 지금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그날, 장미의 얼굴을 봤더라면 그런 식으로는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그 호들갑에 맞장구치거나 말리러 나서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때 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제베르나, 네가 나에게 임무를 위해 죽어달라면 기꺼이 그러겠으나… 그러지 못할 거였어. 네가 행복하지 못한데 죽어서 어떡해.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그딴 놈에게 주던 마음을 거의 접다시피 했을 때, 나는 속으로 환호했지. 그랬었어.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이 남아있을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그놈을 만난 게 인생 최고의 실수라고 했을 때… 솔직히 그렇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건. 그놈을 안 만났으면 우주로 나왔을 일도 없잖아. 그럼 나는 널 못 만났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에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자꾸만 곱씹게 돼서…
네가… 타파티움에게 잘해보겠다고 했을 땐 웃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혀 깨물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남자가 좋아서 그런 거라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그때 처음으로 만다라 같은 종교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사랑이 바로 옆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달라고, 그런 거.
네가 사적으로 그 죽일 놈을 만나서 평화롭게 차 한잔하고 올 때가 가끔 있었다는 걸 알고… 그때는 두 번째로 혀 깨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해야겠지. 쌍둥이가 태어날 때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근데 꼭 걔여야 해? 차라리 나한테 미리 말하거나 도와달라고 했으면 산파든 과학자든 뭐든 구해왔을 텐데…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했던 걸까. 우릴 아는 외부인이 너무 많아지면… 좋지 않으니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삐걱거렸지… 그래도 그 인형이 있었을 때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려고 했던 건 좋았어. 노력은 했던 거 같은데, 솔직히 그때쯤에는… 거의 삐걱거려서 잘 모르겠네. 우리 거의… 파국 아니었나? 아니라면 말고. 하지만 분위기도 뭣도 다 안 좋았지. 그때쯤에 지원도 덜했고, 분위기도 꽤 처져있었고…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아. 그렇게 좋은 시절의 기억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돌 로젤라 덕분에 그나마 제일 괜찮았을 때였던 것 같네.
그리고 그날, 그날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상세히 기억난다. 습격, 도망, 추적, 은신… 나의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토록이나 비참할 수 있던가. 정말 죽고 싶었다. 복수는 못 했지, 지원은 배신했지, 다들 죽상에 제베르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 그나마 타파티움이 없었다면 진짜 완전히 산산조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악당의 최후가 이 정도로 비참하다면 안 했을 거 같아, 그런 실없는 생각도 좀 하면서… 궐련이라도 물고 싶었던 것 같더라.
기껏 생각해낸 게 그 사람인 것도 어이없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걸 받아준 애도 제정신은 아니었겠지, 분명. 하지만 나는 네가 사적으로 만났던 그 사람에게 걸어본 것이었다. 만약… 그게 공적인 관계였다면 우리는 정말로 끝이었겠지.
도시의 축제는 그토록 화려한데, 우리는 갈 곳이 없다는 게 정말… 딱히 어느 쪽의 편을 들거나 하지 않은 다른 반역가문들도 즐기고 있는데, 몰래 수레에 숨어들어오는 우리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비참함보다도 악으로 칭송받던 우리가, 그토록 초라해졌다는 게 나는……
다 지난 일, 이지만.
입안이 썼고, 나오지도 않은 눈물이 흐르는 감각이 싫었다. 아무도 우리가 어딨는지 모를 텐데도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과 꼴좋다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 도시에 있기 싫었다. 그건 나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타파티움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든 추스르고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더 축제에 몸을 숨기는 일행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어디선가 미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니었던 그것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선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벗어나고 싶다고…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내 마음이고, 그날처럼 나를 부르던 제베르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네가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나는 있어야만 해. 채찍질하듯이 자신을 다그쳐도 도망가고 싶어.
그때… 제베르나, 집에 가자. 한마디라도 해볼걸. 과거를 떠올리면 후회스러운 것투성이다. 조금 더 나은 현재일지라도, 과거에 조금 더 잘했더라면 이것보단 나은 현재였을 거란 생각을, 널 보고 있으면 항상 떠올리게 돼.
