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howMustGoOn:Yun

초대를 받아들이기까지 (Full ver.)

열 일곱을 갓 넘은 가을 밤, 악마가 몸에 깃들었다. 죽음조차 망가진 판 위에서, 윤은 무정하게 흘려보낸 것을─ 늦여름에 찾아왔던 검은 마차를 환시한다.

자작 세계관의 TMI대잔치 = 트위스테 요소 거의 없음.


1.

시야 언저리에, 검은 마차가 있었다.

윤은 의아한 낯으로 그것을 보았다. 먼 나라의, 운구마차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매망량의 부류인가, 눈이 가늘어진다. 방계의 방계, 맡은 일마저 실무보다는 후방의 일이라고 하나, 윤은 어쨌거나 를 사냥하는 혈통이다. 그 혈통이 경고를 보내지 않으니, 마귀의 말예는 아닐 터다. 그러나 그 모양새에 둘둘 말은 불길이란! 기척도 없어서 위화감이 짙다. 이곳은 그런대로 보안이 철저한 국제학교의 부지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저런 것이. 윤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아직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 기술지원부의 일로 윤 홀로 있던 빈 강의실에 목소리가 울렸다. 윤은 익숙한 부룸에 고개를 휙 돌렸다. 덥수룩하니 길러둔 검푸른 색 곱슬머리 아래,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은 입술과 어울리지 않도록 서늘한─겨울 밤의 눈보라나 얼어붙은 칼날같은 눈동자. 부모 얼굴보다 더 자주 보는, 동갑내 사촌의 낯이었다. 휘적하니 성큼성큼 걸어온 사촌, 시안은 윤이 멀거니 바라보던 창가를 보았다.

“뭘 보고 있어? 그리 시선을 뺐겨선. 이 철엔 제법 드문, 나비라도 있었을까.”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린 곳에 검은 마차는 없다. “아님 좋은 칼의 영감이라도, 혹은 그 단초라도 왔어?” 나직하지만 모양만은 온화한 기색의 물음에도 윤은 좀더 사나운 낯을 했다. 현실에 있는 것을 보는 눈은 시안이 조금 더 좋다. 그러나 경계에 걸치는 것, 보통이라면 보이지 않을 것이라면 윤의 눈이 좀더 좋다. 윤이 본 것을 시안이 못 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자취조차 모른다는 것은. 그래, 그 눈 좋은 윤이 느끼기에도 아무리 기척이 없다지만, 를 베는 혈통의 직계, 이매망량이 스스로 무릎을 꿇는 사람 모양의 용에게 자취조차 내어주지 않는 것이라면.

“…몰라, 무엇인지.”

애초에, 그것은 마차이기는 했는가?

윤이 퉁명스레 뱉어낸 답변에 시안의 눈이 가늘어진다. “최근 모르는 게 많네.” 얇은 입술을 넘어 느슨하니 발하는 소리는, 그 언저리에서 칼날이 집을 벗어나는 듯 스릉거리는 소리가 섞인 듯 했다. 그, 장막 너머에서 칼을 내는 듯한 소리에 윤은 문득 깨닫는다.

“…그래, 그, 초대장.”

시안이 지금 입에 담은 그 물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적힌, 그러나 이 드넓은 국제학교의 모두와 옆에 서 있는 아룡亞龍이 보증한, 이 세계에는 완전히 합치하는 언어가 없는 우편. 그러나 윤은 어쩐지 초대장이라고 직감하고 말았던 그 편지. 윤의 시퍼런 눈동자에 불꽃 같은 것이 튀었다.

“그것과, 같은 곳에서 온 것이었다.”


2.

시야 언저리에, 검은 마차가 있었다. 얼추 1년만에 마주보는 것에 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단서를 잡기 위해 불태우지 않은 그 ‘초대장’은 언제나 손이 닿을 법한 곳에 있었지만, 마차는 그 날 한 찰나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윤은 스물하고 또 몇 걸음 너머에 서 있는 마차를 보았다. 말까지 온통 검은, 죽음을 두른 듯한 검은 마차. 어디선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편자의 다그닥거리는 소리, 말의 투레질 소리. 잘 만들어진, 생명의 소리.

