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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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맛

촉촉한 숲 by 청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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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달이다. 과거의 4계절이 사라진 지는 한참 되었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3월에 개학하거나 하는 행정적인 부분에서는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었기에, SNS에서 개학과 개강에 고통받는 글들을 볼 때면 귀엽다고 생각하며 나도 무언가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이 샘솟는 것이다. 그동안 나중에 해야지, 다음에 해야지 하며 접어 둔 의지들을 다시 훑어본다. 대학 동창은 이번에 행성간 항법을 배워본다고 했던가? 다른 사람의 의지도 엿들어본다. 그런 신중한 탐색 끝에 내가 정한 3월의 시작은, 수영이었다.

내가 등록한 수업은 3광년 떨어진 행성(성간철로 15분 거리)에서 1대1로 진행했다. 수영에서 1대1이라니 특이하네, 생각하면서도 여러 명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것보단 한 명에게만 웃긴 꼴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생각하며 스르륵 등록하게 되었다. 성간철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에메랄드빛 해변이 있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탈의실과 샤워장부터 먼저 찾는 내 눈동자 앞으로 2미터 정도의 키를 가진 행성인이 그늘을 만들며 나타났다.

“강습받으러 오셨죠?” 주황 반점이 있는 청록색 피부와 반들거리는 눈을 가진 여자였다. 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쾌활한 웃음과 함께 여자는 다시 말했다. “해변에서 하는 거라 분위기는 완전 좋은데 외행성 분들은 등록하려다 자꾸 길을 잃으시더라구요. 저는 갈이라고 해요.” “네에, 저는 다경이에요.” 갈은 나를 해변 구석의 3층짜리 건물로 안내했다. 쨍쨍한 햇볕을 맞으며 걸어오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느껴져 한숨이 돌려졌다. 갈은 내 전화번호와 간단한 인적 사항을 묻고 카운터로 들어가 컴퓨터를 두들겼다. 멀뚱히 서있는 것보단 주위를 둘러보는 편이 자연스러운 행동 같아 고개를 돌리다 2층부턴 탈의실과 샤워실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벽에 붙은 푸른 타일의 패턴을 눈으로 좇다 갈의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등록은 다 됐어요! 다경 씨 담당 강사는 곧 온다니까 의자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짧은 대답 이후 또 다시 낯선 곳에서의 애매한 정적이었다. 갈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이미 내 주의력은 낯선 곳에 온 것만으로도 포화상태여서, 억지로 사회성을 소진하다 내일 피곤함만 얻을지도 몰랐다. 수영만으로도 고될 텐데 더 에너지 쓰지 말자, 생각을 하다 보니 뒷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경 씨 맞나요?” 진한 녹색 피부에 빛나는 반점이 있는 남자였다. “리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첫 수업은 무난했다. 리구는 한 번도 수영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내 수준을 파악하고 스트레칭과 물에 들어갈 준비, 부유물을 잡고 발장구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 바다는 염도가 낮아서 거의 민물이랑 비슷해요. 수영 배우기엔 좋은 바다죠.” 리구는 매우 차분한 말투를 가져서 운동하는 사람은 대부분 갈처럼 쾌활한 태양 같은 사람이다, 라는 내 안의 선입견을 부쉈다.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그 태양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운동 강습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리구의 수업이 마음에 들었다. 이 낯선 곳에 적응하고 귀찮음만 이겨낸다면 수영만은 오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김칫국 먹은 듯한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가벼워서 다음 수업시간이 다가오자 온데간데없어지고 귀찮음과 오늘은 잘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으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수강료는 아까웠고, 이대로 안 가는 것이 더 쪽팔린다는 생각에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워서 수영가방을 잡았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비가 주룩주룩 오는 것이 아닌가. 이 행성은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일 년에 한 번쯤 내린다는데, 왜 그 한번이 오늘이란 말인가? 수영장에서 하는 것이면 몰라도 바다 수영은 비가 오면 할 수가 없으니, 그냥 바로 다음 성간철을 타고 돌아가버릴까 생각하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리구가 보였다. 리구는 우산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방수 재질의 옷을 입어 괜찮은 듯 보였다. 리구의 피부 위에 찍힌 빛나는 점들은 물에 젖으니 더 반짝였다. “오셨군요. 그런데 이렇게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얼굴은 뵙고 가네요.” 난감한지 손톱을 씹던 리구는 무언가 떠올린 것 같았다. “오신 김에 뭐 하나 드시고 가는 거 어떠세요? 제가 살게요.”