……절대로 네가 싫다는 게 아니야.
그때를 자꾸 생각해보면… 내 집은 전부 없어졌지만 네 집이 있다는 건 어쩌다 들은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그게 불타 없어졌던 집이었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데려갔을 텐데.
마음이 차분하질 못하니 그때의 나는 별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네가 힘들까 봐 걱정되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챙길 수가 없는 기분인 게 싫었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었던 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어. 너는 늘 그랬었지, 나한텐 괜찮다는 것만 보여주면서… 정작 중요한 건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어떤 사람이어도 나는 좋아………
트리필엑서는 부유한 행성이고 아이비 제국은 강대했으며 네 가문은 유서 깊은 귀족가라는 걸, 사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너의 첫 모습은 지저분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려서 잘 티가 안 나는 모습이었으니까. 너는 떠나있던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원래 있던 사람처럼 행동했지. 처음으로 너는 내가 생각하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봤어. 우주의 죄인이라고 불리는 반역가문이 귀족 아가씨에게, 당치도 않지…
그때쯤엔 아마 스스로 지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 거 같아. 하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흠 하나 가지 않았어, 더 견고해졌지. 너를 계속 좋아하고 있었지.
떠올려보면 하나하나, 널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은 때가 거의 없다. 오히려 그걸 세는 게 더 빠를 거야. 너를 정말로……
당장 쫓기는 몸이니 조용히 몸을 사리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기로 했었지. 사실 네가 그 집에서 쉬면 좀 기분이 나아질까 해서, 그 집에서 머물자고 밀어붙였어. 정말로 나아진 건지, 아닌 건진 모르겠지만. 너는 괜찮다는 말만 했으니까. 하지만 넌 표정 관리가 별로 잘 안 되는 편인 거 알아?
그때쯤 돼서야 겨우 알 것 같았어.
떨리는 부분이 어디냐에 따라 네가 무엇을 느껴서 괜찮다고 말한 건지…
집에서 머물 때, 정원을 가꾸는 동안의 네 얼굴이 가장 환했던 것도, 내가 어떻냐고 물어보면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 네 눈꼬리가 살짝 떨리던 것도, 하인들을 부리던 네 입매가 떨리지 않기 위해 힘이 들어간 것도, 다른 애들이 언제쯤이냐고 물어보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던 네 표정도,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표정도, 전부 잊지 않았어. 잊지 않으려고, 말없이 네 손을 잡았어.
그럴 때마다 말없이 내 손을 더 꽉 쥐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 번은 움직여서 아직 우리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야 이상한 소문 같은 게 따라붙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애들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던 네 표정도 기억하고 있지.
그때의 가라앉은 네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조금 빛나던 건, 아마 나만 봤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다, 내가 봤으면 타파티움도 봤겠지.
난 도대체 타파티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제베르, 너와는 다르게 그 녀석은 좀 더… 수상한 쪽에 가까운데.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너한테 해가 될 짓을 하는 놈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때 그 싸움에서 난입한 놈의 공격을 맞지 않게 해주려고 널 감싸면서 떨어진 거론 그놈이 용서가 안된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준 것과 나의 모든 것을 박살 낸 것은 다른 문제지. 나, 너한테 이제까지 말하지 않았던 게 있어. 우리는 악당이니 언젠간 죽는다면… 다시 그런 때가 온다면 너는, 너는… 그 자식 손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거 기억나? 난 그놈하고 축제 마지막 날 밤에 약속했었어.
그게 죽게 된다면 내가 죽이기로. 그리고 그건 아주아주 오래 살 거 같으니까 우리도 아주아주 오래 살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네가 불행하지 않게 내가, 내가 널 위해 노력하려고.
그래서 나는, 그때 다 같이 은신했던 그 지하에서 그놈이 죽을 날이 벌써 온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아니라고 하더라. 참 이상하지, 보통 그 정도 부상이면 죽잖아. 근데 걔는 아니래. 이런 적이 우리로 인한 부상 말고도 수없이 많았고, 그때마다 긴 회복기와 몸을 물건 고치듯이 수리하거나 기계 부품을 교체하듯 몸을 교체해서 멀쩡해졌대. 진짜 이상하고 웃기지.