윤은 경계하듯이 마차를 보았다. 마차는 그새 열 걸음 언저리로 다가와 있었다. 윤이 즉각, 주술로 반응할 수 있는 거리 그 한걸음 너머. 공원의 숲그늘에 숨듯이 서 있는 그 검은 마차. 윤은 기묘한 이끌림에 찌푸린 낯을 풀지 못한 채 마차를 경계했다.

“윤, 거기서 뭐 해?”

멀찍한 소리. 이내 훅, 가까이에 떨어지는 기척. 윤은 멈칫 시선을 돌린다. 가볍게 달리는 중으로 보이던 시안이 옆에 서 있다. “학교 결계 넘어 또 뭐가 들어왔어? 경찰부 움직여야 해?” 멀찍이서 용케도 윤의 경계하는 기색을 읽어낸 것이 분명한 시안이 떠든다. 그러나 그 낯에서, 다소간의 의아함이 보인다. 그래, 이번에도 시안은 무엇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또. 윤은 빈정거리는 모양으로 입매를 비틀며 마차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벌레 우는 소리도 없는 고요, 어둑한 숲그늘.

“마차가 있었어, 아마도.”

두 번 마차로 보였으니, 아마도 마차일 것이다. 윤은 그렇게 결론 내리며 씹어뱉었다. 시안은 흐음, 하고 숨소리를 끌며, 윤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덥수룩한 머리 아래, 시안의 잿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태양과 같은 금빛, 달과 같은 은빛. 그 찬란함을 가르듯 날카롭게 일어나는 동공.

“…아하, 또. 나한텐 제대로 안보이는… 그래, 초대구나.”

“초대는, 이번엔 보이냐.”

“어. …감히.”

대외적으로 내던 경쾌한 소리 대신 짐승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안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금과 은으로 찬란한, 용의 눈동자가 얼어붙은 채 윤을 향한다. 시안의 보화같은 눈깔이 윤의 시린 가을 하늘같은 눈과 마주치기를 삼 초. 이내 내리감겼다가 뜨이는 시안의 그 눈은 곧 비내릴 하늘과 같이 짙게 가라앉아있다. 윤은 재차 한숨을 뱉고는 등을 툭 쳐서 자리를 움직이자는 신호를 보냈다.

“아마도, 내년까지는 또 별일 없겠지.”

“다음엔 베어도 될까?”

“네 맘대로 해.”

윤은 피곤한 듯이 눈을 내리감았다.

“내년, 이맘때에 또 오겠지. 완전히 떠난건 아닌거 같고.”


■.

검은 마차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

악마를 벤 것은 악마가 깃들어 변모한 용, 옛 악룡의 뼈로 벼린 칼이니. 그 칼을 든 이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것은 그저 밤바람에 흩날리다 밤에 녹아드는 듯 보이는, 푸르도록 검은 머리칼. 그 덥수룩한 아래 마주하는 눈은, 한 쪽은 칼날과 같고한 쪽은 밤짐승의 것 같이 빛나는, 그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눈이라. 그 이질감을 더욱 짙게 칠하듯, 어린 낯에 돋아난 어둔 비늘은 맨 발에도 돋아 신을 대신했다. 차림은 가볍고 가벼운, 잠자리에나 입을까 싶은 흰 옷이니. 그런 모양으로 악룡을 집어삼킨 옛 용사의 후예, 혹은 용사의 핏줄을 잠식한 옛 악룡의 말예가 사람 아닌 것의 낯으로 악마가 목적했던 것을 굽어봤다.

