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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모빵집 by 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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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아서 C. 클라크

“점화!”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정이 9개월간 마천루 사이를 오가며 수놓은 자수에 빛이 붙는다. 머리 위로 백색의 마법이 자리한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차례다. 정은 고층빌딩 위의 현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정은 장마의 눅눅한 공기에 짓눌린 사람 같았다. 며칠간 씻지도, 자지도 못한 그는 꾸역꾸역 자리에 앉아 산더미같이 쌓은 서류의 탑을 한 쪽 팔로 밀어놓았다. 눈부신 발전의 끝을 고하고 낭만을 좇는 시대라고는 하나 제 옆에 쌓인 서류는 낭만과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어떤 좋은 아이디어도 윗분들의 입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참신함을 잃어버리는 마법이라도 있나 보지? 아, 그래. 말 잘했다. 그거야말로 마법이다. 서류의 탑 꼭대기에 놓인 종이를 집으며 정은 속으로 중얼댔다.

장대한 계획의 서막이 아무리 흥미로워도 일개 기술직인 자신이 하는 일은 카본 파이프를 잇는 것뿐. 그마저도 관리자인 자신은 일정을 조율하고, 시공 과정을 감독하고,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사장님 마감 이거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같은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된다. 게다가 예정에도 없던 미팅까지 잡힌 상황에 정이 근심 걱정 없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사정 좀 봐줘, 으응? 정 사장 없으면 현장 안 돌아가는 거 다 알지.”

“아니, 다 아신다면서. 당장 내일 점심이 말이 됩니까?”

전화가 온 것은 전날 오후.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했다고는 하나 친근감은커녕 얍삽함으로 무장한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양 부장이 갑작스럽게 정을 호출했다. 바로 다음 날에 있을 미팅에 참석해달라는 말을 하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양 부장의 혀가 길다. 정은 갑작스러운 일정 조율에 상대방도 면목이 없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만만하게 언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실무자 없으면 미팅도 안 하겠다잖아. 정 사장한테는 우리가 말 다 전해준대도. 꼭 얼굴을 봐야 쓰겠대.”

양 부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계획에 동참하는 연기자와 관련 정부 부처의 관계자들이 점심을 함께 한다고 한다.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식사 자리에서 나눈다는 점이 다소 의문이 생기나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따로 미팅 시간을 잡지 않고 식사를 함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다만 연기자의 요청 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이번 계획에서 설비를 직접 시공하는 실무자를 자리에 부를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양 부장이 진땀을 빼며 정에게 전화한 것이다. 당장 하루 안에 다른 이에게 현장을 맡기고 멀끔한 복장으로 식사 자리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며.

“아무튼. 정 사장만 믿을게?

“뮤지컬 배우라고 했나.”

정은 서류 한구석에 인쇄된 훤칠한 상대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과연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딱 좋은 얼굴이다. 그는 이번 계획의 주연이다. 즉, 그가 바로 무대의 중심에 설 "마법사“다. 우리는 앞으로 9개월 뒤, 마법을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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