리구가 데려간 곳은 바와 카페를 같이 하는 가게처럼 보였다. 음료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고 음식은 그보단 가짓수가 적었지만 대중적이었다. 우리는 팬케이크와 음료 두 개를 시켰다. 창밖으로 탁해진 바다를 바라보며 다음 수업을 걱정하고 있던 나를 보고 리구가 물었다. “기껏 오셨는데 아쉬우시죠?” “아…그렇기도 한데, 사실 좀 안심도 됐어요. 오늘도 잘 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저만 그런가 싶지만 낯선 곳에서 새로운 걸 배운다는 건 걱정도 되니까요.” “저번에 잘 움직이시던데요. 처음이니까 잘 못하는 게 당연해요. 처음부터 잘하셨으면 제 수업도 필요 없었겠죠.” 나와 리구는 살짝 웃었다. 이내 메뉴가 나오고 함께 먹으며 리구는 이어 말했다. “대부분 배우시는 분들이 처음 몇 번을 가장 힘들어하세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죠. 다경 씨가 온 행성의 분들은 작심삼일이란 말을 쓰던데. 저는 그 삼 일만 버티면 그 뒤론 점점 나아진다고 생각해요.” “좋은 생각이네요. 삼 일은 그렇게 길지도 않고요.” 먹고 있던 팬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워 비로 차가워진 몸을 녹이기 충분했다. 리구의 추천을 받아 고른 음료는 우유 같으면서도 짭짤한 해초 향이 났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린 나는 말했다. “삼 일이 지나기 전까진 여기 올 때마다 맛있는 걸 먹어야겠어요. 그럼 더 잘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쉽게 익숙해지긴 하겠네요. 다른 식당도 추천해 달란 말로 들리는데.” 그렇게 몇 번의 이야기를 더하고 몇 번을 웃으며 비 오는 날의 간식시간이 지나갔다.

난 정말 그 이후로 수업이 끝나고 맛있는 것을 먹은 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냥 간식으로는 안 되고 정말 맛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구는 바로 다음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는 추천해 준 카페로 혼자 가서 푸딩을 먹었다. 커스터드푸딩과는 다르게 투명하고 톡 쏘는 맛이 있었다. 차가운 청량함이 물에서 헐떡대며 데워진 기관지를 식혀주는 느낌이었다. 세 번째 수업 후엔 갈이 리구와 하는 대화를 듣고는 자기도 같이 먹자며 달려와 셋이 피자를 먹었다. 시금치 같은 채소가 잔뜩 얹어진 것이었는데 깔끔하게 먹긴 힘들었지만, 소스와 잘 어울렸다. 갈의 말로는 이렇게 보여도 단백질이 풍부해서 운동 후에 좋다고 했다. 그렇게 세 번의 수업과 세 번의 식사가 끝나고도 나는 재미가 붙어 계속 수영과 간식 찾기를 이어 나갔다.

“이제 몸에 힘이 많이 빠졌네요. 걱정도 줄어드신 것 같고요.” “네, 잘 됐죠. 어쩌면 그날 비가 온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8번째 수업이 끝나고 내가 말했다. 하늘엔 구름 하나 없이 맑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 있다면 첫 삼일동안 맛있는 것을 먹어봐라. 그게 다이어트라면 조금 힘들겠지만.

*유료분량엔 아무 내용 없고 리터럴리 후원용입니다!!! 재밌으셨다면 500원만 던져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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