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때문에 실직한 힘숨알이 길드에 취직하게 된 건에 대하여
[이녹두] 샤녹
이녹두(17세, AA급, 힘을 숨긴 알바,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는 오늘도 평화롭게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중이'었'다.
"서울특별시 A구 B길 52, C건물 외부형 균열 예측. 인근 국민 여러분은 D고등학교 비상대피소로 대피 바랍니다."
삐, 삐, 핸드폰을 시끄럽게 울리는 긴급 재난 문자를 필두로 지긋지긋한 사이렌 소리와 대피 안내가 인근 골목길을 꽉 채웠다. 듣고 들어도 적응이 안되고, 짜증이 나는 소리다. 이녹두는 재고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들고 나온 박스를 내려두며 한숨 쉬었다.
거지 같은 세상이었다. 말도 안되게 위험한 세상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녹두는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균열 위험 수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 역시 아직은 살만 한 세상이다.
AA급 각성자 이녹두가 힘을 숨긴 알바가 된 이유는 별 거 없다. 균열 공략은 너무 위험하고, 미성년자가 돈을 벌기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각성자 자진 신고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 각성자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 모든 혜택이 고1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종류는 아니었다.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존버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아무리 큰 길드라도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중졸 미성년자에게 주는 돈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고졸, 그래도 웬만하면 대졸은 해야 했다. 빌어 먹게도 그런 나라였다.
이녹두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여러 가지 기회비용과 균열을 뛰는 동안 잃는 시급, 손실, 수입을 고려했다. 역시 중졸 고등학생은 균열 따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안정적이고, 이득이다. 그렇게 이녹두는 각성자가 응당 져야할 균열 공략의 의무를 당당하게 저버리며 편의점 조끼를 입은 채로 대피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창에 뜨는 '책임을 잃은 힘'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냐고? 이녹두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법칙'이 돈으로 충만한 그의 드림 노후 라이프를 책임져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균열이고 어쩌고, 그런 걸 책임질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녹두 자신의 인생은 자신밖에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급격히 할 일이 없어진 간헐적 실직자 이녹두는 3,590번째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카톡. 무선 이어폰으로 흘러 나오는 라디오의 내용 사이로 알림음이 들렸다. 이녹두는 먼산을 보던 시선을 핸드폰 화면으로 내렸다. '신시아'. 익숙한 진상 선배의 이름이 떠있었다. 또 무슨 시답잖은 얘기를 하려고. 이녹두는 단골 진상 손님을 마주한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으로 카톡 내용을 확인했다.
[녹두야]
[여기]
[(사진)]
[너 알바하는 편의점 아니야?] 오후 6시 32분
이녹두는 신시아의 카톡에 두 번의 충격을 받았다. 신시아가 '오늘 할인상품 뭐야'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 번, 방금까지 서있던 친근한 편의점 카운터가 박살난 사진을 보았다는 점에서 한 번 더. 답지않게 흔들리는 눈으로 이녹두는 다급하게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맞는데]
[거기가 왜]
오후 6시 33분 [제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ㅔ요;;]
이녹두는 카톡을 보내고는 다시 라디오 내용에 집중했다. 아직 몬스터를 제압하는 중이며, 시민 여러분은 대피소에서 대기하라는 내용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균열이 닫히지 않았다면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이녹두는 피같은 알바 자리의 안부를 당장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울린 알림음을 확인했다.
[(이모티콘)]
[편의점으로 간식 사먹으러 갔던 애가]
[우리반 단톡방에 올렸어] 오후 6시 33분
[그래도 나왔다는 거 보니까]
[너는 괜찮은가 보네] 오후 6시 34분
[??]
[녹두야??]
[괜찮은 거 맞음????] 오후 6시 36분
오후 6시 37분 [네 괜찮아요 지금 대피소에요]
몸은 괜찮았다. 알바비가 조금 많이 안 괜찮을 예감이 들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 몰래 안전장치 한 두개라도 심어두고 올 걸 그랬다. 편의점 내 CCTV에 걸릴까봐 조용히 나온 거였는데.
