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소녀의 영웅
소녀는 소년의 처음


‘하여튼 이상하다니까.’
에레원이 루사테리온을 떠올릴 때마다 내리게 되는 결론은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부른 이래로 그 소년은 언제나 에레원의 편에 있었다.
왕성에서 쫓겨나 도망치던 때에도, 오언 제독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았을 때도 자신보다 작은 키로 저를 올려다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뭐, 어떻게든 해줄게. 너무 걱정하진 마.”
실제로 그 소년은 어떻게든 했다.
짧은 다리로 왕성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작고 말랑한 두 손에 쌍검을 꼭 쥐고 에레원을 죽이려는 자들을 죽였다.
분명 외견상 저보다 어린데도 망설임없이 적을 베어넘기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제게 돌아와 저를 살피는 소년을 볼 때마다 에레원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애써 감추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에레원이 왕위를 되찾기까지 소년은 언제나 대수롭지 않은 일을 처리하듯 모든 일을 대했다.
적을 죽이는 것도, 아군의 죽음을 보는 것도.
이야기 속의 신이나 영웅을 실제로 본다면, 분명 이런 존재일 거라고 에레원은 생각했다.
이렇게 그 무엇에도 평등하게 관심이 없는 채 연극을 바라보는 눈으로 방관하고 있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면 무엇일 것이며, 그럼에도 제 목숨을 바쳤다 깨어나길 반복해가며 에레원을 지켜주는 것이 영웅이 아니라면 어떤 존재일 것인가.
관심이 없다면 두고 가버리면 될텐데.
죽었다가 깨어나며 아파할 거라면 도망치면 될텐데.
그 소년은 계속해서 에레원을 지켰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영웅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소녀는 진짜 영웅 대신 그 괴이한 소년을 자신의 영웅이자 수호신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에레원의 영웅은 에레원이 왕위를 되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로 훌훌 떠나버렸다.
아마 또 누군가를 그 차가운 시선과 다정한 태도로 도와주러 간 것이리라 짐작했기에, 에레원은 그를 걱정하진 않았다.
아주 짧게 헤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아마 후자가 맞을 것이라고 에레원은 생각했다.
다시 만난 앳되었던 영웅이 어느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분위기를 갖게 된 탓이었다.
눈빛과 분위기만 나이들었을 뿐, 여전히 에레원 보다 키가 작은 소년이 정해진 극본을 읊는 배우처럼 에레원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루사테리온은 대체로 그런 태도였다.
이 모든 것이 한 영웅의 서사시를 노래하는 연극이고, 자신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며, 루사테리온은 이 모든 극에 질려버린 주연 배우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태도.
‘그럼 내 역할은 서사시의 한 막에 나오는 조연이자 이후의 막을 위한 조력자인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에레원은 루사테리온에게 군사를 내어주었다.
어찌 되었든 에레원의 영웅은 또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군사가 필요한 모양이었고, 에레원은 자신의 영웅에게 군사적 지원을 거절당한다는 시련을 추가로 얹어주고 싶진 않았던 덕분이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집무실을 떠났던 루사테리온은 이내 다시 돌아와 집무실 문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에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더 필요한 거 있어?”
군수물자 따위의 추가 지원방안을 고민하고 있던 에레원에게 몹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기억해?”
“루사테리온이잖아. 내가 왕위를 되찾는 걸 도와준.”
당연한 것을 묻길래 여상하게 대답했을 뿐인데, 에레원의 영웅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에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하네?”
혀 끝까지 올라왔던 “날 바보로 아는거야?”라는 말은 에레원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루사테리온이 집무실 안으로 다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신기하다. 정말로 나를 기억하네? 다난이면서.”
에레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가 온갖 정신 사나운 짓은 전부 하며 루사테리온은 에레원을 관찰했다.
에레원은 그제야 자신의 말이 이 이상한 소년의 관심을 이끌어냈단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온 세상 모든 일, 심지어 조금 전까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던 일에도 심드렁하던 루사테리온이 처음으로 무언가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에레원의 영웅이 처음 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에레원을 한껏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예쁘게 웃었다.
“나, 네가 좋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루사테리온 대신 리온이라고 편하게 불러도 좋아.”
처음 만난 사이에나 나눌법한 말을 하며 소년은 에레원에게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영 기묘해서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에레원은 그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한껏 미소지은 소년은 악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또 오겠단 말만 남기고 콧노래를 부르며 떠났다.
‘하여튼 진짜 이상한 애야.’
그렇게 생각하며 에레원은 리온이 요청한 군사적 지원을 위한 행정절차에 들어갔다.
정말로 주기적으로 왕성을 찾아오게 된 루사테리온이 벌이는 엉뚱하고 이상한 언행들 탓에 에레원 자신이 골치아프게 될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덕에 서류를 처리하는 그의 얼굴은 진중하기만 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향
자컾만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