악마의 썩어 문드러진 몸뚱이 대신 제 몸뚱이를 내 놓을 뻔했던, 그런 되도않는 내기를 강요당하던 젊은 도검장은 간신히 트인 숨을 기침처럼 토해냈다. 악마에게 다 당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아주 무사할순 없었으니, 이미 들숨과 날숨에 섞여들은 마기에 이미 그 육신이 오염되었다. 가을 하늘 같던 색의 눈이, 마기에 당해 사안으로 변모하기 시작해서 기이하고 불길한 검보랏빛 색으로 변모하는 눈. 그 눈이 다소간의 당혹을 담고 어린 악마 살해자를 올려다봤다.

그이─윤에게 그 악마살해자─시안의 낯이란 익숙한 것이었으나, 또 저 만치나 사람같지 않은 낯짝은 본적 없었으니. 다만 이름이라도 불러보려다, 이미 마기에 중독된 몸으로 눈을 마주하며 부르는 소리가 독이 될까 기침으로 삼켜냈다. 멍청하니 구르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호칭을 골라 불렀다.

“…낙온,”

성년이 되기도 전에, 일부러 멀리서 모른 체 행세하고 싶을 때 쓰라고 일찍 받은 자字는 낙온絡穩, 그러나 결국은 낡은 풍습일까. 친인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기로는 그저 날 적에 지어진 이름 대로 시안. 천신의 화신된 용의 이름을 일곱 번째로 받아, 마를 배격하리라 점지된 자. 그리하여 사람 모양의 용이나 다름없는, 결국 이 날에 악마를 벤 업을 기꺼이 짊어진 어린 청년. 시안은 부름에 버릇대로 웃음을 얼굴에 만들었다.

“부르던 대로, 편히 불러도 돼, 낙윤. 내 친애하는 사촌. 네 아는 대로, 내 받은 이름이 아무렴 마에 침식될 것일까.”

그리곤 윤이─제낙윤이 제가 입에 답은 부름에 따를 내용을 제대로 덧붙이기도 전에, 유려하니 잘라 붙이는 그 답의 말씨는 여상하게도 나긋하여 묘한 위화감마저 있을 지경이다. 마의 잔재에 중독당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윤의 그 눈보다 더 번들거리는 그 눈. 널리 알려지기로는 천체를 닮은 금과 은의 색이라는 그 눈동자는, 흰자를 온통 잠식한데다 동공이 위아래로 죽 갈라진 그 비인간적인 모습 만큼이나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베었지만, 그렇지만. 아무래도 좀 늦었나, 하지만 이보다 빠를 수는 없었는데.”

이미 베어버린 악마의 잔재가 윤의 몸에 간섭하는 것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 대체로의 형상만 사람을 흉내냈을 뿐인 용의 흉안. 오랜 인연, 그렇게 멀지도 않은 핏줄. 친 형제보다 더 얼굴을 많이 봐온 사촌지간인 윤이, 그저 큰 일에 놀랐다고 모르기엔 지나치게 어긋나있었다. 말하는 것이 나을까, 하지만 이 시선조차 마기에 오염되어 오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꿀꺽, 고통에 말라 밭은 숨을 삼킨 윤이 입을 열었다.

“아무렴, …성년도 되지 못한, 누가 악마를, 베겠어.”

윤은 갈라지는 듯한 소리로, 그 어긋남을 모른 척, 평소라면 농이 됐을지도 모르는 투로 뱉어냈다. 다만 근간으 간신히 지어낸 소리라, 말의 끝에는 뒤틀리는 듯한 기침이 따라붙었다. 아직 여유가 있어 이정도다. 시안은 물끄러미 제 사촌 누이를 내려다보다, 이내 그 몸을 짊어졌다. 분명,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은 몸으로 날뜃 탓에 몸이 삐걱거리긴 했으나, 그래도 시안 쪽이 상태가 좋았다. 특히 고작 잔재가, 아무리 악마의 것이라 한들 그 전설이 피로 흐르는 몸을 침식할 수는 없으니. 때문에 동작만은 참으로 스스럼없었다.