하나도 안 웃기는데. 그게 정말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있는 게 맞다고 봐야 할까?
그런 거의 손에 죽은 우리 가문… 사실 복수할 상대가 사라진 건 아닐까 했어. 모르겠더라. 본인이라고 했으니까, 그대로겠지. 그렇게 믿어야겠지. 아니면 싫다는 말 한마디에 사라진 모두가 억울해지는 거니까.
들킬까 봐 안된다면서 지하에서 강제 요양하다 겨우 돌아갔더니, 집에 찾아온 놈도 이렇게 된 우리에게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던 거 기억나네.
우리를 실험용 동물… 아니 그보다도 못하지 돼지를 잘 키웠는데 갑자기 키운 흔적을 없애려고 잡아먹겠다는 것처럼 구는 놈들의 의견이 뭐가 중요할까 싶긴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네 말이 옳았고 좌천된 놈들 참 꼬시다고 생각하고 있어.
사실 네가 두고 보자고 안 했으면 따라가서 어떻게든 해치웠을 거야, 이런 고백이라 미안. 점점 네가 볼 걸 가정하고 쓰게 된다. 편지가 아닌데… 왜인지 점점 편지가 되는 것 같아.
갑자기 스퀼과 하티한테 찾아온 놈도 참 당황스러웠는데, 그게 루예나랑 연결된 것도 어이없었다. 그런데 너는 그때부터 좀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 그제야 네가 삐걱거림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보여서, 나는 정말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네가 힘들어하지 않는데, 뭐가 문제일까.
네가 삐걱거림을 고치든, 거기에 적응하든, 무시하고 그냥 있기로 했든, 혹은 버리고 떠나든.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그래서… 그때, 따라갔다가 아주 한참 뒤에 돌아와선 재밌었다고 마구 얘기해줄 때, 네가 진짜로 신나 보여서 네 얘기를 들었다. 네가 더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의 눈을 하고 있지 않아서, 나는 그게 더 중요했어.
그 희망 없던 눈을 완전히 떠나보낸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우리가 파도처럼 쓸리는 동안 이름세만 받아먹으며 가만히 있던 놈들을 그제야 끊어내자고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 전의 너는 언젠간 작은 도움이라도 있을 거라며 가만히 있기만 했었으니까.
너는 좀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도 좋아. 어디서 들었던 얘긴데, 악당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매사 낙관적인 사람이 하기에 제격이라나. 방해하는 놈들이 계속 와도 거기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니까, 라고 하더라고. 꼭 그 이유가 아니어도, 사람은 밝아야 더… 멀쩡해 보이니까.
하지만 우릴 내친 것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는 왜인지 모르겠었어. 도대체 루예나가 뭘 알려주겠다는 건지도, 네가 왜 마음을 바꾼 건지도. 너는 그게 우리에게 있어 절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고 하며 설득했지. 확실히 지금을 보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직도 그렇게 와닿진 않아. 그럼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인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알려주거나 하는 거야?
사실 난…
네가 만다라를 넘어선 것이 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네가 예전의 너로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네가 그랬지,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우리의 위치가 바뀔 뿐이고 우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때, 사실 조금 무서웠다. 네가 루예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내가 너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이걸 너한테 물어봐야 할까, 그런 생각들로 시간만 보냈지 뭐야. 그냥 너한테 말하면 됐을 텐데.
이것조차 말하지 못해서 여기에 쓰고 있지만…
그래, 서론이 너무 길었지. 처음부터 떠올리려고 해서 그래.
하지만 난… 돌이켜보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적은 없었어. 막연하게 네가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그리고 그건 타파티움만 알고 있지. 걔는 이상하게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더라. 나도 가업을 하면서부터 길러온 육감이라는 게 있는데, 걔는… 뭐랄까 좀, 다른 부류의 감이긴 하지만 대단히 뛰어나.
라스울리놈은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걔한텐 조금 질투도 났지. 널 잘 알고, 네가 신경을 쓰고, 그런 관계는…… 난, 난… 아니다.
