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는 대가가 따른다.
에반 하워드, 5학년
터너는 트렁크 세 개 분량의 짐을 깡그리 챙겨 조용히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방학 두 달과 가끔의 크리스마스 방문 몇 번을 제외하면 7년 만의 귀환이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수도 없이 많은 불안과 공포를 마주했다. 기차간을 꽉 메운 동급생이나 후배들 도 쉴 새없이 보가트와 보가트들이 만들어내는 ‘증폭된 두려움’ 에 대해 떠들어댔고, 본인이 보가트를 만난다면 그 보가트가 어떠한 형상을 보여줄 것인지, 어떤 대응을 할 것인지 만일의 상황을 가정하며 짐작만을 더하기 바빴다. 다만 그중에서도 몇몇 얼빠진 이들은 보가트 따위에는 겁먹지 않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굴며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짓을 반복하곤 했는데, 터너는 괜한 소문을 만드는 자보다 그들을 더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문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대책 없는 낙천적인 태도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빠진 이라고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뭘 그렇게 서 있어? 얼른 들어가시지. 아참, 이제부터는 반장도 뭣도 아니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개학하고 나면 슬리데린에서 감점을 시킬 거라느니 뭐니 하는 협박도 이제 안 통할걸.” … 지금, 트렁크로 괜스레 그의 발등을 툭툭 건드리며 답잖은 말이나 늘어놓고 있는 그의 동생 에반 하워드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터너는 이죽거리는 말에 똑같이 이죽거리는 단어를 늘어놓아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깔끔하게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으로 답했다. “야, 나가서 공부나 해.” “갈 거거든. 이따가 아이린이 오기로 했으니까 방에서 나오면 안 돼. 이거 말하려고 온 거야.” 에반은 터너가 무어라 더 답하기 전에 잽싸게 방을 빠져나와 방문을 닫았다. 맞은 정강이가 얼얼하게 고통을 호소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참을 만했다. 그도 그런 게, 오늘 에반에게는 좋은 일이 두 가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슬슬 그의 눈높이가 형을 따라잡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아이린이 놀러 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입꼬리를 씩 올리며 계단을 내려가 손님을 맞으려던 준비를 할 때, 불시에 다시금 문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너, 저번 과제에 뭐라고 써서 냈다고 했지?” 2차전의 시작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에 들려온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에 에반은 눈을 깜빡였다.
“뭐 말이야? …공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거?”
처음 과제를 받았을 때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리고 수도 없이 비슷한 과제를 맞닥뜨려 왔지만 에반의 답은 항상 비슷한 궤적에 머물렀다. 「몰랐으면 좋을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는 아직도 학교 언저리에서 부모의 흔적을 갑작스레 마주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집에서 하워드 부부의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엄혹하고도 준엄한 감시 하에 절대 엄금이었고, 아무리 호기심이 많다고 해도 부끄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적당히 분별이 가능한 나이기에 그어둔 선을 넘어서까지 모르는 사실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호그와트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토록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슬리데린이었다는 사실이나, 추격꾼을 했다는 사실 또한. 괜히 신경 쓰여 원래 지망이었던 추격꾼에서 파수꾼으로 포지션을 옮긴 지 오래였지만, 기숙사만큼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그 점만 빼면 상당히 정을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바꿀 만큼 간절한 것도 아니긴 했다. 그러나…….
에반은 고개를 돌려 현관에 그대로 있는 자신의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짐을 털어 넣느라 미처 꼼꼼하게 집어넣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온 진녹색의 슬리데린 넥타이를 보았다. 평소라면 반듯하게 개켜 있어야 하는 물건이 비록 자신의 성급함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모양새가 어긋나 구겨져 있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러한 기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을 꺼내기 전의 침묵 사이에는 낮은 한숨이 따라붙었다. 기실, 넥타이의 단정하지 못한 행색 따위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반의 시선은 성가시다는 듯 바닥과, 벽과, 자신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형의 얼굴과, 복도 사이를 왔다갔다 방황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금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눈동자에 안착하고 말았다.
“그거야 당연히… 몰랐으면 좋을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제일가는 공포라고 썼지. 이게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답하면서도 그는 내심 이 사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학교의 덜 자란 7학년들 내에서도 제법 지성인 축에 드는 데다가 호그와트를 갓 졸업하고 사회의 어느 지대에 정착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터너 하워드가 과연 자신의 과제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할지 궁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예상 1번은 대체 그게 뭐냐며 핀잔을 듣는 거였고, 예상 2번은 꼴에 제법 생각 좀 했느냐는 빈정거림 ─ 물론 이게 1번보다는 칭찬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을 받는 것이었다. 눈을 끔벅이며 둘 중 하나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때, 터너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두 개를 전부 다 보기 좋게 비껴가는 종류의 것이었다.