최대한 빨리 처치에 들어가야 했다. 마기에 당한 몸은 이미 거기서 끝이지만.

…윤이 타고나길, 그 몸에서 기의 흐름에 가장 특화된 것이 눈이라 선명하게 증상이 보이는 것이 눈일 뿐, 이미 마기 중독증상이 온 몸을 잠식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마기의 중독으로 인한 변이는 물릴 수 없고 악화를 막는 것도 불가능하며 그 이후의 방책도 딱히 없으니. 시안의 가깝고도 먼 혈족이라 보증된 신화의 잔재로 그나마 아직까지 정신을 잡고 있을 뿐, 이어지는 것은 그저 오롯 감내해야하는 고통이요, 보답 없는 시련이다.

■.

가장 지독하게 영향받은 눈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 눈은 빛을 놓치지도 못했다. 숨결 한 자락에 시야가 뒤틀린다. 한 순간 혼을 보고, 한 순간엔 기를 보고. 한 순간에 하늘 너머를 보고, 한 순간에 심연의 끝을 보고. 손 안에 쥐어져, 원하는 값을 내던 주사위가 날을 벼려 손을 찢듯이.

눈 만이 아니었다. 눈은, 그저 가장 심각한 증상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비명을 씹는 이빨이 육식수의 것으로 뒤틀렸다가 사람의 모양을 한다. 용의 말예라지만 용과는 지독히도 먼 혈통이라, 가까운 것이라면 조모인 불가살이일텐데도. 그 살 위에 쇠바늘 같은 털이 눕는가 싶더니 밤 같은 비늘로 변모했다가 가라앉는다.

…원흉은 이미 죽은 악마의, 몸내기의 마력이었다. 악마살해자가 가다듬은 단 한번의 칼질에 목이 떨어진 악마의 존재는, 몸내기의 의식─몸뺏기의 저주에 따라, ‘승자’인 윤에게 수속되었다. 승자인 윤이 바라지 않았고, 악마를 살해한 시안도 원하지 않았으나, 어쩔수 없었다. 천년을 버틴 악마의 의식儀式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법칙이었으므로.

그때, 시안은 이미 늦었던 것이다. 윤은 아직 사람이었으나, 악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지와 같이 강건하리라 축복받은 몸뚱이가 그것을 아득바득 버텨내고 있었다. 이미 악마가 그 몸을 뺏어본 적이 있는 용보다도 더 짙은 불가살이의 피가 사악을 억누루고 있었다.

죽는 것이 차라리 구원일텐데.

칠주야를 마기중독의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 귀에 문득 닿은, 절대 들리지 않았어야 할 소리. 마기방호복을 지독하게 갖춰입은, 어느 의료인의 중얼거림. 지독한 말이었으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지난한 고통 속에서 마기 중독을 시작으로 악마로 변이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남으려는 발악의 상태는 안정되고 있었다. 악마는 어쨌거나 이미 죽었다. 천 년 넘은 의식의 속행을 막아서는 것은 그만한 혈통. 반쯤 악마에 가까워졌지만, 악마에 도달하기 전에 마기가 정돈된다고, 수치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란, 없어져야만 할 것이니.

악마는 마땅히 부정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악마의 몸 내기를 중간에 끊어, 그 저주를 몸에 다 내리받고도 살아있는 자란 오직 윤 뿐이었다. 그 혈통, 북방의 왕가로부터 내려오는 용의 혈통을 가진 이상, 윤은 제 몸을 실험대로 악마를 공격할 단초를 얻는대도, 거절할 도리가 없다. 스스로 제 몸을 갈라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죽기도 쉽지 않다. 윤은 불가살이의 직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라. 불로 태우는 게 아니면 쉬이 죽지도 않는 강건함을 타고났다. 그러나 윤은 불에는 상처입지도 않고 고통받지도 않으리라는 축복을 업고 있다. 그래도 불가살이의 후예지 불가살이는 아니므로, 본래라면 죽이면 죽는 몸이지만.

