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시대

왜 현판에서는 이벤트만 생기면 균열이 터지죠?

[아르마 코르니스]

  “대체 공무원이 그런 걸 왜 합니까.”

    아르마 코르니스는 불만을 가득 담아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인상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한층 더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주변에 앉은 다른 각성자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균열을 공략하고 민간인을 수호하는 협회 소속 공무원들에게, 국가 헌터들에게 지금 떨어진 명령은… ‘팬사인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공무원은 팬사인회랑은 거리가 멀지. 하지만 자네들도 알지 않나? 요즘 시대에서 각성자들, 특히 헌터들의 인기.”

    국제안전관리협회 미국 지부장은 부하들의 똥 씹은 표정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균열과 각성자가 존재하는 시대였다. 균열을 공략하는 사람들은 ‘헌터’라고 불렸고, 그 중 시민의 구조에 가장 힘쓰는 국가 헌터, 공무원들에게 팬이 생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이해하지만, 알지만. 공무원이 진짜로 팬사인회까지 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닌가?

    “요즘 길드 헌터랑 프리 헌터들한테 조금씩 인기도도 밀리고 있는데, 우리 협회도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지부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공무원들의 표정은 더욱 썩어들어갔다. 대체 공무원들이 길드, 프리 헌터들과 인기도를 겨룰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균열 선점과 기선 제압 같은 중대한 문제도 아니고!

    “하지만 지부장님, 아시다시피 저희 S팀이 없으면 상급 1, 2급 균열에 대비하기 힘듭니다. 텔레포트는 본부에서만 가능하고요. 팬사인회 같은 것을 이유로 S팀을 차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걱정말게. 그 날 하루는 A팀이 상시대기할테니 2급까지는 충분하고. 1급 균열이 터져도 스킬로 가면 되지 않나. 레온타인만으로는 부족할테니 B팀 텔레포트 스킬 각성자도 붙여주겠네.”

    “A팀에서도 불만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이미 추가수당 약속해 놨다네.”

    철저한 수비에 S팀의 팀장, 아르마 코르니스는 기어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놈의 늙은이는 꼭 이상한 포인트에 꽂힐 때가 있었다. 덕분에 뉴욕시 균열 알림음이 애니메이션 오프닝으로 설정되어 있던 때도 있었다. 그 미친짓의 수습은 언제나 부하들의 몫이었고. 준비해야 할 목록과 수습해야 할 목록이 주르륵 떠올라서, 아르마 코르니스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일까? 아르마 코르니스는 정확히 48번째로 자문했다. 깜찍한 디자인으로 뽑힌 ‘ISMA 미국 지부 뉴욕 S팀 팬사인회’ 현수막 아래로 화관을 쓰고 인상도 쓰고 있는 아르마 코르니스가 앉아 있었다. 누가봐도 해탈과 짜증의 중간쯤에 걸려 있는 구린 표정이었지만 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 미간 주름에도 열광하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정말 이게 뭐하는 짓일까? 나는 공무원이 아니었던가?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흘러나오는 49번째 자문은 길어지지 못했다.

    “아, 아르마님, 안녕하세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소녀가 수줍게 종이를 건넸다. 얼마 전 찍은 화보가 크게 인쇄된, 팬사인회용으로 제작한 책자였다. 아르마는 지부장의 욕을 하며 구겨진 표정을 풀고 펜을 들었다.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 보러온 민간인에게는 죄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름이?”

    “제논, 제논이에요.”

    밋밋함에 가까운 사인 밑에,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뱉어낸 이름을 적었다. 제논님에게. 지부장은 사랑을 담아, 따위의 말도 쓰기를 바랐지만 아르마는 역시 거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몇몇 넉살 좋은 팀원들은 한 두마디 더 써주는 것 같기도 했다.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시민과 손깍지를 낀 레온타인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아르마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었다. 저 무서운 놈, 평소에는 저런 놈이 아닌데. 사실 이런 쪽이 천직인건가?

    “아르마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저, 아르마 헌터님이 구해주셔서 살아났어요. 그래서 정말, 정말 많이 존경하고, 지금도 협회 공무원을 목표로 하고 있거든요!”