구구절절하게 널 좋아한다고 하고 보니 대단히, 부끄럽고… 그냥 지우고 다 찢고 싶네. 사랑한다고 러브레터를 보내는 애들은 정말 용기 있구나, 싶다. 이런 용기는 생전 가질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한 과거의 나를 묻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
그래, 나…
널 사랑해. 좋아한다고만 말하면 흘리듯 넘어갈 수도 있겠지. 스스로 마음을 속일지도 몰라. 그러니 혹시라도 지우거나 찢어 없앨 수 있으니까, 한 번이라도 확실하게 정하고 싶었다. 그런 거야, 이건…
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게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그리고 네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잘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고. 결국, 우리를 끌어모은 건 너인데,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이상해. 그러니, 글에서라도 솔직해지고 싶다.
널 위한다고 나를 포함한 우리가 숨긴 게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절대로 알리지 않으려고 네 뒤에서 공작을 펼친 건 또 얼마나 많았는지…… 그동안은 네가 힘들어하고, 우리 모두 얘기할 여력이 없었으며, 네 정신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걸 우리 모두 은연중에 알고 있어서 감추기도 했어.
아마 내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을 거야. 특히 타파티움은 더. 하지만 모두 널 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변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여론이 안 좋다는 건 짐작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나빠. 아직 어디서도 공식적으로 상황을 선포한 게 아니라서 수군거리는 정도지만… 다들 우리가 완전히 격파당했다고 생각해. 우주의 근간이 정의를 택했다고 믿지. 루예나는 계속 가만히 있지만.
그리고 우리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너의 부활을 믿고 있어. 너는 그냥 우리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 정도라고 알고 있겠지만, 아니야.
실상은 아주 너에게 맹목적이고 모든 걸 바치고 싶어 할 만큼 헌신적인 마음가짐으로 각자의 세를 불려나가고 있지… 그 규모는 꽤 많이 크고, 너를 완전히 왕처럼 떠받드는 수준이야. 그리고 일부의 무리는 아예 널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악의 신이 되어 세상의 부조리한 위선을 처단할 거라고 믿는, 마치……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해보자면 사교도 같아 보여.
우리는 그들에게 너를 위해서라며 입단속을 하고 계획을 위해 부린 적이 있어. 한두 번이 아닐 거란 건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런 것들을 당사자인 네가 모른다는 건 결국 보호를 가장한 눈 가리기지. 그리고 우린 그걸 너무 오래 유지했고. 사실 너에게 말할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었어. 하지만 함부로 말했다간, 정말로 모든 게 끝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
그리고, 나는 네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결코, 모든 말을 전부 다, 라고는 못하겠지만… 최소한의 후회는 없다.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이해해줘. 어느 정도는 일기의 목적으로 쓰고 있었어. 다른 나머지 목적으로는, 혼자서라도 어딘가에 고해를 하고 싶었고.
이런 식으로 편지에 하고픈 말을 다 남기고 떠맡기듯 보낸 채 내 정리된 의견을 한 번에 읽어서 받아들이고 정리하라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편지처럼 써서 보여주게 될 거라곤 나도 몰랐어. 미안해. 이건 이해해달라고 밖에 할 말이 없네.
다 읽고 나면 내게 와줄래? 내게 오는 데 오래 걸려도 좋아. 그게 꼭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으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해. 너는 늘 생각하는데 시간을 오래 쏟곤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너에 대해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닌데, 나는 늘 널 모르겠다고만 했었네. 참 바보 같지, 너의 곁에 있던 것만으로도 너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는데.
과거의 나는 참 바보 같은 날들을 보낸 것 같더라. 그건 돌이켜보면, 널 만난 순간부터였을 것 같아. 왜, 그…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잖아? 바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바보 같지. 어떻게, 맺어야 할지… 잘 모르겠네.
다 보면, 정리해서 네 말을 들려줘. 답, 기다릴게.
좋아해.