그런 자질에 더해 악마로 변이를 시작한 것과 다름없는 몸은, 아직 인간이라지만 충분한 조건 없이는 살해하기 힘들었다. 악마살해의 숙업을 버티는 이는, 당대의 용─윤의 사촌인 시안과 그 아비 뿐이었다.

그리고 예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현 씨의 위치란, 말석이라고 깎아내리는 이가 무색해지게, 세상에 군림하는 열의 군주 중 하나─강대한 권력자의 혈통이었다.

먼저, 누구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당신의 아들과 함께 자라온 가엾은 처조카를 죽여버리십시오.” 라고, 그 냉엄한 겨울의 왕에게 어찌 말을 붙이랴.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를 넘어 쌍둥이와 같이 자라온 당신의 사촌 누이를 죽여버리십시오.” 윤을 구하기 위해 악마를 벤 시안에게, 누가 말하랴. 그러니까 그들은 입을 다무는 것이다.

윤은 고통 속에서 그것을 알아버렸다.

■.

몸내기의 의식은 종료되었다. 윤은 아직, 윤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다만, 환상통같은 모양새로 그저 지독했다.

■.

“어릴 적부터, 당신의 아들과 함께 자라온 가엾은 처조카를 죽여버리십시오.”라고, 사람에게 말을 들으면 예왕蘂王은 움직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남은 용의 혈통이란 언제나 천명이 제일로 중해서, 반려만 아니라면야 아끼던 아이라도 사람이―그의 의무가 그리 빌어온다면 기꺼이 죽일 수 있는 왕이기는 했다. 다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를 넘어 쌍둥이와 같이 자라온 당신의 사촌 누이를 죽여버리십시오.” 라는 말에, 시안은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기원을 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용인 시안은 바란다면 친애하는 자라도 기꺼이 죽여줄 수 있는 작자였으나, 다른 이들의 말 따위는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윤에게―그의 손에 죽을 본인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으므로.

그것을 아는 윤은, 로 영락한 그 눈으로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시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사과를 깎고 있었다. 몸 쓰는데는 지독히도 타고났다. 왕자님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신분인 주제에, 시안은 참 곱게도 사과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내가 네 사형집행인이야. 그렇게 하기로 했어.”

를 세상에 둘 수 없으니, 악마에 몸뺏기에 관련된 자는 의례적으로 사형이 내려진다. 다만 악마를 죽이지 못해서, 그 몸을 죽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 첫 번째의 예외가 났으니.

법의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빌지 않았으니,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그 직책을 맡기로 했어. 모두가 너를 차마 죽음으로 밀어버리지 못하니까.”

명목상이라지만 사형집행인. 결코 환영받지 못할 업을 기꺼이 짊어졌다. 예왕가의 하나뿐인 적통이, 한 세기 전이면 왕세자라는 이름 정도는 달고 있었을 놈이. 시안은 단정하게 사과가 깎인 접시를 윤의 앞으로 밀었다. 여상스러운 행동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네가 죽고 싶으면, 내가 확실하게 끝내줄게.”

윤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동갑내기 사촌. 다만 반 년의 차이. 윤은 반 년 어린 제 사촌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감았다.

겨울이 여기 있었다.

■.

열 일곱을 갓 넘은 가을 밤, 악마가 깃들었다.

죽음조차 망가진 판 위에서, 윤은 무정하게 흘려보낸 것을─ 늦여름에 찾아왔던 검은 마차를 환시한다.


3.

지난 해, 중등부 졸업학년의 마지막 한 학기 정도를 악마변이증의 후유증으로 날리다시피 하였으나, 애초에 졸업 요건은 채워둔 참이었다. 윤은 문제 없이 졸업했고,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핑계를 대며 고등부에 입학했다. 을종 2급, 단야기술자. 더이상 쓸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입학 요건을 채우는 용도로는 충분했고, 그리고, 애초에 을종 자격이 단야기술자 하나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성년이 된 해― 지난 반년은 얕은, 지옥이었다.