“…잘 썼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세상에 원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알게 되는 사실만큼 끔찍한 게 또 없다니까. 물론 그게 과연 가장 큰 공포일까? 하는 것에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터너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고, 에반은 예상보다 다정한 말에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형이 왜? 조만간 세인테드 선배가 조언해 준 것처럼 차라리 깨물고 도망가 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그러나 터너는 이런 괘씸한 속내를 알 턱이 없었고, 과제에 대한 몇 마디의 첨언 후에는 그만 가 보라는 냉정한 축객령만을 덧붙였다. 호그와트를 끝마치고 마법 세계에서 이미 성인으로 존중받는 7학년이라면 어린 동생이 말하지 않은 맥락 정도는 알아서 읽히는 법이었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동안 에반은 여즉 터너 하워드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이 이상한 위화감을 털어내었다. 곧 아이린이 도착할 테니 형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나 보가트의 형태 따위는 논외의 일이었다.
* * *
“역시 닮았죠.”
“안 닮았어.”
“닮았다니까요! 이제 슬슬 인정하실 때도 됐는데.”
“너야말로 에코랑 너랑 닮았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는 건 어때? 선배 대부분이 인정했는걸, 완전히 빼다 박았다고 말이야. 커트니 선배도 그렇고, 린네아 선배도 분명 비슷한 말을 할 거고, 또…….”
한여름의 다이애건 앨리 거리를 활보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줄줄이 새어나오는 이름에 아이린 하인즈는 잠시 옆을 보며 눈을 흘겼다. 논쟁의 주제는 꽤나 많이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결판이 나지 않은 주제, ‘더스가 에반 하워드와 닮았냐 닮지 않았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아이린은 나름의 지론과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거야 하워드 씨가 워~낙 집요하게 물어보고 다니셔서 그런 거죠! 그리고 저도 닮았다는 이야기 정도는 많이 들었다구요. 어디, 똑같이 이름 외워 드려요?”
“앗, 저 빗자루 멋있어 보이지 않아?”
─말 돌리지 마시구요! 뒤에 달라붙는 야유에도 불구하고 에반은 이번에 새로 나온 빗자루 모델 쪽을 가리켰다. 날렵한 몸체와 돌기 하나 없이 매끈한 표면, 바람을 잘 가르게 정리된 꼬리까지. 그는 이내 이 빗자루가 애당초 말을 돌리기 위한 핑곗거리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당연하게도 그의 주머니는 항상 차 있는 쪽보다는 비어있는 쪽이 많았기 때문이며, 가격표에 적힌 숫자 역시 학생이 멋모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수치가 아니었기도 했다.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온 에반을 보며 아이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쪽으로 가서 새 교과서부터 살까요? 이번은 O.W.L. 이 있는 아주 중요한 해니까, 빠뜨리지 말고 사오라고 편지에 당부 글이 쓰여 있었잖아요.”
“알겠어…. 아참, 난 망토부터 새로 사야 해. 이번에 키가 너무 많이 커서 그런가, 벌써 종아리 위까지 망토가 올라왔지 뭐야.”
딱히 뽐내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키에 관한 주제가 입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말하는 이의 눈동자에서 반짝거리는 장난기가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만났을 적에는 5cm 가량으로 거의 엇비슷했던 시야가 이제는 한 뼘은 훌쩍 넘어가게 차이가 생겼다면 응당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럼, 망토 가게부터….” 여상한 투로 답하는 아이린에게 불쑥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 치기 어린 마음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때, 아이린? 여전히 어른이 되는 것과 키가 크는 것은 서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 중이야?” “…네?” “키가 크면 시야도 넓어지고 볼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진다면서. 이런 말 조금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본인도 유치한 것을 알아 미리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말은 정말이지 유치함의 정수라면 정수인 이야기였다. “그 논리대로 따지면, 지금은 너보다 내가 좀 더 어른인 거네?” 아이린은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며 평소와 같은 둥근 눈매로 상대방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한순간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둘의 대화에서는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의 가벼운 장난과 농담이 한 템포씩 번갈아 이어지곤 했다. 집이 그래봤자 두 블록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라는 것도 그렇고, 호그와트에서 팀을 꾸려 열성적으로 복도와 초상화들을 헤집고 다녔던 것도 그렇고, 학기가 마무리되고 기차가 킹스크로스 역에 도달하면 런던에서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또다른 기차에 몸을 실었던 것도 그렇고,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다른 이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었으므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든 그 안에는 특유의 편안함과 자기들끼리밖에 알지 못하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말의 중간마다 잠시 쉬어가자는 듯 동시에 조용해지는 순간 역시 존재했었는데, 에반은 그럴 때마다 항상 과할 정도의 즐거움을 체감하곤 했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O.W.L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새 학기, 거리에는 간혹가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보였으나 아직까지는 활기를 띠었으며, 햇빛은 사선으로 슬쩍 기울어져 각 가게의 유리창을 반짝이고는 그럴듯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여름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날은 후텁지근했으나 불쾌하지는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건조감이 몸을 한 차례 데우고 지나갈 무렵, 에반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왜 웃으세요? 지금까지 제가 하는 얘기 듣지도 않으셨죠!”