제베르는 가만히 다 본 노트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의 길디긴 글에는 토로와 고백과 회상, 변명, 그리고 사죄가 정리된 듯, 되지 않은 채로 가지런히 수놓아져 있었다. 몇 번이고 좋아한다는 단어를 보며, 제베르는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계속해서 느껴왔다. 어딘가에서부터 자꾸만 간지럽히듯, 아주 조금씩 커지던 그것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물샘을 슬쩍슬쩍 건드리며 자신은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에 휘말리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만 같아서, 제베르는 애써 눈을 치켜뜨고 버텼다. 그녀는 노트가 있는 책상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녀의 눈에 널브러진 펜과 찢겨 구겨진 채 굴러다니는 종이 몇 장이 들어왔다. 노트의 찢긴 자국은 뒤로 갈수록 점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 애가 이 글을 쓰려고, 얼마나 고심했을지.
제베르는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나무 의자가 삐걱거리는 신음을 내며 그녀를 받쳤다. 제베르는 의자에 몸을 최대한 묻어보았다. 이러면 좀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제베르는 늘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떻게 앞을 정하고 방향을 잡을지, 무엇을 하는 게 최선일지, 어디로 가야 안전할지. 모든 것이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어서, 가장 괜찮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라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혼란스럽게 보였던 걸까. 정말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 치 앞조차 모를 것 같은 것에서도 테나르미의 마음은 계속 변치 않고,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한결같았다. 알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 제베르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모른다는 말로 회피한 것이 얼마나 많았더라.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 그저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 모르는 척 도망쳤을 뿐이었다. 선택은 늘 촉박하게 다가왔고 갈수록 점점 책임져야 하는 게 많아진다고 생각하자 그게 압박으로 느껴져 회피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도망쳐서 잘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보단 뭔가 좀 더 나았을까?
눈을 감고 하나하나 눈꺼풀 안쪽에서 영상을 재생하듯, 떠올려본다. 처음으로 일을 시작해본 때, 만다라를 건드렸던 때, 루예나와 처음 만났던 곳, 강해져서 한 방 먹이고 싶다고 빌었을 때, 테나르미와 계약했던 때…… 계속 생각해봤지만, 역시나 모르겠다. 더 잘 된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어쨌거나 만다라를 상대한다면 그에 필적하는 무언가의 힘이 필요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걸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우리는 어렸고, 젊었고, 혈기 넘치는 악당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과거를 곱씹어봐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미래의 앞날이니까.
테나르미는 이 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최대한 담아내려고 한 것 같지만… 자신을 만났을 때부턴 온통 자신으로 시작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투성이였다. 그게 어쩐지 좀 귀여워 보여서, 다시 노트를 집어 들고 처음부터 훑어내리던 제베르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그 애의 말이 맞았다. 그 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떻게든 위로해주기 위해 옆에서 등을 열심히 토닥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의식의 날에 루예나가 달려온 게 기뻤지만, 또 화가 났다. 올 거면 조금만 더 빨리 오지, 그런 것. 참담함에 목이 메어와 꺼내지 못한 원망은 자신뿐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그날, '사고'가 있던 날의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자세하게 기억나지도 않는다. 아마… 분노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던 것 같다. 황야에 있던 것만 기억났으니까. 내가 무엇을 봤는지도 잘 모르겠더라. 자세한 경위도 나중에 타파티움을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겠네. 그런 건 몰라도 되지.
