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시대

변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이녹두] 샤녹

진상에도 급이 있나요?

이어집니다.


다 자란 식물을 옮겨 심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균열 밖에서 친해진 사람을 굳이 안에서 만날 필요는 없다.

    흙만 바뀌어도 죽어버리는 예민한 식물처럼, 이녹두가 아는 모든 관계라는 것은 그리 연약하고 소중하며, 절대적인 것이었다. 예외는 없다. 내가 봐온 사람들처럼, 그들과의 관계처럼, 이 관계 또한 장소만 옮겨가도 금세 시들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싫었다. 신시아는,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 선배만큼은 균열에서 동료로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그런 바람은 대체로 이뤄지지 않는다.

    “언니 새 차 뽑았다. 멋있지? 사실 회사 차지만.”

    위잉. 짙게 썬팅한 차의 창문이 내려가고, 선글라스를 쓴 신시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녹두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선배는 왜 졸업한지 1년 반이 넘은 학교에 계속 찾아오는 걸까? 물론 이녹두 본인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잘 알아서 괴로웠다.

    “자, 가자, 직장 선배 후배님아!”

    최근에 시작된 이상한 호칭을 부르며 신시아가 뒷좌석을 가리켰다. 이녹두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이녹두, 향년 19세, 고등학교 3학년. 2살 위인 신시아는 대학생. 두 사람은 배진길드 이사 배은하 직속 인턴 생활 중이었다. 균열 공략에 투입되는 현장직, 사실상 하는 일도 정직원과 다를 바는 없었지만 이녹두의 어린 나이와 신시아의 적은 경험 탓에 아직 인턴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돈은 두둑히 챙겨주니 불만은 없지만.

    약 2년 전, 창을 읽는 스킬을 가진 우리의 이사님에게 걸린 탓에 힘숨알(힘을 숨긴 알바, 표준어 미출동 각성자) 생활을 강제로 청산한 이녹두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알바처로 달려가 대기하는 삶을 사는 중이었다. 

신시아가 각성한 것은 약 1년 반 전, 수능 날. 각성한 이래로 같은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해대더니, 반년 쯤 전에 기어이 배은하의 눈에 들어 같은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물론 이녹두는 탐탁지 않았지만, 아니, 탐탁지 않은 것을 넘어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본래 성실한 알바는 고용주에게 불평 불만 따위는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게 그저 받아들이다 보니, 이녹두는 어느새 신시아와 함께 균열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느 관계의 도식도 따르지 않은 채. 이녹두는 계속 지속되는 이 관계가 기꺼우면서도 더없이 불안했다. 본적도, 겪은 적도 없는 관계. 이녹두 자신이 그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그 많은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이 이 관계마저 망쳐버리고 말 것이라고. 탐욕에 눈멀어 이 사람마저 저버리게 될거라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이녹두는 또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그때…. 녹두야? 이제 내가 후배됐다고 말도 안들어주니?”

“듣고 있어요. 그리고 선배는 그냥 계속 진상 선배라니까요.”

“그 진상은 안 떨어지는 거니? 그럼 그냥 후배라고 해주라.”

신시아의 장난스러운 울상이 룸미러에 비쳐보였다. 이녹두는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분명 지금의 관계는 바뀌었고, 진상 선배는 그때 그 의미의 진상 선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녹두는 진상 선배가 후배가 되는 것은 싫었다. 언제나 깨어졌던 불안한 관계가 싫었다. 진상 선배는 그때의 진상 선배처럼 언제나 남아있었으면 했다. 그저 의미 없는 고집일 뿐이라도.

“이제 진상도 안 부리는데에~ 이녹두 알바도 예전만큼 안 뛰면서어어어~”

“그런 점이 진상 같다는 거예요, 선배.”

평소처럼 무감한 목소리에 신시아는 표정으로 우는 이모티콘을 10개쯤 보냈다. 이녹두는 그 표정을 보다가 운전에나 집중해라 일갈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이런 관계가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 관계라도 남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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