“아냐, 아냐. 다 들었어. 어쨌든 내가 엄청나게 유치하고 어른스럽지도 않다, 이 말이잖아. 그 말은 지난 5년 간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으니 이제 슬슬 그만하고, 우리 망토 산 다음에 저기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을래? 내가 하나 살게.”
에반은 오픈 기념으로 아이스크림 위에 마카롱을 얹어준다는 광고를 가리켰다. 이에 적당한 수긍의 말이 돌아올 무렵, 에반의 눈언저리를 스쳐 간 것은 아이스크림이나 빗자루, 교과서 따위가 아닌, 이런 곳에서 차마 마주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분별력이 뛰어난 위인이었다. 아무리 호기심이 많다고 해도 정말 심각한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누를 수 있었고, 궁금한 것과 궁금해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적절히 구분하여 다룰 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자주 기숙사 점수를 감점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동급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적당히 호평을 듣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에반 하워드도 어린 시절, 그의 부모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다락의 서랍을 뒤지고 뒤져 찾아낸 사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호그와트를 갓 졸업한 적당한 이십 대 청년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서로에게 적당한 호감이 있는지 계속 옆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에반은 한 사람에게서는 본인과 형이 그대로 물려받은 날카로운 눈매를, 다른 한 사람에게서는 바람에 풍화된 것과 같은 잿빛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영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 둘이 각종 더러운 일에 손을 담그며 살아가게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을까? 그는 진작 호기심에 선을 긋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사진을 벽장 안쪽에 다시 던져넣고는 다시는, 다시는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잔상이 갑자기 지금, 열네 살의 끝 무렵에 다이애건 앨리에서 발견되고 만 것이다.
‘잘못 본 거겠지.’ 스스로 되뇌는 말에는 어떠한 논리도 믿음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니면 그냥 닮은 사람일 거야.’ 하지만 그는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그것은 명백히 녹턴 앨리로 향해 있었다. 세상이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어긋남에 따라 사람들의 불안을 자신을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인간이 많이도 생겨나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신문 기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확인할 때마다 못마땅한 듯 불만 어린 소리를 내었고, 그것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에반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본인이 마주친 것이 정말 부모라면 본인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넘겨 보았다. 뒤따라가기? …뒤따라가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서 내가 당신들의 자식이라고 말해 봤자 싸구려 신파 드라마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얽혀 있는 것을 잘라도 모자랄 판에 더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그렇다면, 신고하기? …에반은 마법부에서 나온 이들에게 과연 무어라고 설명하며 저들을 잡아달라고 해야 할지, 조리 있고 그럴듯한 말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단 한 가지였다. 못 본 척하기. …실로 그랬다. 그저 본인의 기분만 조금 가라앉을 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이게 현명했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사실을 갑자기 봐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워드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아이스크림은…”
“…아, 미안. 아이린, 나 오늘은 좀 일찍 가 봐야겠어. 나중에 집에서 보자. 아니면 내가 먼저 놀러 갈게. 안녕!”
“저기……!”
그러니 아직 사지도 못한 망토나 교과서, 아이스크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에반은 아이린이 이 일련의 사건들을 부디 눈치채지 못했기만을 바라며 몸을 돌렸다. 와서 산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에코에게 줄 페럿 사료밖에 없으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이애건 앨리에 다시 한번 와야만 할 터이지만, 그런 수고로움 또한 지금 그의 생각 바깥에 존재했다. 그는 보폭을 크게 하여 뚜벅뚜벅 걸으면서 얼굴을 몇 번이고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부모와 관련된 일이 하나라도 생기면 모든 사고 회로와 체계가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도통 엉망이 되곤 했다. 그것이 에반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그는 막연하게 다른 이들의 가정을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가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소개할 정도만이라도 되었더라면……. 대상조차 불분명한 후회는 에반의 그림자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 * *
그러나 에반 하워드에게 찾아올 불행이 한 가지 더 있었다는 것을 그 당시의 그가 알았더라면, 분명 그날 다이애건 앨리에서 그렇게 혼란스러운 태도로 자리를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일은 에반이 준비물을 사러 다시금 혼자 다이애건 앨리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조부는 머글들이 훨씬 더 즐비한 이 도시에서 구태여 마법적인 방식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부엉이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밤 아니면 새벽이 고작이었고, 플루가루 네트워크 역시 이 집만을 비껴 지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에반은 번거롭지만 시간을 들여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는 그것을 그리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창밖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이어진 해안가를 눈에 담는 것은 다소 정적이고 지루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에반이 제일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에 들었다. 그는 평소처럼 여유를 즐기다가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바닥에 붙여 끌었고, 힘차게 집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잘 왔냐는 인사가 아닌, 형의 경고 어린 한 마디였다.