그래서 타파티움에게라도 정을 붙여보려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나쁜 행동이었고, 그걸 받아준 타파티움에겐 고마웠다. 그 애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테나가 자신을 볼 때의 마음이 그랬을까, 싶었다. 사실 지금도 그랬다. 테나도 아직까지 그럴까. 이것도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루예나를 만난 걸까. 하지만 그런 문제를 어떻게 말할까. 그 사람의 사랑은 자신과 결이 완전히 다른데. 그래도, 유익한 시간이긴 했다. 그 사람은 조언을 해줬으니까. 적에게 조언해봤자 불리해지기만 할 텐데도 했다는 건, 역시 그만큼 강해서, 라는 거겠지. 그 강함이 부러웠다. 지금도 그렇고. 그랬다면 그날의 습격 때도 그렇게…… 아니, 애초에 그만큼 강했다면 우릴 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상념에 잠긴 제베르가 입맛을 한 번 다셨다. 씁쓸했다. 수많은 일이 있었다. 편지에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웻지스톤 공방과의 연합이라던가. 태초의 도시에선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을 치렀다던가. 그때마다 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더 성장했다고, 더 나아질 수 있겠다고. 하지만 그건 결국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속해서 피해온 날이 얼마나 되던가. 피하지 않은 날보단 많았다. 돌 로젤라는 그래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그리고 그날은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날이었다. 선택을 두려워해 회피했는데, 회피하는 것을 선택하다니. 그리고 그게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니. 그게 얼마나 웃겼는지. 얼마나, 웃겼는지…… 웃기지 않았다. 제베르는 그날 울었다. 도망치자고 판단을 내린 순간부터, 테나르미의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참 이상하지. 어떻게 보면 자초한 건데도, 왜 그렇게 억울했던 건지. 왜 그 억울함 속에서 루예나가 생각났는지. 사적으로 만날 때면 그 사람은 늘 자기가 억울하다고 했다. 서로 상대하지 않는 게 지금 당장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노래를 부르며 이런 다툼은 의미 없는 소모라고 했지. 언젠간 아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거라고 이를 갈다 음료를 벌컥 들이마시던 모습은 이제 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본때를 보여줬을 테니까.
그런 강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싫었다. 강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힘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자신과는 다르게 잘 알고 있었다. 비단 힘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을 위해서도. 그랬으니 트리필엑서에서 왔다는 의뢰를 받은 거겠지.
그때 노일의 얼굴을 봤을 때, 제베르는 형용할 수 없는 과거와 현재의 것들을 느꼈다.
그걸 뭐라고 부를지 아직도 모르겠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늘 어렵게 다가왔다. 한참을 생각해도 잘 모르겠는, 희미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몰라도 노일이 황제의 명령으로 복구할 수 있었던 집은 충격이었다.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만 있다고 할 수도 없는 충격이 그때의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집이라는 건 불타 없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다시 생겨날 수 있는지. 머물러도 되는지, 또 어느 순간 불타 없어지는 때가 오는 건 아닌지, 생각들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테나르미가 잡아주던 손을 맞잡았다. 집은 불타 없어져도, 그 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날 떠나지 않았으니까.
테나르미와는 다른 의미로, 루예나 또한 날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눈빛과 태도에는 명확한 선이 없었다. 마치 언젠간 좀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느낌으로… 하지만 왜 그렇게 행동해.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건 비밀로 하고 모르는 척 만날 때나 가능한 거였잖아. 왜 그때 날아오는 공격에서 날 감쌌어? 악당은 어쨌거나 죽는 게 이야기의 끝을 알리는 신호인데. 그게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 삶이 더 길게… 이어지겠구나 싶었다.
루예나는 늘 이상했다.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만 같아도 결국엔 다 나아서 멀쩡한 채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는 낫지 않아서,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은연중에 그쪽의 보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이쪽마저 죽어서, 루예나의 무리가 우리를 치면? 나는 그런 것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 따윈 모른다. 하지만 테나르미, 네가 카이제를 다룰 줄 아니 결국엔 괜찮았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그래, 맞다. 트리필엑서로 돌아갔더니 악의 아이들이 우릴 보고 싶어 한다고 한 전령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악의 대리가 되는 것이 두려운 일부 악의 아이들이 나와 우릴 제거하려고 그랬던 거겠지. 루예나를 만나면 늘 보수파들이 짜증 난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권력 싸움 같은 것에 끼고 싶지 않았다. 이젠 다 부질없지만.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벗어나려고 하면 더 다가오고 완벽한 도망은 없었다. 악의 대리가 되었다는 건 아마도 루예나네를 제외한 다른 만다라들과도 부딪칠 일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 결산이란 것도 있고…… 생각해보면 눈앞이 캄캄했다. 만다라는 수많은 신도와 도시의 주민들, 그리고 저네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전부 관리하지 않나? 