이녹두는 5개월동안 정든 카운터와 알바비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안녕을 고했다. 퇴직금과 수당은 받겠지만, 다음 알바는 또 어떻게 구해야 하나. 작게 한숨 쉬며 알바천국을 켜려다가 10개쯤 쌓인 카톡 알림을 먼저 터치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녹두야]
[울어???]
[야 우냐?????]
[괜찮아] 오후 6시 37분
[일단 몸이 우선이지]
[1+1 행사상품 정보 못 듣는 건 아쉽지만]
[아직 카페랑 빵집이랑 서점 알바도 있으니까] 오후 6시 37분
[이 기회에 좀 쉬어]
[곧 시험기간이잖아] 오후 6시 38분
[괜찮은 거 맞지??]
[울지 말고] 오후 6시 39분
[안울어요;;]
오후 6시 40분 [선배 시험 걱정이나 먼저 하세요]
오후 6시 41분 [고3이시잖아요]
고3 공격에 잠시 답이 없던 신시아는 우는 이모티콘을 16종류 보낸 후에야 잠잠해졌다. 이녹두는 채팅방 알림을 꺼버리고 드디어 알바천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천국은 개뿔, 균열 때문에 강제로 닫히는 가게가 우수수 나오는 좁은 나라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헌터나 균열 공략 공무원 아르바이트를 뛰게 생겼다. 인생에 그런 스릴은 필요 없는 법인데.
이녹두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슬슬 화면을 스크롤 했다. 헌터 보조 아르바이트, 길드 균열 공략 지원 아르바이트, 던전 아이템 채집 아르바이트, 경호 아르바이트. 하나같이 '각성자'가 조건인 아르바이트 뿐이었다. 비각성자는 아르바이트도 못 뛰나. 말세로 향해가는 세상에 AA급 각성자 이녹두는 혀를 끌끌 찼다. 누가 보면 기만 중의 기만이라고 기함할 법한 모양새였다.
"이…, 녹두씨? 이름 특이하네."
이녹두의 알바천국 탐방을 끊은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과 착각할 수 없는 특이한 이름 탓에 이녹두는 고개를 들었다. 이 어두컴컴한 대피소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요상한 셔츠에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어떻게 봐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 이어폰도 낀 김에 모른 척할까, 생각한 순간 상대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년 3월 13일, AA급 각성자, 스킬은 '번개', '벼락', '고속이동', 기타 등등."
대뜸 읊어지는 단어의 조합에 이녹두는 당황했다. 생년월일, 등급, 스킬. 창에 적힌, 이녹두 본인만 열람 가능한 정보였다. 각성한 후로는 검사를 한 적도 없기 때문에 협회에서도 알 리가 없었다.
"우와, 칭호도 많네. '방관자', '달빛 아래로 퇴근하는… 알바생'? 뭐 이딴 칭호가 있어. 그리고, 이야. 이건 가관이네."
'책임을 잃은 힘'. 입모양으로 나온 자신의 칭호에 당황에 물들었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가끔 창을 읽는 스킬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그걸 내가 경험하게 될 줄이야.
근처에 균열이 터졌는데 대피소에 앉아있는 각성자라면, 칭호까지 이지경이라면 아무리 머리가 안 굴러가도 이녹두의 방만은 눈치챌만 하다. 그리고 각성자 미신고, 각성자의 균열 공략 미출동 벌금은…. 평범한 소시민 (아마도) 이녹두에게는 아찔한 금액이다.
"…신고할 건가요?"
"아니! 초면에 바로 신고부터 하면 야박하지."
하하, 호탕하게 웃어젖힌 상대방이 이녹두의 앞에 쭈그려 앉고, 이녹두와 얼굴을 맞댔다. 새까만 선글라스에는 이녹두의 금안이 비쳐보였다.
"대신 계약을 하자."
"계약이요?"
"그래, 나와 계약해서 균열 공략 알바생이 되어줘!"
바야흐로 이녹두(17세, AA급, 힘을 숨긴 알바)의 인생을 제대로 꼬아버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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