“할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셨거든.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방에 들어가 있도록 해.”
“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호그와트에서 퇴학당한 건 아닐 거 아냐.”
농담 섞인 말에 터너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인지하자 에반 역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우연의 일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요약하자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우리의 부끄러우신 부모께서 요즘 보가트 방지물품이라며 떼돈을 벌어들이고 계신 건 아시느냐. 그 정도와 규모가 커져서 마법 오남용 관리과에서도 그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들이 하필이면 다음 타겟으로 잡은 게 우리의 이웃 되시는 하인즈 씨였고, 그걸 할아버지가 뒤늦게 알아 버렸다더라. 피해가 상당하신 거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거기까지 다 들은 에반이 목소리를 높인 건 자명했다.
“언제 그랬는데? …그 사람들은, 잡았어? 아이린은? 아이린은 알고 있어?”
“저번에 너랑 같이 물건 사러 갔을 때 있잖아. 하필이면 그때 딱 걸린 모양이던데. 잡았으면 저렇게까지 화나지 않으셨겠지? 간도 커, 마법부 직원한테 사기를 다 치고…….” 냉소 어린 대답에는 에반이 생각한 것과 정확히 같은 양의 체념이 담겨 있었다. 얽히는 것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회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의 연결고리든 이어지고만 결과를 마냥 수긍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발버둥칠 수도 없었기에 그저 체념하고 만 것이다. 에반은 안경알 너머로 피곤하고 지친 기색을 보면서,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서로를 못살게 굴었던 사이였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형이라는 사실을 실감해내고 말았다. 그러나 이대로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있기에는 아직 못 들은 사실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대답을 재촉했고, 터너는 다시금 진한 체념이 묻어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몰라, 걔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하인즈 씨가 말씀하셨으면 알겠고, 말씀하시지 않았으면 모르겠지. 혹시나 해서 충고하는 건데, 말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면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일 테니까 너도 적당히 알아서 조용히 해라.”
그 이후로 에반은 스스로가 어떻게 방까지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다만 열심히 사 온 물건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침대에 누워 그대로 해가 질 때까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얼굴을 어떻게 보지.’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고, 에반은 혼자 힘으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객관적인 인상으로 보건대, 그는 착하냐 아니냐를 따지기엔 심히 애매한 학생이었다. 말썽을 부리는 날들도 적잖지 않았던 데다가, 가끔은 슬리데린의 일반적 이미지에 걸맞은 행보 ─ 상대를 향한 협박이라든지, ─ 를 충실히 수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력의 무게를 따져 본다면 무게추는 확실히 조금 더 선하게 살아가려는 욕심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떳떳하게 소개할만한 부모가 없다면, 본인이 그만큼 떳떳해지면 된다는 게 그의 세계를 움직인 기조였고 판단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간의 시간이 허물어질 정도의 사건이 덮쳐오기도 하는 법이다. 마치 지금처럼.
이후, 남은 방학 동안 에반이 아이린을 찾아가거나 그를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으니 동네에서 얼굴을 볼 리도 만무했다. 8월의 남은 두 주 동안 하워드의 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가끔 책장을 넘기는 소리나 깃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왔을 뿐이다. 에반이 안경을 새로 맞춘 것도 이즈음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공부에 집중하며 잡생각을 떨쳐내자는 것이 본 목적이었고, 집안 사람들 모두 이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마력 강화제를 만드는 약에 대한 예습을 감행하면서 밤늦게 퀴퀴한 서적들을 뒤적이고 있다 보면 금세 복잡한 생각은 잊혔고, 다음날이 밝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끔, 아주 가끔 그는 9월 1일 아이린 하인즈를 어떻게 마주 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불안정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 다시 톡 터져 가라앉길 여러 번이었고, 하여 그는 거울을 보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평소같이 구는 법을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훈련의 효과는 미미했다.
그리고 에반은, 뒤늦게서야, 그가 적어낸 과제의 답이 정확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공포란 무엇인가? 과거에도 지금에도 에반 하워드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몰랐으면 좋을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 사실을 몰랐다면 그는 분명히 평소처럼 즐겁게 새 학기를 준비할 수 있을 터였고, 지금쯤 아이린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남은 숙제들을 처리하고 있었을 터다. 그러나 자신의 공포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게 된 지금, 그는 아이린에게 또 다른 ‘몰랐으면 좋을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알았으면 모르되, 모른다면 끝까지 숨기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게 막 열다섯 살로 접어드는 에반 하워드의 판단이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대가로 치렀는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아서도 안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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