분명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숙한 이들일 게 분명했다. 알고 있었어도 알고 싶지 않던 일이 직접적으로 닥쳐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도망치고 싶은 일이었다. 사람을 관리하고, 알맞게 부리고, 또 일부는 떨어져 나가지 않게 아이 대하듯 모범을 보여야 하는, 그런 일은 제베르에게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테나르미가 말한 추종자들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제베르는 몰랐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더는 피하면 안 됐다. 피하는 것이 된다고 해도, 피하면 무엇이 되는가? 아무것도 결정되는 건 없었다. 그저 제베르의 의견이 빠진 상황이 될 것이고, 계속 굴러가려고 하겠지. 그럴 바엔 다르게, 조금 더 나아 보이는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게 내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 선택을 할 거란 보장은 여전히 없었다. 제베르는 조금 노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막연하고 무섭지만,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테나르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파티움도, 두 쌍둥이와… 조금 못 미덥지만 라스울리 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엔케, 그리고 늑대들……
그 둘에게 신경을 써야 할까 싶긴 했으나, 일단은 보고, 나중에 생각하기로 생각했다. 혼자가 아니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면 그 대신 도와달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테나르미가 그랬지 않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알 수 있었다고. 같이 지켜봐 줄 테니, 같이 의논하면 될 것이다. 앞으로라도.
제베르는 따라가서 어떻게든 해치웠을 거란 문장을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가 귀엽게 느껴졌다. 테나르미는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열심히. 나를 참… 모르는 척, 그런 거 없다는 척, 하고 열심히 따라다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가 너의 이 맹목적인 애정을,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게 전부인 사람인데도…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 자격이 있는지도 잘……
사실 제베르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동안의 일들이 제베르를 좀 더 용기 있게 만들었다. 그날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왔던 아지트를 버린다는 선택, 아스가르드에서의 전투, 베델기우스의 정원에서 있었던 일, 웻지스톤 공방과 절연하고, 악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리가 된 것. 전부 스스로 결정한 일들이었다.
테나르미도, 선택하고 결정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그 무엇보다도 용기 있는 행동. 숨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 두렵고도 무서운 일, 그러나 첫발을 내딛는 데에 성공하면 그 무엇보다도 쉬운 일.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가치 있는 일. 진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래서 제베르는 그때 깨달았다. 항상 달기만 한 게 반드시 사랑인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달지 않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다는 걸. 네가 그토록 힘들면서도 나를 계속 바라본 건, 그저 그것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이라는 걸. 그게 너의 사랑이라는 걸.
트리필엑서에서의 희미한 어린 시절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그때의 풍경만큼은 눈에 선명했다. 공작가의 본가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했고, 오로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일부만을 보러오기 위해 아이비의 수도로 여행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정원사는 그저 보조로만 두었을 뿐이고 집안의 모든 정원과 식물을 관리하는 일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하는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언젠간 내가 자라서 네 남편과 함께하게 될 일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부모님, 그런 미래는 오지 않아요. 나는 이 집에서만 있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 많은 것을 책임지게 되었어요. 만약 그날의 화재가 없었다면 두 분의 말씀이 이뤄지는 미래가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부모님. 나에겐 다른 미래가 있어요. 그걸 선택할지, 말지는 나의 자유겠죠. 그래서 저는 기억 속의 두 분이 늘 행복하게 웃으며 좋은 짝을 만나야 네 삶이 힘들더라도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쁨은 배로 느끼며,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한 말을 믿어보려고요.
달콤한 감정, 그런 건 없고 그냥 죽을 만큼 아프고, 죽을 만큼 슬프고, 죽을 만큼 힘든 끝에 겨우 찾아오는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건 줄 알았던 때가 있고, 또 그걸 벗어난 지금이 있는 것처럼. 루예나의 말대로, 사랑이란 게 무조건 극적이진 않았다. 누군가에겐 아니기도 할 테지만,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는 일. 또 아니기도 하지만 그렇기도 한 일. 마음을 졸인 사람에게는 극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고요한 일.
그렇지만, 고요하게 퍼지는 물결이 잔잔히 마음을 두드리는 일.
내게, 네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일.
클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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