    아르마가 되돌려 준 책자를 소중히 받아든 제논이 상기된 표정으로 종알종알 떠들었다. 아르마는 제논이 풀어 놓은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조금 더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딱히 제논, 이라는 이름이 기억 난 건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하나하나 기억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생명들이 제 손을 스쳐지나갔다. 이제는 그저 일상처럼 여겨지기에, 구태여 기억에 넣어두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이야기에 대한 감상마저 앗아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누군가를 구했다. 내가 구한 사람이 내 앞에 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내가 구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기실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건만, 아르마는 또다시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제가 협회에 들어가게 되면 꼭, 꼭 기억해주세요.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저도 아르마님처럼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될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아르마는 작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저도 모르게 지어진 표정에 객석에서는 열렬한 셔터음이 울렸다. 균열 공략을 할 때에나 보이는 공무원 헌터님의 웃는 표정은 정말 희귀했다. 하물며 검은 코트가 아닌 색깔 있는 사복 차림에, 화관 같은 걸 쓴 광경은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만큼 희귀했다. 희귀한 광경을 몇 번씩이나 보여주는 공무원 헌터 팬사인회, 최고였다. 이미 이들에게 공무원이 팬사인회를 하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게 여겨지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30초에 한 번씩 직업의 혼란을 겪는 SSS급 헌터와 공무원이 아닌 것 같은 팬서비스를 시전하는 팀원들과 마냥 행복한 팬들의 팬사인회는 조금 이상하지만 평화롭게 굴러갔다. 사이렌이 울리기 전까지는.

    “뉴욕시 K홀 인근 1급 외부형 균열 생성 예측, 인근 국민 여러분은 신속하게 대피소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웨에에엥-,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S팀 공무원들의 단말기도 울리기 시작했다. 긴급출동알림. 하필이면 외부형,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점은 현재 팬사인회장과 가까웠다.

회장은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아무리 겪어도 균열은 균열, 거기에 인명피해가 가장 많다는 1급 외부형 균열. 사람들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여러분, 침착하게 비상구를 따라 대피소로 이동해 주세요~”

그 불안감은 또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보러온 사람들이 누구인가, ISMA 미국 지부의 최강 팀이라는 뉴욕 S팀이었다. 침착하다 못해 나른한 레온타인의 목소리에 회장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불안감 섞인 목소리가 걷힌 자리를 대신한 것은 공무원 헌터, 특히나 그들 앞에 있는 그 S팀에 대한 신뢰와 안도의 목소리였다.

“회장은 여기 스태프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바로 균열로 이동하지.”

S팀의 팀장, 아르마 코르니스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훌륭한 아이돌의 모습이었던 팀원들도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템창에서 일사불란하게 장비를 꺼내입고 자연스럽게 브리핑을 하는 모습은 역시, 누가 봐도 프로였다.

평소보다 깜찍한 옷차림과, 선물 받은 액세서리만 뺀다면 말이다.


    “이야, 웬일로 늦었대, 우우리 S팀이? 라비인가 뭔가 들어온 후로는 좀 빨라지지 않으셨었나?”

텔레포트를 하자마자 들려온 것은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형태가 확연해지기도 전에 S팀임을 알아보고 시비를 걸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프리랜서 헌터, 라트로 에스투스.

“신경 꺼, 라트로.”

아르마는 평소처럼 신경질적인 대답을 돌려주고 솔선수범해 신경을 껐다. 빠르게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배치하고. 모든 과정은 평소같이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S팀은 그랬다. 다른 헌터들은… 영 자연스럽지 못했다. 아르마는 한 차례 배치를 마치고 아이템창에서 가죽 장갑을 꺼낼 때가 되어서야 그 시선을 느꼈다. 라트로는 물론이고 주위 길드 헌터들의 요상한, 일견 경악스러운 시선. 아르마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의미를 담아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알, 너… 그거 뭐야?”

아르마와 가장 가까이 있던 라트로는 한껏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손가락은 아르마의 머리 위와 상체를 오가고 있었다. 아르마는 한 번 더 미간을 구겨주었다가 라트로의 손짓을 따라 머리 위를 한번 더듬었다. 그리고 손에 걸리는 느낌에, 아. 그제야 제 옷과 팀원들의 꼴을 살폈다.

평소 S팀의 의상은 흰 셔츠와 검은 외투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르마의 검은 코트 착장을 따라 굳어진, 일종의 유니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의상은 어떤가? 당장 아르마만 해도 연분홍색 카디건에 흰 꽃이 아기자기한 화관을 쓰고 있었다. 텔레포트 한 번 쓰고 드러누운 레온타인은 캐릭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고, 어쩌다 보니 S팀에 같이 묶여 끌려나온 라비에도 동물 귀가 달린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그 가지각색 다양한 모습에 아르마는 뒤늦게 미간을 짚었다.

“아, 맞아. S팀 팬사인회 한다고 했지?”

한 박자 늦게 원인을 떠올린 라트로가 손뼉을 치며 크게 외쳤다. 그 말에 시선들은 라트로는 향했다가, 곧 다시 팀원들을 헤집었다. 아르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지부장, 돌아가면 가만 안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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