윤은, 가문의 일원이 죄 기술자인 탓에 기문技門이라고까지 불리는 제 씨의 후계자였다. 제 씨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자라면 탐욕스럽게 혈족으로 엮는 가문이었으나, 근간은 도검을 만드는 단야장鍛冶匠인 가문이었다. 예왕가의 가보인 용살의 무구를 점검하고, 를 베는 날붙이를 만들기 위한 가문. 가주는 반드시 도검을 다루는 장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차기 가주로 일찌감치 내정되기를 고작 열 두살이 되는 해였던 윤. 윤은 제 타고난 것 쌓은 것 모든 것을 그런 업에 쏟아부은 자였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를 베는 칼을 완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부정당했다. 천명天命을 잃어버렸다.

마기에 중독당한 증상이, 마물이 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지독한─달리 말하자면, 앞으로의 삶이 마물이냐 괴귀냐 둘 중 하나일 윤이 만드는 것은, 결국 에 물든다. 고통으로 새긴 억제식이 있지만, 그것이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정념을 다하지 않는 것 뿐. 로 영락해가는 윤의 정념은, 결국 를 부른다.

윤은 이제 칼을 만들 수 없다. 칼을 만들때 제 전부를 쏟지 않는 방법을 모르므로. 주술의 재능과 타고난 손 솜씨로 부단히도 노력을 해왔지만. 어쨌거나. 칼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낡은 형통의 야장무冶匠巫요 용으로 만든 무구를 벼리는 제 씨의 차기가 될 수 없다.

마음 한 구석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공원의 벤치에 앉아, 시선을 가리듯 고요히 멈춰선 검은 마차를 올려다보는 윤의 눈에 감정이 흔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기가 일렁인다. 이 검은 마차는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를 어딘가로 보내고 싶었던 걸까. 윤은 마를 억누르도록 조제된, 축성이며 뭐며 물씬 받은 담배의 재를 털었다. 생이, 호흡이 독하다.

생이 독하다면 올라타면 된다, 고. 마차는 권유한다. 어쩌면 그 때, 악마에게 당하는 것이 조금 일러, 지난 해 마차가 오기 전이었다면. 악마변이증에 시달리던 그 때의 윤은 곧바로 그 달콤하도록 쓴 제안에 올라탔을지도 모른다.

검은 말은 윤을 내려다본다. 윤은 아직, 침묵한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떤 답도 없이 자리를 떠난다.

검은 마차는, 밤까마귀의 초대장은 아직 윤의 답을 듣지 못했다.


■.

용의 시절에 아직 무뎌지지 못한 미련을 쏟아 칼을 만든 결과가, 결국 이것이다. 이 칼의 이름을 말하자면 그저 자멸自滅이라. 내 말로란 이러한 것임이 눈 앞에 결정지어졌다. 아하, 이는 참으로 독한 나의 혐오, 자학, 멸렬, 분노.

그리하여, 이는 결국 나의 목을 벨 뿐인 칼이라.


4.

천명이라 여겼던, 당연하게 평생 일궈나가리라 생각했던 업을 저주에 빼앗긴 것도 벌써 몇 해째던가. 그 와중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성마냥 무너졌건만, 이것만은─당연하지 않았던 이 일하나만은 변함이 없다. 윤은 낯선 채 익숙해진 검은 마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도 잦아들까, 아직 더욱 이 계절에 홀로 있으면 꼭 검은 마차 하나가 윤에게 찾아들었다. 딱 이 계절에, 한 해에 단 한번. ‘올해로 네 번째던가.’ 윤은 마차를 흘겨보던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다리마저 꼬고, 벤치의 등받이에 팔을 건 그 태도만은 마차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내 윤은 손가락을 딱 튕겨, 제 방에 있는 물건 하나를 손 안으로 불러들였다. 뜯은 자국 있는 봉투와, 글씨 같은 것이 차 있는 종이들. 유사한 것은 있어도 꼭 일치하는 것 없는 언어가 가득한 그 종이는, 그 약간의 유사함에 기대서 살펴보면 초대장이라던가, 안내장이라던가. 

처음에는 봉투 하나에 단정하게 담겨있던 이 편지는 검은 마차와 대충 엇비슷하게 윤에게 왔다. 윤은 그, 어쩐지 낡지도 않는 듯한 편지를 대충 볕뉘에 흔들어본다. 내용은 잘 몰라도 그 모양은 이제 외울 지경일 것을 괜히 뒤집어서 보기도 했다. ─그 내내 마차는 윤의 시야 언저리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무언가 답을 기다리는 듯, 여태껏 그래왔듯이 고요하게.

종이를 잘 간추려 봉투 안에 넣은 윤은, 등받이에 한껏 기댄 채이던 몸을 앞으로 숙인다. 팔뚝을 제 다리에 걸치고, 시선을 마차 쪽에다가 든다. 이 검은 마차는 꼭 이 계절에, 윤이 혼자 있을 적을 골라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리 가까운 듯 적당히 멀찍한 그늘가에서 기다리곤 했다. 네 번동안 조금씩 가까워긴 했을까, 그런 애매한 거리쯤에서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타나거나, 윤이 무정하게도 자리를 떠나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말발굽 다그닥거리는 소리도 없이, 말의 투레질 소리도 없이. 윤이 제법 오래 거하고 있는 이곳이─이 마차가 오기 전부터 재학중인 이 학교가 평소엔 제법 들고 나는 이에 대한 보안이 철저함을 생각하면, 참으로 수상쩍은 것이었다. 

기척도 없이 찾아들어, 조용하게 기다리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이 기이한 일은 무슨 집착일까, 무슨 저주일까, 그런 의심을 한가득하면서 살펴보아도, 이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윤의 눈에는 이 종이 쪼가리며 검은 마차는 분명히 무해無害하였다. 

그저 모양만이 죽음과도 같을 뿐인, 이 검은 것들.

윤은 잘 간추린 편지를 허리춤의 가방에 대충 쑤셔박았다. 보이는 것보다 넓은 가방은 어둠 속으로 검은 편지를 감춘다. 이윽고, 이 여름 내내 우는 벌레 소리조차 잦아든 것 같은 순간, 공원 한 켠의 벤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옆에 세워뒀던 짐가방의 손잡이를 꾹 붙들고, 검은 마차 방향으로 향했다.

그간 윤은 철저하게─ 아니, 어떻게든 이 의심스러운 마차를 무시해왔다. 여러 핑계가 있었고 사정이 있던 덕이다. 그러나 이젠 이젠 핑계도 사정도 남지 않았다. 윤은 천명을 잃은지 오래고, 지금 손에는 개인 작업실의 문제로 모든 기물이 정중하게 봉인처리된 가방이 들려 있다. 붙들만한 것이 더이상 남아있질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이 손에 들려있다.

어디서든, 대충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만치의 물건이 이 한 몸에 갖춰진 순간 찾아와버린, 이 마차. 그리하여 무시할 수 없게 된 이 호기심, ─아니, 충동은. 아하, 이 낯선 지 오래된 마차는, 사실 전혀 무해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조금 더 많은 게 필요해서, 그래서 이 순간 이토록 강렬한 충동을 선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윤은, 어차피 그날─제 천명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 이래 제정신인 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든, 를 베기 위한 칼은 제 목부터 베려 드는 칼이었으니.

윤은 이 다음엔 미뤄진 형刑이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 그리 짐작하면서도 결국 웃었다. 이토록 방법도 없다면, 다음에는 시안에게 약속대로 베어 달라고 빌기라도 할까. 그리 날것의 무언가로 흔들거리며, 검은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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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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